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김정일의 경호원이였다 제3부]
제3장 벌레보다 못하게 취급받는 수인의 목숨
이영국
1. 죽을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
1995년 7월에 3중대는 여성 소대로 되고, 3중대에 있던 사람 중 일부를 2중대에 편입시키면서 대다수를 1중대 쪽으로 이동하였다. 3중대 밭쪽에 새로운 금광을 개발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범죄 행위를 한 당사자만 남기고 정치범의 가족들은 금광 개발하는데로 데리고 가면서 본래의 1중대(가족세대)를 이동시켰다.
7월초쯤으로 기억하는데, 어느 날 아침 온 구역이 떠들썩하게 러시아제10톤 트럭 15대가 동시에 들어와서 1중대 가족세대의 짐을 2시간 내에 실어 이동하였다. 선생들은 가족세대들이 밖으로 나간다고 거짓선전을 하였지만 실제로 새로운 금광을 개발하는 곳으로 간 것이다. 이것은 선생들의 산나물 채취와 송이버섯을 따는 죄인들이 대숙구역을 넘어 새로 개발하는 구역으로 들어갔다는 1중대 가족세대를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
1중대와 3중대에 있던 가족세대 중 일본에서 귀국하여 들어온 재일동포 가족세대 30가구가 병과 영양실조, 사형으로 죽었고 나머지 50세대가 대이동하여 금광개발지로 갔다. 가족세대가 살던 돼지우리 같은 나무판자 집이 하루사이에 다 철수되고 내가 일하던 1중대는 산으로 올라가 일주일 동안 벌채를 해야했다. 그때 외국에서 국제 인권단체가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강기슭에 병영을 짓게 하고 울타리와 전기철조망 속에 1중대를 밀어넣었다.
나는 1중대에 가서는 부업 소대장을 하지 않고 새로 편성된 농산 1소대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소대에 맡겨진 분량이 옥수수 밭 100정보 정도였는데 관리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가족세대가 나가고 인권이 적은 데다가 영양실조자가 중대에 60%에 이르니 일할 인원수가 한참 모자랐다. 그해 신의주에서 40명 정도가 우리 구역에 들어오면서 인원문제가 풀렸다.
1중대는 그해 농사를 잘 짓지 못해 계획량의 80%를 국가에 바치고 나니 그 나머지만을 가지고 생활하기가 어려웠다. 매일 80g밖에 끼니를 에우다(못먹어서) 사람들이 많이 죽어갔다. 인도네시아 대사를 하던 김원조도 죽었다. 그는 인도네시아 참사가 한국으로 탈출한 책임을 지고 이곳에 들어왔었다. 또한 리비아 대사를 하던 김대훈이도 죽었다. 그의 아들 김대일이가 16살 때 리비아 처녀와 함께 한국 영사관에 들어가다가 잡혀 아들 교양을 잘못한 죄로 아버지와 아들이 리비아에서 직송되어 관리소에 들어온 것이다.
함경남도 낙원군당 책임비서도 제도를 비난한 죄로 들어와서 죽었다. 60년대에 북한에 온 재일교포였는데 김정일이 없는 지구는 존재하지 못한다는 말을 가지고 “김정일이가 지구를 깬다면 그것은 정신병자”라고 하여 관리소에 들어온 사람이다. 중국 심양 영사관 주재 영사였던 김철(가명, 본명 김정남)이도 홍콩 무기판매 사건이 드러나면서 관리소에 들어왔다.
그때 다 죽어가던 사람이었는데 선생들이 그에게 약가 영양음식을 먹여서 살렸다. 그는 김정일의 매부 장성택의 오른팔이었다. 장성택의 측근들이 그를 뒤에서 밀어주는 것으로 보였다. 함경남도 태권도 위원장 김종성도 이곳에 와서 죽었다. 또한 평강 평사포 사령부 외화벌이 부장인 김옥두 소장도 외화벌이 책임을 지고 들어와 죽었다.
1중대에서만 한해에 40~50명 정도가 먹지 못하여 죽었다. 나도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100명 정도 땅에 묻어 보았고, 죽은 사람들을 목격한 것은 셀 수도 없을 정도이다. 처음에는 무섭더니 6명 이상을 내 손으로 묻고 나니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 감각이 없어졌다. 죽은 사람을 나르기가 죽기보다 싫었지만 선생의 말이 법이라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이다. 그 한해에 죽기도 많이 죽었으며 죄인 모두가 언제 죽을 것인가 하고 기다리는 사람들 같았다.
