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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대구불교방송(94.5MHZ)이 매주 화요일 17시20분부터 방송하고 있는 <불교역사 산책>중 해인사 도입부를 정리한 것입니다.
<김재원의 사랑방 3>
해인사의 숨은 얘기
김재원
MC ; 네, ‘무명을 밝히고’ 매주 화요일은 영남불교문화연구원의 김재원 박사님과 함께 세월의 뒤안길에 묻혀있는 불교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는데요. 김재원 원장님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김 : 안녕하십니까.
MC :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고, 한결같은 원장님의 모습을 뵈면서 참 많은 것을 배우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청취자분들의 관심과 기대도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지난 시간까지는 가야산에 얽히고설킨 사연들과 진면목에 대해서 오랫동안 얘기 했었는데요.. ...오늘은 어디서부터 시작해볼까요?
김 ; 여태 가야산얘기를 했으니 이제 해인사로 옮겨 봐야지요.
1. 천하제일 가람 터 해인사
MC ; 가야산 하면 해인사잖아요. 어쩌면 해인사 때문에 가야산이 유명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요.
김 ; 그렇지요. 해인사와 가야산은 분리될 수가 없지요. 이 땅에서 해인사가 갖는 명소적 위상은 엄청납니다. 홍류동 10리 계곡, 해인사가 앉은 자리는 절묘하거든요. 가야산 정상인 칠불봉을 중심으로 두리봉, 깃대봉, 단지봉, 남산 제일봉 같이 1000m가 넘는 봉우리들이 마치 영어의 C자 모양을 이루고 있는 그 안쪽에 해인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가히 천하제일의 가람 터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란 걸 가 본 사람은 다 공감하게 되는 곳입니다.
MC ; 해인사 터가 좋다는 건 가본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천하제일이라 할 만큼 좋은 건가요?
김 ; 그럼요. 가야산에서 대가람 자리는 그곳 말고는 없습니다. 해인사가 해발 700m라는 사실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경주 남산이 500m가 안되고 대구 앞산이 650m라는 걸 생각하면 굉장히 높은 곳에 있지요.
MC ; 높은 곳은 교통도 불편하고, 바람도 세고, 날씨도 더 춥고, 물자 운반에 어려움이 많아 불편할 건데 왜 그런 곳을 택했을까요?
김 ; 골이 좁고 깊은 산간지대에는 계곡 바닥에서 일정한 높이에 올라서야만 터다운 터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낮은 곳에서는 턱을 바짝 쳐들어야 앞산 정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산을 능압이라고 하는데, 그런 곳은 좋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의 높이에 있어야 앞산의 능압을 피하면서 시계를 확보할 수 있거든요. 또 그런 곳이어야지 갑자기 불어난 계곡물의 재해도 피할 수 있고. 시끄러운 물소리를 벗어 날 수 있습니다. 이런 조건을 갖춘 장소를 최고의 수행 처로 칩니다.
MC ; 1000m가 넘는 산들로 둘러 싸여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해인사도 능압을 피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요.
김 ; 맞습니다. 곧이곧대로 하면 완전히 능압을 벗어난 자리는 아니지요. 그런데 방향을 약간 조정하므로 해서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연출해 내고 있습니다. 해인사의 방향을 보면 바로 앞 비봉산의 정상을 바라보지 않고 서남쪽으로 약간 비켜서 능선의 6부쯤 되는 부분을 향하고 있습니다. 해인사의 본전인 대적광전이 이 방향을 바라보므로 해서 비봉산 너머의 동그스름한 봉우리들이 아스라이 펼쳐지고, 햇볕도 더 많이 받게 되고, 풍광도 더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능압을 피하므로 해서 단점이 큰 장점으로 바뀐 것이 해인사 터 잡기의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MC ; 저는 해인사가 그렇게 높은데 있는 줄 몰랐어요. 그저 해발 2~300m 쯤 되는 걸로만 알고 있었어요.
김 ; 그게 700m나 올라왔는데도 2~300m 정도로 느껴질 만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증거지요. 주위에 높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데다 들어오는 길이 완만하고, 주변 풍경이 아름답고, 낯설지 않으니까 실제 높이를 실감하지 못 하는 것 같습니다.
MC ; 수행이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각가지 번뇌를 떨쳐 내야 하듯이 수행의 장소도 주변의 장애물에 눌리지 않는 그런 곳이어야 된다는 뜻인 것 같은데요.
김 ; 그렇습니다. 인간의 심상(心相)이 지상(地相)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만큼 심상이 지상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수행 장소가 중요한 거지요. 보통 도를 통하기 위해서는 좋은 스승과 좋은 도반과 좋은 수행 장소,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들 합니다. 좋은 수행처란 것은 지상이 심상에 미치는 저해요소를 염려 안 해도 되는 그런 장소를 말하는 거지요. 해인사가 이런 입지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고 봅니다.
MC ; 언젠가, 해인사의 지형은 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형상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김 ; 예, 해인사는 떠나가는 배, 행주형의 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주문에서 봉황문, 해탈문까지가 뾰족한 이물, 즉 뱃머리이고, 구광루, 탑, 대적광전, 승방이 있는 부분이 배의 몸통에 해당되고, 대장경이 안장되어 있는 수다라전, 법보전 쪽이 고물, 즉 선미를 이루어서 가람 전체가 배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또 극락골 중턱에 있는 마애불상이 배를 모는 뱃사공의 역할을 한다고 의미부여를 하고 있지요.
MC ; 그러고 보니 ‘진리의 바다에 비친 삼라만상의 참모습’ 해인(海印)이라는 이름과도 썩 잘 어울리는 발상인 것 같은데요.
