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약력
1954년 10월 전남 고흥군 도양읍 장계리 출생 / 광주서중, 광주일고 졸업 / 성균관대 및 학송경학원에서 유학 공부 / 1984년 인간문화재 일산 김명환 선생에게서 판소리 고법(鼓法) 전수받음 / 1986년 ‘민중시’ 등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 활동 재개 / 1993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 1993년 7월 동학혁명 백주년 기념대회(고흥 문화원)에서 창작판소리 ‘전봉준’ 완창 / 1995년 1월 타계.
문학적 저항정신과 오월시의 태동
듣건대, 뉴욕 / 26번가와 브로드웨이의 교차로 한 귀퉁이에 / 겨울철이면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 모여드는 무숙자(無宿者)들을 위하여 / 행인들로부터 동냥을 받아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 (중략) // 몇 명의 사람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브레히트, 詩 ‘임시 야간숙소’ 중에서
브레히트가 시로써 통곡했던 그 암울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았으며, 착취는 오히려 더욱 교묘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80년대는 우리 사회와 역사 속의 온갖 모순들이 수면 위에 드러나면서, 그것을 극복하고 변혁하고자 하는 젊은 눈빛들의 손바닥이 늘 땀에 촉촉이 젖어 있던 시대였다. 문학 쪽에서 본다면, 그 시대는 또한 ‘시(詩)의 시대’이기도 했다. 모든 언로가 끊기고 철저히 통제되어 있던 서슬 퍼런 군부정권 하에서, 시는 그 막힌 길의 전위를 뚫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시운동 그룹의 대표적인 것으로 <오월시>, <시와 경제>, <삶의 문학>, <분단 시대> 등을 꼽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오월시>의 태동은 마치 어둔 밤하늘에 별 하나가 막 떠올라 밝게 빛나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후, 그 ‘오월의 별’은 오래도록 붙박이별로 반짝이며 길을 찾는 많은 이들의 북두성이 되어주었다.
<오월시>는 ‘5.18 광주항쟁’ 정신을 고스란히 계승하면서 광주ㆍ전남 지역의 오랜 문학적 정서를 대변하는 동시에 시가 세상을 바꾸는 무기가 될 수 있고, 또 그러해야 한다는 신념을 선언하면서 출발했다. 하지만, <오월시>는 하나의 문학적 ‘에꼴(派)’로서만 자기를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80년대 민중미술의 ‘판화운동’ 등과의 연대를 이루어 간 것도 오월시의 성과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하나의 파도는 그것을 낳은 넓은 바다의 품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이 땅의 오랜 역사를 통해 이어져 온 저항 정신과, 70년대를 거치면서 더욱 치열하게 다져진 문학적 실천 정신이 오월시라는 파도를 밀어 보낸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월시의 파도를 형성하고 영향을 준 이 지역의 문인으로는 천승세, 문병란, 송기숙, 조태일, 송수권, 조정래, 이청준, 한승원, 서정인, 김남주, 이성부, 양성우, 이시영 등등 이 짧은 지면에 다 열거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시인 박종권을 아는 이는 매우 드물다. 그는 오월시 동인들의 습작기 문학청년 시절부터 함께하면서 시정신과 시법(詩法) 등에서 직접적이고도 강력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다만, 시인으로서의 그의 이름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는 그가 자신을 잘 내세우지 않는 성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시보다는 우리의 판소리 가락에 더 많이 경도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시를 아주 버린 것은 아니었다. 시는 그와 평생을 함께한 또 다른 벗이었다. 1995년 1월의 한겨울, 그는 불현듯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마흔을 갓 넘긴 젊은 나이에 이 땅의 뛰어난 가객(歌客) 하나가 또, 그 꿈을 다 펼쳐보지도 못하고 스러져간 것이다.
