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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보르도노브의 나폴레옹 평전을 읽고(2011.9.20)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나폴레옹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그 유명한 나폴레옹 평전을 읽었다. 이 책을 통해 나폴레옹의 도전과 위대함과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러나 자신이 성취한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는 무모함은 결국 또 다른 권력에 의해 세상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프랑스령 코르시카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은 프랑스어도 제대로 몰랐지만 승승장구하여 프랑스 황제가 된다. 황제의 가문 사이에 나폴레옹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당시 프랑스 전통을 무시해야 했던 나폴레옹은 홀로 고민하는 모습도 이 책은 표현하고 있어 나폴레옹의 인간적인 모습을 읽을 수가 있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에서 그치지 않았고 유럽대륙을 통일시키기 위해 군사를 몰고 종횡무진했다. 나폴레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폐위되어 엘바섬 영주로 떠나게 된다. 엘바섬에 도착한 나폴레옹은 재기를 꿈꾸며 엘바섬을 탈출하여 궁에 입성한다. 그리고 유럽대륙 통일을 위해 러시아를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영국을 중심으로 한 대불동맹과의 싸움에서 지고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유럽대륙 통일이라는 나폴레옹의 원대한 꿈과는 달리 그의 결혼생활은 소박했다. 이미 결혼하여 두 명의 자식을 둔 조제핀과의 결혼, 그리고 조제핀이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소외감 등은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공주와의 결혼으로 이어진다. 결국 마이 루이즈와 재혼을 통해 아들 로마왕(나폴레옹 2세)이 태어나지만 아들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지 못하고 폐위되는 신세가 되었다.
18~19세기 유럽을 쥐락펴락했던 나폴레옹의 활동상은 수많은 사가들에 의해 다양한 각도에서 8만여권의 책들을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의 한계는 분명히 있었다. 그것은 시대적인 상황이었다. 당시는 눈에 보이는 힘인 무력으로 통치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결국 무력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며 생을 마감해야 했다.
오늘날 치열한 정보전쟁 사회에서는 다소 지루한 이야기지만 그 포부와 패기는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다음은 이 책에서 눈길을 끌었던 대목을 정리해 보았다.
나폴레옹은 1769년에 프랑스령 외딴섬 코르시카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어도 모르던 소년이 본토에서 가난과 설움 속에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대혁명의 물결 속에 승승장구하여 이탈리아 원정에서 이집트 정복으로 이어지는 혁혁한 전공을 쌓으며 구국의 영웅으로 등장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그는 1804년에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황제 자리에 올라 유업의 절반을 제패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패주한 후 유럽 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1814년 퇴위한 후 엘바 섬에 유배 되었다. 이듬해 기적같이 재기해서 권좌에 복귀했으나 1815년6월 워털루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제국의 영광에 종지부를 찍었다. 패배한 황제는 남대서양의 고도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되어 1821년 숨을 거두었다.
황제를 따라 유배지에 온 라스 카즈가 남긴 세인트헬레나 회고록(1823)이 나폴레옹 신화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반면, 황제의 반대편에 섰던 자유주의자 샤토브리앙이 남긴 저승 비망록(1841)이 반 신화의 선봉장 구실을 했다.
나폴레옹은 독재에 항거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코르시카의 괴물이었으며 무미건조한 현실을 조롱하며 영웅시대의 향수를 노래하는 낭만주의자들에게는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였고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평화주의자들에게는 프랑스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이민족 용병 대장이었으며 독일의 침략에 복수하려는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민족정기의 화신이었다.
역사적 평가 다양
1)권력욕에 물든 정권 찬탈자?
2)프랑스 대혁명의 수호자인가?
3)군사적 모험가인가?
4)조국을 구한 애국자인가?
5)유럽 통합의 선구자인가?
6)세계 정복의 화산인가?
7)근대화의 길을 연 개혁가인가?
8)구질서를 수호한 독재자인가?
나폴레옹이 죽은 후 오늘날까지 전 세계에서 나폴레옹을 다룬 출판물은 가짓수만 어림잡아 8만여권에 이른다. 황제와 영욕을 함께한 측근들의 회고록에서 역사가들의 연구서를 거쳐 사실과 허구를 뒤섞은 역사소설에 이르기까지 하루에 한 권 이상 출판된 셈이다.
조르주 보르도노브가 나폴레옹의 진면목을 잡아내기 위해 동원하는 자료는 실로 방대하다. 그는 당대인의 회고록에서 역사들의 연구서까지, 추종자들의 추모글에서 반대파들의 비방문까지 정부 공문서와 정치 책자에서 떠도는 소문과 민중의 노랫말까지 샅샅이 뒤지며 그 속에서 인간 나폴레옹의 숨결을 찾아 나선다.
