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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숨어있기 좋은 방◑ 원문보기 글쓴이: 잡초
아슬아슬하게 왕위에 오르다
광해군(1575~1641, 재위 1608~23) 부부의 무덤은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낮은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 왕릉답지 않게 규모가 초라하기 짝이 없고 비석에는 총탄 자국도 군데군데 있어서 보는 이들을 서글프게 한다. 그 언저리에 있는 단종의 왕비 송씨의 화려한 사릉과 너무나 대조가 된다. 그 배경을 더듬어 보면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광해군의 묘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비운의 임금을 상징하는 듯 초라한 모습이다.
ⓒ 주니어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역사인물을 오늘날의 가치기준으로 재평가하는 일은 한 인물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 본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고정관념에 빠지기 쉽다. 그것은 당시의 가치기준 때문이기도 하고 이념의 조작에서 나오는 경우도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인물이나 역사적 사실을 놓고 그 실상과는 다르게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 글에서 역사인물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그 실상에 접근하고 새로운 역사경험을 음미하기 위해 광해군을 조명해 보려고 한다.
조선조에서는 폭군으로 흔히 연산군과 광해군을 꼽는다. 분명 연산군은 폭군의 범주에 든다. 이에 비해 광해군은 그 속사정이 사뭇 다르다는 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폐위시킬 때의 죄목은, 첫째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이고 자신을 유폐시켰다는 것이고, 둘째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정치를 혼탁하게 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 번째 이유로 다음 사실을 들었다.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긴 지 200여 년, 의리로는 곧 군신이요, 은혜로는 부자와 같도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다시 세워 준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도다. 선왕(선조)이 어위(御位)하신 지 40년 동안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평생 등을 서쪽으로 대고(중국이 있는 방향) 앉으신 적이 없었다. 광해군은 배은망덕하여 천명의 두려움을 잊고 음흉하게 두 마음을 품어 오랑캐에게 정성을 바쳐 기미년 오랑캐를 칠 전역(戰役, 1619년의 사르후 전투를 말함)에 참가하면서 장수에게 “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일렀도다. 그리하여 끝내 온 군사가 오랑캐에게 투항하여 사해에 떠돌게 했도다. ······ 우리 삼한 예의의 나라로 하여금 오랑캐와 금수의 지경으로 돌아가게 했으니 통탄해 본들 어찌 말을 다하겠는가?
- 《광해군일기》 권187, 15년 3월조
바로 이 세 번째 문제가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주된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중국에 대해 사대를 하지 않고 청나라에 곁붙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광해군을 오늘날 재평가하는 초점이 된다. 다시 말해서 그가 자주 · 실리 외교를 추구하다가 사대파에 밀려났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어떻게 해서 왕위에 올랐을까?
원래 선조는 정비 소생의 아들이 없었고 후궁 출신인 공빈 김씨에게서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다. 따라서 장자인 임해군이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그는 무식하고 난폭한 면이 있었다. 선조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후계문제를 놓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다른 후궁에게서 난 많은 왕자들이 각기 왕위를 넘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인빈 김씨는 자신의 소생인 어린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시키려는 공작을 끊임없이 벌이고 있었다. 조정과 민간의 인심은 영민한 광해군에게 쏠리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세 살 때에 죽은 처지여서 스스로 처신에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북쪽으로 쫓겨 가는 몸이 되었다. 후사를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양에서는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것으로 일단 세자책봉 문제가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광해군은 세자로서 분조(分朝, 임시로 세자에게 임금의 일을 대행하게 하는 제도)를 맡아 난중에 동분서주하며 그 소임을 다했고, 조정과 민간의 명망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광해군의 왕위계승권은 요지부동할 것 같았고 그 자신 또한 현군의 자질을 키워 나갔다.
이런 마당에 1606년(선조 39) 중전인 인목왕후에게서 뒤늦게 왕자가 태어났다. 불행의 씨앗은 바로 여기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선조는 정비에게서 새로 태어난 영창대군을 무척 총애했다.
어느 날은 영창대군을 무릎에 앉히고 대나무 그림을 그려 여러 신하들에게 보여 주기도 했다. 그 대나무 그림은 곁가지가 굵게 뻗어 있고 줄기는 아주 가늘게 그려져 있었다. 일부 눈치 빠른 벼슬아치들은 선조의 심중을 짚어 내느라 온 머리를 짜냈다.
1608년, 선조는 병이 위독하자 대신들의 주장에 따라 광해군에게 선위(禪位, 현재의 임금이 살아 있을 때 왕위를 물려주는 일)의 교서를 내렸다. 시의에 적절한 조치였다.
그리고 이 일을 전후로 선조는 조정의 명망 있는 일곱 신하들을 불러들여 이른바 “영창대군의 일을 잘 부탁한다”는 유교(遺敎)를 내렸다. 이에 눈치 빠른 영의정 유영경은 광해군에게서 소외를 받고 있는 처지에서 선조의 대나무 그림의 곁가지는 광해군, 줄기는 영창대군을 암시한 것으로 생각해서, 또 유교의 뜻을 헤아려 선위의 교서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 실로 묘한 양상이 벌어진 것이다. 병석에 누워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왕을 싸고 음모정치가 조정을 휘몰아 가고 있었다.
이 일이 광해군의 왕위계승을 위해 오랫동안 광해군을 보호하고 감싸던 정인홍 · 이이첨 등에 의해 누설되면서 또 한번 조정에 큰 논란이 일게 되었다.
역사에서는 유영경 일파를 소북파, 정인홍 일파를 대북파라 한다. 정인홍은 선조에게 이 일을 알리고 앞으로의 분란을 막기 위해 유영경의 처사를 엄히 다스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 음모를 막으려 하다가 결말을 완전히 짓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 인목대비가 관례에 따라 언문 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하게 했다.
형제에게 형벌을 내리다
참으로 위태로운 형편이었다. 적어도 광해군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넘겼다. 어렵사리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처음부터 선조 초년에 태동한 당인(黨人)들의 횡포에 진절머리를 쳤다. 자기네들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조정과 나라의 일을 제멋대로 농락하는 당파들을 광해군은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이라고 생각했다.
유영경이 정계에서 쫓겨난 것은 당연했고, 그에게 죽음을 내린 것도 무리한 조처가 아니었다. 한편 광해군을 감싸던 정인홍 · 이이첨 등 대북파가 득세한 것도 어느 정도 자연스런 정치과정이었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조정의 기풍을 새롭게 하려고 했다. 당파를 따지지 않고 인재를 고루 쓰고 임진왜란으로 파탄이 난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며, 난중에 불타 버린 경복궁 등 궁궐을 새로 짓거나 손보아서 왕실의 위엄을 살리고, 조세를 고르게 하여 민생을 구제하려고 했다(대동법 실시).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한때 원병을 보내겠다고까지 한 누르하치가 무서운 기세로 세력을 뻗고, 명나라는 늙은 호랑이로 쇠약해 가는 국제질서에서 한시도 눈길을 떼지 않았다.
