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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카페 게시글
세계역사 스크랩 일본은 고대사가 없다..............
스토리 추천 0 조회 87 14.01.12 04: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가야와 백제의 열도패권쟁탈전】

〔가야의 열도 개척〕

일본 열도를 최초로 대규모로 개척한 것은 서기 340년대부터 360년대 초반까지 가야에 의해 개척되었고 그 개척사가 세 가지의 설화로 남아있다. 이때가 백제로서는 근초고왕대에 해당되고 그 당시 백제는 대륙으로 건너가 대륙에 두 개의 백제군을 마련했던 것으로 보는데 그 기록들이 대륙측 사서 열 종에 나와있다. 필자의 글 "대륙백제", "아라가야의 이즈모[出雲] 제철단지 개척사", "가야가 개척한 일본열도", "가야인이 개척한 구주의 신라[천일창 설화]" 참조

〔가야와 백제의 30년전쟁〕

백제는 서기 364년부터 가야영역을 침탈하고 가야본국뿐만 아니라 가야가 개척한 열도까지도 손에 넣으려 함으로써 가야와의 사이에 약 30년에 걸친 전쟁에 돌입하는 것이 일본서기에 소상하게 나온다. *필자의 글 "가야와 백제의 30년전쟁" 씨리즈 (1)∼(10) 참조


【구수대왕 전사후의 상황 요약】

〔신무의 동정 시작; 서기 384년 2월〕

근강대첩에서 구수대왕의 전사후 가야군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담로도를 근거로 한 백제군과 대치하며 전투를 계속한다. 이때 아신왕(=아지사주)이 증원군(=17현민/암수 말 두 필)을 이끌고 담로도에 있는 부왕에게로 가는 것이 서기 응신기 20년조의 기사다. 신무의 동정이 시작되는 것은 서기 신무즉위전기 무오년조 기사다. 17현민은 17,000명의 증원군이다.

〔침류왕의 단명과 진사왕의 왕위찬탈; 서기 385년 6월〕

열도에서 가야군이 주도권을 쥐고 공세를 취하는 가운데 침류왕은 본국으로 들어가다가 진사군과 가야군의 협공을 받아 진사에게 잡혀 자살을 강요당하고 죽은 후에 시(屍)를 팔단(八段) 당한다. * 필자의 글 "침류왕과 진사왕의 상쟁" 씨리즈글 세 편 및 "진사군과 가야군에 협공 당한 침류왕의 상황", "침류왕의 정확한 전사시기" 참조

〔신무의 동정; 서기 384년∼389년〕

신무(=중대형)는 공세를 계속하지만 6년 가까이 아신군을 변변히 이기지도 못하고 지루하게 대치를 한다. * "신무의 동정"은 별도해설

〔아신과 응신의 밀약; 서기 389년 가을〕

결국 서기 389년 가을 아신왕(=중신겸족)의 제안에 따라 응신은 진사왕을 타도하고 반도백제, 열도왜 분립을 하는 조건으로 밀약을 맺고 네 차례에 걸쳐 열도에서 발진한 원정 끝에 진사왕을 타도하고 아신(=아화)을 위에 오르게 한다. 밀약은 서기 황극기 3년조에 나오고 이 협정을 이행하는 것이 서기 숭준즉위전기의 물부수옥대련 타도 기사이고 민달기 원년부터 3년까지의 고구려 외교사로 분식된 기사이고 그 4차 구원에서의 전역이 바로 응신기 3년 시세조에서 진사왕을 죽이는 사건인 것이다. 이리하여 응신(=중대형/신무)은 서기 390년 열도 최초의 통일왕조인 대화왕조를 수립하게 되는 것이다. * 필자의 글 "아신과 응신의 반도백제·열도왜 분립밀약", "아신의 對진사왕 역쿠데타전역", "아신의 역쿠데타가 왜의 대고구려 외교사로 둔갑한 사연", "대화왕조=가야왕조이고 왜=가야라는 응신천황의 고백", "호태왕비문의 왜의 실체를 밝힌다", "일본 고대 대화왕조는 가야왕조" 참조


