|
길, 화가 남희조씨의 예술과 인생 이야기
뉴욕의 소호(SoHo)는 많은 예술가들이 한번쯤 전시회를 꿈꾸는 명실상부한 현대미술의 중심지이다. 물론 소호 일대에 개발붐이 일면서 예술가들이 작업하던 작업실들이 하나 둘 고급 쇼핑가, 음식점 등으로 탈바꿈을 했다. 그와 동시에 이곳에서 활동하던 많은 가난한 예술가들이 임대료가 저렴한 첼시(Chelsea) 등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지만, 소호가 가지는 예술의 중심지로써의 상징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봄이 찾아오는 길목에서 수많은 예술가와 관광객, 그리고 쇼핑객들이 드나드는 예술의 1번지, 소호를 찾았다. 스프링 스트리트(Spring Street)와 브룸 스트리트(Broom Street)가 만나는 번화가 일대. 주말을 앞둔 금요일 저녁의 소호 거리는 많은 인파로 활기차게 붐비고 있었다. 머서 스트리(Mercer Street)에 들어서니 ‘Red Dot New York Art Fair’라고 쓰여있는 빨간 깃발이 힘차게 펄럭인다. 출입구는 단촐하기 그지 없는데 안으로 들어서니 큰 규모의 미술 전시장이 펼쳐진다.
3월 3일부터 6일 까지 4일간 열린 ‘Red Dot New York Art Fair’에는 50여개의 국제 근 • 현대 미술 갤러리들이 참가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회화, 사진, 조각 등 최근의 트렌드, 그리고 그 트렌드를 넘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예술작품들을 선보이고 있었다. 특히 이번에는 한국 혹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출신 작가들의 전시회도 같이 열리고 있었다.
여러 작품들 중 인상적으로 눈에 띄는 것이 단연 남희조(51)화가가 그린 회화 작품들이다. 서양화이면서 동시에 동양화의 여백의 미, 단아한 선, 부드러운 색조를 담은 그림들이 여러 점 전시되고 있었다. “작품을 보러 오신분들이 그러시는 거예요. 동양화하지 않았느냐고. 서양화이긴 하지만 동양화의 향기가 풍기는 그림들이라고 감상평을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겸손하지만 자신감있는 목소리로 남희조씨가 말문을 연다.
“이 그림은 제가 브룩클린에서 학교를 다닐 때 그곳의 풍경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그림이에요. 미술이라는 길이 힘든 길이잖아요. 그 어려웠던 시절의 브룩클린의 건물과 거리를 당시의 감성을 담아 표현한 그림이죠. 이 그림을 보면 브룩클린에서 힘들게 미술을 배우던 시절이 생각나요.”
남희조씨는 마흔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브룩클린에서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브룩클린에 위치한 Pratt Institute에 2001년 입학을 하면서 만학도로서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1998년, 자녀들의 학교 공부를 위해 미국 워싱턴 DC로 건너오게 되었고 이어 콜로라도로 이주해서 1년 6개월 보내면서 만학도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원래 한국에 있을 때부터 스스로 독학을 해 그림을 그리고 도자기를 만들면서 미술가의 꿈을 조금씩 키워나가고 있었다. 미술과 관련된 강좌를 듣기 위해 문화센터에도 다니고 실력있는 미술가에게 사사를 받기도 하면서 본인이 가지고 있던 예술적 재능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남편의 적극적인 응원에 힘입어 콜로라도에 머물던 시절부터 만학도의 길을 향해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한국 토박이로 영어를 능숙하게 쓸 수 없었던 그녀는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면서 우선 영어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언어가 큰 걸림돌이었어요. 미술 공부를 떠나서 일단 언어가 되지 않으니 저에게는 시작부터 쉬운 길이 아니었던 셈이죠. 콜로라도에서 1년 반을 보내는 동안 언어연구기관에 설치된 언어센터에서 영어를 철저히 배웠죠. 콜로라도가 미국 중부에 위치해 있어 미국 중산층의 영어를 배우기에 좋은 장소였던것 같아요. 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도 처음엔 쉽지 않았어요. 일단 토플 공부에 매달려서 미술학교 입학을 위한 점수를 따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공부했어요.”