이런 어려운 판국인데도 그의 형 임해군은 광해군의 정사를 비방하고 다녔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 또한 틈만 나면 광해군을 깎아내리려고 했다. 이들은 당인들과 결탁하여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언제나 광해군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광해군은 일단의 조치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임해군에게 제재를 가한 것이다. 일부 벼슬아치들은 임해군을 추대하려다 실패하자 장자계승권을 주장, 명나라에 이 사실을 알려 압력을 넣으려고 했다. 임해군 자신은 난행을 거듭하면서 왕위를 동생에게 빼앗겼다고 분한 마음을 먹고 있었다. 대북파는 이 사실을 그대로 넘기려 하지 않았다. 끝내 임해군은 교동도에 유배를 당했다가 사약을 받았다.
이때에 제기된 것이 할은론(割恩論)이다. 형제 사이에도 왕법에 어긋나는 짓을 하면 형벌을 가해도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이것은 정인홍 등 대북파가 제기한 왕권확립의 이론이다.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으로는 인목대비와 그 아비 김제남 등의 일파가 있었다. 이들 또한 불만이 많았다.
이런 속에 1613년 서양갑을 중심으로 한 서자들의 옥사가 있었다. 이들은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하면서 반역을 도모했는데 “참 용은 일어나지 않았는데(眞龍未起, 진룡은 영창대군을 뜻함) 거짓 여우가 먼저 울어댄다(假狐先鳴, 가호는 광해군을 뜻함)”라는 주장을 내걸었다.
이에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사는 집에 가시 울타리를 치고 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되었고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 등이 그 주모자로 지목되어 처형되었다각주1) .
이듬해에는 강화부사 정항의 자의로 영창대군이 증살(蒸殺,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열기에 질식해 죽게 한 것)되었다. 이때에도 할은론이 제기되었는데, 정인홍이 일곱 살의 어린 영창대군에게는 할은론을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처음에는 처형의 조치를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일을 겪게 되자 인목대비는 젊은 나이이지만 궁중의 어른으로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녀는 궁중에서 기회만 있으면 눈물을 흘리며 불평의 말을 늘어놓았다.
광해군을 원망하고 헐뜯는 인목대비의 행동거지는 이해할 법했고,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권신들이 인목대비의 일을 물고 늘어졌지만, 광해군은 이 문제만큼은 쉽사리 동의하려 들지 않았다. 광해군은 5년 이상을 끌다가 끝내 인목대비에게서 ‘대비’라는 존호를 깎고 서궁에 유폐시키는 조치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에 제기된 것이 전은론(全恩論)이다. 부모에게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형벌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 정인홍의 주장이었다. 이이첨 등 일부를 제외하고 인목대비에 대한 조처에 반대 여론이 드셌지만, 마지막까지도 죽음의 형벌은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효’를 인간의 기본덕목으로 삼는 유교 이념의 사회에서, 비록 생모는 아니었지만 폐모의 조치를 내린 것은 광해군의 큰 실수였다.
명분보다는 실리를 취하겠다
위의 일들은 모두 왕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결국은 세자 때부터 도전을 받아 왔던 반대세력을 제거한 것이었는데, 때로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고, 때로는 인륜에 어긋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은 광해군을 폭군으로 보이게 한 원인이었지만 왕위에 오른 과정과 왕권을 강화하는 사정에 비추어 보면 결정적인 기준은 되지 못한다.
조선조 임금들 중 이런 크고 작은 일들을 저지르지 않은 경우는 드물다. 예컨대 태종은 동생들을 죽인 뒤 왕위에 올랐고,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는 숙부와 아들 · 며느리를 죽였다. 단지 이들의 죄상이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왕위에서 쫓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실의 문제를 떠나 광해군의 정치적 공과를 따져 보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 조선은 명나라 원병의 힘을 입어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광해군은 왕을 대신하여 전국을 돌며 전쟁으로 인한 화재의 참담함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 군대가 형편없이 허약함을 직접 보았다. 더욱이 명의 원병을 위한 양곡 공급, 물자 · 노역의 징발을 담당하는 과정에서 명군의 횡포와 국력의 소모를 겪었다. 유성룡도 “왜군은 얼레빗이었고 명군은 참빗이었다”고 할 정도로 명군의 행패는 대단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명과 조선은 새로운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명나라와 조선이 7년 전역을 치르면서 국력이 여지없이 소모된 틈을 타서 만주지방에서 일어난 여진족은 거친 기세로 뻗어 갔다.
광해군은 건주위의 누르하치를 예의 주시했다. 그러나 국내의 사대파는 명나라에 대한 재조자소(再造字小, 임진왜란 때 나라를 다시 세워 주고 작은 것을 사랑해 준다는 뜻)의 은혜 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여진족은 오랑캐라고 얕잡아보았다. 광해군은 명나라에 가는 사신을 통하거나 의주 지방에 있는 정탐꾼을 통해 여진족의 세력과 동정을 수집해서 대책을 세우기에 바빴다.
1616년에 들어 누르하치는 마침내 후금(後金)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1617년 누르하치는 명나라 국경을 더욱 압박해 갔다. 명나라는 후금 정벌을 단행하기로 하고 조선에 원병을 요구했다. 광해군은 “남쪽에 변란이 있어 군사가 부족하다”거나 “우리 군사는 훈련이 안 돼 쓸모가 없고 무기도 갖추지 못했다”는 따위의 핑계를 대면서 거절을 거듭했다.
1618년 7월, 조정은 명나라의 거듭된 강경한 요구에 밀려 끝내 군대 파견을 결정했다. 1619년 2월, 강홍립을 도원수로 한 1만 3000여 명의 조선군은 출정에 나서 조 · 명 연합군으로 편성되었다.
광해군은 3만 명의 군사로 국경지대를 지키게 하고 군량미 조달에 차질이 없게 하는 한편, 출정한 강홍립에게는 “관형향배(觀形向背)를 취하라”는 밀지를 내렸다. 강홍립은 진군하면서 군량미가 뒤에 처져 있다고 핑계대고 머뭇거렸다. 그러면서 몰래 통역을 보내 후금과 내통하기도 했다. 전세가 다급한 명나라의 독촉이 빗발치자, 강홍립은 앞으로 나가 싸우는 체하다가 후금에 거짓 투항했다. 청나라 말을 잘하는 역관을 미리 데리고 가 “우리 군대는 마지못해 출정에 나섰다”고 광해군의 뜻을 은밀하게 전했다.