【달리 분식된 신대기; 서기 369년∼374년】

백제와 가라의 열도패권다툼을 대폭 압축한 스토리가 서기 신대기 하 9단 천손강림(天孫降臨)조에 나온다.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아들 정재오승승속일천인수이존(正哉吾勝勝速日天忍穗耳尊)이 고황산영존(高皇産靈尊)의 딸 고번천천희( 幡千千姬)를 취하여 천진언언화경경저존(天津彦彦火瓊瓊杵尊)을 낳았다. 황조(皇祖)인 고황산영존이 특히 귀여워하고 사랑하여 떠받들어 키웠다. 황손인 천진언언화경경저존을 세워 위원중국(葦原中國)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땅에는 반딧불과 같이 빛을 내는 신과 파리 같은 소리를 내는 사신(邪神)이 많았다. 또 초목들도 말을 했다. 그래서 고황산영존이 많은 신들을 소집했다. "위원중국의 나쁜 귀신들을 평정할려고 한다. 누구를 보내면 좋은가? 그대들 모든 신을 숨김없이 말하라"라고 했다. 모두가 "천수일명(天穗日命/天菩比命)은 신 중의 걸물입니다. 그를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했다. 제신의 말을 좇아서 천수일명이 가서 평정하게 했다. 그러나 이 신이 대기귀신에게 아첨하여 3년이 지나도록 보고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아들 대배반삼웅지대인[大背飯三熊之大人/大人 이를 우시(于志)라 한다]을 보냈다. 다른 이름은 무삼웅지대인(武三熊之大人)이라 한다. 이 역시 그 아버지에 따라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고황산영존이 다시 제신을 모아서 보낼 자를 물어보니 모두 "천국옥(天國玉)의 아들인 천치언(天稚彦/天若日子)이 장사니까 보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고황산영존이 천치언에게 천록아궁(天鹿兒弓)과 천우우시(天羽羽矢)를 주어 보냈다. 이 신도 역시 충성하지 않았다. 거기 가서 현국옥(顯國玉/大己貴神)의 딸인 하조희(下照姬/高姬/稚國玉)를 취하여 머물러 살면서 "나는 장차 위원중국을 다스리겠다"라고 하고는 끝내 복명하지 않았다』라고 나오는데 침류(=천치언)가 제칠지도를 들고 도왜(신공 52년=서기 372년)하여 본주를 장악하려고 하였으나 서기 374년 초고대왕이 친정을 가기까지 가야군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고황산영존은 일본왕실의 황조신〕

천조대신은 고사기 응신기의 백제국주 조고왕(照古王)과 '비출 조(照)'로 연결되는 초고대왕이고, 정재오승승속일천인수이존도 초고대왕이다. 속일(速日)은 신무기의 요속일(饒速日)과 동일인물이고 "요[饒/餘]씨 성을 가진 이름에 속(速) 자 들어간 왕[日]"이라는 뜻이다. 곧 성씨록에 나오는 백제국 속고대왕(速古大王)인 것이다. 소꼬[肖古]=소꼬[速古]다. 천(天)은 백제를 뜻하고 이(耳)는 귀(貴) 대신에 쓰이는 존칭이다. 훈과 음을 같이 놓고 쓴 것이다. 나머지도 전부 존칭이다. 고황산영존은 "황실을 낳았다[皇産]"는 뜻이고 이것은 '세우고[立/建]'와 같은 발음의 '세우고[肖古]'와 같아 왕실을 세운 초고대왕과 동일인물이다.

〔니니끼[瓊瓊杵]는 구수태자〕

천진언언화경경저존은 구수대왕이다. 위원중국은 열도를 말한다. 반디[螢]같이 빛을 내는 신과 파리 같은 소리를 내는 사신(邪神)은 가야계나 열도원주민을 은유, 비칭한 것이다. 반디[螢]라는 것은 일신(日神)인 초고대왕(=天照大神)과 월신(月神)인 구수대왕에 비하여 보잘것없다는 뜻이다. 결국은 백제와 가야(=위원중국의 나쁜 귀신)과의 대립을 백제왕실 기준으로 묘사한 것이다. 니니끼[瓊瓊杵]는 "붉은 옥[瓊]으로 장식한 지팡이" 라는 뜻이고 칠지도를 뜻하며 구수대왕이 칠지도 이면에 나오는 "백제왕세자로서 초대왜왕"인 것이다.