차마 믿을 수 없는 한 시인의 죽음, 그는 우리 시대 진인이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회보)
문학적, 예술적 감성의 씨앗을 심어준 남쪽 바다
시인 박종권(朴種權)은 1954년 10월, 전남 고흥군 도양읍 장계리 가래수(신흥)에서 부(父) 박영배(朴營培)와 모(母) 김봉심(金鳳心)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득량만의 쪽빛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의 문학적, 예술적 감성과 상상력을 키워왔는데, 특히 조부(祖父)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의 조부 박동규(朴棟圭)는 일제 때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인텔리였다. 하지만, 워낙 얽매임을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던 그는 이승만 정권 시절 그 흔한 벼슬자리를 다 마다하고 조용히 초야에 묻혀 농사를 지으면서 은일자(隱逸者)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다만, 자유당 정권이 지방자치 흉내를 낼 무렵 딱 한번 이 지역 의회의 의원직을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런 연유로 이곳에서는 아직도 그를 ‘박의원’으로 통칭하고 있다.
박종권은 그런 조부의 희망이자 자랑으로 자라났던 셈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남달라 인근에서는 신동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그림을 곧잘 그렸고,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초등학교 시절의 통신표(성적표)를 보면 전 과목이 ‘수’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자칫 오만하게 자랄 수 있는 그의 성품을 원만한 인격으로 여물게 한 것은 모두 그의 조부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한편, 당시 군청 공무원이었던 그의 아버지 박영배는 3.15 부정선거를 목격하면서 이의 부당함을 항의하다가 ‘풍도수리조합’이라는 한직으로 좌천되는 좌절을 겪었다. 이후 박정희 쿠데타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는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순천을 거쳐 광주로 나가 학업을 계속하게 된다.
광주 서중을 거쳐, 광주 일고를 졸업한 그가 본격적으로 문학에 눈을 뜬 것은 중학교 시절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평생 지기였던 전남대 송하진 교수(국문과, 고흥 과역 출신)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그는 재주가 많았다. 그의 재주가 나는 늘 부러웠다. 그의 문재(文才)는 중학교 때부터 스승과 동료 사이에 이름이 높았다.「감꽃이 필 무렵」이라는 소설로 ‘학원문학상’을 받는가 했더니 어느새 시를 쓰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의 시는, 그때 겨우 모작에 열을 올리던 우리와는 이미 격이 달랐다.”
아무튼 그의 시적, 예술적 토양의 가장 밑바닥을 형성한 것은 그의 어린 시절의 고향 바다였음이 분명하다. 청정하고 따뜻한 득량 바다는 그에게 무한한 꿈과 시적 상상력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팔다리가 달아나고 살이 문드러졌다고
어찌 강물 흐르는 것을 모르랴
멀리 떨어진 섬과 섬 사이를
하염없이 이어주는
청징한 뻐꾹새 울음소리
그 울음의 신새벽 같은 물길은
끝없이 흘러
비린내 물드는 포구
스러지는 선창에도 닿게 되나니
보라, 떠난 자들의 여윈 눈가에
녹다 남은 소금기
그늘 서린 수양버들 잎사귀로 받아내며
흘러드는 강물의 사랑을
보라, 봄날 철쭉꽃 타는 바다에
天地 가득 다시 혼불처럼 피어나는
섬과
섬들의 섬.
─다도해 (전문)
* 박종권 유고 시집 『찬물 한 사발로 깨어나』 (실천문학사, 1995) 중에서
유장한 가락과 군더더기 없는 이미지, 시어들의 시대적 상징성, 그리고 따뜻한 민중적 감성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시다. 어찌 이런 시를 절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시는 눈으로만 읽을 게 아니라 소리 내어 한번 읊어보아야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가히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하다. 흔히 ‘민중시’ 계열의 시들이 보여주는 상투성과 설익음, 그리고 목청만 드센 성급함 등의 시적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고 있다. 시는 결국 모든 것을 삭히고 승화시켜서 하나의 보편적 경지를 이룬 뒤에야 제 맛을 갖는 것일까. 이 시를 보면, 모든 문학 정신은 결국 하루아침에 책 몇 권 읽고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호흡 속에서 오랜 시간을 두고 형성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사실 이 곳의 바다는 이청준, 한승원, 송수권 등 이 지역의 많은 문인들의 문학적 모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이야말로 모든 위대한 문학ㆍ예술의 어머니임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가락, 판소리에 눈을 돌리다
박종권은 성균관대학교 및 학송경학원에서 유학(儒學)을 공부하면서, 이때부터 우리의 가락인 판소리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송하진 교수의 술회를 다시 들어보자.
