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을 서두르신 것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처럼 부활하신 이후뿐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생은 잠시도 쉴 틈이 없는 고난의 역사였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라고 말씀하셨지만 정작 자신은 저희들의 허덕이는 고생과 무거운 짐을 ‘멍에’처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가시 나무로 만든 왕관을 머리에 쓴 최후의 모습’(요한 19,2 참조)처럼 가시밭길의 연속이셨습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마구간에서 ‘포대기에 싸여 말구유’(루카 2,7)에 눕혀졌으며 곧바로 이집트로 피난 가서 난민생활을 했습니다. 고향사람들로부터는 ‘저 사람은 가난하고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55 참조)라고 ‘지혜와 능력’을 의심받고 하찮은 목수 취급을 당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어 주님은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쉬자.’(마르 6,31 참조)라고 말할 정도였으며, 마귀에 홀린 아이를 고쳐달라고 간청하자 “내가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살며 이 성화를 받아야 한단 말이냐”(마태 17,17)고 꾸짖을 정도로 과로의 연속이셨습니다.
오죽하면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루카 9,58)고 한탄하셨을까요.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성경에는 주님이 머리를 두고 주무시는 장면이 한군데 나옵니다. 그곳은 방도, 침대도 아니며 한적한 들판도 아닙니다. 조각배 안입니다. 배 안이라 해서 안락한 선실도 아니고 ‘뱃고물을 베개삼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마르 4,38) 그것도 ‘거센 바람이 일어 물결이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거의 가득 차게 된 배’ 안에서 깊은 잠을 주무십니다. 공포에 질린 제자들은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지 않습니까.”(마르 4,38)라고 ‘성화’를 부리며 주님을 깨웁니다. 주님은 일어나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향해 ‘고요하고 잠잠해져라.’하고 호령하시자 바람은 그치고 바다는 잠잠해집니다.
그러고 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책망하십니다.
이제야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최후의 유언으로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을 남긴 주님께서 저와 함께 계신 곳은 바로 ‘제 마음(心)’ 속임을.
주님은 제게 말씀하십니다. “호수 저편으로 건너 가자.”(마르 4,35) 호수 저편은 이승의 번뇌를 해탈한 유토피아, 즉 피안(彼岸)의 세계.
저는 주님을 제 배에 모시고 호수 건너편으로 노를 저어 갑니다. 어떤 때는 바람에 돛이 부러지고, 거센 파도가 배안까지 들이찹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 마음의 뱃고물에 머리를 기대고 편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가 주무시는데 제까짓 바람과 바다가 어찌 배를 집어삼킬 수 있겠습니까마는 ‘저는 그만 ① 거센 바람을 보자, ② 무서운 생각이 들어, ③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비명을 지르며 성화를 부립니다.
거센 바람의 의심과 죽게 되었다는 맹목의 두려움은 주님에 대한 믿음을 여지없이 무너트리는 교활한 악의 유혹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고요하고 잠잠해져라’하고 명령하신 것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사소한 의심과 두려움으로 흔들리고 있는 제 믿음에 대한 책망인 것입니다.
지금 이순간도 주님은 제 마음의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아아,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을 깨우지 않고 멍멍개야, 짖지 마라. 쉬잇! 꼬꼬닭아, 울지 마라.
쉿! 달빛은 영창으로 은구슬 금구슬을 보내주는 이 밤.
잘 주무세요, 우리 주님! 하고 자장가를 부를 수 있도록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9) 저에게 굳은 믿음을 허락하소서. 아멘.
- 성경 인용은 공동번역 성서입니다.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 2
최인호 베드로┃작가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