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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1828)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의 스페인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그에 의해, 초기 르네상스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고전적인 대가(master)로서의 화가’ 전통은 마감되고, ‘근대적인 예술가(artist) 화가’의 역사가 시작된다. 고야는 스페인 궁정화가의 전통을 이어 세 왕 카를로스 3세, 카를로스 4세, 페르난도 7세를 위해 일한 고전적 의미의 마지막 대가이자, 전통적인 회화 형식을 차용하되 주제에서 거리를 두는 새로운 시선으로 그 의미를 해체한 최초의 근대적 예술가였다. 그는 82년의 긴 생애 동안 종교화, 초상화, 장르화뿐 아니라 당대의 역사, 개인적인 환상이라는 다양한 주제를 프레스코, 유화, 동판화, 석판화 등의 매체로 다루어 회화 7백여 점, 판화 3백여 점, 드로잉 9백여 점을 남겼다. 작품의 양식은 로코코에서 낭만주의까지 변화의 폭이 넓다.
고야는 1746년에 스페인 동북부 아라곤 지방의 푸엔데토도스(Fuendetodos)라는 시골 마을에서 도금을 하는 장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라곤의 주도 사라고사로 이주해 가톨릭 수도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여기서 사귄 친구 사파테르(Martín Zapater)와 1775부터 1799까지 주고받은 편지는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차 자료이다. 14살이 되는 1760년부터는 사라고사의 종교화가 호세 루산(José Luzán Martínez) 화실에서 4년간 그림을 배웠는데, 이곳은 그보다 먼저 성공하게 될 화가이자 장래의 처남인 프란시스코 바예우(Francisco Bayeu)가 그림을 배운 곳이기도 하다.
바예우는 1758년 왕립 아카데미의 장학생으로 마드리드 활동을 시작했고, 고야도 1763년과 1766년에 왕립 아카데미의 역사화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아카데미 입성을 시도했으나 두 번 다 실패했다. 1752년에 페르난도 6세가 설립한 왕립 아카데미(Real Academia de Bellas Artes de San Fernando)는 스페인 출신 화가를 길러내기 위한 가장 권위 있는 기관이었다. 벨라스케스로 대표되는 황금기 이후 스페인 미술은 쇠퇴해갔다. 그를 후원했던 펠리페 4세의 아들 카를로스 2세가 자손 없이 죽고, 그 뒤를 루이 14세의 손자 펠리페 5세가 이어받으면서 스페인의 왕가는 합스부르크에서 부르봉으로 대체되었다. 마드리드의 부르봉 궁정 미술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외국에서 온 화가들이 지배했다. 고야가 활동을 시작할 당시 궁정과 아카데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사람도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보헤미아 출신의 신고전주의 화가 멩스(Anton Raphael Mengs)였다.
당대 거리의 여가와 패션의 로코코적 묘사
아카데미 입성이 좌절된 고야는 24세가 되는 1770년에 자비로 이탈리아 유학을 떠났다. 여러 도시를 돌아다녔지만 가장 오래 머문 곳은 로마였고, 이곳에서 1771년 파르마 아카데미의 경연대회에 역사화를 보냈다. 이 대회에서도 당선되지는 않았지만 좋은 평을 받았고, 고대와 르네상스 거장의 작품을 모사한 스케치북과 함께 자신감을 안고 사라고사로 돌아왔다. 1773년에 호세파 바예우(Josefa Bayeu)와 결혼하고, 사라고사에서 종교화를 그리다 1774년 말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Real Fábrica de Tapices de Santa Bárbara)의 부름을 받고 1775년 1월, 29세가 되어서야 (17살 때부터 가고 싶어했던)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 |
마드리드에서 고야가 처음 한 일은 거대한 궁궐 방안 벽을 덮을 태피스트리들의 실물크기 밑그림(cartoon)을 그리는 것이었다. 돌로 된 건물의 추위와 습기를 막고 실내에 생기를 주기 위해 걸렸던 태피스트리의 용도에 맞게, 그림은 밝고 활기찬 분위기가 대다수다. 그는 사냥, 투우와 같은 오락이나 계절별 풍속, 당대의 시골과 도시의 거리 풍경 등에 다양한 계급과 차림새의 인물들을 등장시켰다. 엘 에스코리알 식당 벽에 걸릴 태피스트리 밑그림인 [양산 The Parasol]에는 프랑스식 의상을 입은 어린 부인과 그를 에스코트하는 마호(majo) 복장의 젊은 남성이 로코코적으로 경쾌하게 그려져 있다.