김 ; 그렇지요. 이것뿐만 아닙니다. 대장경판고 위쪽에 돛대 바위라고 불렀던 거대한 바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높이가 20자 이상이었다고 하니까 7m 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요. 이걸 한말에 깨뜨려서 보수공사에 썼다고 합니다.
MC ; 돛대까지 갖춘 배 모양의 사찰, 생각만 해도 꿈속의 고향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왜 그런 바위를 깨뜨렸을까요?
김 ; 당시 대적광전의 축대 일부가 허물어져서 이 바위를 깨뜨려 공사에 썼다고 합니다. 당시 계산동 성당을 짓기 위해 대구에 와 있던 청나라 기술자를 초빙해서 축조했다고 하니까 1902년이 되겠습니다. 1986년에는 돛대바위를 뜯어낸 그루터기 위에 수미정상탑을 세웁니다. 수미정상탑은 장좌불와(長坐不臥)로 유명한 일타스님이 오대산 월정사 8각 석탑모양을 본떠서 만든 7층탑인데 높이가 14m입니다. 이런 탑을 풍수비보탑이라고 불러요.
MC ; 자연적으로 있던 돛대바위를 깨뜨려 낸 자리에 세운 수미정상탑이 ‘풍수비보탑’이라는 말씀이시죠.
김 ; 그렇습니다. 사람이 병이 들거나 허약할 때 침을 놓거나 뜸을 뜨거나 약을 먹여서 병을 낫게 하고 원기를 회복시키듯이 산천이 병들거나 허약할 때는 인공적으로 탑을 만들거나 숲을 조성하거나 장승같은 것을 세워 좋게 하는 것을 풍수비보라고 합니다. 자연적으로 있던 돛대바위를 없애서 생긴 손상된 부분을 인공으로 탑을 세워서 보충시킨 것이지요.
MC ; 대장경판고 위쪽의 수미정상탑이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는 행주형 배의 인공 돛대를 염두에 두고 만든 풍수비보탑이라는 말씀이시죠.
김 ; 저는 그렇게 봅니다. 일반적으로 탑은 절의 법당 앞에 있게 됩니다. 법당과 관련 없는 곳에 세워지거나 건립 목적이 불교 원리보다 부수적인 비보신앙 쪽에 무게가 실릴 적에 저는 비보탑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황룡사 9층 목탑은 신라를 노리고 있는 이웃 나라들, 중화, 일본, 말갈, 여진 같은 9나라를 제압하고 국운을 왕성하게 하기 위해 세운 호국 비보탑이라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도 천태산 영국사 망탑봉에 서있는 망탑봉 3층 석탑이나 춘천 소양호 안쪽 청평사 고개 마루에 서있는 공주탑, 여주 신륵사 남한강가에 서있는 전탑 같은 많은 탑이 비보탑에 해당합니다. 이런 면에서 해인사 장경각 뒤의 수미정상탑은 현대의 비보 탑이라 할 수 있지요.
MC ; 수미정상탑이 없애버린 배의 돛대를 다시 만든 비보탑이라면 행주형의 명당이 어떤 의미이기에 힘들여서 비보를 하게 되는 지 궁금해지는데요.
김 ; 행주형의 땅은 사람과 물건을 가득 싣고 떠나는 배와 같아서 그곳에 사는 사람은 크게 번성하고, 재물이 산 같이 쌓이는 길지입니다. 이렇게 좋은 행운도 있지만 키나 돛대나 닻이나 뱃사공이 없거나 제 역할을 다하지 못 할 때는 배가 전복되거나 표류하는 위험도 안고 있습니다. 항해하는 사람들이 항상 배를 정비하고, 수리하고, 정성스레 돌보듯이, 행주형 땅에 사는 사람들도 늘 지형지물을 정비해서 훼손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서야 합니다.
MC ; 그러니까 명당이란 게 행운만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다루었을 때는 파선하거나 표류하는 위험성도 함께 갖고 있다는 뜻이군요.
김 ; 그렇습니다. 땅은 전적으로 좋은 것만 갖춘 완벽한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떻게 관리하고, 가꾸느냐에 따라 복이 되기도 하고, 화가 되기도 하는 거지요. 해인사는 뜯겨나간 돛대바위 대신에 수미정상탑을 세움으로 해서 행주형의 명당으로서 갖출 것은 다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제 망망대해를 헤쳐 나아가야하는 스님들의 대승적 지혜와 용맹정진으로 불국토를 이룩하는 일만이 남은 거지요.
MC ;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현대에 비보탑을 세운 해인사의 처사는 시대의 물결을 거슬러가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김 ; 언뜻 생각하면 그렇기도 하지요. 자초지종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돛대바위를 깨뜨려낼 당시는 과학적인 사고에 입각한 생활방식만이 인류의 평화를 약속한다는 과학만능주의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때입니다. 아마 저절로 생긴 바위덩어리를 높이 솟았다고 돛대로 생각한 전통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바위를 깨뜨려냈을 겁니다. 돛대바위를 없앤 후 곧 해인사는 일제의 탄압에 시달림을 받게 되었고, 해방 후에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혼란이 계속 되었습니다. 돛대 없는 배가 표류하는 형국이 된 거지요.
MC ; 그러니까 20세기에 가장 빛나는 업적이라는 과학적 사고를 적용시켜 돛대바위를 없앴다가 다시 전통 사상으로 회귀해서 탑을 세운 셈이군요.