2. 소를 잡아먹은 사람
1998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국가대표 농구팀 책임지도원이었던 김00라는 사람이 1중대에 배치되어 일하다가 야밤에 경비성원이 잠자는 틈을 타서 죄인 병영을 이탈하여 없어졌다. 그는 95년경 북한 땅의 식량난 때문에 농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지방인 함경북도에 배치되었는데 가정형편이 곤란해지자 먹을 것을 찾아 헤매면서 사방을 떠다니다가 중국 쪽에서 소꼬리를 사간다는 소문을 듣고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중국 장사꾼에게 소꼬리 150개를 팔아먹었다.
그러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온성보위부에 잡혀 정치범 수용소에 오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소가 국가 농업의 기본 핵심이다. 본래 외화가 부족한 데다 전쟁 준비로 인하여 연료 사정이 대단히 열악하여 기계로 논밭을 갈지 못하니 소야말로 중요한 운송수단이다. 그런 소를 잡아먹는다거나 죽이는 행동은 정치범으로 취급받는다. 남한 사람들이 볼 때는 소꼬리 잘라 낸 것이 별 죄냐고 생각할 줄 몰르겠지만 북한에서는 역적으로 취급받는다.
그는 키가 2.2m인 데다가 남보다 체구가 훨씬 커서 하루 80~130g의 식사량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죽을 각오를 하고 야밤에 식칼 하나를 가지고 병영을 탈출한 것이다. 경비병들은 30분에 한번씩 침실을 돌아다니면서 인원을 확인한다. 김00는 부업 소대에서 일하였는데 밤 12시에 경비성원들이 순찰하던 중 그자 보이지 않자 구역 분주소에 보고하였다. 온 중대가 밤잠을 자지 못하고 주변 산을 샅샅이 수색하였지만 보이지 않았다.
소 축사에도 수색이 있었는데 소 한 마리가 없어졌다. 당시는 가을이었지만 밤에는 영하로 내려갔다. 추운 데다 영양실조까지 걸린 그가 견디기 어렵기 때문에 산에서 불을 피울 것이라고 하여 불빛이 나는 곳을 찾아보았다. 아침이 되자 온 구역이 일을 하지 못하고 중대 단위로 소대별 조를 묶어 주변 산을 수색하였지만 찾지 못하였다. 일주일 간 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골짜기에서 제 발로 내려왔다. 소를 잡아 소 가죽은 이불 삼아 덮고 생고기를 뜯어먹으면서 일주일을 견디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자기 소원이 다 풀렸다며 죽이겠으면 죽이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서 족쇄를 채워 구류장에 내려가 한달 있다가 올려보냈는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이런 놈은 정치범이 아니라 경제범”이라면서 차에 실어 개천관리소에 이관시켰다.
아무튼 온몸이 영양실조로 걷기도 힘든 사람이 소를 끌고 산에 가서 잡아먹었다는 그 자체가 믿어지지 않았지만, 사실 관리소 안에서 먹는 문제를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걸 정도로 사람들이 악에 받쳐 있다. 그러니 죽을 때 죽더라도 실컷 먹고라고 죽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이고, 그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3. 사람 살릴 식량은 없어도 가축 줄 식량은 있다
정치범들은 누구나 사람이라는 인간딱지를 떼고 ‘너는 짐승이다’는 생각을 세뇌 당한다. 이것이 정치범 수용소를 설치한 김일성, 김정일의 근본 의도이다. 사람의 이성을 상실하게 하고 본능만 남은 짐승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정치범들이 죽어 가는 기본 원인은 식량을 주지 않아서이다. 1995년까지는 그래도 죄인들 일인당 160g을 주었지만 1996년부터 농사가 잘 되지 않아 안끼에 80g을 주었다.
하루 평균 14~15시간씩 개인별 도급을 주어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면 그나마 밥그릇에서 밥을 덜어내는 비극도 일어났다. 자기 밥을 빼어서 과제를 수행한 사람의 밥 위에 얹어주는 모습을 지켜보는 고통은 영양실조에 걸린 수용소 죄수들만이 알 수 있는 무어라 표현하지 못할 서글픔이다. 그것은 곧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관리소에서는 죄수들을 먹이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뼛물까지 뽑아 일하게 한다.