“그는 판소리를 배우기 전에 트로트를 열심히 불러댔다. 목포에서 광주까지 두 시간이 걸리던 시절 직행버스 막차 안에서 출발해서 도착할 때까지 ‘고향의 그림자’에서부터 ‘황성옛터’까지 내리 불러대는데도 짜증을 내는 승객은 하나도 없었고, 내릴 때는 박수에 다음 술자리까지 제의를 받았을 정도였다. 그는 대학 시절 부채에다 추사의 ‘세한도’를 모사해서 내게 보내준 적이 있었고, 남농(南農)의 ‘청송도’를 본뜨기도 하고 기우도(騎牛圖)를 곧잘 그리기도 했다. 지금도 주변 친구들 중엔 그의 청송도나 기우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
“세상에선 그를 시인으로 알기보다는 소리꾼으로 아는 사람이 더 많다. 그가 북과 소리에 경도된 것은 시인인 줄로만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퍽 생소한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오랜 인연의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건 그가 고향인 전남 고흥에서 보낸 유년 시절과 관계가 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의 직장 관계로 외가(풍양면 고옥리 축두)에서 자란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당시 외가 마을 앞바다의 간척사업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외증조부가 고흥이 낳은 국창 김연수와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김연수는 일 년 중 몇 달은 외가댁에 머물면서 소리를 했던 까닭에, 그는 자연히 어려서부터 소리를 듣고 따라 부르곤 했던 것이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 그는 부산에 있는 군수사령부에서 군 생활을 했는데 열병 치료차 휴가를 나와 집에서 쉬고 있던 어느 날, 그가 집에서 임방울의 ‘쑥대머리’를 낡은 테이프로 듣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먹고 사는 게 급급했던 시절이라, 옛 문화에 대한 각성 같은 것은 없었고, 청년들도 통기타 노래에 흠뻑 빠져 있던 때라서 그것이 내겐 퍽 인상적이었다.”
이후, 박종권은 제대 후 복학하여 학교를 다니면서 박봉술 선생으로부터 ‘적벽가’를 배웠는데, 배우는 속도가 남달랐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날 박 선생은 그에게 이제 그만 소리를배우라고 했다. 이유인즉, 더 배우면 정말 소리꾼이 되고 말겠는데 좋은 대학 다니면서 뭣 때문에 밥 빌어먹는 소리꾼이 되려하느냐며 만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종권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계속해서 진봉규 선생을 사사하고, 조상현, 오비연, 신영희 등 국악인들과 계속 교류하면서 소리를 익혀갔다. 그리고 틈틈이 <뿌리 깊은 나무> 등에 국악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 특히, 오월시 동인의 한 사람인 이영진 시인이 편집장을 맡고 있던 잡지 <전통문화>의 고정된 꼭지에 한동안 국악 관련 글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소리북의 명인 김명환 선생을 만나다
그러던 중 한번은 잡지사의 청탁으로 인간문화재 일산(一山) 김명환(金命煥) 선생을 취재하러 갔다가 단숨에 선생의 북소리에 빠져 사제의 연을 맺은 뒤, 뒤늦게 다시 소리북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김명환(1911-1989) 선생은 전남 곡성군 옥과면 출신으로 22세 때 조선 최고의 명고수로 칭송받았으며, 197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9호 ‘판소리 고법 기능보유자’로 선정된 분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국악인들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형편없었다. 조선 최고의 고수라는 분이 집 한 칸도 없이 노량진의 달동네 비슷한 곳에서 겨우 방 한 칸 얻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허울 좋고 말 뿐인 인간문화재 대우였다. 이러한 정황을 잘 보여주는 도올 김용옥의 짤막한 글 한 편이 있다. 당시 김용옥도 일산 선생에게서 북을 배우고 있었으며, 선생의 제자들 모임인 ‘일산회(一山會)’의 회원이었다.