강홍립의 투항 사실이 평안감사 박엽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보고 책임을 맡은 인물이었다. 박엽은 장계를 써서 조정에 보고하는 한편, 강홍립 등 투항한 장수의 가족을 잡아가두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렸다. 말할 것도 없이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대소 신료들은 날마다 강홍립의 죄를 논하고 사대의 은혜와 덕의를 따지면서 후금정벌론으로 밤을 지새웠다. 한편 강홍립은 적의 진중에 있으면서 적의 동정과 전후의 사정을 장계에 써서 노끈으로 꼬아 말안장에 끼워 비밀리에 조정에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정의 대신들은 이 사실을 명나라에 알려 사죄해야 한다, 후금의 국서를 찢어 버리고 사자를 죽여야 한다, 강홍립 등의 가족을 역률(逆律)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밤낮 들볶이던 광해군은 처음으로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경들은 이 오랑캐를 어찌할 것인가? 우리나라의 병력으로 1초(哨, 100명단위)라도 막을 만한 형세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지난번 군사를 요구하는 글이 명나라에서 두 번이나 왔을 적에 내가 걱정한 바는 곧 원병을 보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인심이 본래 굳건치 못하고 군사가 평소에 교련이 되어 있지 않아 하루아침에 몰아 들어가더라도 싸움에 도움을 주지 못함을 알리는 것이었다. ······ 경들이 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한갓 내 말을 틀어막아 우리 군사가 투항한 사정을 명나라에 알리려고만 드니 어찌 이런 어그러진 사리가 있는가? 내 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이를 절통해 하는도다.
지난해 명에서 청병하여 왔을 적에 경들은 마치 북 한 번 울리면 싹 쓸어 버릴 것같이 말했다. 이렇게 생각하고야 병가(兵家)의 일이 어찌 두렵지 않은가? ······ 내 이를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근심 걱정한 나머지 마음의 병이 더욱 돋아 발광할 지경에 이르렀도다.
- 《광해군일기》 권139, 11년 4월조
또 앞으로 세울 계책에 대해 광해군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가 계책으로 삼을 것은 군신 상하가 모든 일에 힘써, 정벌할 준비에 온 생각을 쏟아서 군사를 기르고 장수를 뽑으며, 인재를 거두어 쓰고 백성의 걱정을 펴 주어 인심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또 크게 둔전(屯田)을 개간하고 병기를 조련하여 성지(城池)를 잘 수리하여 모든 것을 정리한 뒤에야 정세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로다. 그렇게 하지 않고 혹 태만히 하면 큰 화가 곧바로 이를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 《광해군일기》 권139, 11년 4월조
광해군일기
조선 인조 2년(1624)에 실록청에서 펴낸 광해군 재위 15년 동안의 실록. 다른 실록과 달리 187권 64책의 정리되지 않은 중초(中草)가 남아 있으며, 정조 18년(1794)에 수정하여 간행했다. 《연산군일기》와 함께 왕의 시호를 쓰지 않고 일기로 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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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찰력으로 현실에 대처한 것이지만 광해군은 조정에서 고군분투해야 했다. 온 조정은 광해군의 정책에 반대를 거듭했고, 왕비 유씨까지도 조정의 분위기를 알고 언문 상소를 올려 명나라를 섬길 것을 간곡히 부탁할 정도였다. 광해군은 자신의 뜻을 밀고 나간 뒤에 대제국 청을 건설한 후금과 적당한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회유를 거듭하는 한편 명나라에 대해서도 적절하게 대처해 나갔다.
그러나 광해군이 쫓겨난 뒤 조정의 정책은 배청(排淸)으로 일관했다. 심지어 후금의 사신을 쫓아 보내고 국서를 찢기까지 하면서 적대감을 보였다. 그러다가 1627년, 광해군이 물러난 지 5년 만에 후금의 침입을 받았다. 이른바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강제로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이때 인조는 아무런 손도 써 보지 못한 채 강화도로 도망쳤다.
그 뒤에도 도망 온 명의 장수들을 돕고 청의 사신은 죽이려 하면서 청의 황제를 인정하지 않다가 끝내 1636년에 전면적인 침입을 당했다. 왕은 남한산성에 들어가 아무런 방비책도 세우지 못하다가 끝내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행하고 군신의 관계를 맺고 말았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굴복일 것이다. 고려 때 원에게 항복했을 때에도 형제 관계를 맺었지 군신 관계는 아니었고, 임진왜란 때에도 끝까지 버티어 왜군이 스스로 물러갔다.
이렇게 나라를 무참하게 만들고도 광해군에게 씌워진 죄는 사대를 저버리고 임금(명을 뜻함)을 배반했다는 것이다. 나라가 짓밟히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면서까지 명을 섬기는 존명사대를 지켜야 했을까? 또한 아무런 대비책도 세우지 못하면서 명분만을 내세워야 했을까? 한번 곰곰이 되새겨 볼 일이다.
광해군의 인생을 지워 버린 인조반정
이처럼 광해군은 실리적인 외교를 추구했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도 어느 군주 못지않게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임진왜란 뒤 서울로 환궁했을 때에 서울의 궁궐은 거의 불에 타 없어졌다. 왕이 월산대군의 사저를 빌려 써야 할 정도였다. 광해군은 곧 토목공사를 벌여 경복궁을 제외한 많은 궁궐의 대부분을 다시 지었다. 이런 과정에서 부역이 가중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광해군은 천도를 서둘렀다. 서울의 옛 집이 대부분 불타 없어진 마당에 왕실의 위엄은 말이 아니었다. 벼슬아치들 또한 위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민간에서는 ‘정씨 왕조설’ 따위가 퍼져 ‘이씨 왕조’를 부정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각주2) . 광해군은 지사(地師)를 동원하여 임진강 가의 교하(오늘날의 파주 교하면 일대)로 천도할 것을 결심하고 그곳에서 토목공사를 벌였다. 그러나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부세가 과중한데다가 명의 병력 요청 등으로 이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어 기초만 서둘다가 중지하고 말았다.
광해군이 나라를 다스렸던 일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는 즉위하여 곧바로 시행한 대동법을 들 수 있다. 종래에는 공물을 바칠 때 대납(代納)하는 과정에 중간에서 모리배들이 끼어들어 실제 납공자(納貢者)에게 부담을 가중시켰고 이것이 이권으로 전락했다. 이 폐단을 없애기 위해 쌀로 환산하여 바치게 한 것이 대동법이다.
이것은 처음 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시행되었지만 차츰 각 지방으로 확대 적용되었다. 이 제도는 토호를 낀 중간 모리배들이 이권을 독차지하는 폐단을 막았다.