김 ; 현대교육의 과학적 사고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풍수사상이나 우리의 전통을 미신으로 규정해서 돛대바위를 없앴다가 그 자리에 탑을 세웠지요. 해인사는 전통사상과 과학의 미신논쟁을 비교할 수 있는 검증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MC ; 풍수와 과학의 미신논쟁을 검증 비교할 수 있는 곳이라면 눈으로 확인하고 직접 체험한 어떤 사례가 있었다는 뜻인 것 같은데요?
김 ; 그렇습니다. 1972년은 중국이 ‘죽의 장막’을 걷어내고 미국과 화해했던 해입니다. 그때 미국 닉슨 대통령과 중국 주은래는 핑퐁외교로 불리는 탁구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우리나라는 운동경기보다는 문화유산으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그 대상이 바로 해인사가 소장하고 있는 고려대장경이었습니다. 팔만대장경의 가치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이 초라하고 비과학적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대장경판의 명성에 걸 맞는 화려하고 웅장한 장경각을 짓고 싶었던 것이죠. 당시는 남북관계가 최고의 긴장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박대통령은 폭격을 당해도 끄떡없는 지하 돔식 건물에 대장경판을 수장하고, 지상 1층에 전시관과 체험관 같은 시설을 배치하는 방법을 검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때 해인사 스님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결사반대에 들어갑니다.
MC ; 그때가 서슬 퍼런 유신시대일 것 같은데, 스님들의 반대명목이 무엇인진 몰라도 효과가 있었겠습니까?
김 ; 그 계획은 지금의 장경각 법보전 위쪽 35m 지점에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짓는 것으로 설계되었습니다. 돔식의 지하 수장고를 만들기 위해서는 땅을 파야합니다. 떠나가는 배의 형상인 행주형의 명당에 땅을 파는 행위는 배의 바닥에 구멍을 뚫는 거와 같은 겁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몸으로 건설장비의 진입을 막아내는 극한 사태까지 벌어졌던 겁니다.
MC ; 땅을 파서 행주형의 배 바닥에 구멍이 뚫리면 배가 침몰한다는 풍수원리로 스님들이 빈대를 한 거군요.
김 ; 그렇습니다. 마치 갑오개혁 때 단발령이 내리자 我頭可斷 我髮不可斷, ‘내 머리는 베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면서 의병을 일으켰던 그 기세와 같은 거였지요. 스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자 무소불위의 유신정부도 한 발 물러섭니다.
MC ; 유신정부가 한 발 물러섰다는 것은 해인사 스님들과 정부 당국 간에 적당한 합의가 이루어 졌다는 뜻인 것 같은데요. 그 결말은 요?
김 ; 지하 돔은 없애는 것으로 설계가 변경되고, 장소는 내청룡 바깥, 해인사 본전에서 동남쪽으로 등성이 하나를 넘어선 곳에 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지금의 선원입니다. 정면 13칸 측면 2칸 472평의 엄청난 규모입니다. 대통령의 특명으로 최신 공법과 온갖 기술을 다 동원해서 2년 걸려 지은 새 대장경 판고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MC ; 최첨단 장비와 기법을 활용해서 가장 과학적으로 지었을 새 장경각에 문제가 생기다니 선뜻 이해가 안 되는데요 .
김 ;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질법한 의문이지요. 건물이 완공되자 시험 삼아 상당수 대장경판을 옮겨놨습니다. 옮겨 놓은 지 두어 달도 못돼서 경판이 갈라지고, 비틀어지고, 곰팡이가 피고, 결로 현상이 생겼습니다. 700년이 넘도록 아무 탈 없이 잘 보존되어 왔던 대장경판이 과학적 보관으로 인해 큰 수난을 당하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생긴 거죠.
MC ; 온도, 습도가 자동으로 조절되는 장비와 온갖 최신 설비가 다 갖춰졌을 경판고에 왜 이런 문제점이 생겼을까요?
김 ; 폭격에 견디도록 튼튼하게 짓는 데만 치중했지 경판과 수분의 상관관계나 나무의 수축이나 특성, 바람 길이나 공기의 흐름에 대한 고려가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스님들의 항의가 빗발쳤지만 당국은 묵묵부답으로 쉬쉬하기만 했습니다. 새 건물에 옮겼던 경판들은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고, 몇 차례에 걸친 기술검토회의가 개최되었지만 뾰족한 대책이 나올 리 없었죠. 결국 대장경 판고로는 부적당 하다는 결론을 내려 폐쇄시키고, 1983년 동안거부터 지금까지 선원으로 쓰고 있습니다.
MC ; 미신 신봉자로 비난받으면서까지 행주형 절터 관념을 고수했던 스님들이 천년 고찰 해인사를 지켜낸 거로군요.
김 ; 그렇지요, 원래 계획대로 장경각 뒤편에 지하 돔식 수장고와 시멘트 건물이 들어섰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하지요. 해인사 스님들은 수행 못잖게 드세기로도 유명합니다. 지금도 아랫동네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축구시합을 하는데 스님들이 이기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평소에 족구 같은 가벼운 운동으로 체력을 단련해서 수행에서 오는 체력감소를 최소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인사 스님들의 힘이 드센 것도 가야산이 석화성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 화마를 누르는 염승
MC ; 석화성이라 하셨는데, 석화성이 무언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김 ; 석화성이라는 건 산 봉우리가 뾰족뾰족한 바위들로,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보이는 험한 산을 일컫습니다. 숙종 때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가야산은 경상도에는 없는 석화성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곳에 살면 성격이 불같고, 활달하고, 화재도 자주 일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MC ; 가야산이 석화성이기 때문에 불이 자주 나고, 성격이 불같이 급한 것을 조절하기 위한 또 다른 비보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요.