“한강변 노량 나룻터의 일산댁에 들어섰을 때 히라이시(平石直昭)는 놀래 자빠졌다. 그들 감각으론 일국의 정상의 ‘메이진(명인)'이라 하면 으리으리한 저택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아파트 골방에 그를 안내하자 일산 선생은 좀 부기가 있는 손으로 날 어루만지시며 또 푸념을 늘어놓으셨다. ’아니 글쎄, 여기선 북도 못 친다우. 옆집 아파트 여편네가 어찌나 밉쌀머리 없는 게, 아니 북만 쳤다 하면 달려와서 제랄발광을 늘어 놓는다우. 그래 요 방을 비싸게 돈들여가꼬 수리했제 안컷오만, 방음이 잘 안되는가벼.' 말귀를 알아들은 히라이시는 <뉴욕타임즈> 전면에 난 김명환의 모습과 지금 이 다 찌그러진 열 평 남짓한 아파트의 골방에 앉아 쌍스러운 옆집 여편네 땜에 치고 싶은 북도 못치고 앉아있는 늙은이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무슨 우주의 영기라도 돌았는지 눈을 껌벅껌벅하는 것이었다. 히라이시는 내 어깨를 치면서, 김형! 빨리 국학을 하시오. 조선 땅엔 아직 국학이 없는 듯하오!” -김용옥,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부록 「애도 일산 김명환 선생 별세」(통나무, 1989) 중에서.
박종권은 그 골방을 수없이 드나들며 소리북을 익혀갔다. 판소리에 늦게야 입문한 그는 어쩌면 소리꾼보다는 고수로서의 새로운 경지를 헤쳐 나가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어느 날 그는 일산 선생으로부터 “이제 소리가 보이는가?“ 하는 질문을 받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길로 직장마저 그만 두고 홀로 지리산 중산리 계곡으로 들어가 수련을 했다. 그 지리산 시절의 추억담이 하나 전해지는데, 날마다 계곡에서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다 돌아오던 어느 날 밤, 꿈에 웬 할머니가 나타나 지팡이로 머리를 때리면서 왜 날마다 시끄럽게 하느냐고 꾸짖더라는 것이다. 며칠 뒤 인근 절의 스님을 만나 꿈 얘기를 했더니, 지리산 마고할미라며 백일기도를 해도 현신하지 않는데 그새 뵈었냐며 좋은 일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아무튼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그의 북소리가 더 나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보다 소리를 더욱 잘 듣게 되었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1989년 4월, 일산 선생이 타계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시 한편을 써서 스승의 예술과 은혜에 대한 감사와 그리움을 토로한다.