보르도노브는 나폴레옹을 평가하기에 앞서 이해하고자 한다. 그가 궁긍적으로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세계를 제패한 영웅의 위용이 아니라 고민하고 망설이면서도 주어진 상황에서 결단을 내리고 또 그로 인해 상처받는 인간의 얼굴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나폴레옹은 황제 자신이 일부러 보여주고자 했던 모습이 아니며 후대인들이 입맛대로 그려놓은 모습과도 거리가 멀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보르도노브는 오직 인간을 이해한다는 한가지 목적만 가지고 나폴레옹의 심리 속으로 들어가 있는 그대로의 나폴레옹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용재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양사학)
제1부 성장 (1769~1793)
1장 어린시절
나의 숭고한 지위는 몬테노테에서 시작된다-나폴레옹
코르시카 섬: 이탈리아의 서쪽, 프랑스의 남부, 사르데냐 섬의 북쪽에 위치한 지중해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다. 카르타고, 로마 등 다양한 세력의 지배를 받다가 1282년 제노바 공화국의 속령이 되었다. 1768년 프랑스에 팔리고 1년 뒤인 1769년 아작시오에서 나폴레옹이 태어났다.
2장 국왕의 장학생
졸업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서는 3~4년간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나폴레옹은 1년 만에 졸업시험에 통과한다.
나폴레옹은 1785년9월1일 페르 포병대 소위로 임관(16세15일 되는 날)
3장 청년 장교
1785년11월초 발랑스 포병 연대에 부임-월급 1,120리브르
자코뱅파: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급진적으로 이끌었던 정치 분파, 1793년6월부터 1년여간 혁명정부를 주도했다. 공포정치로 국내외에 반혁명 기도에 맞섰으나, 1794년7월27일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몰락했다.
1787년11월27일 저녁11시
이제 겨우 성년이 되었을 뿐이지만 인간에 대해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사라져버리기 쉬운 열정을 나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나는 역사의 붓을 놀릴 수 있다. 내 약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내가 쓰는 장르의 글에 있어서는 이것이 가장 적합한 정신과 영혼의 상태인지도 모른다. 성년의 물욕이 나의 붓을 더럽히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진실만을 쓰리라. -나폴레옹
4장 파올리 추종자
삼색기: 프랑스 혁명기에 왕을 상징하는 백색과 파리시를 상징하는 청색과 적색을 결합시켜 탄생했으며 프랑스혁명 초기에 휘장의 형태로 사용되었다. 1794년 프랑스의 국기로 정해졌다.
1789년6월 나폴레옹은 파올리에게 그 유명한 편지를 보냈다.
장군님, 저는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태어났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목격한 장면들은 3만 프랑스인들이 우리 해안에 토사되듯 밀려와서 자유의 왕관을 피바다 속에 빠드려버리는 가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죽어가는 자들의 외침과 억압받는 자들의 신음, 절망의 눈물이 제 요람을 에웠쌌습니다. 장군님께서 섬을 떠난 후 행복에 대한 희망도 함께 사라져버렸습니다.
5장 산악파
툴룽: 마르세유 동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프랑스 제1의 항구도시(나폴레옹이 진정으로 태어난 고향이다)
산악파: 프랑스혁명 때 정국을 주도한 국민공회의 좌익 정당. 자코뱅파 의원이 중심을 이루며, 1793년에 지롱드파를 타도하고 공포정치를 행하여 혁명을 추진했으나, 1794년7월에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몰락했다. 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라 등 국민공회의 급진 지도자들이 뒤쪽 높은 자리에 의석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제2부 도약(1793~1799)
나폴레옹이 나타나 그때까지 맥빠진 총재정부가 보여준 끝없는 혼란을 종식시켰을 때 우리는 그에게서 독재의 군사적 유용성을 보았다. 그는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고 우리는 그의 행위를 종교의 잣대로 심판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던 그 종교의 잣대로, 그 종교에서는 조국에 유익한 것만이 존경받을 만한 것이었다.-스탕달, 나폴레옹에 대한 회상
1장 툴롱
그의 공적은 인정해 주지 않아도 그는 혼자 나아갈 것이다.-뒤고미에 장군
총재정부: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한 뒤 1795년 테르미도르 쿠데타부터 1799년 나폴레옹의 쿠데타까지 존재한 프랑스 정부. 부르조아 공화주의에 입각한 제헌선거에 따라 의회안건 제출권을 가지는 500인 의회와 의안 선택권을 가지는 원로원의 2원제 의회가 구성되고 행정부는 5명의 총재로 구성되었다.
2장 방데미에르 13일
3장 조제핀(1763년-나폴레옹보다 6년 연상)
침실에서도 그 어느 곳에서도 항상 우아한 여인이었다.-나폴레옹
온통 당신 생각으로 가득 찬 채 잠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의 모습과 어젯밤의 열정은 내 감각을 쉬게 놓아두지 않습니다. 수만 번의 포옹도 내게는 충분치 않습니다. 내 피를 타오르게 할 뿐입니다.-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4장 첫 이탈리아 원정
아, 그 시절은 프랑스에게 정말로 아름다운 날들이었다!-나폴레옹
프리드리히 대왕(1712~1786) 프로이센의 국왕, 슐레지엔을 영유하고 폴란드 분할로 서프로이센을 얻었다. 관료 조직을 정비하여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에 앞장선 전형적인 계몽 전제군주이다. 제위기간은 1740~1786년
로디전투: 1796년5월10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이탈리아의 밀라노 남동쪽에 있는 아다 강의 로디 다리에서 장 피에르 볼리외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일부와 싸운 전투, 나폴레옹의 제1차 이탈리아 원정 때 벌어진 세 번째 전투이다.