그 밖에 광해군은 문화적인 사업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찬술, 《동의보감》 간행 등을 이룩했고, 《삼강행실도》를 보급하여 타락하는 기풍을 쇄신하려 했다. 또한 포도청을 상설기구로 만들어 사회불안에 대비했고, 군사시설인 진보(鎭堡)의 확충 등으로 외침을 막을 준비를 했다.
이런 공적은 광해군이 쫓겨난 뒤에 심하게는 죄목으로 씌워지기도 했고 전혀 그의 공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게다가 광해군의 정책들은 토지를 독점한 벼슬아치나 토호들에게 불만을 사서 그들을 광해군의 반대세력으로 몰아가는 결과만 빚었다. 광해군은 인재를 고루 수용한다는 명분 아래 서얼과 노복 출신을 많이 등용하여 수령으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뒤에 “명기(名器, 어진 신하)를 뒤섞이게 하고 벼슬을 뇌물에 팔았다”며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광해군은 조카뻘인 인조에게 쫓겨났다. 반정이 일어났을 때 왕비 유씨가 궁궐 후원에 이틀 동안 숨어 있다가 수비대장에게 물었다.
“오늘 이 일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오?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오?”(《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
광해군과 폐비 유씨, 폐세자와 폐세자빈 등 네 사람은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각주3) . 이들을 먼 외딴섬으로 보내지 않은 것은 서울 가까이에 두고 늘 감시하면서 후환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기어코 죽이려고 새 임금과 대신들을 졸랐지만 이원익 등이 간곡히 만류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들이 위리안치되고 난 두 달쯤 뒤에 폐세자가 담 밑에 구멍을 파고 도망쳐 나오다가 잡히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의 손에는 은과 쌀밥 그리고 황해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쥐어져 있었다고 한다. 폐세자가 구멍을 통해 도망할 때에 폐세자빈은 나무에 올라가 바라보다가 폐세자가 잡히는 것을 보고 땅에 떨어져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목매어 죽었다. 또한 인목대비의 강경한 주장에 따라 폐세자에게 죽음이 내려지자, 폐세자도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광해군은 쫓겨난 지 불과 두 달 만에 20대 중반의 외동아들과 며느리를 잃었다. 다음 해 10월, 강화도로 귀양온 지 1년 반쯤 되어서는 폐비 유씨가 심화병(心火病)으로 죽었다. 이제 광해군 혼자만 남게 되었다. 그의 혈육이라고는 박씨에게 시집간 외동딸뿐이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정에서는 반란군이 광해군을 추대할까 싶어서 광해군을 배에 실어 태안에 옮겨 두었다. 그러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로 데리고 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에서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조정에서는 또다시 그를 교동도에 안치시켰다. 이때 그를 눈엣가시로 본 서인 계열의 신경진 등은 경기수사에게 “선처하시오”라고 하면서 죽이라는 암시를 주었지만, 경기수사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그를 보호했다.
다음 해에는 광해군을 서울 근방에 놓아두는 것이 불안하여 제주도로 옮겨 놓았다. 휘장을 친 배를 타고 제주도에 내린 광해군은 외딴섬으로 온 자신을 보고 탄식해 마지않았다. 그는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들이 상방을 차지하고 그를 아래채에 재워도 그저 입을 꾹 다물었고,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부르며 앙탈을 해도 고개를 숙인 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제까지 그 위엄 있던 군주가 오늘에는 기도 못 펴는 촌로로 바뀐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조용히 돌보며 인생을 관조하는 자세였는지는 몰라도 인간적인 비극임에 틀림이 없었다.
광해군은 제주 땅에서 귀양살이한 지 19년 만에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내가 죽으면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 달라”(방손 이해성의 말)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양주 적성동에 있는 그의 어머니 공빈 김씨 무덤 아래 묻혔다. 조정에서 베풀어 준 마지막 은총이었다. 그리고 외동딸의 자손에게 제를 지내게 했다.
공빈 김씨의 무덤 오른쪽에 임해군이 묻혀 있고 그 아래에 광해군이 묻혀 있지만, 임해군의 양손들은 공빈 김씨와 임해군에게만 시제를 올리고 광해군의 무덤에는 발길도 안 돌렸다. 당시 혹은 훗날 어떤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그의 비극적 생애를 더욱 부각시키는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광해군은 인간적인 약점도 많이 지니고 있었다. 어릴 적에 어머니를 잃고 세자책봉에 있어서나 왕위에 오른 뒤에도 늘 그에게 붙어다니는 검은 그림자들이 있었다.
이것은 선조의 변덕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고, 또 많은 왕자들(선조는 영창대군 외에도 13왕자를 두었음) 틈에 끼어 왕위가 늘 불안했던 탓도 있었다. 그래서 정서불안 같은 결함이 생겼을 것이다. 그리하여 음모와 술수가 판을 치는 궁중을 부드럽게 다스리지 못한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개혁과 혁신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에게 치도(治道)의 이론을 제공한 인물은 정인홍이었다. 정인홍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를 물러가게 하고, 우리의 군사로 우리의 강토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인홍 역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면서 토호들의 노비를 거두어 가서 토호들에게 큰 지탄을 받았다. 그는 벼슬길에 나와서 산림장령(山林掌令)으로 부패한 관리들을 매섭게 매도했으며, 후금과의 관계에서도 중립적이고 실리적인 태도를 건의했다.
광해군은 정인홍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혁신정치를 폈고, 이런 과정에서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데에 덕치를 벗어나는 조치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서인 주도의 모든 기록들은 온갖 잔일을 들추어 광해군을 헐뜯었고, 심지어 인목대비는 “선조를 독살했다”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늘어놓기도 했다. 또 광해군을 받들던 대북파가 그 뒤 여지없이 몰락하여 그를 옹호할 세력이 없었다는 점도 간과할 일이 아니다. 반면에 광해군은 간신인 이이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 일을 그르친 경우도 있었다.