이제 마음 놓고 흘러가십시오 / 이 깊은 슬픔의 뿌리를 눕히는 / 북소리로 흘러가신다면 / 우리는 말없이 상처를 밟고 가는 / 저 봄날의 저문 강물을 따라 / 흔들리는 작은 풀잎이라도 되어 / 가시는 길가에 몸을 구부려 떨며 / 오래오래 서 있겠습니다. // 우리 옆에 계실 때보다는 / 사시는 그곳에서 더 큰 꽃으로 피어 / 한 세상 온갖 서러운 이름까지도 / 무성하고 꼿꼿하게 받아 키우실 줄로 압니다. // 햇살이 실실이 머리를 푸는 노량진에서 / 가야금이 놓인 대청마루에서 / 그늘같이 젖어드는 그리움을 적셔가며 / 우리는 여전히 심청가 한 대목을 듣겠지만 // 한 송이 두 송이 다도해의 섬처럼 빛나고 있는 / 당신의 그 큰 북소리를 타고 / 누가 저승의 어두운 수평선으로부터 / 눈을 떠서 힘차게 저어 돌아오겠습니까 // 이제 부디 고요히 흘러가십시오 / 당신을 보내드리는 / 이 붉은 황토흙의 옥과땅에서 / 다만 쓰러지지 않는 조선의 넋으로 / 밤낮 소리치는 강물을 이루어 / 스스로 불타며 흘러가신다면 / 거친 손을 잡아주고 쓰다듬어 주는 / 앞산의 푸른 솔바람으로 다시 돌아오신다면 / 우리는 오히려 새로운 기쁨에 온몸을 떨며 / 무릎 꿇고 당신을 맞이하겠습니다. ─푸른 솔바람으로, 일산 김명환 선생 영전에 (전문)
또한 박종권은 틈날 때마다 선생의 북소리뿐만 아니라, 선생 자신이 걸어온 평생의 삶과 예술을 틈틈이 구술토록 하여 그것들을 녹음테이프에 고스란히 담아두었는데, 선생의 타계 후 그 녹음을 바탕으로 그것을 모두 책으로 출판하였다. 『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어요』-민중자전에세이 (김명환 구술, 백대웅ㆍ김해숙ㆍ박종권 외, 뿌리 깊은 나무. 1992.)라는 책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국악계뿐만 아니라, 우리말의 방언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 되고 있다.
민족문학 그리고 쑥대머리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박종권은 한동안 서랍 속에 간직해 두었던 그의 시작노트를 다시 꺼내어 들었다. 당시는, 전두환 군부정권을 향한 학생ㆍ시민의 저항이 갈수록 극렬해지고 있었고, 오월시를 비롯한 많은 문학운동, 문화운동, 노동운동 등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변혁을 향한 시대적 몸부림을 외면한 채 방에 앉아 북만 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민중시> 등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많은 시인ㆍ문학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전통과 현대의 연결고리를 모색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그는 그렇게 북과 소리 그리고 시작(詩作)을 병행해 나갔으며 1993년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 시절, 그는 문인들의 술좌석에서는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시절부터 그가 부르는 ‘쑥대머리’는 이미 정평이 나있었던 것이다. 우렁찬 목소리로 유장하게 불러 제끼는 그의 쑥대머리 가락은 많은 문인, 예술인들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고 투지와 정기를 일깨워주는 청량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가 노래할 때면 장내는 차라리 엄숙함에 싸이고, 설움에 겨운 몇몇 이들은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목놓아 울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문단에서는 그를 흔히 ‘쑥대머리 시인’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나중에 천승세 선생은 그런 그의 소리를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내 올 여름 불솥더위 숫구멍 위에 얹고 / 견딜 그날까지만 살 수 있다면 / 너는 울고, / 나는 듣고/ 우리 또 청청하게 만날 것이다. / 울울청산 한 덩이 들여마셔라. / 큰 하늘 한 점도 걸러내거라. / 목젖께 그닐그닐 맺히는 설움도 / 카악 토악질로 뱉아내거라. // 이런 소리 있어야 한다 / 이런 북장단 있어야 세상이다. // 울어라, 매미여! / 판소리 뽑으라. // 심심하고 무름해서 감질나는 한평생 / 삼라만상 어귀찬 목숨들 / 나무 없으면 끝장이다. // 매달려라, / 오르거라 끝가지까지 // 희번득 희번득 요리조리 날며 / 갈비짝 찢어지게 불러라, 여름을! ─천승세, 매미-박종권 판소리 (전문)
그러나 그는 시인으로서도 가인(歌人)으로서도 공인할 정도의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그것은 그의 삶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보다는 운명 같은 그의 삶의 방식 때문이라고 말해진다. 이 부분에 대한 송하진 교수의 술회를 다시 들어보자.