5장 이집트 원정
스무 번의 승전은 그의 젊음과 아름다운 눈빛에, 창백한 얼굴과 쇠약해진 모습에 아주 잘 어울렸다.-탈레랑의 회고록
6장 브뤼메르 18일
우리는 이제 프랑스 대혁명의 원칙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대혁명을 이룩한 사람들을 구하려 생각하는 지점에까지 와 있다.- 스탈 부인
제3부 통령정부(1799~1804)
1장 프루타르코스의 인물
쾌락이나 부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명예와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이다.-플루타르코스, 알렉산드로스 대왕
나폴레옹을 사로잡은 책은 플루타르코스가 쓴 카이사르의 이야기다. 나폴레옹이 카이사르 전기를 읽고 또 읽고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명상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근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2장 통령정부 헌법
프리메르 22일 작성된 헌법은 프리메르 24일(1799년12월15일) 파리에서 공포되었다.
나폴레옹이 최고행정관직에 취임후
공화국을 국민에게는 소중한 것으로, 외국에게는 존중할 만한 것으로, 적에게는 놀라운 것으로 만든다.
헌법 투표 결과 찬성 301만1007표, 반대 1,562표
1800년1월1일 입법부 회의 시작
3장 유럽이 우리를 지켜본다
유럽이 우리를 지켜본다. 우리에게나 유럽에게나 합당한 일을 해야 한다.- 보나파르트가 국가참사관에게
4장 튈르리에서 말메종까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에는 두 가지가 있다. 두려움과 이해관계이다.
5장 마렝고 전투
카이사르가 자신의 행운을 이야기하고 스스로 그 행운을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은 잘한 일이다.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모두의 상상력에 어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보나파르트가 뢰데레에게
6장 생니케즈 거리
나의 직계 상속자는 프랑스 국민이다. 그가 바로 나의 자식이다. 나는 오직 그를 위해서 일했다.-보나파르트가 르 쿠퇴 드 캉텔뢰에게
7장 하느님, 통령을 지켜주소서
8장 권좌의 행진
당면한 세기는 이제 두 해 째를 맞이했다. 로마가 스파르타의 자리를 차지하였듯, 보나파르트라는 이름 아래 이미 나폴레옹이 드러났다.-빅토르 위고, 가을잎
1802년2월25일 보나파르트는 대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혁명력 10년 테르미도르 14일(1802년8월2일) 원로원 결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종신 제1통령으로 선언했다.
제1조 국민이 임명하고 원로원이 공포하노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종신 제1통령이다.
제2조 한 손에는 승리의 월계수를, 다른 한 손에는 원로원의 법령을 든 평화의 동상이 나라의 승인을 증명할 것이다.
제3조 원로원은 제1통령에게 프랑스 국민의 신임과 경애와 찬양을 표할 것이다.
9장 앙기엥 공작
콩데 집안의 왕자 앙기엥 공작 처형
1804년5월4일 원로원은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린다.
프랑스 공화국 정부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세습 황제에게 맡기는 것이 프랑스 국민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될 것이다.
국민은 권력을 되찾도록 억지로 강요받아서는 안되며, 능욕당한 국왕에 대해 보복하도록 강요받아서도 안된다.
제4부 황제(1804~1807)
대지와 해양 위에 절대적인 이 권력
내가 모두 위에서 행하는 이 최고의 권력
무한한 권세와 눈부신 지위
막대한 고통과 피의 대가로 얻은 것
지체 높은 내게서 좋아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
성가신 궁정 아첨꾼들이 좋아하는 것은
눈부시게 빛나는 권세의 아름다움뿐
누리자마자 시들해져 버리는 그 매력을 잃어
그 열정은 다른 열정에 밀려나고
우리의 영혼처럼 그 마지막 숨결까지
욕망은 항상 무언가를 좇으며
더 이상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내닫고
그러다 절정에 오르면 내려가고 싶어진다.
나는 황제를 숙원했고 황제가 되었다.
바랄 때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고
되고 난 후에는 그 모든 매력과 함께
끔찍한 근심들과 끝없는 불안
수많은 은밀한 적과 죽음의 연속
평화로운 즐거움도 휴식도 없다.
-크로네유, 시나 2막 1장
1장 대관식
나는 왕관을 갈취하지 않았다. 내가 개울에서 건져낸 왕관을 민중이 내 머리 위에 씌웠다.-나폴레옹이 몽톨롱에게
원로원 결의는 플로레알 28일(1804년5월)에 선포되었다.
공화국 정부는 프랑스 국민의 황제에게 양도되었다. 현 공화국의 제1통령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국민의 황제다. 황제의 작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직속 친자나 양자에게 상속되며, 장자 상속권에 따라 남성에게 상속된다.