광해군은 중국에서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는 시기에 적절한 외교로 청나라의 침입을 막았고 대동법의 실시로 조세행정을 바로잡았으며 《동의보감》의 간행으로 의학서적을 정리한 업적을 남겼다. 이렇게 그는 업적을 쌓았지만 인간적으로는 불행한 임금이 되었다는 것은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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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이화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펼쳐보기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도 맡았다. <허균의 생각>, <한국의 파벌>, <조선후기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등의 저서가 있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국사 역사인물들 중에서 꼭 알아야 할 100여 명을 엄선하여 생생하게 재조명한다.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
전체목차
1부. 한국 고대사의 지도를 그리다 위대한 정복자, 중흥의 제왕 - 광개토대왕삼국틍일의 기초를 다진 영웅 - 김춘추백제의 중흥을 꿈꾼 서동설화의 주인공 - 무왕신비에 싸인 가락국의 왕비 - 허황옥발해를 건설한 고구려 유민 - 대조영신라의 후예로 미륵세력을 결합한 지배자 - 궁예광해군 이혼, 光海君
시대가 거부한 폭군 아닌 폭군
출생사망재위
1575년 |
1641년 |
1608년~1623년 |
목차접기
아슬아슬하게 왕위에 오르다
광해군(1575~1641, 재위 1608~23) 부부의 무덤은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낮은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 왕릉답지 않게 규모가 초라하기 짝이 없고 비석에는 총탄 자국도 군데군데 있어서 보는 이들을 서글프게 한다. 그 언저리에 있는 단종의 왕비 송씨의 화려한 사릉과 너무나 대조가 된다. 그 배경을 더듬어 보면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광해군의 묘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비운의 임금을 상징하는 듯 초라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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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을 오늘날의 가치기준으로 재평가하는 일은 한 인물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 본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고정관념에 빠지기 쉽다. 그것은 당시의 가치기준 때문이기도 하고 이념의 조작에서 나오는 경우도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인물이나 역사적 사실을 놓고 그 실상과는 다르게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 글에서 역사인물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그 실상에 접근하고 새로운 역사경험을 음미하기 위해 광해군을 조명해 보려고 한다.
조선조에서는 폭군으로 흔히 연산군과 광해군을 꼽는다. 분명 연산군은 폭군의 범주에 든다. 이에 비해 광해군은 그 속사정이 사뭇 다르다는 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폐위시킬 때의 죄목은, 첫째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이고 자신을 유폐시켰다는 것이고, 둘째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정치를 혼탁하게 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 번째 이유로 다음 사실을 들었다.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긴 지 200여 년, 의리로는 곧 군신이요, 은혜로는 부자와 같도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다시 세워 준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도다. 선왕(선조)이 어위(御位)하신 지 40년 동안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평생 등을 서쪽으로 대고(중국이 있는 방향) 앉으신 적이 없었다. 광해군은 배은망덕하여 천명의 두려움을 잊고 음흉하게 두 마음을 품어 오랑캐에게 정성을 바쳐 기미년 오랑캐를 칠 전역(戰役, 1619년의 사르후 전투를 말함)에 참가하면서 장수에게 “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일렀도다. 그리하여 끝내 온 군사가 오랑캐에게 투항하여 사해에 떠돌게 했도다. ······ 우리 삼한 예의의 나라로 하여금 오랑캐와 금수의 지경으로 돌아가게 했으니 통탄해 본들 어찌 말을 다하겠는가?
- 《광해군일기》 권187, 15년 3월조
바로 이 세 번째 문제가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주된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중국에 대해 사대를 하지 않고 청나라에 곁붙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광해군을 오늘날 재평가하는 초점이 된다. 다시 말해서 그가 자주 · 실리 외교를 추구하다가 사대파에 밀려났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어떻게 해서 왕위에 올랐을까?
원래 선조는 정비 소생의 아들이 없었고 후궁 출신인 공빈 김씨에게서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다. 따라서 장자인 임해군이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그는 무식하고 난폭한 면이 있었다. 선조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후계문제를 놓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다른 후궁에게서 난 많은 왕자들이 각기 왕위를 넘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인빈 김씨는 자신의 소생인 어린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시키려는 공작을 끊임없이 벌이고 있었다. 조정과 민간의 인심은 영민한 광해군에게 쏠리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세 살 때에 죽은 처지여서 스스로 처신에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북쪽으로 쫓겨 가는 몸이 되었다. 후사를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양에서는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것으로 일단 세자책봉 문제가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광해군은 세자로서 분조(分朝, 임시로 세자에게 임금의 일을 대행하게 하는 제도)를 맡아 난중에 동분서주하며 그 소임을 다했고, 조정과 민간의 명망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광해군의 왕위계승권은 요지부동할 것 같았고 그 자신 또한 현군의 자질을 키워 나갔다.
이런 마당에 1606년(선조 39) 중전인 인목왕후에게서 뒤늦게 왕자가 태어났다. 불행의 씨앗은 바로 여기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선조는 정비에게서 새로 태어난 영창대군을 무척 총애했다.
어느 날은 영창대군을 무릎에 앉히고 대나무 그림을 그려 여러 신하들에게 보여 주기도 했다. 그 대나무 그림은 곁가지가 굵게 뻗어 있고 줄기는 아주 가늘게 그려져 있었다. 일부 눈치 빠른 벼슬아치들은 선조의 심중을 짚어 내느라 온 머리를 짜냈다.
1608년, 선조는 병이 위독하자 대신들의 주장에 따라 광해군에게 선위(禪位, 현재의 임금이 살아 있을 때 왕위를 물려주는 일)의 교서를 내렸다. 시의에 적절한 조치였다.
그리고 이 일을 전후로 선조는 조정의 명망 있는 일곱 신하들을 불러들여 이른바 “영창대군의 일을 잘 부탁한다”는 유교(遺敎)를 내렸다. 이에 눈치 빠른 영의정 유영경은 광해군에게서 소외를 받고 있는 처지에서 선조의 대나무 그림의 곁가지는 광해군, 줄기는 영창대군을 암시한 것으로 생각해서, 또 유교의 뜻을 헤아려 선위의 교서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 실로 묘한 양상이 벌어진 것이다. 병석에 누워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왕을 싸고 음모정치가 조정을 휘몰아 가고 있었다.
이 일이 광해군의 왕위계승을 위해 오랫동안 광해군을 보호하고 감싸던 정인홍 · 이이첨 등에 의해 누설되면서 또 한번 조정에 큰 논란이 일게 되었다.
역사에서는 유영경 일파를 소북파, 정인홍 일파를 대북파라 한다. 정인홍은 선조에게 이 일을 알리고 앞으로의 분란을 막기 위해 유영경의 처사를 엄히 다스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 음모를 막으려 하다가 결말을 완전히 짓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 인목대비가 관례에 따라 언문 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하게 했다.
형제에게 형벌을 내리다
참으로 위태로운 형편이었다. 적어도 광해군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넘겼다. 어렵사리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처음부터 선조 초년에 태동한 당인(黨人)들의 횡포에 진절머리를 쳤다. 자기네들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조정과 나라의 일을 제멋대로 농락하는 당파들을 광해군은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이라고 생각했다.