아무리 건장한 사람이라도 영양실조에 걸린다. 그안에 가둬 놓고 짐승처럼 주는 식량에만 매달리고 굶으면서 일주일정도 지나면 멀쩡한 사람도 순식간에 쓰러진다. 영양실조에 걸리면 힘이 없는지라 자기 몸을 움직이기 싫으므로 15일 정도 지나면 약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은 죽고, 강한 사람만이 좀더 견디어 살아남았다. 사실 수용소 안에는 짐승이 죽는 것보다 사람이 죽는 것을 더 자주 보게 되고, 짐승 시체보다 더 흔하게 굴러다니는 것이 사람시체이다.
1996년~1998년 사이에 한해 평균 300~400명이 죽었을 것이다. 죄수 인원의 절반 가량이 그때 죽었다. 죄수들은 너무도 배가 고프다보니 소금을 몰래 가지고 다니면서 능재풀, 질경이풀, 다래나무순, 도라지, 뱀, 개구리, 쥐 등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소금과 함께 닥치는 대로 먹었다. 뱀가죽과 쥐 내장까지 다 먹어치우는 데 이 모습이 너무도 예사롭게 보인다.
또한 늙은 죄수들은 힘이 없으니 소가 싼 똥에서 옥수수 알을 골라서 주어먹고는 힘이 난다고 좋아했다. 도대체 사람이 사는 모습 같지가 않았다. 죽어 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눈뜨고는 못 볼 지경이다. 초기에는 칼슘과 단백질 부족으로 이빨이 흔들거리고 빠지며 상처받은 자리가 검게 죽어간다. 점차 머리골격이 줄어들고 살이 빠지며 키까지 줄어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이 부어서 물이 차고 손과 발 부분이 부어서 물이 터지면서 나중에는 죽는다.
죽은 사람은 두 시간 내에 산에다 묻는다. 주소, 나이, 생년월일도 없이 흙으로 대충 덮어버린다. 구역 분주소에 문서가 있기 때문에 분주소 선생들만 누구의 모지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농사를 지어도 80%의 곡식은 사회로 나간다. 또한 죄수들의 먹을 식량은 모자라도 선생들이 기르는 가축들을 먹이는 옥수수는 무조건 보장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기르는 가축들은 사람보다 대우가 더 좋다. 결국 수용소의 공식은 “정치범은 살아서 사회에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을 고통속에 죽어가게 할 것인가만 생각하며 만들어진 곳 같다. 김정일이 자기 정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북한 사회를 비난하는 수많은 백성들을 정치범으로 만들어 죽이지만 언젠가는 그 대가를 천 배, 만 배로 역사 앞에 받을 것이다.
4. 심심풀이로 사람을 죽이는 악마들
수용소 주변 산 둘레에는 5m 높이의 돌 담장이 있다. 그리고도 죄인들의 도주가 우려돼 수용소를 지키는 경비병들이 기관총과 무전기를 들고 잠복과 차단, 순찰근무를 선다. 북한이 정치범 수용소 죄인들의 도주를 우려하는 것은 그 실상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해서일 것이다. 그래서 외국에서 기자나 손님들이 오면 조선인민경비대 xx 부대라고 위장 간판을 걸어 놓고 군사기지인 것처럼 속이면서 비공개 지역이라 한다.
잠복근무와 감시근무를 서는 군인들은 2~3명이 조를 지어 다니면서 수용소 구역 내에서 죄인들의 일거일동을 단속하고 감시한다. 순찰병들이 발 옆의 길을 지나가다가 느닷없이 밭에서 일하는 죄인들을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마구 때려죽이는 끔찍한 사건들이 자주 벌어진다. 여기서 군사복무를 하는 군인들은 김정일의 선전만 믿고 죄수들을 ‘계급적 원수’로 여긴다.
이곳에서 복무하는 군인들은 38도선 최전방에서 근무하는 민경(민사경찰-DMZ근무)과 같은 대우를 해주므로 군인들은 정치범들을 적으로 삼는다. 1997년 말에 군인 두 명이 일하러 나가는 죄인들의 옆을 지나가다가 김일천이라는 23살 먹은 죄인이 인사를 하면서 자기를 쳐다본다고 하여 메고 있던 총 개머리판으로 그의 머리를 마구 때려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하였다.