〔천수일명=질아=무내숙이〕

천수일명이 구수대왕의 장자인 무내숙이다. 가더니 대기귀신에게 아첨하여 3년이 지나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말이 신대기 상 5단 사신출생조에 질아가 3년이 지나도 서지 못했다는 말과 등치되어 무내(武內)가 질아(蛭兒)인 것이다. 대기귀신에게 아첨했다는 말은 칠지도를 주고 열도의 후왕으로 임명해서 보냈는데 가야에 협력하여 본국에 반기를 들었던 것을 말한다. 후왕으로 파견한 것이 서기 369년이고 3년이란 구수대왕이 천손으로 분하여 천강, 구주평정을 완료한 서기 371년을 기준으로 햇수로 역산한 것이다. 이 질아(=소언명명)가 처음으로 대기귀신을 찾아가는 것이 신대기 상 8단 말미에 나오는 소언명명 설화이고 무내가 가야와 협력하게 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3대를 내리 새로 은유〕

대배반삼웅지대인(大背飯三熊之大人)은 무내의 아들이라고 나오는데 대(大)가 붙은 것으로 봐서 무내의 장자로 보인다. 배반(背飯)은 반도어로 배반(背反)과 같은 말로 배신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소비[背飯]는 소비[立+鳥]와 발음이 같고 뜻은 '쇠새'다. 사사기[초료/새새끼]로 은유된 무내의 아들다운 이름이다. 구수대왕을 경행기에서는 백조로 은유했는데 삼대(三代)에 걸쳐 내리 새로 은유한 것이다. 우시[大人]>웃이>웃사람을 말한다. 아마 왕의 손자 즉 세손(世孫)을 웃이>우시[大人]라고 한 듯하다. 지금은 백제대왕의 증손자가 된다. 대왕은 초고대왕이고 왜왕은 구수태자고 왜의 후왕은 무내였던 것이다. 따라서 왜왕인 백제태자의 손자이므로 대인(大人)이라 한 것이다.

〔천국옥은 구수대왕〕

천국옥(天國玉)에서 천국은 백제고 그 아들 천치언(天稚彦)이 침류왕이므로 역시 구수대왕을 지칭한다. 옥은 왕(王)과 같은 뜻으로 쓰고 치(稚)는 중(仲)의 뜻으로 기·기에서 자주 쓰인다. 사기에 장자로 나오는 침류왕은 사실은 중자였던 것이다.

〔아라구니다마[顯國玉]은 아라가야왕〕

그런데 역시 가더니 현국옥(顯國玉/대기귀신)의 딸 하조희에게 장가들어 복명을 안 한다. 이 말은 침류가 열도로 가서 가야를 쉬이 평정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우쯔시구니다마[顯國玉]라고 되어 있으나 아라구니[顯國]로 읽을 수 있어 아라국왕(阿羅國王)을 지칭하고 아라사등인 것이다. 옥(玉)은 바로 왕(王)을 상징하는 것이다.

위의 스토리의 주제도 백제와 가야의 열도를 사이에 둔 패권다툼을 신화로 꾸민 것이다.

〔하조희는 열도 은유〕

하조희(下照姬)란 사람이 아니고 아라사등이 개척한 열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어서

