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는 길
유병덕
2015harrison@naver.com
입춘이 지나니 봄빛이 거리를 활보한다. 햇살이 거실로 들어와 둥지를 틀었다. 따뜻한 봄기운이 온 방을 휘저어 마음이 심란하다. 쫓기듯 집을 나왔다. 철모르는 삭풍이 수런거리며 겨울로 돌아갈 것처럼 하지만, 멀리서 달려오는 봄바람에 이내 꼬리를 내린다. 오랜만에 차를 세워놓고 자전거를 타고 농장에 가볼 요량이다.
겨우내 편안한 승용차만 타고 농장을 다녔다. 날씨가 추워서 찬바람 맞는 게 싫어서이다. 차는 때가되면 기름을 넣고 엔진 오일을 갈며 보듬었다. 누가 와 다칠세라 블랙박스를 설치하여 감시까지 시켰다. 그러나 자전거는 삭풍이 몰아치는 팔풍받이에 쇠사슬로 꽁꽁 붙들어 매 놓았다. 주인이 겨울나는 동안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기운이 없는 패잔병처럼 자전거는 누워서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자전거는 내게 특별한 존재이다. 학창시절부터 내 삶의 궤적과 함께했다. 이십 리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니느라 다리가 아팠다. 아버지께 자전거를 사달라고 졸랐지만, 돌아온 답은 한 마디뿐이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가난한 살림살이를 뻔히 알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다. 지금에 와서 이실직고하지만, 자전거 갖고 싶은 마음에 부모님 몰래 사방사업을 따라다니며 돈을 모았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산 것이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흥분했다. 기쁨에 흠뻑 젖어 몸 구석구석의 세포들이 제각기 일어나 춤추었다. 그 뒤로 자전거 없이 못살 것 같았다. 학교 다녀와서 자전거를 닦고 기름 치며, 눈비를 맞을까 봐 외양간 한 귀퉁이에 잘 모셨다. 언제부터인가 승용차를 타면서 편안함에 취해버렸다. 애지중지하던 자전거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었다. 어쩌다 필요해져야 그를 찾는다.
그러다 보니 자전거 몰골이 말이 아니다. 오래된 탓도 있지만, 무관심이 더 크다. 여기저기 녹슬고 부서지고 하여 초라하기 그지없다. 지인은 그를 버리고 새로 사라고 권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지난날 핍진의 세월을 고스란히 함께한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통학시키고 동호인과의 만남을 주선하며 승용차가 가지 못하는 길을 동행했다. 봄날 천변 길을 따라가며 물오리와 놀고 가을날 갈대밭 사잇길을 걸으며 바람과 속삭이곤 했다. 언젠가 달려가다가 하수구에 처박혀서 병원 신세를 진 추억도 있다.
요즘은 승용차 유혹에 그를 만나지 못했다. 살며시 다가가 자전거 앞바퀴를 만져보았다. 바람이 쭉 빠졌다. 뒷바퀴도 매한가지다. 어두운 밤길을 밝히는 전구가 깨어지고 뒤를 바라보는 후사경이 사라져버렸다. 그를 쇠사슬로 묶어놓아 꼼짝없이 당한 것이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는지 난감하다. 급한 마음에 승용차로 농장에 갈까 하는 생각이 들어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뒤통수가 뜨끈하다. ‘이제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다.’라며 그가 선언하는 것 같다. 환청인지 모른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래 세월을 이어온 인연 때문이다. 자전거를 수리하여 농장에 타고 갈 심산으로 자전거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묶어놓은 쇠사슬이 말썽이다. 이기적인 마음에 단단히 묶어놓아 풀기가 쉽지 않다. 자물쇠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한나절이나 실랑이했다. 결국 풀지 못한 채 자전거포로 끌고 갔다. 주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오래된 자물쇠는 초기화가 곤란하다며 난감해 한다. 그 주인에게 읍소하여 어렵사리 고쳤다. 하루해가 사위어간다.
자전거의 인연이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와 마주하니 지인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돈이 없어 학업을 포기하려 할 때 등록금을 대준 선생님, 젊은 날 진로를 잃고 방황할 때 보약 같은 말로 응원해주던 친구, 직장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 밤을 새워가며 내 일처럼 도와주던 동료 등, 지인들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내가 살아오면서 조금 더 가까이 그들과 교감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사람의 인연을 끊을 수 있을까. 자전거와 만남이 이럴진대 인간의 만남은 더할 것 같다.모든 만남은 이별을 예비한다. 회자정리라는 말이 있듯 누구와의 만남은 이별이 필연이다. 인간의 삶은 만남과 헤어짐에 연속으로 우리는 이것을 인연이라고 부른다. 카뮈는 삶의 부조리함을 ‘죽음의 무의미성’에서 찾았다. 가장 완벽한 헤어짐은 죽음이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인연이 무기력해진다. 이 비루한 일상적인 삶의 반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인지 모른다. 내가 존재하며 지인과의 인연을 끊을 수 없다.
그런데 나 자신이 걱정스럽다. 나를 감 잡을 수 없을 만큼 내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원래 인간이란 그런 것인지 모른다. 고단한 삶 속에서 초심을 잃지 말자며 하루하루를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히 쌓아왔는데 어느새 승용차처럼 편안하고 편리한 현실에 저당 잡힌 듯하다. 편안함과 편리함의 저당을 풀어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농장 가는 길로 들어서니 이름 모를 꽃들이 손을 내밀어 환호한다. 농장의 일은 어제와 비교하여 오늘이 다를 바 없다. 전기 스위치를 누르고 스프링클러로 농작물에 물을 주는 일이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시나브로 쌓이면 모습이 달라진다. 십여 년 전 내 모습은 오늘의 내가 아니듯 오늘의 나는 십여 년 뒤의 내가 아닐 것이다. 삶은 순간순간이 단절되는 게 아니라 영원히 이어진다.
봄바람이 분분하다. 저녁노을을 밟으며 수많은 이가 천변을 산책한다. 붉게 물든 노을과 새털구름 사이로 지인들이 내게 손짓하는 것 같다. 겨울날 따뜻한 목로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던 그들이 그립다.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코로나19 역병을 핑계 댈 일이 아니다. 사부작사부작 자전거를 타고 가서 안부를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