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낙이 부르는 노래 ***
<근로자로 한국에 간 남편과 아들을 기다리는 아낙의 기도>
글-문 기 복
아침나절 새들이 머리 위로 돌고 있습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도
새들은 청아한 목청이 얼어붙지도 않는지
능청스럽게 노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단정히 델을 차려입고
하늘로, 땅으로,향해 물을 뿌리는
뿌연 젖빛같은 반백의 머리이지만
발갛게 익은 볼이 너무나 고운 한 아낙이 있습니다.
무슨 소원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근로자로 한국에 나간 남편과 아들이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혹시나 차강사르와 함께 오지 않을 까
설레는 마음으로
깊숙이 꾸겨 넣어둔 그리움을 다시 풀어
아늑한 하늘 끝에 날려 보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제도 똑같이 정성을 다해 빌었는데
하루가 여위어 바람처럼 가도
아무도 노을빛을 멈추고
기적처럼 성큼 다가오지 않더라고 했습니다.
말을 타고 늘 하던 버릇처럼 앞동산에 올라
어워를 세 바퀴 돌고
그래도 아쉬워 땅으로 내려
돌멩이를 주워 얹으며 또다시 돌아보았지만
여전히 차가운 눈바람만 무성하여
휑한 시선으로 이어진 능선을 바라봅니다.
한참 한숨을 고르다가
어릴 적에 할머니가 해 주셨다는
푸른 군대에서 용맹을 떨친
조상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전쟁터에서 여기저기 뿔뿔이 헤쳐 살았던 가족들은
간혹 전선에서 오는 전령에게
안부를 확인하는 것으로 일생을 다해
모두가 초원에서 바람이 되었다는 전설입니다.
철부지 아이가 아홉 살 되던 해
아버지의 대견스러워 하는 눈빛이 좋아서
앞만 가린 가죽 옷을 겹쳐 입은 채로
양털로 두껍게 만든 방패를 앞세우고
물기어린 어미의 얼굴에
미소로 비비고는 말 위에 올라
아버지를 따라 전선으로 향하던
팔백년 전의 소년 병사처럼
남편과 맏이는 잘 살자고 행복하자고 웃으며
앞만 보고
그렇게 무지개가 피어나는 나라로 떠났답니다.
풀꽃이 피었다가 지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품안에 있던 남은 자식들도
하나하나씩 떨어져 가고
남편과 맏이가 떠나던 그날에도 얼굴 부끄러워
마차에 흔들거리며 눈물 보이기 싫어
파란 하늘에
없는 구름 찾는 시늉만 하다가
어린 것들을 품에 안고
길가에 서서 입을 꼭 다물고 배웅하던 아낙이
이제는 기다림에 익숙해진
초원의 망부석이 되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먼 길이라 함께 가지 않았어도
눈 덮인 산하를 보며
늘 고향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을 그들이
떠나던 모습 그대로 넘어올 그 길을 따라
작은 돌 하나라도 세월을 지우듯
말끔히 치우고 또 쓸어보았지만
지평선 너머 하늘은 푸르디푸르고
아낙은 푸른 늑대를 기다리며
설산을 하릴없이 거니는 사슴이 되고 말았습니다.
간간이 남편의 흥얼거리던 노랫소리가
바람결에 들리는 것 같아
그리움으로 긴 겨울밤을 하얗게 지새우다가
아무도 범하지 않은 새날 첫 여명의 하늘을 이고
피붙이처럼 정이 듬뿍 들어버린 가축들을 앞세워
그들이 돌아올 길을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가 보려고
길이 아닌 길로 화살을 날리듯 말을 달려봅니다.
눈에 보이던 모든 것을 감추면서 깔아 논
희디흰 비단길을 찢어져라 난폭하게 채찍을 날리며
살아있는 힘을 다해 목이 터져라
정이 묻은 이름을 울며 부르짖어 보지만
빈 땅에 메아리만 온통 강물 되어
무심하게 흐릅니다.