태피스트리 밑그림에서 창의적인 구도와 자신감 있는 색채와 구성을 보여주었던 그는 1778년에 벨라스케스의 그림들을 판화로 만들기 시작했다. 고야는 자신에게는 스승이 셋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자연이었다. 그는 자연이 아니라 고전 그리스 조각을 모방하는 신고전주의적 교육 방법에 반감을 가졌고, 후에 아카데미에서 “회화에는 규칙이 없다”고 연설하기도 했다. 스페인 아카데미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신고전주의가 세력을 떨치고 있던 시대에 그의 판화들은, 스페인적인 것을 찾던 화단에서 벨라스케스에 대한 열광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고, 그는 선구적인 감식안을 가진 사람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1780년에 고야는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788년에는 카를로스 3세가 죽었고, 1789년에 고야는 이어 즉위한 카를로스 4세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궁정화가인 고야는 왕족의 초상화를 그리고, 사라고사와 마드리드의 주요 성당의 벽화 작업을 하면서 태피스트리 밑그림도 계속 그려야 했다. 그가 1775년부터 1792년까지 그려 제출한 카툰 수가 63점이나 되었다. 과로에 시달리던 그는 1793년에 휴가를 얻어 세비야를 여행했는데 도중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중병에 걸렸다. 카디스(Cádiz)에 있는 후원자의 집에서 요양을 해서 회복은 되었으나 청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때 그의 나이 47살이었고 이후 반평생을 화가는 귀머거리로 살았다.
인습과 계몽의 시대 초상 | |
1780~90년대에 고야는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왕족, 귀족뿐 아니라 유력한 정치가, 교양 있는 개혁가, 부유한 자선가 등 상류 계층의 다양한 인물들이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했고 그 과정에서 이들과 쌓은 친분과 여기서 얻은 경제적인 소득은 그가 독자적인 회화 양식을 과감하게 추구할 자유를 주었다. 절제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초상화 [가스파르 멜초르 데 호베야노스 Gaspar Melchor de Jovellanos]와 [라 솔라나 후작 부인 The Marquesa de la Solana]의 모델은 화가가 공감을 보였던 계몽주의를 옹호한 엘리트 귀족들이다. | |
18세기는 중세적인 주술과 이성에 대한 믿음이 공존했던 계몽주의 시대였다. 당시 스페인은 고압적인 교회와 무자비한 전제군주, 나태한 귀족이 지배하는 야만적 폐쇄 사회로 악명이 높아 유럽 안에서도 이국적인 변방 취급을 받았지만, 그 안에서도 볼테르와 루소의 나라 프랑스에 호감을 가지고(afrancesado) 미신과 인습을 타파하려는 열의를 가진 계몽주의자(ilustrado)가 있었다.
고야는 1799년에 출판한 판화집 [변덕 Los Caprichos]을 통해 계몽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에칭과 애쿼틴트를 실험적으로 혼합한 80점의 동판화로 이루어진 이 판화집에는 화가 스스로 “인간의 과오와 악덕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했다는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그 한 예로 판화집 50번 [친칠라 Los Chincillas]에는 자물쇠로 귀를 닫고 눈을 감은 채 눈 가린 당나귀가 떠 넣어주는 죽을 먹는 두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의 몸을 감싼 문장은 귀족 출신임을 나타낸다. 나태와 미신이 빠진 이들은, 직접 보고 들어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눈가린 당나귀로 표현된 무지로 배를 불리고 있다. 제목 친칠라는 당시에 인기 있던 유사한 내용의 연극의 주인공 이름이다.