2000년에는 자녀들이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가족이 동부 지역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난 후 남는 시간에 대학 입학 준비를 시작. 불혹(不惑)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대학을 들어가기에는 적지 않은 나이지만 그녀의 공부에 대한 열망은 그 누구보다 강했다. 한국에서 홀로 사업을 하며 가족들을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남편 역시 그녀의 든든한 지지자이자 후원자였다. It’s never too late to learn. 남희조씨는 본인의 꿈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딛기 시작했다.
1998년에 시작된 영어 공부와 학교 입학준비는 결국 2001년 결실을 맺었다.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디자인, 예술 분야의 교육기관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의 입학허가를 받게 된 것이다. “개강하는 첫날 학교 교실에 앉아 있으니 같은 반의 학생들이 다 아들뻘이더라고요. 처음에 교수가 들어 오더니 제게 ‘여기는 당신이 가르치는 강의실이 아니다. 내 강의가 있는 곳이다 강의실을 잘못 들어오신 것 같은데 다른 강의실로 가봐라’ 라고 그러는 거예요. 어찌나 부끄럽던지. 강의실에 있으면 학생들도 제가 교수인지 아는 거예요. 나이가 들어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그렇게 부끄럽게 느껴지더라고요.”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고 하지만 남희조씨는 주변의 젊고 똑똑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비교되는 자신의 처지에 자격지심을 느꼈다고 한다. 그들과 경쟁하기 위해, 아니 같은 수준으로 따라가기 위해서 남희조씨는 보이지 않는 노력을 두배, 세배 해나가야만 했다.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 좌절, 도전,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영어로 매주 에세이(Essay)를 써내야하는 과목을 들으면서 어려운 벽에 부딪히기도 했다.
“글을 쓰려면 무언가 읽어야 글이 나오는데 저는 읽는 것도 남들보다 시간이 배로 많이 걸리는 거예요. 그래서 밤을 새워 책을 읽고 새벽에 글을 쓰기 시작하는 거죠. 아침 수업 가기 직전까지 에세이를 쓰고 인쇄를 해서 학교로 달려가곤 했어요. 하루는 밤을 꼬박 세우고 컴퓨터로 에세이를 작성해서 인쇄하려고 하는데 프린터기가 고장나서 인쇄가 안되는 거예요. 숙제를 못가져가서 어찌나 속상하던지. 암튼 그 때를 생각하면 고생 정말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내가 이 나이에 타국땅에서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2001년에 9.11 테러가 나면서 남희조씨는 거처를 뉴저지로 옮기게 되었고 브룩클린에 위치한 학교까지는 왕복으로 4시간이 소요되는 통학을 하기도 했다. 그때의 고생스럽던 경험들이 추상화를 통해 표현이 되어 이곳 전시장에 걸려있는 것이다. 늦게 출발했기에 남들보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녀는 Pratt Institute에서 Paninting을 전공으로 하면서 동시에 Print Making, Ceramic Making, 고전 미술사, 현대미술사, 미학론 등 다양한 수업을 접하며 만학도로서 예술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전남 담양 출신인 남희조씨는 어린 시절부터 시골에서 자연을 벗하며 예술가로서의 정서와 감수성을 자연스럽게 키울 수 있었고 그 자연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에 큰 흥미를 느꼈다.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께서 연로하신데다 넉넉치 못한 집안 형편으로 미술가의 꿈은 마음 한구석에 간직해야만 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게 미술이잖아요. 6남매중 막내였던 저는 언니, 오빠들과 달리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걸 무척 좋아했어요. 집안 형편에 재료비 등 돈이 많이 들어가는 미술 공부를 하기에는 나이드신 부모님께 너무 죄송스러웠죠. 미술 선생님이 미술반에 들어오라고 하셔도 용기내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늘 다른 친구들이 미술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부러워했죠.”