간밤에 토오너를 통해 들어온 달빛이
차가운 듯 따스한 눈길로
차강사르가 오는 길목, 지평선 너머에는
이미 혹독하던 겨울자락을 거두며
봄이 오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약속은 없었지만
어려서부터 부딪히며 살아
둥글둥글 몸 내음이 푹 배인 띠를 두르고
외롭게 서 있는 가족들의 우주, 겔이 있는 곳으로
흩어져 있어도 서로의 마음을 다 읽고 있는
아름다운 내 사람, 내 혈육들이
사방에서 환하게 웃으며 모여 올 텐데
전쟁터에서 함께 나이 들어버린 그 얼굴들이
연기처럼 아득해지다가 다시 사무쳐
그동안 말라빠져 까만 재가 되고만
소박한 사랑을 다시 피우려고
초원에 널려진 불씨를 줍고 있습니다.
아락을 내려놓고
마음 깊은 곳에서 뽑아내는 사랑의 노래를 소중히 담습니다.
옷 속을 파고드는 태곳적 바람이
영혼의 푸른 믿음을 휘감아 기도로 담습니다.
그리운 사람이 있어
선혈이 낭자한 전선에도
무지개가 피고
들꽃도 흩어져 자유로웠던
계절을 추억하며 봄을 기다리는데
넘치는 정이 넋으로, 한숨으로 뭉쳐
어느덧 구름 되어 흘려가고 있어
자꾸만 남쪽으로 눈길을 돌립니다.
낯익은 새들은 아침부터 모여들어
첫 만남의 햇살을 향해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얼어있는 하늘을 깨는 노래를
주문 외듯 끊임없이 불러대고
무표정한 가축들은 털복숭이 얼굴로
눈 속을 헤치고 말라버린 풀을 찾는 적막한 초원에서
아낙은 이런저런 생각이 많습니다.
오늘밤에도
세상 불을 다 끄고
꽁꽁 얼어붙은 깊은 강물에서
소리 죽여 흐르는 무수한 사연들을 캐내지만
산과 바다건너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그 길을
단숨에 오고가는
그 꿈을 꿀 수 없을 것 같아
문득 세상의 모든 생명을 풍성케 하신다는
하나님을 떠올립니다.
딸에게 이끌려 예배당에 갔을 때
기도하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신다는
사랑이 많으신 그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아낙은 옷깃을 여미고
그분이 계시는 곳을 향하여
어설프지만 애절한 기도를 시작합니다.
기도하면 한 몸이 된다는 그 말씀을 꼭 안고
강건케 하시는 능력의 근원되시는 그 분에게
새해에는 덫과 같이 올 모든 일을 내어맡기오니
눈물을 닦아주실 그 사랑을 저에게 주옵소서.
이제는 그리움의 눈물이 아니라
날마다 만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하소서.
몽골 용어 해설
델 : 몽골인들의 전통 복장
차강사르 : 몽골의 가장 큰 명절인 설날이다. 봄이 시작되는 음력 1월 1일을 기념하는 행사이다. 차강이란 몽골어로 흰색이란 뜻이며 사르는 달을 의미한다.
어워 : 그동안 ‘오보’로 알려졌고 한자음으로 악박(顎博), 오포(敖包)라고 문헌에 전해지는 신앙물이다. 한국의 성황당(城隍堂)과는 신격이나 신앙 형태가 다르며 서낭당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어워는 돌을 쌓아 올린 일종의 제단(祭壇)이나 적석탑(積石塔)이라 할 수 있지만, 탑이라기보다는 돌무더기라 함이 옳을 것이다.
토오노 : 겔 지붕에 나있는 천창
겔 : 몽골인들이 사는 이동식 천막 집
아락 : 연료로 쓸 쇠똥, 말똥을 집어 담는 망태. 보통 버드나무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