이 판화집의 광고에서 화가는 이 그림의 ‘독창성’을 강조했는데, 실제로 주문 작품들에서는 할 수 없었던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해 환상과 현실이 혼합된 독특한 이미지들을 만들어냈다. 그 중 일부는 성직자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은 것도 있고, 마녀를 그린 그림은 외설적인 느낌도 줬다. 그런 이유 때문에 종교재판소의 화를 당할까 두려워 고야는 이 판화집을 판매 10일만에 모두 회수해, 1803년에 원판과 함께 왕립 인쇄소에 기증하고 이를 대가로 (여섯 명의 자녀를 어려서 잃고 얻은 유일한) 아들의 연금을 확보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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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 50번 “친칠라”] 1799년 종이에 에칭과 애쿼틴트, 20.8×15.1cm, 릴 미술관, 프랑스 | |
근대의 초상화, 진실의 거울
이 판화는 화를 피했지만 그를 종교재판소에 세운 작품이 있긴 했는데, 그것이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옷 벗은 마하 Nude Maja]이다. 공식적으로 누드가 금지되어 있고, 왕조차도 선대의 소장품 중에 있는 누드를 없애려고 했던 스페인에서 이런 누드를 주문한 것은 당대 최고의 실력자 마누엘 고도이(Manuel Godoy)였다. 그는 사냥밖에는 관심이 없었던 카를로스 4세를 대신해 군을 통솔하는 총사령관이자 정치를 책임지는 수상이었고, 왕비 마리아 루이사(María Luisa de Parma)의 공공연한 애인이기도 했다. 1808년에 실각하고 망명한 그의 소장품은 국가가 몰수했는데, 그 안에 이 작품과 또하나의 유명한 스페인 누드인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도 있었다. | |
[옷 벗은 마하] 1797~1800년경 캔버스에 유채, 98×191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
고야의 누드는 벨라스케스처럼 뒤돌아 누운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누워 있고, 벨라스케스가 그려 넣어 신화라는 맥락을 만들었던 큐피드조차 없는,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의 몸을 대상화한 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세속적인 누드이다. 처음 몰수되었을 때는 ‘집시’라고 불렸는데, 1815년 종교재판소가 압류했을 때 ‘마하’라는 제목이 붙었다. (마하maja는 마호majo의 여성형으로 이들은 고야 시대 스페인에서 특이한 옷차림과 행동거지로 주목받았다. 이들은 낮은 계급에 행실도 점잖치 않은 것이 보통이었지만, 이들의 패션은 귀족들까지 모방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실제 모델은 고도이의 정부인 페피타(Pepita Tudó)로 확인되었다. 그녀의 성기는 화면의 정 가운데,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있고 손도 머리 위로 치켜 올려 아무 곳도 가리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관람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시선은 관람자의 모습을 되비추어 내어 당혹하게 하는 면이 있다. | |
[카를로스 4세의 가족] 1801년 캔버스에 유채, 280×336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
고야는 1799년에 스페인 화가로서의 최고 영예인 수석 궁정화가의 자리에 오른다. 이 자리에 오른 직후 그가 그린 왕족 초상화인 [카를로스 4세의 가족 The Family of Carlos Ⅳ]는 얼핏 보면 전통적인 왕가의 초상화 같으나 볼수록 기이한 작품이다. 구도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과 유사하게 화면 왼쪽에 캔버스와 화가가 보인다. 중앙의 왕비 자세도 [시녀들]의 마르가리타 공주를 연상시킨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이 후경의 거울과 그 안에 비친 국왕 부부의 모습을 통해 자연스런 이야기를 만들었던 것과 달리, 고야의 그림 속 인물들은 그냥 어수선하게 서 있다. 이들이 왕가의 일원이라는 것은 휘장과 보석 등을 통해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왕은 가까스로 왕가를 추스르고 있는 중이다.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혁명으로 1793년에 그의 7촌인 루이 16세의 목이 달아났고, 이제는 나폴레옹이 권력을 장악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오는 상황이었다. 그는 스페인 부르봉 왕실이 프랑스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7년 후 그는 왼쪽에서 두번째에 선 아들 페르난도 7세에 의해 강제로 폐위되어 망명하고, 페르난도 7세도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에 의해 왕위를 잃고 망명을 떠나게 된다.
그림 자체는 아직도 반짝반짝 광채가 나지만, 그려진 인물들이 어리석고 추해 보여서, 모델들이 이 그림에 만족했다는 점을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한다. 왕비를 대표로 한 이들은 누구보다 우월한 권력과 지위를 평생 누려왔기에, 일반적인 미의 기준에 연연하지 않을만한 자신감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벨라스케스 그림 안에 있던 거울을 고야는 모델들의 앞으로 옮긴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들 모두 앞에 커다란 거울이 있다면, 거기 비쳐 자신들도 볼 수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면, 그렇게 자신을 그림 보듯이 구경할 수 있는 거리감이 확보된 상황이라면, 실제 이상을 요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델의 뒤로 물러난 화가의 위치 또한 설득력이 있다.