『이때 고황산영존은 오래도록 보고가 없어 이상하게 생각하고 무명치(無名雉/꿩)를 보내 알아보게 했다. 꿩이 가서 천치언(天稚彦)의 집 앞에 탕진두목(湯津杜木)의 끝에 앉았다. 이때 천탐녀(天探女)가 이를 보고서 천치언에게 "이상한 새가 두목(杜木) 끝에 앉아 있습니다"라고 하자 고황산영존이 준 활과 화살로 꿩을 쏘아 죽였는데 그 화살이 꿩의 가슴을 꿰뚫고 고황산영존이 앉은 자리 앞에 이르렀다. 고황산영존이 그 화살을 보고서 "이것은 예전에 내가 천치언에게 준 화살이다. 피가 묻었다. 국신(國神)과 싸워서 그랬는가"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 화살을 집어 도로 아래로 던지니 그 화살이 떨어져서 천치언의 가슴에 꽂혔다. 이때 천치언은 햇곡을 먹고 잠을 자고 있었는데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것이 세상사람들이 되돌아온 화살을 꺼리는 연유다』

〔천치언은 침류〕

천치언의 집 앞에 탕진두목(湯津杜木)이 있다는 말도 연결고리가 들어있다. 탕(湯)은 침류를 조로 하는 성씨인 액전부탕좌련(額田部湯坐連)과 목(木)은 침류의 이칭인 목리경(木梨輕)태자, 목라근자(木羅斤資)와 그 후손 목리만치(木리滿致)와의 연결고리다. 또 가즈라[杜木]라고 하는데 가즈라[실 사 변+曼]와 같아 왕관을 뜻하기도 한다. 즉 열도의 왜왕 또는 후왕을 뜻한다.

〔침류의 단명〕

천치언이 일찍 죽는데 침류왕은 왕 재위기간 1년 4개월 정도다. 그것을 비유한 말이 "햇곡을 먹고 잠을 자다가 죽었다"는 말이다.

이어서 보면

『천치언의 처 하조희(下照姬)가 소리내어 울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자 그 소리가 하늘까지 들렸다. 이때 천국옥(天國玉)이 그 곡성을 듣고 하조희의 부(夫) 천치언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고 질풍을 보내 시신을 하늘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상옥(喪屋)을 짓고 빈소(殯所)로 했다. 강의 기러기는 사자(死者)의 음식을 나르게 하고 청소를 시키고 [一書에 닭에게 음식을 나르게 하고 기러기에게 청소[ ]하게 했다고 한다]. 참새는 용녀(용女/절구 찧는 여자)로 했다 [一書에 기러기를 사자의 음식을 나르고 청소하게 하고 쇠새[ 鳥]는 신령(神靈) 대신에 제사 받는 자로 하고 참새를 용녀( 女)로 하고 뱁새를 우는 여자[哭女]로 하고 솔개[ ]를 염(殮/시신을 씻고 옷을 갈아 입히는 일)을 하게 하고 까마귀를 사자의 음식을 나르게 하고 모든 새에게 일을 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팔일팔야(八日八夜)를 울고 슬프게 노래를 불렀다』 * 찧을 용=봄 春 밑에 日을 절구 臼로 바꾼 것=찧을 搗

구수대왕도 이때는 이미 전사하고 없을 때다. 침류가 진사에게 전사하자 하늘로 데려갔다고 한 것이다. 천국옥에서 천(天)은 백제고 옥(玉)은 왕이므로 백제대왕인 구수대왕인 것이다.

〔삼대를 내리 새[鳥]로 은유〕

새들을 동원하여 장사를 치르게 하는 것은 은유다. 새는 구수대왕도 새로 은유되었지만 특히 참새도 나오고 뱁새도 나오는 것이 새새끼로 은유되는 무내숙이와 관련 있다. 침류왕을 분식한 서기 중애기 9년 2월조에 중애가 갑자기 죽자 몰래 시신을 거두어 무내숙이에게 주어 해로(海路)로 혈문(穴門)으로 옮기고 풍포궁(豊浦宮)에 빈(殯)하고 불을 때지 않고 가장(假葬)을 했다고 나온다. 물론 무내는 침류보다 더 일찍 죽었기 때문에 이때 무내숙이는 무내의 아들들이다. 무내의 아들들이 전부 새로 은유된 것이다. 구수대왕을 백조로 은유하고 그 장남 무내를 뱁새[  /초료]로 은유하고 다시 그 아들들을 새들로 은유하여 분식의 일관성이란 면에서 삼대에 걸쳐 내리 새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서기 효덕기 5년 3월조에서는 무내 아들(=전구신축자) 한 명이 소아창산전대신(=침류왕)과 같이 죽는 것으로 나오고 진사왕을 분식한 서기 안강기 원년 2월조에도 난파길사일향문(難波吉師日香蚊/무내후손) 부자가 대초향황자(=침류왕)와 함께 자살하는 것으로 나온다.