유영경이 정계에서 쫓겨난 것은 당연했고, 그에게 죽음을 내린 것도 무리한 조처가 아니었다. 한편 광해군을 감싸던 정인홍 · 이이첨 등 대북파가 득세한 것도 어느 정도 자연스런 정치과정이었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조정의 기풍을 새롭게 하려고 했다. 당파를 따지지 않고 인재를 고루 쓰고 임진왜란으로 파탄이 난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며, 난중에 불타 버린 경복궁 등 궁궐을 새로 짓거나 손보아서 왕실의 위엄을 살리고, 조세를 고르게 하여 민생을 구제하려고 했다(대동법 실시).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한때 원병을 보내겠다고까지 한 누르하치가 무서운 기세로 세력을 뻗고, 명나라는 늙은 호랑이로 쇠약해 가는 국제질서에서 한시도 눈길을 떼지 않았다.
이런 어려운 판국인데도 그의 형 임해군은 광해군의 정사를 비방하고 다녔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 또한 틈만 나면 광해군을 깎아내리려고 했다. 이들은 당인들과 결탁하여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언제나 광해군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광해군은 일단의 조치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임해군에게 제재를 가한 것이다. 일부 벼슬아치들은 임해군을 추대하려다 실패하자 장자계승권을 주장, 명나라에 이 사실을 알려 압력을 넣으려고 했다. 임해군 자신은 난행을 거듭하면서 왕위를 동생에게 빼앗겼다고 분한 마음을 먹고 있었다. 대북파는 이 사실을 그대로 넘기려 하지 않았다. 끝내 임해군은 교동도에 유배를 당했다가 사약을 받았다.
이때에 제기된 것이 할은론(割恩論)이다. 형제 사이에도 왕법에 어긋나는 짓을 하면 형벌을 가해도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이것은 정인홍 등 대북파가 제기한 왕권확립의 이론이다.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으로는 인목대비와 그 아비 김제남 등의 일파가 있었다. 이들 또한 불만이 많았다.
이런 속에 1613년 서양갑을 중심으로 한 서자들의 옥사가 있었다. 이들은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하면서 반역을 도모했는데 “참 용은 일어나지 않았는데(眞龍未起, 진룡은 영창대군을 뜻함) 거짓 여우가 먼저 울어댄다(假狐先鳴, 가호는 광해군을 뜻함)”라는 주장을 내걸었다.
이에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사는 집에 가시 울타리를 치고 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되었고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 등이 그 주모자로 지목되어 처형되었다각주1) .
이듬해에는 강화부사 정항의 자의로 영창대군이 증살(蒸殺,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열기에 질식해 죽게 한 것)되었다. 이때에도 할은론이 제기되었는데, 정인홍이 일곱 살의 어린 영창대군에게는 할은론을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처음에는 처형의 조치를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일을 겪게 되자 인목대비는 젊은 나이이지만 궁중의 어른으로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녀는 궁중에서 기회만 있으면 눈물을 흘리며 불평의 말을 늘어놓았다.
광해군을 원망하고 헐뜯는 인목대비의 행동거지는 이해할 법했고,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권신들이 인목대비의 일을 물고 늘어졌지만, 광해군은 이 문제만큼은 쉽사리 동의하려 들지 않았다. 광해군은 5년 이상을 끌다가 끝내 인목대비에게서 ‘대비’라는 존호를 깎고 서궁에 유폐시키는 조치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에 제기된 것이 전은론(全恩論)이다. 부모에게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형벌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 정인홍의 주장이었다. 이이첨 등 일부를 제외하고 인목대비에 대한 조처에 반대 여론이 드셌지만, 마지막까지도 죽음의 형벌은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효’를 인간의 기본덕목으로 삼는 유교 이념의 사회에서, 비록 생모는 아니었지만 폐모의 조치를 내린 것은 광해군의 큰 실수였다.
명분보다는 실리를 취하겠다
위의 일들은 모두 왕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결국은 세자 때부터 도전을 받아 왔던 반대세력을 제거한 것이었는데, 때로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고, 때로는 인륜에 어긋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은 광해군을 폭군으로 보이게 한 원인이었지만 왕위에 오른 과정과 왕권을 강화하는 사정에 비추어 보면 결정적인 기준은 되지 못한다.
조선조 임금들 중 이런 크고 작은 일들을 저지르지 않은 경우는 드물다. 예컨대 태종은 동생들을 죽인 뒤 왕위에 올랐고,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는 숙부와 아들 · 며느리를 죽였다. 단지 이들의 죄상이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왕위에서 쫓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실의 문제를 떠나 광해군의 정치적 공과를 따져 보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 조선은 명나라 원병의 힘을 입어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광해군은 왕을 대신하여 전국을 돌며 전쟁으로 인한 화재의 참담함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 군대가 형편없이 허약함을 직접 보았다. 더욱이 명의 원병을 위한 양곡 공급, 물자 · 노역의 징발을 담당하는 과정에서 명군의 횡포와 국력의 소모를 겪었다. 유성룡도 “왜군은 얼레빗이었고 명군은 참빗이었다”고 할 정도로 명군의 행패는 대단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명과 조선은 새로운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명나라와 조선이 7년 전역을 치르면서 국력이 여지없이 소모된 틈을 타서 만주지방에서 일어난 여진족은 거친 기세로 뻗어 갔다.
광해군은 건주위의 누르하치를 예의 주시했다. 그러나 국내의 사대파는 명나라에 대한 재조자소(再造字小, 임진왜란 때 나라를 다시 세워 주고 작은 것을 사랑해 준다는 뜻)의 은혜 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여진족은 오랑캐라고 얕잡아보았다. 광해군은 명나라에 가는 사신을 통하거나 의주 지방에 있는 정탐꾼을 통해 여진족의 세력과 동정을 수집해서 대책을 세우기에 바빴다.
1616년에 들어 누르하치는 마침내 후금(後金)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1617년 누르하치는 명나라 국경을 더욱 압박해 갔다. 명나라는 후금 정벌을 단행하기로 하고 조선에 원병을 요구했다. 광해군은 “남쪽에 변란이 있어 군사가 부족하다”거나 “우리 군사는 훈련이 안 돼 쓸모가 없고 무기도 갖추지 못했다”는 따위의 핑계를 대면서 거절을 거듭했다.
1618년 7월, 조정은 명나라의 거듭된 강경한 요구에 밀려 끝내 군대 파견을 결정했다. 1619년 2월, 강홍립을 도원수로 한 1만 3000여 명의 조선군은 출정에 나서 조 · 명 연합군으로 편성되었다.
광해군은 3만 명의 군사로 국경지대를 지키게 하고 군량미 조달에 차질이 없게 하는 한편, 출정한 강홍립에게는 “관형향배(觀形向背)를 취하라”는 밀지를 내렸다. 강홍립은 진군하면서 군량미가 뒤에 처져 있다고 핑계대고 머뭇거렸다. 그러면서 몰래 통역을 보내 후금과 내통하기도 했다. 전세가 다급한 명나라의 독촉이 빗발치자, 강홍립은 앞으로 나가 싸우는 체하다가 후금에 거짓 투항했다. 청나라 말을 잘하는 역관을 미리 데리고 가 “우리 군대는 마지못해 출정에 나섰다”고 광해군의 뜻을 은밀하게 전했다.