김일천은 당시 수용소 생활을 5년 정도 넘겨 수용소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한숨 돌리고 생활하던 찰나에 억울하고 재수 없게 맞아 죽고 오히려 죄를 뒤집어 쓴 채 땅에 묻혔다. 이러한 일이 있을 때 죽인 군인들에게는 표창장이 주어지고 죽은 죄인의 가족과 친척들은 다 역적이 되고 반역자로 몰리게 된다. 굶주림의 고통과 함께 수용소의 죄수들에게는 이렇듯 언제 누가 달려들어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정신적 고통이 늘 따라다닌다.
1998년에 있은 일이다. 구역마다 분주소가 자리잡고 있는데 내가 들어가서는 분주소장이 한번 바뀌었다. 구역 내에 새로운 소장이 온다니 죄인들의 모든 관심사였다. 죄인들은 하나같인 좋은 소장이 왔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국각보위부에서 대체 누가 내려올 것인지 궁금해하며 길옆에서 풀 뽑기와 도로 정리를 하던 6월 어느 날이었다. 죄인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풀을 뽑으면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가는데 그 중 허약한 김영남이가 제일 뒤꽁무니에서 따라왔다.
김영남은 함경북도 온성군 출신으로 22살 청년이었다. 중국에서 한국에 가려다가 잡혀왔는데 구류장 어혈로 남보다 영양실조가 심했다. 그런데 김영남의 뒤에 웬 중년 사나이가 중절모를 쓰고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군인지 몰라 인사할 생각도 못하고 호기심만 가지고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는 김영남이를 발로 차면서 “이놈 새끼 다른 놈들보다 왜 그렇게 떨어져 나가는가”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우리는 대뜸 눈치를 채고 하던 일을 계속 하였다. 김영남이는 불의에 일어난 일에 놀라서 일어났다. 그 중년 사나이는 멀리서부터 김영남이를 목표로 삼았는지 그가 일어서는 것을 보고 자기에게 달려드는 것으로 알고 나무 지팡이로 그를 마구 때렸다. 김영남이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데 그 중년 사나이는 급기야 길옆의 돌을 주워 머리를 내리쳤다. 급소를 맞았는지 피를 도로에 흠뻑 흘리고 쓰러졌다.
우리는 멍하니 공포에 떨면서 자기 일을 하는데 담당 선생인 김형섭이가 나타나서 그 중년 사나이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직책이 높은 사람인 줄로 았았다. 김형섭이가 인사를 올리고 죄수들에게 “야 이 새끼들아 저 새끼를 치우라”고 소리를 치기에 달려가 김영남이를 치웠다. 그때 벌써 김영남의 목은 굳어 있었다.
우리가 놀라자 담당 선생은 두 시간 내에 공동묘지에 가서 파묻고 오라고 하고는 그 중년 사나이와 함께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후 구역 선전실에서 죄수들을 모이라고 하여 갔다. 앞에는 그 중년 사나이가 서 있었다. 그는 “너희들이 일을 잘못하고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다죽어야 한다”며 자기가 분주소장이라고 했다.
그때서야 나는 그가 새로 온 분주소장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날 이후 구역에는 먹장구름이 몰려왔다. 영양이 부족해 일을 잘못하는 사람들을 구류장에 보냈다가 다시 올라오게 했다. 돌아와서는 대개 보름 안에 저절로 죽어갔다. 아파서 누운 사람들도 담가(들것)에 싣고 밭에 데리고 나가서 일을 시키는 새로운 악마가 탄생하였다.
5. 도주분자의 최후
36살인 0형석이는 함경북도 온성 출신이다. 그는 한국 방송을 듣다 보위부에 잡혀서 구류장에서 1년 2개월을 살다가 폐인이 되어 1996년에 수용소에 들어왔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시기 국군포로였는데 온성 탄광에서 일하다가 돌아가셨다. 그의 아버지는 유언을 통해서야 고향이 “한국”이라는 사실을 아들에게 일러주었는데, 그때부터 그는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 방송을 들었고 한국에 가는 꿈을 키우다 끝내 수용소에 잡혀왔다. 형석은 구류장에 오래 동안 있다보니 참을성이 부족하여 식당에서 밥을 훔쳐먹는 등 일을 자주 저질렀다. 당연히 담당 선생의 주시를 받게 되었다. 그는 오직 먹는 데에만 집착하다가 담당 선생이 기르는 닭을 다섯 마리 훔쳐 강변의 돌 사이에 감추어놓고 두 마리를 생식으로 먹었다.