그가 [변덕] 등의 판화집을 통해 그가 살고 있는 시대에 얼마나 잔인하고 어리석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그려낸 것은, 프랑스 계몽주의자와 같은 이방인의 시각에서, 즉 자기가 몸 담고 있는 현실로부터 역사적인 거리감을 확보하고, 스스로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초상화 역시 전통적인 구도나 주제를 따르는 듯 하면서도, 역사적인 거리감을 확보한 시각을 보여줌으로써, 전통을 해체하고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고 있다.
새로운 증인으로서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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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계몽주의자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던 프랑스 군대는 1808년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해 페르난도 7세를 폐위시켰고, 나폴레옹의 형 조세프가 호세 1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다. 아더 웰즐리(Arthur Wellesley) 즉 웰링턴 공작(1st Duke of Wellington)이 이끄는 영국군이 개입하여 다시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오르는 1814년까지, 스페인 전역에서는 반도 전쟁(Peninsular War)이라 불리는 프랑스에 대항한 전쟁이 이어졌다. 고야는 이 기간 동안 계속해서 궁정화가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호세 1세의 초상화를 그려 1811년에 그에게서 훈장까지 받았고, 이후 웰링턴 공작이 마드리드에 입성하자 제작 중이던 호세 1세의 초상화 얼굴을 웰링턴으로 바꿔 제출하기도 했다.
비록 사후에 간행되었지만, 전쟁 기간 동안 판화집 [전쟁의 참화 Los Desastres de la Guerra]를 통해 프랑스 군대에 의해 자행된 잔인한 살육에 대한 기록을 남겼던 화가의 이런 행적은 오늘날의 많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고야는 종교화는 제작했지만 그다지 독실한 종교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푸에블로(pueblo)라 불리는 일반 서민의 생활을 선구적으로 그린 화가로 인정받고 있지만 본인의 계급적 정체성 또한 모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신은 미천했으나 화가로 성공하면서 사치스런 생활을 즐겼고, 재산의 보전과 확대에 큰 관심을 보였다. 또한 족보에 관심이 많았고 성공한 후에 이름에 ‘데(de)’를 집어넣어 귀족처럼 보이고 싶어했다.
정치적 입장 또한 정확히 알 수 없는데, 몇몇 작품을 보고 그를 ‘비리의 고발자, 정의의 투사’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그의 행적을 보면 기회주의자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부르봉 왕조, 종교재판소, 프랑스군, 영국군 모두를 위해 일했고 어떤 쪽으로부터도 특별히 해를 당하지 않았다. 훌륭한 예술가 중에 철두철미하게 대의에 충실했던 사람을 찾아보긴 어렵다. 혁명적인 예술가도 예술가로서만 혁명적인 경우가 많다. 고야가 편지에서 ‘몸이 산 채로 태워지는 것 같았다’고 격분한 사건도 작품 수정을 요구 받아 화가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때였다.
오늘날 민중의 항거와 권력에 의한 학살의 원형적인 이미지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The Third of May 1808 in Madrid]는 프랑스 점령 때가 아니라 프랑스 군이 물러가고 페르난도 7세가 돌아오기 직전, 전쟁 기간 동안 화가의 친프랑스적 행적에 대해 의심이 가해질 때 제작되었기 때문에, 저항의 메시지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도전쟁의 도화선이 된 1802년 5월 2일의 봉기와 짝을 이룬 이 그림은, 푸에블로 곧 보통사람들을 영웅적 순교자 내지는 그리스도와 같은 구원자로 이상화시키고 있다. 미구엘 감보리노(Miguel Gamborino)가 1813년에 제작한 판화의 구도를 차용하였으되, 더욱 직접적이고 강렬한 표현력을 가진 이미지로 재창조한 이 작품은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등과 같은 작품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
검은 회화, 괴물 자체인 인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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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이시드로 순례 여행] 1821~1823년 캔버스에 유채, 138.5×436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이후에 화가는 페르난도 7세의 화가로 일하면서 당시에 새로 소개된 석판화를 시도했고, 판화 연작 [투우 Tauromaquia]를 판매했고, 사후에 소개된 판화집 [속담 Proverbios] 작업도 했다. 1819년에 화가는 ‘귀머거리 집(Quinta del Sordo)’라고 불린 마드리드 교외의 시골집을 구입하였다. 1820~23년에 이 집의 두 방 벽 전체에 14점의 대형 벽화를 그렸는데, 어둡고 기괴한 화면 때문에 [검은 회화 Las Pinturas Negras]라고 불린다. 이 그림들은 1870년대에 벽에서 떼어져 캔버스로 옮겨졌는데, 이 때 이미 훼손이 심해서 많은 부분에 복원가의 손이 더해졌다. 따라서 오늘날 미술관에 걸린 그림과 화가가 그린 그림이 차이가 많을 가능성이 있다.