〔팔일팔야는 8년〕

팔일팔야(八日八夜)가 가끔 사용하는 은유로서 지금은 만 8년간의 기간을 말한다. 이것은 구수대왕 전사(서기 384년 2월)후 아신왕이 왕위(서기 392년 7월)에 오르는 데 걸린 기간을 말한다. 또는 침류왕이 전사한 서기 385년부터 햇수로 8년간으로 본다. 아신이 실제로는 응신과 같은 해 같은 달 1월 5일에 즉위한 것으로 나오는데 그 당시 백제에는 진사왕이 있었으나 정통계승라인에서 벗어난 인물이라 건너뛴 것이다. 이어서 보면

『그런데 그 전에 천치언이 위원중국에 있을 때 미사고언근신(味 高彦根神)과 친했다[味 /아지스기]. 그래서 미사고언근신이 하늘로 올라와서 조문했다. 그런데 이 신의 용모가 천치언의 평생(平生)의 모습과 쏙 빼닮았었다. 천치언의 친척과 처자들이 모두 "우리님이 살아 있는 것 같다"라고 생각하고 의대를 잡고 기뻐하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미사고언근신이 화를 내며 정색을 하고 "붕우(朋友)의 도리로 조문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러운데도 불구하고 멀리서 와서 슬퍼하는 것이다. 어째서 나를 망자와 잘못 보는가" 라고 말하고 차고 있던 날큰칼[刈/가리라 한다]로 빈소를 부수니 이것이 떨어져 산이 되었다. 지금 미농국(美濃國)의 남견산(藍見山) 위에 있는 상산(喪山)이다. 세상사람들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잘못 보는 것을 꺼리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 풀 벨 예(刈)

〔아지스기는 아직기〕

아지스기[味 ]는 고사기에는 아지시기[阿遲志貴]로 나오는데 이 인물은 서기 응신기에 경(輕)의 판상에서 양마를 하게 했다던 아직기(阿直岐)다. 아지스기, 아지시기에서 '스'와 '시'는 서로 교체될 수 있는 음이고 여기서는 우리말 사이시옷이다. 따라서 아지스기>아지시기>아짓기>아직기(阿直岐)가 되어 서기 응신기에 나오는 아직기(阿直岐) 즉 아신왕인 것이다.

〔용모가 닮은 것이 부자간 은유〕

평생(平生)이란 반도어로 평상시(平常時)라는 뜻도 되고 글자 그대로 일생(一生)이라는 의미도 된다. 용모가 닮았다는 것이 부자간이라는 말이다. 아신이 화를 내며 부인하는 것은 자신은 아버지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산이름은 지어낸 것이다.

이것과 거의 같은 스토리가 이설1에 나오는데 보면

『천조대신(天照大神)이 천치언(天稚彦)에게 "풍위원중국(豊葦原中國)은 내 아이가 임금이 될 땅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남은 적이 강포하고 나쁜 일을 하는 신들이 있다. 그러니 그대가 가서 평정하여라"라고 했다. 그리고 천록아궁(天鹿兒弓)과 천진녹아시(天眞鹿兒矢)를 주어 보냈다. 천치언이 명을 받고 내려와 토지신의 많은 딸들에 장가들어 8년이 되도록 보명(報命)하지 않았다...』라고 나오는데

천조대신은 초고대왕이고 천치언은 침류왕이고 적은 가라인(加羅人)들이다. 토지신(土地神)은 열도를 개척한 아라사등이고 많은 딸들은 역시 열도의 소국(小國)들을 말한다. 위원중국은 열도를 가리키고 열도의 후왕을 백제대왕이 임명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8년은 열도장악 못한 기간〕