닭이 없어지자 온 중대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선생이 독이 올라서 죄수들을 잠도 제대로 못 자게 하고 자그마한 일에도 매를 때렸다. 어느 날 형석은 자기와 제일 가까이 지내던 온성에서 같이 온 사람에게 “내가 식량과 소금과 닭고리를 다 준비해 놓았으니 도망치지 않겠는가”하면서 “이틀이면 구역을 벗어날 수 있다”고 제의했다.
이 말 한마디 때문에 그는 도주분자로 몰렸다. 같이 온 사람이 선생에게 고자질한 것이다. 식사를 하고 있던 형석을 우리 중대 선생이 2중대 선생과 같이 와서 구류장에 싣고 갔다. 다음날에는 강기슭을 뒤져 형석이 감추어 놓은 닭 3마리를 찾아 가지고 와서 중대 죄수들을 모아 놓고 이제부터 두고 보라며 자기가 형석을 총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두 달 후 온 구역에 사형장으로 모이라고 하여 오후 3시에 집합하였다. 구역 전체 1000여 명이 넘는 인원을 앉혀놓았다. 사방에는 경비대가 기관총을 걸어놓고 전투 준비를 한 상태였는데 참으로 으스스하였다. 이어 지프차가 나타나더니 입에 자갈을 물린 형석을 끌어내렸다. 온몸을 밧줄로 감고 교수대에 묶어 놓고 총살 준비를 했다.
담당 선생 김형섭이 앞으로 나서서 “(형석은)계급적으로 나쁜 토대에서 태어나 반혁명행위를 한 탓에 통제구역에 왔는데, 자기 죄를 인정하지 못하고 또다시 역적행위를 하기 위해 도주하려 했다. 식량과 고기, 성냥, 소금을 준비하고 다른죄수와 모의하다가 잡혔으니 반혁명분자로 사형한다”고 했다. 교수대에 매달려 있던 형석은 머리를 흔들면서 거짓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때 군이 5명이 AK소총을 들고 나왔다. 화력장교가 권총을 들고 “반혁명분자를 향하여 점발로 쏴”라는 구령을 외치자 총소리가 울렸다. 머리가 터지고 뇌가 쏟아져 나오고 가슴과 뼈가 다 터지는 것이 눈앞에서 보였다. 형체를 알 수도 없게 된 시체를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갔다. 정치범들은 총살하는 것을 하도 많이 보아서 놀라지도 않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작업 현장으로 향했다.
6. 쇠줄로 다리를 매어 트럭으로 끌고 오다
수용소 안에서의 처벌방법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노동에 성실히 참가하지 않을 때와 사회제도를 비난하는 발언을 했을 때, 도주계획을 하였을 때에는 용평구역에 있는 구류장에 무조건 끌고 간다. 그곳에서 목숨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하루 한끼 130g의 옥수수를 먹이고는 지독한 고문을 들이댄다.
그곳에 가면 살아 나온다 해도 살았다고 볼 수가 없다. 숨이 겨우 붙어 기어 나오면 한 달쯤 후에 끌고 나와 총살한다. 송장같이 말도 못하는 식물인간 상태의 사람을 질질 끌고 나와 총질을 해댄다. 이영철이라는 현역 군인출신의 죄수가 있었다. 그는 구역 안에서 싸움질을 하여 용평구류장에 갔는데 웬일인지 일주일 만에 올라왔다. 그러다 1998년 7월 중순경 너무 견디기 어려웠는지 죽을 각오를 하고 탈출하였다.
그는 작업하던 도중 소대장에게 화장실에 갔다오겠다고 했는데 1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2소대는 소대장이 이철웅이었는데, 소대 일을 중지하고 전원이 소리를 치며 찾아도 오지 않았다. 당황한 소대장이 담당 선생에게 보고하자 채 30분도 되지 않아 군인들이 완전무장에 무전기를 휴대하고 트럭 한 대에 실려왔다. 그 부대 역량이 대숙구역에 올라와서 원래 있더 부대와 협상하여 경계근무를 수행했다.
3시간쯤 후에 이영철이는 끌려왔다. 수용소 구역에서 사회로 나가는 길에 잠복 근무를 서던 군인의 총에 다리를 맞고 쓰러진 것이다. 군인들은 쇠줄로 이영철의 발을 묶고 자기들이 타고 온 트럭견인기에 매달았다. 그 차를 그대로 몰아 이영철이를 땅바락에 질질 끌고 수용소로 돌아왔다. 온 구역이 하던 일을 중단하고 길 양쪽 4km 구간에 죄수들이 쭉 늘어섰다.