강홍립의 투항 사실이 평안감사 박엽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보고 책임을 맡은 인물이었다. 박엽은 장계를 써서 조정에 보고하는 한편, 강홍립 등 투항한 장수의 가족을 잡아가두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렸다. 말할 것도 없이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대소 신료들은 날마다 강홍립의 죄를 논하고 사대의 은혜와 덕의를 따지면서 후금정벌론으로 밤을 지새웠다. 한편 강홍립은 적의 진중에 있으면서 적의 동정과 전후의 사정을 장계에 써서 노끈으로 꼬아 말안장에 끼워 비밀리에 조정에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정의 대신들은 이 사실을 명나라에 알려 사죄해야 한다, 후금의 국서를 찢어 버리고 사자를 죽여야 한다, 강홍립 등의 가족을 역률(逆律)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밤낮 들볶이던 광해군은 처음으로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경들은 이 오랑캐를 어찌할 것인가? 우리나라의 병력으로 1초(哨, 100명단위)라도 막을 만한 형세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지난번 군사를 요구하는 글이 명나라에서 두 번이나 왔을 적에 내가 걱정한 바는 곧 원병을 보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인심이 본래 굳건치 못하고 군사가 평소에 교련이 되어 있지 않아 하루아침에 몰아 들어가더라도 싸움에 도움을 주지 못함을 알리는 것이었다. ······ 경들이 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한갓 내 말을 틀어막아 우리 군사가 투항한 사정을 명나라에 알리려고만 드니 어찌 이런 어그러진 사리가 있는가? 내 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이를 절통해 하는도다.
지난해 명에서 청병하여 왔을 적에 경들은 마치 북 한 번 울리면 싹 쓸어 버릴 것같이 말했다. 이렇게 생각하고야 병가(兵家)의 일이 어찌 두렵지 않은가? ······ 내 이를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근심 걱정한 나머지 마음의 병이 더욱 돋아 발광할 지경에 이르렀도다.
- 《광해군일기》 권139, 11년 4월조
또 앞으로 세울 계책에 대해 광해군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가 계책으로 삼을 것은 군신 상하가 모든 일에 힘써, 정벌할 준비에 온 생각을 쏟아서 군사를 기르고 장수를 뽑으며, 인재를 거두어 쓰고 백성의 걱정을 펴 주어 인심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또 크게 둔전(屯田)을 개간하고 병기를 조련하여 성지(城池)를 잘 수리하여 모든 것을 정리한 뒤에야 정세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로다. 그렇게 하지 않고 혹 태만히 하면 큰 화가 곧바로 이를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 《광해군일기》 권139, 11년 4월조
광해군일기
조선 인조 2년(1624)에 실록청에서 펴낸 광해군 재위 15년 동안의 실록. 다른 실록과 달리 187권 64책의 정리되지 않은 중초(中草)가 남아 있으며, 정조 18년(1794)에 수정하여 간행했다. 《연산군일기》와 함께 왕의 시호를 쓰지 않고 일기로 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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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찰력으로 현실에 대처한 것이지만 광해군은 조정에서 고군분투해야 했다. 온 조정은 광해군의 정책에 반대를 거듭했고, 왕비 유씨까지도 조정의 분위기를 알고 언문 상소를 올려 명나라를 섬길 것을 간곡히 부탁할 정도였다. 광해군은 자신의 뜻을 밀고 나간 뒤에 대제국 청을 건설한 후금과 적당한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회유를 거듭하는 한편 명나라에 대해서도 적절하게 대처해 나갔다.
그러나 광해군이 쫓겨난 뒤 조정의 정책은 배청(排淸)으로 일관했다. 심지어 후금의 사신을 쫓아 보내고 국서를 찢기까지 하면서 적대감을 보였다. 그러다가 1627년, 광해군이 물러난 지 5년 만에 후금의 침입을 받았다. 이른바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강제로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이때 인조는 아무런 손도 써 보지 못한 채 강화도로 도망쳤다.
그 뒤에도 도망 온 명의 장수들을 돕고 청의 사신은 죽이려 하면서 청의 황제를 인정하지 않다가 끝내 1636년에 전면적인 침입을 당했다. 왕은 남한산성에 들어가 아무런 방비책도 세우지 못하다가 끝내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행하고 군신의 관계를 맺고 말았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굴복일 것이다. 고려 때 원에게 항복했을 때에도 형제 관계를 맺었지 군신 관계는 아니었고, 임진왜란 때에도 끝까지 버티어 왜군이 스스로 물러갔다.
이렇게 나라를 무참하게 만들고도 광해군에게 씌워진 죄는 사대를 저버리고 임금(명을 뜻함)을 배반했다는 것이다. 나라가 짓밟히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면서까지 명을 섬기는 존명사대를 지켜야 했을까? 또한 아무런 대비책도 세우지 못하면서 명분만을 내세워야 했을까? 한번 곰곰이 되새겨 볼 일이다.
광해군의 인생을 지워 버린 인조반정
이처럼 광해군은 실리적인 외교를 추구했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도 어느 군주 못지않게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임진왜란 뒤 서울로 환궁했을 때에 서울의 궁궐은 거의 불에 타 없어졌다. 왕이 월산대군의 사저를 빌려 써야 할 정도였다. 광해군은 곧 토목공사를 벌여 경복궁을 제외한 많은 궁궐의 대부분을 다시 지었다. 이런 과정에서 부역이 가중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광해군은 천도를 서둘렀다. 서울의 옛 집이 대부분 불타 없어진 마당에 왕실의 위엄은 말이 아니었다. 벼슬아치들 또한 위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민간에서는 ‘정씨 왕조설’ 따위가 퍼져 ‘이씨 왕조’를 부정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각주2) . 광해군은 지사(地師)를 동원하여 임진강 가의 교하(오늘날의 파주 교하면 일대)로 천도할 것을 결심하고 그곳에서 토목공사를 벌였다. 그러나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부세가 과중한데다가 명의 병력 요청 등으로 이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어 기초만 서둘다가 중지하고 말았다.
광해군이 나라를 다스렸던 일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는 즉위하여 곧바로 시행한 대동법을 들 수 있다. 종래에는 공물을 바칠 때 대납(代納)하는 과정에 중간에서 모리배들이 끼어들어 실제 납공자(納貢者)에게 부담을 가중시켰고 이것이 이권으로 전락했다. 이 폐단을 없애기 위해 쌀로 환산하여 바치게 한 것이 대동법이다.