행여나 부모님께 폐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어린 마음에 남희조씨의 꿈은 멀어져만 가는 듯 했다. 대학도 교육학을 전공해서 입학을 했지만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중간에 학업을 그만두어야했다. “그래도 미술을 하고 싶다는 그리고 해야겠다는 꿈은 버리지 않았어요. 어린 시절의 꿈을 변함없이 가지고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는 것 같아요. 2001년에 Pratt Institute에 입학해서 어린시절부터 꿈꿔왔던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기에 힘든 시절이었지만 정말 행복했던 인생의 한 시기였던 것 같아요.”
남희조씨는 자신이 늘 하고 싶어했던 미술 공부였기에 자신의 열정을 바쳐 큰 성취감을 느끼며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늦깍이지만 자신의 열정을 담아 공부에 매진한 결과, 2006년 말 졸업 직전에 연 개인전에서는 모교인 Pratt Institute의 History Department의 관계자가 남희조씨의 작품을 구입해 모교에 영구 전시하게 되는 행운을 안았다. 비록 다른 동기들 보다 졸업을 늦게 했지만, 2007년 땀과 열정이 베인 학사 학위를 받게 된다. 그녀의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저는 좋은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실기적인 부분에서 뿐만아니라 이론적인 면에서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최고의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다시 더 깊은 학문의 세계에 도전을 했던거죠.”
남희조씨는 학사 학위를 받고 나서 곧바로 Pratt Institue의 대학원에 진학을 하게된다. 40이라는 나이에 도전한 예술로의, 학문으로의 길에서 그녀는 ‘참다운 예술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떠한 예술가가 되어야 하는가’하는 화두를 가지고 대학원 시절 다시 한번 자신과의 싸움에 나섰다. 2년 여의 시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결국 석사까지 마치게 되었고 2009년에는 한국에서 개인전을 성공리에 개최하기도 했다.
학교를 마친 후에는 미국에서도 여러 번 개인전을 가졌으며 Riverside Gallery, Jersey City Hall, Beacon Hall, FGS Korean Community Center 등 뉴욕과 뉴저지의 내로라하는 갤러리에서 초청을 받아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6년의 학부생활과 2년 반의 대학원 생활은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 자기수양을 통해 남희조씨의 예술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공부를 하는 동안 그녀가 항상 자신에게 물었던 화두는 예술을 통해 다른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저는 그림을 그리면 행복을 느껴요. 그 행복감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고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었던거죠. 예술은 커뮤니케이션이고 공유하는 것이에요. 예술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색과 모양을 통해 표현하고, 자신이 연마한 기술 안에 시대적 배경을 녹여내 대중들과 호흡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자기 만족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진정한 그림이 아니죠. 그림을 그려놓고 그것을 전시해서 다른 사람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림을 그려 놓고 공유하지 않고 자기만의 화실, 창고에 보관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예술로 승화되기는 어렵죠.”
남희조 화가에게 있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곧 자기 수양을 의미한다. 그림을 그릴 때는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고 또 주변을 잘 살피며 작업을 해왔다. 지금껏 명상하는 마음가짐과 평온한 정신 자세를 가지고 예술 작업에 임해 왔다. 결국 그녀는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 수양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가라고 하면 보통 자유로워야한다는 생각에 술, 담배 등을 마음껏하면서 방종에 가까운 자유를 추구하려고 하잖아요. 하지만 저는 인격에서 그림이 나온다고 생각해서 절제하고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려고 노력해요. 저는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와 108배를 하고 또 정근과 천수경을 통해 하루를 시작하고 있어요. 뉴욕에서는 경쟁이 굉장히 치열해요.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이겨내려면 무엇보다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기도가 필수인 것 같아요.”
사실 그것을 깨닫게 된 것도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였다. 남편의 불심을 옆에서 지켜보며 불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었던 남희조씨였지만 본인이 몸소 실천하고 있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꿈에 할아버지가 절에 가라고 날짜까지 짚어주는 걸 보고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친구가 바로 남희조씨의 손을 붙잡고 절에 데려간 것이다. 잠실 석촌호수 근처에 위치한 불광사에서 광덕스님을 만나 기본적인 불교 의식에 대해 배웠고 본인 스스로 책을 보고 따라하며 기도를 시작했다. 초심이였기에 시키는 대로 열심히 실천을 해나갔다는 남희조씨.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예불을 드리고 108배를 하고 시간에 맞추어 기도를 했어요. 49일간 열심히 실천을 했더니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는거예요. 나 스스로가 먼저 행복해지고 밝아지고 있었어요. 그 때는 무엇을 바라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했기에 변화가 빨리 찾아온 것 같아요. 남편의 사업도 좋아지고 생활도 점점 나아졌어요. 기도의 효험을 알게 된 것이죠.”