많은 딸들에 장가들어 8년간 보명하지 않았다는 말은 위에 나온 팔일팔야와는 또 다르다. 천치언이 보고하지 않은 기간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것은 초고대왕이 서기 375년에 전사하고 구수대왕이 백제대왕이 되면서 침류가 왜왕이 되었으나 그 후 8년이나 지나도록 열도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구수대왕이 서기 382년경에 본주정벌에 다시 나서게 되는데 서기 375년∼382년까지의 햇수를 말하고 이것이 다시 구수대왕을 분식한 윤공기에서는 사인(=침류왕)이 제희(=열도)의 뜰에서 7일(=만 7년)을 엎드려 있었다고 한 것이다. 이어서 계속 보면

『...그때 미사고언근신은 빛나고 용모가 아름다워 두 언덕 두 골짜기 사이를 비추었다. 조상(弔喪)하러 온 사람들이 노래를 불렀다. 혹은 미사고언근신의 누이 하조원이 여러 사람들에게 언덕 골짜기에 비치는 것은 미사고언근신임을 알리려고 노래를 불렀다 한다.

「천(天)에 있는 제직녀(弟織女)의 목에 걸린 옥어통(玉御統)의 혈옥(穴玉)은 골짜기 둘을 건너 있는 미사고언근신」 또 부르기를

「천(天)을 떠나는 이녀(夷女)가 건너는 세또[迫門] 석천편연(石川片淵), 편연(片淵)에 망(網)을 걸고 끌어당겨 가까이 오너라 석천편연(石川片淵)」』

〔여인은 영토, 옥은 왕권〕

첫째 노래에서 천(天)은 백제(百濟)다. 제직녀(弟織女)란 열도를 은유한 것이다. 아우 제(弟) 자가 열도를 말한다. 옥어통(玉御統)이란 왕권을 말한다. 혈옥(穴玉)은 이미 구멍이 뚫어진 옥이니 왕권(王權)이 예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두 언덕 두 골짜기"는 이대이왕〕

두 언덕 두 골짜기라는 것이 또 은유다. 두 언덕 두 골짜기란 구수대왕>(침류왕+진사왕)>아신왕을 말한다. 이것은 구수대왕의 대통을 이을 인물이 아신이라는 말이다. 보통 낮과 밤으로 은유하는데 여기서는 두 언덕 두 골짜기로 침류와 진사의 이대이왕(二代二王)을 은유하고 있다. 하조원이 알리려고 한다는 말이 "정통계승자는 아신이다"라고 선언하는 형식이다. 역시 결과를 가지고 8세기초에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신왕이 백제왕실을 살린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직녀라 했으니 아스까를 지칭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무령왕이 아신왕의 직계손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노래에서 이녀(夷女)도 열도인데 아신·응신 분립으로 당분간 백제 손에서 떠나가지만 그물로 끌어 당겨 끝내는 차지하겠다는 의지를 노래했다.

최후로 백제가 망한 후에 열도를 장악한 왕실이 구수대왕의 후손 중에서 무내숙이계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기도 하다. 이시까와[石川]가 무내숙이의 후손 성씨이기 때문이다.

石川朝臣; 孝元天皇皇子 彦太忍信命之後也(左京皇別)로 후쯔[太]=후쯔[經津]로 구수대왕의 후손이다. 그런데 성씨록에는 석천과 동조라고 된 성씨들 모두가 무내의 후손으로 나와 석천도 무내의 후손인 것이다.
田口朝臣; 石川朝臣同祖 武內宿이大臣之後也(左京皇別)
紀朝臣; 石川朝臣同祖 建內宿이男 紀角宿이之後也(左京皇別)로 建內=武內이며 기조신의 조로 되어 있는 여기 기각숙이가 서기 응신기 3년 시세조에 (狗原에서) 진사왕을 죽이고 아화(=아신)를 왕으로 세우는 아신왕의 사촌인 것이다.
林朝臣; 石川朝臣同祖 武內宿이之後也(左京皇別)