스스로 나폴레옹은 신의 은총과 공화국 헌법에 의한 나폴레옹, 프랑스 국민의 황제라고 칭함
2장 아우스터리츠
해군의 운명이 세계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나폴레옹이 빌뇌브 해군 제독에게 보낸 훈령
해군 장성들이 30척의 함선을 가지고 영국군 함선 24척을 겁낸다면 해군을 둘 피요가 없을 것이요.-보나파르트
3장 프로이센 원정
나폴레옹이 휘파람을 부니 프로이센의 존재가 사라졌도다.- 하이네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1770~1840 프로이센의 국왕,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틸지트의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하고 영토의 태반을 상실했다. 빈 회의 이후로는 내정, 외교 면에서 모두 메테르니히에게 좌우되었다.
호엔촐레른 왕가: 1415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한 독일의 왕가. 1701년에는 프로이센 왕이 되어 합스부르크 가에 견줄 만한 세력을 누렸으며, 19세기에는 독일 민족 통일의 중심이 되어 1871년에 독일 제국이 성립되자 황제의 칭호를 얻었다.
4장 전쟁도구
이 위인은 신도 반신(半神)도 아니었지만 인간 이상이었고 다른 인간을 다스리기 위해 신으로부터 교육받은 사람 같았다. -슈발리에 대령, 나폴레옹 전쟁 회고록
19세기 초 프랑스 인구는 약 3천만명 정도로 당시에는 유럽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 중 하나였다. 총재정부는 20~25세까지의 모든 남성들에게 병역의 의무를 지게 하는 칙령 선포. 얼마 후에는 1,500에서 1,800프랑을 내면 한 사람을 대체할 수 있었다.
5장 정치 기계
우리 인간은 정치에 휘둘려서는 안된다. 정치를 휘둘러야 한다. -나폴레옹이 라스 카즈에게
6장 인간 나폴레옹
나는 권력을 좋아하오. 하지만 예술가로서 좋아하지. 음악가가 자기 바이올린을 좋아하듯이. 나는 소리를 내고 화음과 하모니를 만들어내기 위해 권력을 좋아하오. 예술로서 권력을 좋아하오.
7시간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된 황제가 주관하는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의 영향력은 사람들을 자극한다. 그는 분석적인 사고와 대단한 통찰력을 가지고 가장 복잡한 문제들의 요점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대단한 치밀성을 가지고 문제를 파악할 뿐만 아니라 그 모순점까지도 잡아낸다. 그가 이렇게 한 문제에 대해서 철저하게 파헤치는 주도면밀함은 함께 일하는 모든 장관들에게 군대 훈련과 마찬가지의 단련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전투장에서 병사들이 전사하는 것처럼 우리는 과로로 기진했다.- 국가참사원 심의관 트레이몽
나폴레옹은 언론과 선전의 중요성을 잘 간파하고 있었다. 정치의 척도가 되는 보고서와 기사 읽기를 마치고 나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지시들을 불러준다.
7장 나폴레옹의 가족과 장군들
나는 아주 정직한 인간이다. 나는 가족 관계의 성스러움을 믿는 어리석음을 범했다.-나폴레옹이 몽톨롱에게
일하면서 배우는구나. 나는 오늘 지배 가문의 왕족들을 왕좌에 영원히 예속시켜 놓는다는 옛 군주들의 기본원칙이 얼마나 현명하고 필요불가결한 것인가를 깨닫는다. 내 가족들은 내가 그들에게 베푼 은덕보다 더 많은 고통을 내게 주었다.-나폴레옹이 메테르니히에게
나폴레옹 어머니는 많은 청탁으로 나폴레옹을 가장 많이 괴롭혔다.
나폴레옹은 자기 가족에 대해서는 약하기 짝이 없다. 착한 아들, 착한 가족이어야 한다는 이탈리아 부르주아 집안 특유의 분위기와 함께, 자신의 확실한 명분을 위해서 저지해야만 할 때조차도 도가 지나친 가족들의 행동을 저지할 만큼 강하지 못했다.- 메테르니히
그의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모든 식구들이 그에게 쓴 맛을 보게 했다. 그래도 그는 계속 그들에게 돈과 명예를 아끼지 않았다.-라프 장군
제5부 실책(1807~1812)
이미 그의 위대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사고는 유럽을 거대한 프랑스로 만들었다, 베를린, 빈, 마드리드, 모스크바, 런던, 밀라노가 매년 파리로 올라와 경의를 표한다. 바티칸도 루브르의 신하가 되고 대지는 매순간 낡은 왕관 밑에서 열리고 모든 잔재들 속에서 인류를 위해 손에 글로브를 든 또다른 샤를마뉴 대제가 나온다.
언제나 초인간적인 계획을 구상하고 독수리 백 마리가 로마황제를 호위하듯 그를 호위한다. 그의 군대가 나간다. 깃발을 앞세우고 무거운 대포가 깨끗이 닦은 아가리를 내리고 커다란 굉음을 내며 잠복지 위로 솟구쳐 올랐다.-빅토르 위고, 낙엽
1장 황제의 교리문답
그는 역사를 작아 보이게 하고 상상을 크게 보이게 한다- 우드토 부인
1806년 교리문답
황제에게 봉사하고 황제를 명예롭게 하는 것은 곧 하느님에게 봉사하고 하느님을 명예롭게 하는 일이다.