“나는 그것을 바람이라고 불렀다. 그의 가슴에도, 핏줄에도, 어깨에도, 호주머니에도 늘 바람이 불었다. 그것은 일견 세상과 자신과의 기압차에서 발생한 것 같기도 하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의식의 심연에서 발생한 것 같기도 했다. 사실 그는 어디에서도 안정하지 못했다. 안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바람 같았고, 바람 같았기 때문에 축적하지 못했으며, 축적하지 못했기 때문에 또 안정하지 못했다. 가족에서도, 일에서도, 예술과 종교에서도 그랬다. 그의 재주의 구슬을 꿰어줄 끈이 없었다.
그는 중학생 시절에 벌써 아버지의 죽음을 겪어야 했다. 딱 한번 그에게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열차 사고였다. 누군가를 구하려다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관을 들고 가 흩어진 시신을 수습했다고 하니 단순한 죽음이었어도 견디기 어려웠을 텐데 어린 가슴에 주어진 충격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이 일을 그가 자신의 삶과 결부시켜 말한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 그의 삶 전반에 깔려 있는 방황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이다.
나는 그가 우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누구보다 고달팠던 인생길에서 늘 웃음을 잃지 않았고 의젓했다. 그러나 그는 갈대처럼 속으로 늘 울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시 전편에는 울음이 깔려 있다. 그것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는, 이르러야 할 곳에 이르지 못하는 삶에서 비롯되는 자기 연민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내적 갈등은 당연히 방황으로 나타나 또 하나의 건조한 바람이 된다.”
그 무엇이 수렁 속에서 솟아난 / 한 송이 연꽃처럼 / 우리들의 가슴을 새벽마다 벙글게 하느냐 /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더 크게 울려서 / 환하게 밝아지는 조선의 깊은 골짜기를 / 꼭두서니빛으로 가득 채우는 / 황소 울음이 되게 하느냐 / 마침내 가시덤불 찬이슬 툭툭 털고 / 불타는 흰 옷자락 바람에 날리우며 / 저 밀물처럼 밀려 들어오고야 말 아침의 싱싱한 눈물이여 / 몇 천년 만신창이 버려진 황토길을 밟아 / 우리들의 눈 앞에, 상처난 무릎 아래 / 죽은 심청이가 살아 돌아오듯 / 자궁 같은 꽃송이를 타고 와서 꼭두서니빛 비린내로 퍼져나갈 소리여 ─북1 (일부)
그의 시에는 언제나 유장하게 흘러가는 가락이 있다. 그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오랜 숨결이 자연스럽게 배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가락은 그의 고향인 고흥 땅의 붉은 황토밭과 굼실거리며 이어지는 낮은 구릉들과 그 아래 펼쳐지는 따뜻한 들판을 닮아있다. 세상을 향해 질타의 목소리를 높인 시들도 많지만, 그의 대부분의 시들은 판소리 가락처럼 따뜻하고 구슬픈 정조와 함께 감칠맛 나는 시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거의 초기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다음의 시를 보면, 그의 언어 감각과 이미지를 구사하는 시적 능력이 얼마나 탁월한가를 알 수 있다.
물새 떼가 날아가는 강물 위에는
꽃잎 하나 떨어지고 있구나
天地를 피로 물들이고
흐르는 물을 떠올리는
그릇마저 물들이는
쑥대머리 귀신형용
빗소리를 생각느니
그늘 서린 잎사귀로
빗물 받아주던
그대의 불빛 같은 두 손을 생각하느니
우리는 무엇이 되어 누워있는가
꽃잎 하나 불타며 떨어지는 마을
바람에 흔들리며 노래하는 풀잎처럼
흘러가리라
다시 흘러가리라.
─靑牛에게 (전문)
1993년 7월 그는 고향인 고흥의 문화원 초청으로 창작 판소리 ‘전봉준’을 발표한다. 이 공연은 동학혁명 백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장효문 시인의 서사시를 바탕으로 본인이 직접 판소리 대본을 만들고 직접 소리를 불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창작 판소리를 했던 사람은 임진택 정도가 있었음을 생각하면, 시와 소리를 연결하려는 그의 이러한 문학적 시도는 높게 평가할 만하다.