김 ; 약한 것을 보충해주는 것을 비보라 하고 강한 것을 누그러뜨리는 것을 염승 또는 압승이라고 합니다. 해인사에는 지금도 염승의 풍습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적기에는 1695년부터 1871년까지 176년 동안 해인사는 7번의 큰 화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해인사 앞의 남산제일봉이 석화성이기 때문에 그 화기가 해인사에 뻗쳐 불이 자주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석화성인 남산제일봉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5월 단옷날 해인사에서는 소금 담은 단지를 남산 제일봉에다 묻는 염승을 합니다.
MC ; 남산제일봉의 화기를 누르기 위한 염승으로 왜 소금단지를 정상에다 묻는 걸까요?
김 ; 그건 음양오행을 일상생활에 적용시켜온 상생과 상극의 원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행이라는 건 목화토금수를 말하는데 이것은 세상 만물을 이루고 있는 원소입니다. 오행 중에 불을 누르는 물, 즉 수는 방위로는 북쪽이고, 계절로는 겨울이고, 색깔로는 검정이고, 맛으로는 짠맛입니다. 소금은 짠맛이니까 오행으로 수에 해당합니다. 수극화 즉 물이 불을 제압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꼭대기에 묻는 이유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의 운동을 응용한 겁니다. 이처럼 오행의 원리를 실제로 적용한 예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MC ; 소금단지 묻는 남산제일봉을 보통 매화산이라고 하지요.
김 ; 그렇습니다. 매화라면 보통 봄을 알려주는 꽃으로만 알고 있는데, 묻을 매(埋)에 불 화(火)를 쓰기도 합니다. ‘불을 묻어두고 있는 산’의 뜻으로 산의 생김새와 이름의 의미가 부합되지요.
MC ; 소금단지를 단옷날 묻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김 ; 단오는 ‘단양’, 또는 ‘천중절’이라 해서 일 년 중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입니다. 불을 상징하는 양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날, 물의 기운인 소금으로 그 기세를 꺾어 눌러보겠다는 의도입니다. 또 실제로 이때가 일 년 중 기후가 가장 건조할 때이기도 합니다. 모두 불조심을 하고 불의 고마움을 알자는 뜻으로 이 시기를 택한 것 같습니다.
MC ; 가야산 전체가 타오르는 불꽃형상의 석화성이라고 하셨는데, 하필 남산제일봉에다 소금을 묻는지 궁금해지는데요?
김 ; 남산제일봉에 묻는 이유는 음양오행설에서 찾아야 합니다. 남산제일봉은 기암괴석들이 마치 매화꽃이 핀 것 같다고 해서 梅花山이라고도 하고, 길게 이어진 날카로운 바위 능선이 마치 부처님 형상과 같다고 해서 천불산이라고도 부르는데, 높이가 1010m입니다. 이 매화산이 바로 해인사의 남쪽에서 해인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남쪽은 오행으로는 ‘화’ 즉 불에 해당합니다. 불의 방향에서 불의 기운이 직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으니 화기가 바로 와 닿는다는 겁니다. 또 소금은 여기만 묻는 것이 아니고, 다른 곳에도 많이 묻습니다.
MC ; 매화산 말고 어디에 어떤 절차로 묻는지 알고 싶어지는데요.
김 ; 해인사 소금염승은 공개적으로 시행되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 편입니다. 이참에 해인사 단오절 행사 전체를 말씀드리는 게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단오는 보리농사를 짓던 시절에는 지금의 설이나 추석 같이 큰 명절이었습니다. 이 풍속이 아직까지 사찰에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단오가 되면 해인사 승가대학 학인 스님들은 축구시합을 하고, 신도들은 극락골 마애불 앞에서 사시공양을 올리고, 선원 스님들은 소금 염승을 합니다. 이날은 새벽부터 행사준비로 경내가 분주해집니다.
MC ; 그러니까. 해인사의 단오절은 각 단체마다 벌이는 행사를 달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 ; 그렇습니다. 새벽 6시 반, 대적광전 앞에서부터 소금 염승이 시작됩니다. 사중의 소임을 맡은 스님들과 종무소 직원들이 다 나와서 부처님께 삼귀의를 올리고, 반야심경을 봉독하고 나서, 대적광전 축대에 마련된 구멍에 스님들이 소금을 한 줌씩 차례로 넣어서 가득 채웁니다. 그 위에다 물을 부어서 소금을 녹입니다. 소금은 원래 물만 상징하는 게 아니라 민속에서는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는 정화, 사악한 것을 쫓아내는 벽사, 병을 낫게 하는 약,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로, 경제적으로는 귀한 재물로 쓰였기 때문에 대적광전의 ‘소금 묻이’는 여러 가지가 복합된 것으로 보여 집니다.
MC ; 해인사의 주전인 대적광전 앞 축대에 소금 염승을 실시하기 위한 소금구멍이 있었군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김 ; 대적광전 앞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종무소 앞 우화당 쪽에 절구통같이 생긴 소금염승 돌이 있습니다. 이곳에도 스님들이 돌아가면서 소금을 가득 채우고 물을 붓습니다. 이렇게 절구통처럼 생긴 소금염승 돌이 해인사 큰절 경내와 산내 암자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지고, 묻혀 지고, 없어진 것이 부지기수이었을 텐데도 이렇게 많이 남아 있는 걸 보면 예전엔 화재예방에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MC ; 본 절 경내와 산내 암자에 흩어져 있는 돌구멍에 소금을 채우는 행사를 끝내고 매화산으로 가는 모양이지요.