【가야의 대화왕조(서기 390년∼479년)】

서기 390년 성립된 대화왕조는 응신을 이어 그 이복동생 진언가계의 왕 3대를 거쳐 서기 479년 동성대왕이 즉위할 때까지 정확히 90년간 존속하게 된다. * 필자의 글 "일본 고대 대화왕조는 가야왕조", "대화왕조=가야왕조이고 왜=가야라는 응신천황의 고백", "가야인이 개척한 구주의 신라 [천일창설화]" 참조

〔백제 내부사정〕

이 기간 동안의 백제는 열도출신인 무내숙이의 후손 비유왕이 서기 427년에 쿠데타로 구이신왕을 열도로 축출하고 왕이 되어 2대를 유지하고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전사하자 다시 열도출신인 아신왕의 후손 문주왕이 왕위에 올라 역시 2대 5년을 유지하다가 삼근왕 때인 서기 479년에 열도출신인 가야계 동성대왕에게 왕권이 넘어가게 된 것이다. * 필자의 글 "백제 구이신왕의 열도망명", "백제 비유왕은 열도출신", "백제 문주왕도 열도출신" 참조

【동성대왕의 대통합왕국 수립(서기 479년∼501년)】

이후 동성대왕부터는 열도도 백제의 후국으로 편입되고 백제는 대륙 두 백제군, 백제본국, 가야, 열도를 통합한 대왕국을 이루어 서기 660년에 망할 때까지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대륙 두 백제군의 소멸시기는 명확한 기록을 찾기 어려운데 당나라 때 폐기된 듯하다. * 필자의 글 "백제 동성대왕 왕권장악 스토리", "가야왕실의 마지막 꽃 백제 동성대왕", "일본서기상의 동성대왕 시호분석", "서동설화의 실사적인 해석" 참조

〔아스까[飛鳥]시대의 개막〕

이렇게 대통합왕국을 이룬 절세의 영걸 동성대왕을, 아신왕의 직계손으로서 열도출신인 무령왕이 암살하고 백제왕위에 오름으로써 초고대왕과 구수대왕 이래로 백제의 숙원이었던 열도정복이 이루어진 것이고 이것을 신생일본의 백제계왕실 기준으로 "아침이 밝아 힘차게 비상하는 새"라는 뜻으로 지은 말이 아스까[飛鳥]인 것이다. 이 이후 열도는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할 때까지 백제의 후국(侯國)으로서 동조(東朝)로 불렸고 동성대왕의 아들들과 아신왕의 후손들이 후왕(侯王/內藏)으로 부임한 기록들이 동성대왕을 분식한 무열기부터 군데군데 나온다. * 필자의 글 "동성대왕의 왕권장악 스토리", "가야왕실의 마지막 꽃 백제 동성대왕", "무령왕 탄생설화의 실사적인 해석" 참조


다시 간단히 요약하면 열도를 두고 가야와 백제가 패권쟁탈전을 벌인 것은

1. 서기 340년대부터 360년대 초반까지 가야가 열도를 개척하고

2. 서기 364년부터 389년까지 약 30년간 초고대왕부터 진사왕 때까지 백제가 가야본토와 가야가 개척한 열도까지 차지하려고 전쟁을 벌이고 침류왕과 진사왕의 내분을 틈타 가야왕자 응신(=천일창)이 아신을 도와주고 독립을 얻게 되어

3. 서기 390년부터 479년까지 90년간 열도에 응신이 세운 가야계 대화왕조가 있었고

4. 서기 479년부터 501년까지 대화왕조출신 가야계 동성대왕이 역으로 백제까지도 차지함으로써 대통합왕국을 이루고

5. 501년에 부여씨 무령왕이 동성대왕을 암살하고 백제왕이 됨으로써 비로소 열도는 명실 공히 백제의 후국이 되어 아스까[飛鳥]시대가 열리고 서기 660년 백제가 망할 때까지 동조(東朝)라고 불리기도 했던 것이다.

6. 백제가 망한 후에는 열도에서 약 30년에 걸쳐 백제계와 가야계의 패권다툼이 다시 일어나고 최후로 패권을 잡은 측이 백제 초고대왕의 장손자였던 무내숙이계로 분석되고 있다. 이 인물이 지통 다음의 문무천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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