▲ 민족문학작가회의의 한 문학행사를 마치고 여러 문인들과 함께 (뒷줄 5번째 ↓표)
때로는 꽃으로, 쑥국새로, 바람으로
90년대로 들어서면서 박종권은 그의 북소리를 더욱 다지고 활발한 시작 활동을 병행해 나갔다. 많은 문학행사, 운동행사, 집회 등에 국악인들을 연결하여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또 국악인들의 해외공연에도 동참하는 등 활동의 폭을 넓혀갔다. 그러나 그의 내부의 바람과 방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화려한 무대와는 달리 그의 삶은 언제나 빈한했고, 팍팍하고 고달팠다. 이즈음 그가 급속도로 황폐해져 간 것은 앞서의 언급처럼 근원을 알 수 없는 그의 내부의 바람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결국 안정할 만한 물적 토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그리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소리에 대한 그리움, 시에 대한 그리움, 친구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 술에 대한 그리움까지 그리움을 주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늘 바람이었다. 그 바람의 방향은 남향이었다. 왜냐하면 남쪽에 그의 고향과 무등산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언저리에 사랑하는 친구들이 살고 있고 그곳에 그의 아름다운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바람 치는 날엔 / 무등산 골짜기로 들어가고 싶네 / (중략) / 이렇게 온몸이 쥐가 나도록 아픈 날엔 / 무성하게 우거질 억새풀, 우리의 그리움도 / 만연사 아래 할머니집 막걸리처럼 삭아 / 부글부글 괴어오르지 않겠는가 / 가고 싶네, 길은 갈수록 더 멀리 아득해지지만 / 누군가 손 흔들며 기다리는 곳으로. ─비바람 치는 봄날에 (일부)
그는 광주에서 살고 싶어 했었다. 그리움이 막걸리처럼 삭아 부글부글 괴어오르면, 그는 광주에 왔다. 그때마다 그는 고향에서 살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광주에서 일터를 찾지 못했다. 그토록 가기 싫어하던 서울로 꾸역꾸역 돌아가고 나면 따뜻한 안방에서 재우지 못하고 차가운 여관잠을 자게 했던 나 또한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한동안 허전해했다. (송하진)”
1995년 1월, 음력 설이 되었는데도 그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가족들이 수소문했으나 어디에서도 행방이 묘연했다. 결국 보름만에 행려 변사체로 중대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병원 영안실에는 그의 벗들과 선후배, 문인, 국악인들이 속속 달려왔다. 모두 그의 차가운 주검 옆에서 밤을 지새며 울분을 토로하고,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되어버린 그의 ‘쑥대머리’를 함께 불렀다. 그의 장례는 민족문학작가회의장으로 치러졌다. 여기서 그의 죽음에 대해 다시 세세히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그가 남긴 유고시집 『찬물 한 사발로 깨어나』(실천문학사, 1995)에 나와 있는 그의 벗들과 선후배 문인들의 안타까운 토로와 추모시를 인용하면서 글을 맺으려고 한다.