김 ; 꼭, 그런 절차가 있는 건 아닙니다. 경내 소금 염승은 소임을 맡은 스님과 종무소 직원들의 몫이고. 경내 행사가 끝날 때쯤 준비를 끝낸 선원 스님들을 중심으로 100 여명의 대중이 매화산을 오릅니다. 녹음이 짙어가는 산길에 길게 이어지는 스님들의 행렬은 물이 흐르듯, 구름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고, 그침이 없습니다. 산길이 가팔라 숨이 차면 다리쉼을 하면서 스님들은 수리취떡과 앵두를 일반 참석자들에게도 나누어 줍니다.
MC ; 스님들이 참석자들에게 수리취떡과 앵두를 나누어 준다? 왜 수리취떡과 앵두를 먹는지 궁금해지는데요.
김 ; 둘 다 단옷날 먹는 명절 음식입니다. 구태여 이유를 찾자면 앵두는 색깔이 불처럼 빨갛기도 하지만 화성이 강한 식품으로 분류됩니다. 그래서 화성인 심장을 북돋아 혈액순환을 좋게 해서 피부를 탄력 있게 해준다고 되어 있습니다. 화기를 누르기 위해 떠나는 길에 간식으로는 안성맞춤이지요.
수리취떡은 단옷날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단오를 보통 수릿날이라고 하는데 이 어원이 수리취에서 왔다고 해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취나물은 종류가 많은데, 그 중에서 제일 크고 모양이 좋은 것이 수리취입니다. 단오가 되면 한창 자라는 수리취를 뜯어다 발음이 비슷한 수레바퀴모양으로 떡을 빚어 먹기 때문에 수릿날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MC ; 험한 매화산을 어렵사리 오른 대중들의 다음 행동이 궁금해지는데요.
김 ; 사시가 되면 염승이 시작됩니다. 가야산을 향해 삼귀의를 올리고 소금이 가득 채워진 자그만 단지에 물을 붓고 뚜껑을 덮어 다섯 방향에다 묻고 꼭꼭 밟습니다. 이어서 소금을 싼 한지 꾸러미를 역시 다섯 방위의 바위 사이에 끼워 넣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MC ; 다섯 방위에다 묻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고, 이때 사용되는 소금의 양은 어느 정도인지 알려져 있습니까?
김 ; 다섯 방위란 건 동서남북 사방에 중앙을 더해서 5방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공간적으로 화기가 어느 쪽으로도 뻗어가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는 매년 행하는 행사니까 유효기간이 1년이 되겠지요. 소금의 양은 보통 10kg짜리 세 포대를 쓰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MC ; 선원 스님들이 매화산에 오르는 것은 소금염승의 목적 외에 건강을 위한 탁월한 의식이라 생각되는데요. 비슷한 의례가 다른 곳에도 있습니까?
김 ; 비슷한 소금 염승이 영축산 통도사에도 보입니다. 통도사에서는 매년 단옷날 아침 구룡지에서 용왕재를 올립니다. 이 용왕재에는 한지로 항아리 입을 봉한 수십 개의 단지가 등장하는데, 이 속에 화기를 막아내는 소금이 들어 있습니다. 통도사의 소금염승은 스님들이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건물의 네 귀퉁이 평방위에 소금단지를 올려놓는 것이 해인사와 다른 점입니다. 작년 단옷날 올렸던 소금단지는 내려서 신도들에게 나눠 줍니다. 이 행사가 끝나고 나서 스님들은 축구시합에 들어갑니다. 소금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이와 비슷한 염승 비보가 민간에도 많이 있습니다.
MC ; 화기를 누르기 위한 민간의 염승 비보, 한 번 알아 봤으면 좋겠는데요.
김 ; 대구의 앞산, 대덕산이 가야산과 같은 석화성입니다. 그래서 대구에 큰불이 자주 일어난다는 겁니다. 조선 중종 때 발간된『동국여지승람』과 『대구읍지』에 이 앞산의 왕성한 화기를 누르기 위해서 연귀산에 돌거북을 만들어서 앞산을 남쪽으로 바라보게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연귀산이 지금의 제일여중 자리인데, 지금도 교사 앞에 돌 거북이 있습니다.
MC ; 거북이 화기를 제압한다. 어떤 원리로 불을 막는지 궁금해지는데요.
김 ; 이것 역시 음양오행설에서 찾아야합니다. 거북은 현무입니다. 현무는 오행으로 ‘수’에 해당하고 방위로는 ‘북’쪽이고 음양으로는 ‘음’입니다. 물의 방향인 ‘북’에서 불의 방향인 ‘남’을 제압한다는 유감주술입니다.
MC ; 보통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라 할 때 현무가 거북이고 물을 상징한다는 말씀이시죠. 이렇게 염승을 했는데도 서문시장 화재, 금호호텔 화재, 지하철 중앙로역 화재 같은 대형 화재가 왜 일어났을까요?
김 ; 지금 제일 여자 중학교 교정에 가면 돌 거북이 본래의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라보는 방향도 달라진데다 철책으로 둘러놨습니다. 우스개로 사람들은 철창에 갇힌 현무가, 동쪽을 보고 있는 거북이 남쪽에 숨어있는 화기를 어찌 누르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MC ; 문화유산을 귀찮게 여기고, 소홀히 취급하는데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한 말씀으로 알겠습니다. 과연 이런 염승이 효험이 있었을까요?
김 ; 효험이 있었다, 없었다는 것은 단정적으로 말씀드릴 성질은 아니고, 화마로부터 절을 지켜내겠다는 스님들의 지극정성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분명합니다. 일례로 6.25 때 목숨을 걸고 폭격을 막아낸 일은 이런 염원이 이루어 낸 한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3. 해인사를 폭격에서 구해낸 영웅
MC ; 해인사가 6.25 때 건봉사나 오대산 월정사처럼 소실당할 뻔 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는데, 청취자들이 무척 궁금해 하실 것 같습니다.