이처럼 불교는 뉴욕에서 예술활동을 하는 남희조씨에게 큰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방학 때면 한국을 찾았던 남희조씨는 여름방학 내내 실상사, 조계사, 봉운사, 구룡사 등 큰 절을 찾아다니며 초발심을 가지고 새벽기도에 나섰다고 이야기한다. “부처님의 은혜를 받아서 공부도 원하는대로 하고 나만의 예술활동을 펼쳐나가고 있어요.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행복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 저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것 같아요.”
남희조씨의 이러한 철학은 그녀의 작품에도 그대로 묻어난다. 이번 전시회에 내건 작품들도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차갑고 어두운 도시의 이미지가 아닌 명상적이면서 밝고 활기찬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다. 이는 기도와 명상을 통해 얻어진 마음가짐을 통해 그림을 그리기에 가능한 것이다. 서양화들이지만 동양적 선의 기법, 여백의 미, 선과 색의 조화를 통해 동양화의 요소들을 잘 녹여내고 있다. 동 • 서양이 화폭에서 만나 도회지의 풍경이 동양적 선(禪)을 통해 자연의 풍경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을 찾는 미국분들이 제 그림을 좋아하시는 거예요. 동양화와 서양화가 조화되어서 나타나는 것 같다고 하시고 또 그림이 활기차면서 동시에 명상적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서양화 중심의 미국에서는 제 그림이 또 다른 느낌을 선사해 주나봐요. 제가 추구하는 불교의 정신, 선과 명상의 세계가 관객들과 잘 소통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남희조 화가가 추구하고 있는 예술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나눔의 정신이 그림을 통해 구체화되고 실제적으로 메시지가 되어 관객들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만학도의 길에서 예술을 향한 열정과 역량이 조화롭게 화폭에 담기고 그림의 메시지가 관객들과 호흡하며 그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앞으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화폭에 담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했다. 남에게 보여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철학이나 감정에도 충실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남희조화가. 예술을 서로 공유하고 나누는 그 자체가 성공적인 예술가의 삶이라고 예술에 대한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이야기했다. 남희조 화가가 마음껏 예술의 세계에서 꿈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그녀의 곁에서 든든하게 지원해 주고 있는 남편, 그리고 끊임없이 공부를 해나가는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하는 두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은 불교와 더불어 그녀가 기반을 두고 있는 예술의 굳건한 원동력이다.
남희조씨는 그림이 곧 자기 자신의 수양이자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했다. 나 스스로를 잘 살피고 내 주위를 잘 살펴 환경과 나 자신을 조화롭게 한 후 그림을 그려 나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 불교에 기반을 둔 명상과 선의 세계를 화폭에 옮겨 동양과 서양이 조화롭게 하나가 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서 하는 그림 그리기가 단지 취미활동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예술로 승화하기 위해서는 남들과 나누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이 작가 자신, 작가의 삶이라는 거예요. 바로 내 인격에서 그림이 나오는 거예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아름답게 해야 하죠. 자신의 열정과 창조성을 통해 붓끝에서 생명이 흐르도록 그림을 그려나가는 거예요. 그래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죠.”
불혹의 나이에 남보다 늦게 시작한 공부이지만 남희조 화가의 진지한 자세는 그녀의 예술 세계를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진정한 예술, 대중과 소통하는 예술을 향한 끊임없는 배움의 자세는 앞으로도 그녀의 예술 세계에 가장 큰 원동력이 될 것이다. <2011.4>
남희조 화가 개인전
▶ 5월 14일 (Opening) ~ 5월 28일
▶ River Side Gallery, New Jersey
One Riverside sq. Suite 201, Hackensack, NJ 07601
▶ 201) 488-3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