“그의 죽음의 내막에 대해 더 이상 말하는 것은 너무 오욕스럽다.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 그러나 그의 시와 노래, 그의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는 결코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파괴자도 범죄자도 아니었다. 예술적인 열정과 인간적인 애정을 가진, 매력 있는 시인이요 가객이었다. 다만 가난하고 불우했을 뿐이었다. 그 같은 사람 하나 정도를 포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각박하고 불안정해져버린 이 시대 이 사회가 일탈의 주체이다. 그의 죽음은 자신의 삶이 축적된 결과로서의 상징성은 없지만, 이 시대와 사회의 전도된 가치체계나 오만방자한 인간 군상에 대한 엄숙한 계고로서의 의미는 있다. 물론 그는 그 희생물이 되고 말았지만 그 같은 대상에 굴복한 적은 없었다. 그의 삶이 비록 풍요롭거나 세련되지는 못했어도 언제나 의젓하고 당당했던 건 그 때문이다. (송하진)”
“임방울 선생의 단가 중에 ‘추억’이라는 노래가 있다. 박종권 형은 그 노래 테잎을 빌려간 후 그냥 도솔천 강가로 가져가버렸다. 고수 김명환 선생 댁에 데리고 가서 선생을 뵙게 해주던 일들도 새롭다. 박종권 형은 이 세상이라는 풀밭을 떠돌며 노래를 부르던 가객이었다. 이 세상에 남겨둔 그의 노래에는 그래서 유장하고 깊은 운율이 있고 읽다보면 그가 치는 북장단 소리가 시 속에서 들려온다. 그의 시가 소리가 되어 하늘과 우리 마음을 울리는 것을 그도 그 강가에서 듣고 있을 것이다. (나해철 시인)”
“그가 즐기던 판소리 더늠처럼, 뚜렷이 새겨진 박종권 형의 삶의 흔적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반려가 될 것이다. 그저 평범하고 단란하게 살 수 있었던 삶을 뿌리친 채 소리 공부에 혼신을 바친 일이며, 아무런 내색 없이 시인으로서 지켜야 할 자리면 조금도 물러섬이 없던 형의 모습은 남아있는 우리들에게, 집요하게 어떻께 살 거냐고 캐묻고 있다. 급변하는 세태 앞에서 얼굴이 분명하지 않은 가성을 내는 이들이 수두룩하고, 큰 일은 버려둔 채 작은 일에 덜미를 잡혀 등을 돌린 벗들이 적잖은 요즈음 꾸밈 없이 제 빛깔대로 살아온 박종권 형의 삶과 시는 우리들에게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 (박몽구 시인)”
“그는 어디에 있을까. 서울에는 결코 있지 않을 것이다. 달빛조차 얼어붙는 지리산 중산리 계곡이나 만연사 막걸리집 대숲 같은 데엘 가면 만날 수 있을까. 바보 같은 생각이다. 오히려 그를 사랑했던 이들의 가슴에 그가 살아있다. 그의 시가, 노래가, 웃음이,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다. 그러다 때로는 꽃으로, 쑥국새로, 바람으로 현현할 것이다. (송하진)”
황소처럼 산천을 울다 가는 통 큰 사내야.
그대 앞에 올리는 향불 따윈 부질없구나.
뜨거운 눈물로는 이 무서움 가시지 않는구나.
겨울강에 이르면 인연이 다한다고 했던가.
저기, 잎 져 흘러가는 새파란 물가.
무정한 사내 홀로 독주에 취해
제 살을 찢어내고, 절정이던가 애끓는 옥중가가 들려온다.
쑤우욱...대 머어리...구신 혀어엉...용!
아 아! 육탈(肉脫)의 저 아득한 강 너머로 사라지는
주인 없는 가락이여.
단 한 차례도 뒤돌아 눈길 주지 않는 그대 완강한 뒷모습.
그대를 죽여, 천만번 죽여 다시 북소리
온 산천을 휘돌아 흐른다면
오, 빈 산 빈 강을 두드려 울리는
그대 눈물 없이 우는 큰 울음 온 들녘을 적신다면
타오르는 노을도 다시는 붉어지지 않으리
꽃 아래 젖은 술조차 다시는 익어 향기롭지 않으리
때절은 바바리 깃을 바람에 날리며, 멀어져가는 이여.
사무쳐 온몬에 돋는 이 한기!
그래, 그대는 우리 식은 가슴을 쪼개던 대책없는 눈물,
잠시도 멈출 수 없었던 숨가쁜 노래였다.
-이영진, 가객(歌客)
* 故 박종권 시인의 영전에 올립니다.
/ 박호민 시인ㆍ<아리랑신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