김 ; 6.25 때 인천상륙작전으로 중부지방을 국군이 장악하자 남쪽에 내려와 있던 북한 인민군들이 돌아갈 길을 잃게 됩니다. 인민군들이 지리산으로 몰려들어 백두대간을 도주로로 삼는 바람에 일선이 아닌 후방에서 대대적인 인민군소탕작전이 강행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서남지구 특별경찰대가 지리산 공비토벌에 투입되었습니다. 수적인 열세와 장비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자 1950년 7월부터는 공군과 육군도 가담해서 지상과 공중 합동작전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이때 가야산에도 9백 명 가까운 인민군 패잔병들이 들어와서 해인사를 점령했다는 경찰의 첩보가 날아듭니다. 대구에 있던 미 공군작전본부에서는 사천에 주둔하고 있는 제1전투비행단에 출격명령을 내립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위대한 작전이 탄생합니다.
MC ; 가슴 뭉클하게 한 위대한 작전이 어떤 것이었는지 기대되는데요.
김 ; 당시 제1전투비행단 작천참모였던 장지량 중령과 전투비행단장 김영환 대령은 의기투합합니다. 2차 세계대전 때 파리가 독일군에게 포위되자 파리방위사령관은 군인으로서 치욕을 무릅쓰고 전격적인 항복을 하므로 해서 파리의 유서 깊은 문화유산들이 보전될 수 있었고, 또 미군들이 일본의 역사 도시 교토를 폭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해인사에 출몰한 공비들은 식량탈취에 목적이 있으니까 곧 돌아갈 것이다, 그들이 은신처로 돌아가고 나서 출격하자는 계획을 세우고 ‘날이 저물었다’, ‘일기가 불순하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서 출격을 계속 늦춥니다. 그때는 날이 맑은 낮에는 아군이 승전하고 비가오거나, 밤이 되면 적이 유리하다는 징크스가 있었습니다. 미 고문단 윌슨 대위는 명령불복종을 대통령에게 알리겠다면서 출전을 다그쳤습니다. 이때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이 비행기를 몰고 와서 ‘너희들을 포살시키라’는 대통령의 명령이 떨어졌다며 노발대발했습니다.
MC ; 대통령에게도 출격명령 불복종 사건이 보고된 것 같은데, 포살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김 ; 이적행위나 명령불복종은 총살형인데, 총을 쓰지 말고 대포를 쏴서 죽이라는 겁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화가 단단히 났었던 거지요. 1951년 12월 18일 운명의 날이 밝았습니다. 며칠간 질척거리던 진눈깨비도 그치고 아침 해가 밝게 떠오르자 사천 제1전투비행단에서는 비상벨이 울리고, F-51 무스탕 전투기 1개 편대, 네 대가 굉음을 울리면서 활주로를 이륙했습니다. 1호기 편대장 김영환 대령, 2호기 박희동, 3호기 강호륜, 4호기 서상순 중령으로 편성된 공군기는 낙동강을 따라 북상하다가 함안 상공에서 가야산 해인사를 향해 기수를 돌렸습니다.
MC ; 6.25 당시 우리 공군의 주력기는 F-51이었던 모양인데요, 무장 상태는 어떻습니까?
김 ; F-51기는 ‘무스탕’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6.25가 터지고 나서 도입된 전투기인데 6.25 때 엄청난 활약을 합니다. 비행기마다 500파운드 폭탄 2개, 로켓탄 6개, K-50 기관총과 실탄 1800발을 싣고 있었고, 편대장은 750파운드짜리 네이팜탄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최신 무기들을 다 갖추고 있었던 셈입니다.
MC ; 보통 정찰기가 전폭기를 유도한다던데, 정찰기는 출격하지 않았나요?
김 ; 물론 출격했지요. ‘모스키토’라고 2차 대전 때 맹위를 떨쳤던 정찰기가 공격 목표로 떨어뜨렸던 연막탄이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에서 하얀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편대장의 ‘공격개시’ 명령 한 마디면 해인사는 완전히 불바다가 될 절대 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적들이 해인사로 몰리고 있으니, 공격 명령을 내려 달라’는 편대원들의 재촉이 잇달았습니다. 그러나 편대장의 명령은 뜻밖이었습니다. ‘지금 해인사로 몰리고 있는 사람들은 인민군들이 끌고 간 우리 양민들이다. 편대장의 지시 없이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정찰기에서는 ‘편대장은 무얼 하고 있나 네이팜탄으로 해인사를 즉시 공격하라’는 독촉훈령이 빗발치고 있었습니다.
MC ; 가슴이 다 조마조마해지는 것 같은데요. 다음에 이어지는 명령은 무엇이었습니까?
김 ; 급강하, 급상승, 선회를 몇 번 한 뒤 해인사 주변에 교묘하게 위장된 적들의 아지트를 기관총으로 공격하고 폭탄은 몇 개의 능선 너머에 있는 적의 기지에 투하하는 것으로 작전을 끝냈습니다.
MC ; 상식적으로 군인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으니 그 후유증이 만만찮았을 것 같은데요.