총재정부 때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유대인들은 거의 반 불법체류자 상태로 살았고 그들의 신전도 폐쇄되었다.
그러나 작은 희망이 보이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첫 이탈리아 원정 때부터 유대인들을, 특히 교황령의 유대인들을 해방시켰다.
나폴레옹 황제는 아주 영리하게 고리대금업 퇴치와 유대인 공동체의 재구성을 명분으로 내세움으로써 프랑스 안에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위치를 마련해 낼 수 있었다.
1808년 칙령을 통해 나폴레옹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을 선포하고 히브리 종교의식을 인정한다.
나폴레옹은 기사를 손수 쓰기도 하고 핵심 부분만 불러주기도 했는데 그가 직접 쓴 기사와 지침만 준 기사는 쉽게 구분이 된다.
2장 스페인 전쟁
1793년 이후 영국은 누가 최고권자가 되든 프랑스와는 천적이었다.
영국이 프랑스 제국을 봉쇄한다면, 프랑스는 섬나라 영국이 유럽 대륙으로 들어는 것을 막음으로써 영국을 봉쇄하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스페인 백성들을 과소평가하여 자기 신하 정도로 생각했다. 저항 게릴라는 히드라처럼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서 치열하게 거둔 승리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게릴라 저항군들이 아직 억압받고 있던 유럽에게 준 비극적인 교훈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스페인의 내부갈등을 중재해서 평화에 대한 의지를 보였어야 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다. 스페인을 영국의 편에 들어가도록 만든 것은 나폴레옹의 용서받을 수 없는 실책이었다.
3장 에어푸르트 회합
왕좌를 위해 저지른 국가의 모든 죄는 하늘이 우리에게 왕좌를 허락하는 순간 우리를 그 죄에서 방면한다. 하늘이 총애하여 그에게 준 신성한 지위에서 과거는 정당화되고 미래는 보장된다.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 자는 유죄가 아니다. 무엇을 했건 무엇을 하건 그는 신성불가침이다.-코르네유, 시나
위대한 사람의 우정은 신의 축복이다.
그는 주변을 에워싼 사람들이 하는 칭송의 말에 도취되어 아부와 진정한 칭찬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가 궁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에어푸르트 조약 이행으로 알렉산드르 황제는 바사라비아를 차지했고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자유롭게 공략할 수 있다는 일시적인 보장을 받음으로써 당장 필요했던 목적을 달성했다.
괴테는 에케르만과의 대화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인상 이야기
-나폴레옹은 훔멜이 피아노를 다루듯 세상을 능숙하게 다룬다. 다른 위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항상 변함이 없이 훌륭하다는 것이다. 전투 전이나 후에나, 승리한 후에나 패배한 후에나 항상 두발로 똑바로 서서 명철한 머리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는 자기 상태에서 아주 편안하고 안정감 있게 모든 상황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다. 훔멜이 아다지오든 알레그로든 저음을 연주하든 가곡을 연주하든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바로 진정한 재능에서 오는 그 편안함과 능숙함은 전쟁의 기술에서나 평화의 기술에서나 마찬가지듯 피아노 뒤에서나 대포 뒤에서나 마찬가지다.
하이네가 뒤셀도르프에서 나폴레옹을 만나 후에 적은 감탄 문구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내가 그를, 실제로 황제를 직접 만나다니, 그는 한 번의 눈길로 모든 사람들을 다 꿰뚫고 있었다.
결국 나폴레옹이 이룬 정복들 가운데 유일하게 오래 지속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는 것인데 그 자신은 이러한 사실을 나중에 세인트헬레나에서야 깨닫게 된다.
4장 바그람의 밤
조제프에게, 나의 가장 우수한 군대를 남겨주고 나는 빈으로 갑니다. 신병들과 내 이름과 내 커다란 군화만 가지고.-나폴레옹
에어프르트 조약은 오스트리아의 속임수였고 그 사이 오스트리아는 무장을 강화했다. 오스트리아는 영국으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서 50만명의 군대를 구축했다.
-폐하 조심하십시오! 참모부를 향해서 포격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는 무슨 일이든 다 일어날 수 있다.
훌륭한 전술이 돋보이는 바그람 전투의 승리는 적을 괴멸시키지는 못했지만 2만 명의 프랑스군 사상자와 3만5천명의 오스트리아군 사상자를 냈다.
5장 오스트리아와의 혼인
오스트리아는 괴물 마노타우로스에게 예쁜 암송아지를 제물로 바쳤다.-리뉴 대공
이봐 독일 여자하고 결혼하게. 최고라네. 부드럽고 착하고 순진하고 장미처럼 순진해-나폴레옹이 합스부르크 왕의 딸 마리 루이즈에 대해
1811년3월20일 아들을 낳아서 이름을 나폴레옹 프랑수아 샤를 조제프(부친의 이름과 두 형들의 이름을 붙였다)라고 지었다.