이영철이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경비대 군인들의 트럭에 질질 끌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역에서 처음 보는 일이라 누구도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영철의 등이 다 벗겨지고 머리가죽까지 다 벗겨졌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도로에서 철수하여 사형장에 모이라는 지시를 받았다. 사형까지 하는 지는 모르고 사형장에 가보니 선생들이 이영철을 교수대에 밧줄로 매어놓았다.
사실 이영철은 등가족과 머리가죽이 다 벗겨진 상태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그 시체에다 대고 다시 총살을 집행했다. 사형이 끝나고 이영철이가 앞으로 고꾸라지자 머리가죽과 등가죽이 흔들거렸다. 분주소장은 사형장에 모인 죄수들에게 피를 손으로 만져보라고 명령했다. 그는 “너희 놈 새끼들도 도주하며 이렇게 개보다 못하게 죽여버리겠다”고 호통을 쳤다.
이때 현진용이라는 사람이 달려나가 “사람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이는가? 트럭으로 끌고 와서 다 죽은 사람을 이러헥 하여야 합니까?”라고 마이크를 쥐고 호소했다. 그런 말을 하면 죽는다는 걸 뻔히 알겠지만 너무도 잔인한 상황 앞에 스스로 이성을 상실해 버린 듯 했다. 경비대 군인들이 총 개머리판으로 마구 때리고 쓰러진 현진용을 트럭에 싣고 내려갔다. 그때 우리는 죽은 사람의 피를 손으로 문지르고 다시 작업장으로 올라갔다. 아무튼 그 유골이라도 가족에게 돌려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7. 남녀를 옷 벗기고 몽둥이로
관리소 생활을 하다보면 온 중대가 옷을 벗고 매 맞을 대가 한 두번이 아니다. 내가 처음 당한 것은 제 기일 내에 옥수수 단지를 제대로 심지 못하여 우리 소대가 다 매을 맞을 때였다. 선생이 “엎드려”하면 여자든 누구든 상관이 없다. 웃옷을 벗고 엎드리면 경비원이 가져온 몽둥이로 매사람씩 돌아가면서 소를 때리는 식으로 물푸레나무 10대가 끊어져서 없어질 때까지 때린다.
소리를 지르면 다른 사람에 비하여 몇 대를 더 맞는다. 좀 지칠만하면 선생은 상욕을 하면서 오늘은 이만 한다고 소리를 지르고 다시 한번 걸려들면 구류장에 가서 썩으라고 호통을 친다. 선생의 회초리에 맞고 나면 등이 쓰라려 반듯이 눕지를 못하고 옆으로 겨우 누워 쪽잠을 잔다. 한번은 3중대에서 여자들과 생활할 때 남녀 10명이 자기 작업과제를 수행하지 못했다고 하여 옷을 벗고 엎드렸다.
여자들은 적을 다 드러내놓고 남자들과 같이 엎드렸다. 선생이 나무로 등과 온몸을 닥치는 대로 때렸다. 여자들은 온몸을 심하게 비틀면서 입에서는 고통 어린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면 선생은 야릇한 웃음을 짓고 회초리가 다 없어질 때까지 때리는데, 여자들이 신음소리를 내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여자들이 고통스러원하는 모습을 즐기는 그 악마의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감이란 당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등만 맞는 것이 아니다. 바지를 걷어올리고 앞다리 뼈와 장딴지를 맞으면 누구라도 아파서 팔짝팔짝 뛰는데 참으로 견디기 힘들다. 수용소 죄수들은 다 맨발이다. 맨발을 나무로 후려치면 너무도 쓰리고 아파서 도망치는 사람까지 있다. 대부분은 맞다가 그 자리에 쓰러진다.
선생들은 이렇게 사람을 짐승처럼 대하며 맞아죽는다 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악착스럽게 때리면서 그것을 쾌락으로 삼는다. 나는 그들이 천성적으로 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완전히 통제된 수령독재 사회에서 자신들도 그렇게 배워왔고, 그것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지도 못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수령독재의 한 부속품일 뿐이다.
하지만 지난날을 생각하다 보면 그들이 비록 시키는 대로 했던 것 뿐이라 하더라도 언제인가는 자기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받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