그중 한 작품인 [산 이시드로 순례 여행 The Pilgrimage to San Isidro]에는 마드리드의 수호성인인 산 이시드로의 은거지로 순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광기에 어린 사악한 군중으로 보인다. 한때 이성을 믿었고, 출세를 위해 다양한 권력자들 아래서 쉼없이 일하며 예술가로서의 자유를 얻기를 소원했던 그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자발적으로 그린 그림은 어둡고 비관적이다. 그가 사회에서 몰아내기를 원했던 ‘괴물’이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1820년에 자유주의자의 헌법이 제정되었지만 1823년에 페르난도 7세와 종교재판소가 다시 힘을 얻어 반동 정치를 시작하자 고야는 집과 그림을 손자에게 넘기고 프랑스로 갔다. 이것도 무단으로 망명을 간 것이 아니라 왕에게 건강을 구실로 휴가를 얻어서 떠난 것이고, 이후 보르도에 정착해서도 다시 스페인에 들어가 왕에게 정식으로 은퇴를 허락받고 연금을 정리해서 받았다. 그는 아들 하비에르와 1812년에 아내가 사망한 후 동거한 레오카디아(Leocadia Weiss)의 딸 마리아(María del Rosario Weiss)에게 그림을 가르친 정도고 제자라고 할 만한 사람을 두지 않았다. 말년 2십여년간은 그의 인기가 줄고 아카데믹한 신고전주의풍이 유행했다. 이사벨라 2세 때 신고전주의에 대한 대안을 민족적인 주제에서 찾고자 했던 코스툼브리스모(Costumbrismo) 화가들이 그의 말기 양식과 유사한 표현적, 회화적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19세기 말 바르셀로나의 모데르니스타(modernista) 운동의 스타 피카소는 ‘작은 고야’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엘 그레코에서 고야를 잇는 스페인 전통을 계승할 화가로 부각되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고야의 주요작 대부분은 스페인, 특히 마드리드에 소장되어 있었다. 1820년대 이래 그의 판화를 접한 파리의 화가들은 그의 회화 작품을 보러 스페인으로 여행을 많이 다녔다. 들라크루아 같은 낭만주의자는 물론이고 마네, 르누아르, 세잔, 반 고흐, 툴루즈-로트렉 등도 그의 그림의 색채와 표현력에서 받은 영향을 고백했다. 상징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화가들도, 보이지 않는 공포와 환상을 시각화한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고, 그를 근대적인 미술의 선구자로 여겼다. 그는 철저하게 스페인적인 화가였지만, 그의 작품이 가진 강력한 회화성은 오늘날까지, 세계 각지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호소력을 보여주고 있다. 고야는 격동의 시대에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영화도 자주 만들어졌다. 그중 최근 제작된 [고야의 유령]은 (영화 속에 보이는 작품 연대는 다소 부정확하나) 전체적인 분위기와 배우들이 만드는 거의 모든 화면이 고야의 그림을 그대로 닮아, 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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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김진희 / 미술평론가
- 연세대학교 신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9년부터 전시기획과 문화예술행정 분야에서 일하면서, 관람자의 눈에 근거한 미술 비평을 시도해 왔다. 미술, 역사, 제3섹터에서의 활동에 관심이 있고 이들의 접점을 찾는 중이다.
발행일 2010.12.17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루브르 박물관, 프라도 미술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