6장 러시아 원정
눈이 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정복에 의해 패했다. 처음으로 독수리가 머리를 숙였다.-빅토르 위고, 별
프랑스 제국 130개의 데파르트망이 있었다.
-프랑스 본토의 행정지역
-라인 강 연안 지방
-벨기에 지역
-네덜란드 지역
-한자동맹 지역
-이탈리아 왕국(프랑스와는 별개의 나라였지만 프랑스 황제가 주인)-24개의 데파르트망
나폴레옹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자신의 광적인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면 아무와도 상의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영감에만 의지하고 불처럼 타오르는 상상력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는 알렉산드르의 최후통첩에서 함정은 보지 못하고 이 만만치 않은 라이벌을 무찔러버릴 수 있는 뜻밖의 기회가 왔다고만 생각했다.
영국, 러시아, 스웨덴, 그리고 스페인이 여섯 번째 대불동맹 결성
제6부 추락(1812~1815)
그는 작은 사람이었다네
사람들은 거인이라 불렀지
떠날 때는,
그런데 보게 되었네
그가 다시 작은 인간으로
파리에 돌아온 것을
(후렴)
즐겁게 즐겁게 친구여 노래하세
위대한 이름을
위대한 나폴레옹을
영웅이네 영웅, 작은 집안에
숨차게 달리며
모스크바를 차지했다고 믿었는데
그 거대한 원정
그러나 그 위대한 대장은
그저 보았을뿐, 세상에 맙소사
불길만 보았을 뿐이라네
무엇을 했나 그 도시에서
집도 없이
잿더미밖에 없는 데서?
어려운 일이지
거기서 겨울을 나는 것은
길바닥에서
(후렴)
무엇이 남았나 묻지 않고
카이사르처럼 자랑스럽게
우연히도 그렇게
거인 나폴레옹이 철수를 했다네
-노래제목, 러시아 원정
1장 퇴각 이후
우리의 패배가 프랑스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하지만 내가 도착하면 비참한 상태는 곧 바뀔 것이다.-나폴레옹
1812년 12월5일 나폴레옹은 스모르고니에 러시아 주둔군을 남겨놓고 12월18일 파리에 도착했다.
나폴레옹의 생각과 실책과 환상과 고정관념,그리고 변함없는 낙천주의
놀라운 계획들, 아니 서사시적인 몽상들로 가득했다.
신은 패배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지도 모른다고.
한 공작부인의 눈물은 내 동정을 사지 못하지만 백성들의 고통은 나를 괴롭힌다네.
나폴레옹이 애써 만든 프랑스의 네 번째 왕조는 관례적인 형식과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2장 제국민 전쟁(라이프니치 전투)
시간이 날아간다. 나의 위치에서는 한 순간을 잃음으로써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나폴레옹
1813년부터 결정적인 시간이 왔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별이 빛을 잃었다. 나는 고삐가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는 것을 느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벼락같은 한 방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었다. 우리 가운데서 배신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내 부관들은 무르고 어설프고 서툴렀다. 성화는 꺼졌다.-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이 한 말
3장 첫 번째 퇴위
니콜라(왕당파들이 부르는 나폴레옹의 별명)
나폴레옹 황제가 유럽의 평화를 회복시키는데 유일한 장애물이라는 동맹국들의 선언에 대해, 나폴레옹 황제 자신과 그 후계자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왕위를 포기할 것이며, 프랑스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개인적인 희생도 감내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바이다.
-1814년4월6일
동맹국은 나폴레옹을 엘바 섬의 영주로 임영하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매년 200만 프랑의 연금을 받을 것이라고 결정했다. 나폴레옹이 서글퍼한 것은 자신의 폐위가 아니라 네이나 베르티에 그리고 그밖에 자신의 장군들이 모두 자신의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서 부랴부랴 새로운 권력으로 옮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내가 아직 살기로 결정한 것은 다시 여러분의 영광을 위해 일하기 위함입니다.
4장 산초 판사의 섬
나폴레옹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면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사토브리앙
5장 샹드메 축제
승리를 향해 돌격하자.삼색기로 장식한 독수리는 이 종탑에서 저 종탑으로 노트르담 성당의 종탑까지 날아갈 것이다.-나폴레옹
6장 워털루
그렇다, 독수리는 어느 날 저녁 영원의 궁륭을 날고 있었다. 폭풍이 몰아쳐 그의 두 날개를 부러뜨리고 허공에 벼락과도 같은 자국을 그으며 추락했다. 모두들 환호를 올리며 둥지로 달려들어서 제각기 이빨이 허락하는 대로 먹이를 차지한다. 영국은 독수리를, 오스트리아는 새끼수리를, -빅토르 위고, 황혼의 노래
1815년 6월 나폴레옹은 혼자서 모든 무게를 감당해야 했고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세인트헬레나에서 고백한 바에 의하면 나는 운명이 나를 버렸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결정적인 성공에 대한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과감히 시도하지 못한다는 것은 적절한 순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행운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아무것도 감행할 수 없다!