이것은 처음 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시행되었지만 차츰 각 지방으로 확대 적용되었다. 이 제도는 토호를 낀 중간 모리배들이 이권을 독차지하는 폐단을 막았다.
그 밖에 광해군은 문화적인 사업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찬술, 《동의보감》 간행 등을 이룩했고, 《삼강행실도》를 보급하여 타락하는 기풍을 쇄신하려 했다. 또한 포도청을 상설기구로 만들어 사회불안에 대비했고, 군사시설인 진보(鎭堡)의 확충 등으로 외침을 막을 준비를 했다.
이런 공적은 광해군이 쫓겨난 뒤에 심하게는 죄목으로 씌워지기도 했고 전혀 그의 공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게다가 광해군의 정책들은 토지를 독점한 벼슬아치나 토호들에게 불만을 사서 그들을 광해군의 반대세력으로 몰아가는 결과만 빚었다. 광해군은 인재를 고루 수용한다는 명분 아래 서얼과 노복 출신을 많이 등용하여 수령으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뒤에 “명기(名器, 어진 신하)를 뒤섞이게 하고 벼슬을 뇌물에 팔았다”며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광해군은 조카뻘인 인조에게 쫓겨났다. 반정이 일어났을 때 왕비 유씨가 궁궐 후원에 이틀 동안 숨어 있다가 수비대장에게 물었다.
“오늘 이 일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오?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오?”(《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
광해군과 폐비 유씨, 폐세자와 폐세자빈 등 네 사람은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각주3) . 이들을 먼 외딴섬으로 보내지 않은 것은 서울 가까이에 두고 늘 감시하면서 후환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기어코 죽이려고 새 임금과 대신들을 졸랐지만 이원익 등이 간곡히 만류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들이 위리안치되고 난 두 달쯤 뒤에 폐세자가 담 밑에 구멍을 파고 도망쳐 나오다가 잡히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의 손에는 은과 쌀밥 그리고 황해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쥐어져 있었다고 한다. 폐세자가 구멍을 통해 도망할 때에 폐세자빈은 나무에 올라가 바라보다가 폐세자가 잡히는 것을 보고 땅에 떨어져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목매어 죽었다. 또한 인목대비의 강경한 주장에 따라 폐세자에게 죽음이 내려지자, 폐세자도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광해군은 쫓겨난 지 불과 두 달 만에 20대 중반의 외동아들과 며느리를 잃었다. 다음 해 10월, 강화도로 귀양온 지 1년 반쯤 되어서는 폐비 유씨가 심화병(心火病)으로 죽었다. 이제 광해군 혼자만 남게 되었다. 그의 혈육이라고는 박씨에게 시집간 외동딸뿐이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정에서는 반란군이 광해군을 추대할까 싶어서 광해군을 배에 실어 태안에 옮겨 두었다. 그러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로 데리고 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에서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조정에서는 또다시 그를 교동도에 안치시켰다. 이때 그를 눈엣가시로 본 서인 계열의 신경진 등은 경기수사에게 “선처하시오”라고 하면서 죽이라는 암시를 주었지만, 경기수사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그를 보호했다.
다음 해에는 광해군을 서울 근방에 놓아두는 것이 불안하여 제주도로 옮겨 놓았다. 휘장을 친 배를 타고 제주도에 내린 광해군은 외딴섬으로 온 자신을 보고 탄식해 마지않았다. 그는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들이 상방을 차지하고 그를 아래채에 재워도 그저 입을 꾹 다물었고,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부르며 앙탈을 해도 고개를 숙인 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제까지 그 위엄 있던 군주가 오늘에는 기도 못 펴는 촌로로 바뀐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조용히 돌보며 인생을 관조하는 자세였는지는 몰라도 인간적인 비극임에 틀림이 없었다.
광해군은 제주 땅에서 귀양살이한 지 19년 만에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내가 죽으면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 달라”(방손 이해성의 말)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양주 적성동에 있는 그의 어머니 공빈 김씨 무덤 아래 묻혔다. 조정에서 베풀어 준 마지막 은총이었다. 그리고 외동딸의 자손에게 제를 지내게 했다.
공빈 김씨의 무덤 오른쪽에 임해군이 묻혀 있고 그 아래에 광해군이 묻혀 있지만, 임해군의 양손들은 공빈 김씨와 임해군에게만 시제를 올리고 광해군의 무덤에는 발길도 안 돌렸다. 당시 혹은 훗날 어떤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그의 비극적 생애를 더욱 부각시키는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광해군은 인간적인 약점도 많이 지니고 있었다. 어릴 적에 어머니를 잃고 세자책봉에 있어서나 왕위에 오른 뒤에도 늘 그에게 붙어다니는 검은 그림자들이 있었다.
이것은 선조의 변덕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고, 또 많은 왕자들(선조는 영창대군 외에도 13왕자를 두었음) 틈에 끼어 왕위가 늘 불안했던 탓도 있었다. 그래서 정서불안 같은 결함이 생겼을 것이다. 그리하여 음모와 술수가 판을 치는 궁중을 부드럽게 다스리지 못한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개혁과 혁신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에게 치도(治道)의 이론을 제공한 인물은 정인홍이었다. 정인홍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를 물러가게 하고, 우리의 군사로 우리의 강토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인홍 역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면서 토호들의 노비를 거두어 가서 토호들에게 큰 지탄을 받았다. 그는 벼슬길에 나와서 산림장령(山林掌令)으로 부패한 관리들을 매섭게 매도했으며, 후금과의 관계에서도 중립적이고 실리적인 태도를 건의했다.
광해군은 정인홍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혁신정치를 폈고, 이런 과정에서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데에 덕치를 벗어나는 조치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서인 주도의 모든 기록들은 온갖 잔일을 들추어 광해군을 헐뜯었고, 심지어 인목대비는 “선조를 독살했다”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늘어놓기도 했다. 또 광해군을 받들던 대북파가 그 뒤 여지없이 몰락하여 그를 옹호할 세력이 없었다는 점도 간과할 일이 아니다. 반면에 광해군은 간신인 이이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 일을 그르친 경우도 있었다.
광해군은 중국에서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는 시기에 적절한 외교로 청나라의 침입을 막았고 대동법의 실시로 조세행정을 바로잡았으며 《동의보감》의 간행으로 의학서적을 정리한 업적을 남겼다. 이렇게 그는 업적을 쌓았지만 인간적으로는 불행한 임금이 되었다는 것은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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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펼쳐보기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도 맡았다. <허균의 생각>, <한국의 파벌>, <조선후기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등의 저서가 있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국사 역사인물들 중에서 꼭 알아야 할 100여 명을 엄선하여 생생하게 재조명한다.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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