김 ; 당연하지요. 그날 저녁 미 공군 고문단의 윌슨 소령이 합동작전본부 장교들을 대동하고 왔습니다. 왜 정찰기가 연막탄으로 지정해 준 해인사를 폭격하지 않고 엉뚱한 곳을 공격했는지 따졌습니다. 김 대령은 해인사를 공격해서 공비들이 섬멸된다면 응당 폭격을 했겠지만 귀중한 문화유산만 불태우게 되고 공비들은 장소를 이동해서 다시 준동할 것이고, 전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 하는 작전이란 것을 주장했습니다. 윌슨 소령은 ‘김 대령은 사찰 문화재가 국가안위보다 중요하냐.’라고 물었습니다. 김 대령은 ‘사찰과 문화재가 국가보다 중요할 수는 없지만 공비보다는 중요하다. 영국은 세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꾸지 않는다고 했지만, 우리에게는 세익스피어와 인도 둘을 다 줘도 바꾸지 않을 귀중한 문화유산이 있다. 그게 바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이다.’ 라고 응수 했습니다. 죽음까지 각오한 김 대령이기에 떳떳하고 거침이 없었습니다. 김 대령의 확신에 찬 자세와 문화유산 사랑에 감동한 윌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례를 붙이면서‘ ’김영환 대령 같은 훌륭한 상관을 모시고 있는 대한민국의 공군 장병들이 부럽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부러워하는 낯빛으로 떠나갔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MC ; 만약에 군인정신만을 고집해서 상부의 명령대로 해인사를 공격했더라면... 상상만 해도 아찔합니다.
김 ; 그렇지요. 군인에게 있어서 명령은 목숨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또 국민의 목숨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도 있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군인도 군인이기 전에 국민의 한 사람입니다. 김영환 대령은 군인으로서의 명령보다 국민으로서, 군인으로서 순리를 택한 선지자였다고 생각합니다.
MC ; 세상에는 수많은 영웅들이 있지만 진정한 영웅은 김영환 대령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김 ; 맞습니다. 아무리 불가피한 전쟁이라 하더라도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켜서 승리한 사람을 영웅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많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내고 귀중한 것을 파멸에서 건져낸 사람이 진정한 영웅이지요. 최대 위기의 순간에서 이런 결단을 내린다는 것은 영웅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몇 년 전 6.25 때 노근리 주민 학살 사건의 당사자였던 미군 데일리라는 사람이 피해자였던 노근리 주민들과 만나는 장면이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은 ‘사격명령은 내려졌고 군인이기 때문에 명령에 따랐을 뿐이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격분했었습니다.
MC ; 자기는 상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니까 책임이 없다는 거겠지요. 김 ; 물론 그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항할 능력도 없는 비무장의 민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총을 쏘았다는 것은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고 봅니다. 미국의 데일리와 우리의 김영환 대령을 비교하면 누가 진정한 군인인지 단박에 알 수 있지요.
MC ; 우리시대의 영웅, 김영환 그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궁금합니다.
김 ; 보통 조종사라고 하면 빨간 마후라, 신사, 멋, 낭만, 하늘의 사나이 같은 것이 연상됩니다. 공군 조종사가 이런 이미지로 국민들의 눈에 비치게 된 것은 조종사들의 일상생활이 김영환 장군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면서부터라는 데에 연구자들의 의견이 일치되는 것 같습니다. 멋, 낭만, 용기, 정열 어떤 수식어가 붙어도 어울리는 전설적인 군인이었습니다.
MC ; 요즘 말로 하면 얼짱, 몸짱에 지성까지 갖춘 엘리트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 ; 그렇지요. 사진을 보니까 시원시원한 얼굴에 야무진 체격이 아주 개성적이고 매력이 넘쳤습니다.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 김준원은 대한제국 말 황실에서 세운 황립 무관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김좌진 장군, 지청전 장군도 이 학교 출신이지요. 그런데 1909년 일본이 무관학교를 폐교시키고 그 생도들을 일본육사에 편입시키는 바람에 일본군으로 근무하게 됩니다. 러일전쟁 참전 후에 오산학교와 배재학교에서 역사 지리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어요. 어머니 변상희 여사는 진명여학교 출신의 신여성이었고요. 사업 수완이 좋아서 우리나라 최초의 예식장 만화당 예식부를 만들어 큰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MC ; 무관의 대를 이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군요.
김 ; 예, 부잣집 막내로 성장한 김영환은 조선 최고의 명문 제일고보, 지금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쓰다누마 비행학교에 입학했다가 해방직전인 1944년에 귀국해서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갑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귀공자 과정을 다 거친 거지요. 해방이 되자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미군정 통위부 정보국장 대리로 발탁됩니다. 이때 미군정을 상대로 한 그의 활동이 훗날 공군 창설에 밑거름이 됩니다. 어딜 가나 객기 넘치고, 재치가 번뜩였습니다.
MC ; 객기와 재치가 넘쳤다면 얄개 같은 일들이 계속 터졌을 것 같은데요 .
김 ; 예,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의 형이 초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김정열 장군인데, 그의 집무실로 급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웬 비행기 세 대가 한강 인도교 다릿발 사이로 지나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서울 전 지역에 비상이 걸렸고 범인은 바로 잡혔습니다. 당시 공군 3총사로 이름을 드날렸던 김영환, 김신, 장성환이었다고 합니다.
MC ; 김신은 김구 선생의 아드님이죠. 거기다 참모총장의 아우까지 끼었으니, 전국적인 화젯거리가 되었겠습니다.
김 ; 물론이지요. 세 사람은 깜짝 쑈 한 번 부리고 헌병대 감옥으로 직행 했다고 합니다. 객기 한 번 부리고 죄 값을 톡톡히 치룬 거지요. 이런 고도의 비행술이 적의 대공포화 사이를 누비면서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한국 공군 전술의 전통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 이화여대 상공에 매일같이 비행기 세 대가 나타나서 시끄러워서 수업을 못하겠다는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이것 역시 삼총사의 짓이었습니다. 이 건은 혈기왕성한 총각이라는 점이 참작되어서 영창까지는 가지 않고 수습 되었다고 합니다.