황제를 동반한 사람은 패배한 장군들과 근위대 생존자뿐이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절망뿐이었다.
제7부 세인트헬레나(1815~1821)
1장 테미스토크레스처럼
대단한 제국이었다. 나는 8,300만 인간을 다스렸다. 유럽 인구의 절반이 넘는다. -나폴레옹이 구르고에게
1815년6월21일 나폴레옹 황제는 엘리제 궁에 도착했다.
비열한 푸세는 배신과 경찰권력을 남용하는데 타고난 소질을 발휘한 인물이다.
장군 프랑스의 상황과 병사들의 외침이 조국을 구하라고 나를 부릅니다.-나폴레옹
실추한 황제에서 다시 젊은 시절의 작가 지망생으로 돌아왔다. 자료 수집과 구술의 열정을 함께 가지고, 10월14일 세인트헬레나 섬이 눈앞에 보였다.
2장 진흙으로 빚은 인간
진흙으로 빚은 인간에 불어넣었던 가장 강한 생명의 숨결-샤토브리앙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이 나폴레옹을 재검토했다는 점이다.
권력의 바이올린을 켜지 않게 되면서 그는 언어의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그 연주는 권력의 바이올린 못지않게 강력하며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능숙하고 지속적이었다.
모든 철학의 근원인 역사를 깊이 성찰하라-나폴레옹의 유언
3장 한밤의 열병식
당대 사상의 선두에서 나아가라.
사상이 당신을 따르고 지지할 것이다.
당대 사상을 뒤따라 가라.
사상이 당신을 끌고 갈 것이다.
당대 사상을 거슬러 가라.
사상이 당신을 전복시킬 것이다.-나폴레옹
옮긴이의 말
나은주
조르주 보르도노브는 역사적 사실 뒤에는 복잡하고 많은 요소들이 작용하고 있음을, 한가지 기준으로 심판하거나 정의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심판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저 사실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가능한 한 여러 각도에서 그리려 했다.
정치가, 군인, 유럽의 정복자, 세계의 가치를 뒤바꾼 혁명사상의 전파자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 지나간 시간, 퇴색한 사건들을 되살려내는 뛰어난 필력으로 인해 지루해지기 쉬운 역사서는 흥미진진한 소설처럼 읽힌다.
보르도노브의 문장들은 많은 문화적,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위대한 행동은 우연과 행운이 만들어낸 작품이 아니라 철저한 전략과 천재성에 나온다. 위대한 인물이 가장 위험한 시도를 할 때 실패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카이사르, 한니발, 구스타프 대왕과 그 밖의 위대한 인물들을 보라. 그들은 항상 성공한다. 그들이 행운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 된 것일까? 아니다. 자신의 행운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위인들의 성공의 원동력을 연구해 보면 그들이 성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나폴레옹이 라스 카즈에게
공평한 후세 사람들의 눈에는, 재산도 배후세력도 없는 서민 출신의 한 젊은이가 아작시오라는 작은 도시에서 출발해 세계 최고의 왕좌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오스트리아의 황녀와 결혼했으며, 로마 교황으로부터 축성을 받고, 유럽의 거의 모든 강국들을 지배했으며, 모스크바와 이집트 카이로에까지 위력을 행사하고, 자기 형제들을 차례로 스페인과 나폴리와 네덜란드와 베스트팔렌의 왕좌에 앉힌 사실이 놀랍기만 할 것이다.
이 모든 사건들도 믿기 어렵지만, 1814년 단 며칠 만에 패배한 후 1815년 기적처럼 회생해서 3개월간 버티다가, 자신이 지배하던 세력들이 맺은 동맹군에 의해 영원히 추락해 버린 사실은 더욱더 충격적이다.
그렇다면 후세의 역사가들은 20년 동안이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던 이 사람이 대체 어떤 인물인지를 알아보고자 할 것이고, 그의 하찮은 일상생활의 단면들까지도 상세히 파고들고 싶어할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추락의 주된 원인은 무엇이었는지를. 샵탈의 회고록
나폴레옹 연표
1769년 8월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에서 출생
1779년 1월 오툉 중학교 입학
5월 국왕 장학생으로 브리엔 사관학교 입학
1784년10월 파리 사관학교 입학
1785년2월 아버지 샤를 보나파르트, 39세에 위암으로 사망
1785년11월 발랑스 포병 연대 부임
1789년7월 프랑스 대혁명 발발
1793년6월 파올리파와의 대립으로 나폴레옹 일가, 마르세유에 정착
7월 니스에서 제4포병 연대 대위로 복귀
1794년3월 이탈리아 원정군 포병 사령관에 취임
1796년3월 이탈리아 원정군 총사령관이 됨
3월 조제핀과 결혼
4월 이탈리아 원정 출발
5월 로디 전투 승리, 밀라노 정복
1797년2월 아르콜레 전투, 만토바 점령
10월 캄포포르미오 조약 체결
1798년5월 이집트 원정 출발
8월 아부키르 해전에서 브뤼에스 제독이 영국의 넬슨 함대 격파
1799년3월 생 장 다크르 포위 공격
7월 아부키르 전투에서 투르크군에 대승
11월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로 정권 장악
12월 제1통령 취임. 혁명력 8년 헌법 공포
1800년 5월 이탈리아 수복을 위해 오스트리아와 전투, 알프스를 넘음
6월 마랭고 전투 승리
1801년 2월 오스트리아 뤼네빌 평화조약 체결
7월 교황 비오7세와 콩코르다 체결
1802년 2월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이 됨
3월 영국과 아미앵 평화조약 체결
5월 레지옹 도뇌르 훈장 법안 통과
8월 혁명력 10년 헌법 공포, 종신통령이 됨
1804년 2월 왕당파의 카두달, 피슈그뤼 등에 의한 나폴레옹 암살 계획 발간,체포함
3월 프랑스 민사법 발효(후에 나폴레옹 법전으로 명명됨), 앙기앵 공작 처형
5월 원로원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결의, 황제에 즉위
12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황제 대관식
1805년 3월 이탈리아 왕에 즉위
8월 제3차 대불동맹군 결성
10월 울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 승리,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 넬슨 함대에 패함
12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동맹군 격파
1806년 8월 신성로마제국 붕괴
10월 예나 전투, 아우어슈타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 격파, 베를린 입성
11월 베를린 칙령 발표, 대륙봉쇄 개시
1807년 2월 아일라우 전투
6월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프로이센군 격퇴
7월 틸지트 평화조약 체결
11월 제1차 밀라노 칙령 발표
12월 제2차 밀라노 칙령 발표
1808년 3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반프랑스 폭동 발생, 스페인 전쟁 개시
7월 형 조제프가 스페인 왕에 즉위
10월 에어푸르트 조약 체결
12월 마드리드 입성
1809년 5월 빈 입성
5월 아스페른 전투, 에슬링 전투
7월 바그람 전투에서 승리
10월 오스트리아와 쉰브룬 평화조약 체결
1810년 3월 마리 루이즈와 재혼
7월 네덜란드 합병
12월 러시아, 대륙봉쇄 파기
1811년 3월 아들 로마왕(나폴레옹2세)탄생
1812년 6월 러시아 원정
9월 보로디노 전투, 모스크바 입성
10월 모스크바에서 퇴각
12월 파리 튈르리 궁으로 귀환
1813년 3월 독일 해방전쟁 개시
6월 스페인의 비토리아 전투에서 웰링턴에 패배, 스페인 전쟁 종결
8월 드레스덴 전투에서 승리
10월 제국민 전쟁(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대패
1814년 1월 프랑스 국내 전투 시작
2월 몽트르 전투에서 패배
3월 동맹국에 항복, 동맹국, 파리 점령
4월 퇴위
5월 엘바 섬으로 유배
1815년 2월 앵콩스탕 호에 올라 엘바 섬 탈출
3월 파리 입성, 백일천하 시작
6월 워털루 전투에서 참패, 두 번째 퇴위, 영국군의 포로가 됨
7월 영국군 전함 벨레로폰 호에 승선
10월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
1820년 7월 간염으로 보이는 병세가 나타남
1821년 4월 유언을 구술함
1821년 5월 세인트헬레나에서 사망
옮긴이 나은주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불어학과, 프랑스 파리 3대학 불어교육학 석사, 언어문화교육학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현재 프랑스 사회과학 고등연구원 한국연구센터 정보책임전문원으로 일하고 있다. 도서관 정보 서비스 향상을 위한 RSS 기술의 응용, 정보지기의 일인다역, 유럽 한국학을 위한 한국 전자자료 사용 방안 모색 등의 논문을 썼다.
감수 이용재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Syndicalisme demetier et syndicalisme d' industrie, 영웅만들기:신화와 역사의 갈림길(공저) 드이 있으며, 역서로는 소유란 무엇인가, 유럽의 탄생,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 혁명, 폭력에 대한 성찰 등이 있다.
나폴레옹 평전
초판1쇄 인쇄 2008년4월10일
초판1쇄 발행 2008년4월15일
지은이 조르주 보르도노브
옮긴이 나은주
감수자 이용재
펴낸이 정차임
디자인 강이경
펴낸곳 도서출판 열대림
출판등록 2003년6월4일 제313-2003-202호
주소 서울시 마포구 동교동 156-2 마젤란 503호
첫댓글 솔직히 전 회장님께서 정리하여 올리신 이 독후감기록문도 제대로 다 읽지못하는데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본격적인 가을인것 같습니다. 독서,사색이 제대로 영글겠지요. 저두 이제 독서해야겠어요.
나중에 필요하실 때 참고하시면 좋을 듯 싶습니다. 책을 만나면서 여러가지 새로운 아이디어도 발굴하고 있습니다. 진작에 읽었더라면 배신은 당하지 않았을 것을 하는 반성도 하게 됩니다. 좋은 날들 되세요.
일요일날 친구랑 도서관에 가서 4권의 책을 빌려왔는데 과연 다 해치울수 있을지 ,,,,나폴레옹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라고 하는데 ~~ ^^*
다 읽으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