MC ;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아이디어를 계속 창출한 것 같은데요. 전투 중에 이런 끼가 발동되면 어쩌지요.
김 ; 타고난 천성이 어디 가겠습니까, 지리산 공비 토벌에 출격했다가 적에게 피탄 되어서 남원 근방 섬진강변 모래사장에 불시착 했다고 합니다. 같이 출격한 편대기가 엄호하면서 내려다보니까 추락한 비행기에서 빠져나온 김영환이 동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안전하다는 것을 알리고는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는 섬진강에 들어가 수영을 하더랍니다.
MC ; 적진 속에 홀로 떨어진 사람의 행동치고는 지나치게 여유롭게 객기를 부린 것 같습니다.
김 ; 그렇지요. 적진 속에서의 수영, 이런 배짱은 김영환 장군을 빼고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겁니다. 거침없는 그의 일생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빨간 마후라입니다. 한국 공군의 표상인 빨간 마후라는 김영환이 처음 고안했고 최초로 착용했습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집에 들렀을 때 형수님이 입고 있는 빨간색 비단 치마가 무척 좋아 보였습니다. 조종사 복과도 잘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마후라를 만들어 달라고 조릅니다. 치마를 만들고 남은 자투리로 마후라를 만들어 줬지요, 이렇게 탄생한 빨간 마후라는 세계 조종사 가운데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 목에만 걸리게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됩니다.
MC ; 치마를 만들고 난 자투리 천이 빨간 마후라로 탄생 했군요, 예전에 빨간 마후라라는 영화도 있었지요.
김 ; 그걸 어떻게 아세요. 40년도 더 전에 나온 건데, 실화를 토대로 만든 영화지요. 신영균, 최무룡, 최은희가 주연이었지요. 몇 해 전에는 빨간 마후라를 앙드레 김이 직접 디자인해서 조종사에게 걸어주는 행사가 있었다는 보도를 봤습니다.
MC ; 그 뒤 김영환 대령은 어떻게 됩니까?
김 ; 6.25가 끝나던 1953년에 준장으로 진급해서 제1전투비행단장이 되었습니다. 그 이듬해 3월4일 강릉비행단 창단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애기 F-51 무스탕을 몰고 사천 비행장을 이륙했습니다. 그날 그의 항공기는 착륙 예정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강릉 기지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기치 않은 악천후를 만나 묵호 근방 바다에서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김영환 장군은 이 세상에 자취 하나 남기지 않고, 하늘의 사나이답게 하늘나라로 훨훨 날아 가버렸습니다.
MC ; 그야말로 영웅은 죽지 않고 사라져 갔군요. 해인사 대장경을 지켜낸 김영환 장군을 나라가 그냥 두지는 않았겠죠?
김 ; 그게 이상합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하는 군인의 책무보다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정신에 무게를 더 두었는지 그 사실이 바깥으로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불교계에서는 2002년 해인사 올라가는 비거리에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를 세웠습니다. 무궁화가 새겨진 하얀 화강암 대석 위에 오석으로 대장경판 모양을 만들고 비문을 새겼습니다. 비문은 “여기 화살같이 흐르는 짧은 생애에 불멸의 위업을 남기고 영원히 살아남은 영웅이 있다. 김영환 장군!”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비가 조촐하기 때문에 해인사를 찾는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큰절로 올라가버립니다.
MC ; 크고 화려한 것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의 눈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비쳐지겠지요. 안타깝지만 우리의 현실입니다.
김 ; 그렇지요. 크고 화려한 것만 추구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병폐가 이 깊은 산중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는 게 더 없이 서글퍼집니다. 김영환 장군이 해인사를 구해 냈지만 해인사는 또 한 번의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MC ; 또 한 번의 위기라니요? 정말 바람 잘 날이 없군요.
김 ; 해인사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가야산 빨치산들이 국군의 소탕작전으로 활동이 위축된 데다 북으로부터 철수 명령이 내려집니다. 전쟁에서 철수할 때는 적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 진지를 불태워 버리는 게 원칙입니다. 이 원칙을 알고 있던 해인사 스님들은 그들을 설득도 하고, 대들기도 하면서 불 지르는 것을 막는데 목숨을 걸었습니다. 가야산을 떠나면서 해인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 나름대로 여러 차례 회의를 했던 것 같습니다.
MC ; 정말 위기일발이네요. 인민군은 종교가 없지 않습니까?
김 ; 물론, 그들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지요. 그렇지만 그들이라고 민족의 성보를 모를 리는 없지요.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경전이기 이전에 인류가 쌓아온 문화유산입니다. 결론이 나지 않자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답니다. 투표결과 단 한 표 차이로 태우지 말고 떠나기로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MC ; 아슬아슬한 순간을 또 한 고비 넘겼군요.
김 ; 저는 김영환 장군이 군인으로서 목숨을 걸고 명령에 불복종하면서까지 대장경판을 지켜내고, 인민군이 떠나면서 해인사를 불 지르지 않은 것은 바로 팔만대장경을 조성하면서 의도했던 부처님의 가피력과 보관에 온갖 정성을 쏟은 우리 조상들과 해인사 스님들의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앞으로 어떤 위기가 또 닥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앞으로의 위기는 김영환 장군 같은 영웅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의 관심과 사랑으로 위기자체를 사전에 봉쇄해야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