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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vs 종교
'신앙'은 신과 개인적인 만남인 것이고,
'종교'는 신앙이 모여 생긴 단체이다.
'신앙인'은 종교가 없어도 유지 될 수 있지만,
'종교인'은 종교단체를 떠나게 되거나 종교단체가
없어지만 당황하게 된다.
신앙인은 하늘의 신께서 인도하시는 것이고,
종교인은 하늘의 신께서 인도하시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람이 인도하기도 한다.
그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상황까지
갈 수 있다.
(마태복음 15: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아멘.
'신앙인'은 신과의 끊어지지 않는 끈으로 싫다고
도망가도 붙잡혀서 신의 명령대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믿지 않으려고 해도 할 수 없다.
그냥 믿음을 신께서 주시기 때문에 내가 안믿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종교인'은 사람이 믿음을 강요시킨다.
믿으라고 세뇌시킨다. 남을 의식해서 믿음이
있는 척을 한다. 내가 진정 믿음이 있어서 믿는
것인지 아는 것을 믿고 있다고 착각하는지도
구분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죽어서 가는 천국을 논한다.
이땅에서의 구원은 안중에도 없다.
자기 종교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남의 종교에서 사람을 빼오기도 하고
자기 종교끼리 교인들을 빼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게 영혼을 불쌍히 여겨 구원시키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정말 지옥에 가서 고통받아야 하는 영혼이
불쌍하다면 그렇게 앉아서 교인들을 상대로
어떻게 설교를 할 것인지를 고민하면 안된다.
빚더미 올라 있는 교회 건물을 놓고 고민하면
안된다.
교인 수에 눌려 고민하면 안된다.
밖으로 나가 미친년놈처럼 날뛰어야 한다.
정말 마귀가 고통을 주는 지옥이 있다면.
그런 곳에 가면 안된다고 외치다 죽어야 한다.
자기 자식은 지옥가도 괜찮게 내버려 두고
교인들만 설교듣게 닥달하면 안 된다.
오는 사람 모아놓고 강의하듯이 하다가
강의료 받고 집으로 가면 안 된다.
그러면 안된다.
◐종교
☞ '플라시보'
플라시보란 '위약' 이라는 말로 병을 실질적으로
완하시키거나 치료하는 목적보다는 환자의 심리적인
안정을 가져다주는 약물치료로 정의한다.
환자가 위약에 의해 치료받는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그 효능을 잃게 된다고 말한다.
'위약'이 효력을 발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진짜
약물로 치유력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종교'는 '플라시보' 라고 할 수 있다.
회개를 했으니 용서 받은 것 같고, 헌금을 했으니
돈으로 때운 것 같고, 절을 했으니 신이 내가 돌리는
영광을 받으신 것 같고 나를 좀 예뻐할 것 같고,
기도를 했으니 할 일을 한 것 같고 언젠간 이뤄질 것 같고,
설교를 들었으니 훈방조치 된 것 같고, 봉사를 했으니
몸으로 때운 것 같고.
같고 같고 같고... 확정이 아니라 이 된 것 같은 것이,
됐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종교다.
그래서 종교를 갖고 있으나 없으나, 이 종교를 가지나
저 종교를 가지나 인간들의 살아지는 삶은 All 똑 같다.
종교를 가짐으로 내 종교는 거룩한 것 같고,
내가 선해진 것 같고, 내가 의로워진 것 같고
천국도 믿음으로 당연히 갈 것 같으나
어느 종교를 갖고 있어도 사는 것은
내 성품대로 살고 내 성격대로 살고
내 인생 시스템적으로 산다.
☞변질
처음엔 신앙이 모였지만 나중에는 종교에 묶이게
된다. 종교에서 원하는 교리와 회칙이 우선이다.
얼마큼 종교단체에 나와야 하고 얼마큼 헌금해야
하고 얼마큼 봉사해야 하고, 성만찬은 어떻게
해야 하고, 세례는 어떻게 받아야 하고, 종교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고 등 묶이는 것이 많다.
그런 종교생활을 충실하게 잘하면 믿음이 굉장히
좋은 것 같고, 천국 구원도 당연히 받을 것 같고.
보배라고 칭찬도 받고 롤모델이라는 소리도 듣는다.
그러면서 신앙도 좋아진다고 착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물들어가다가 종교단체를 떠나게 되거나
종교단체가 없어지게 되면 당황하게 된다.
내가 신을 떠난 것 같고, 내가 믿음이 없어진 것 같고,
내가 구원을 못 받을 것 같고, 지옥에 갈 것 같고,
무언가 신을 향해 의식을 치뤄야 하는데 하면서
숙제를 안한 것 같아 갈피를 못잡게 된다.
세뇌된 종교교육에 의해 두려워할 수도 있다.
종교생활을 잘 하다가 무언가 이유로 종교단체에
소속이 안 되어 있으면 큰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주변에서 걱정스럽게 말들을 한다.
믿음이 다 떨어져 타락할것 처럼.
이럴때 진정한 신앙인은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고
진정한 종교인은 안절부절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친구따라 강남 간 사람들은 그러나 저러나
아무 생각이 없을 수도 있고, 종교생활을 안하니
오히려 더 편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들은 신의 존재는 잘 모르겠는데 하도 그 종교단체로
들어오라고 귀찮게 하니 안 갈수도 없고 해서 간 경우이고,
그 종교가 좋아보여서 갈 수도 있고, 그 신께 기도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고 아픈 몸도 낫는다고 해서 필요해서
갈 수도 있다.
그러다 신을 만날 수도 있고, 계속 아무생각 없이 못 만날 수도
있다. 어느 종교단체에 소속이 되어있는 종교인들 중에서도
자기 신을 만나 보지도 못해놓고 당당하게 나는 어느 종교인
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종교생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신을 만났느냐가 중요하다.
기도 응답을 받아보면서 신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설교를 들으면서 신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은 신의 존재를
만난 것은 아니다. 신과 개인적인 소통이 있어야 한다.
종교단체를 떠났을 때 믿음이 떨어질까 걱정되고
신이 자기를 버릴까봐 걱정인 사람들은 종교믿음이
떨어진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설교를 들으면서, 종교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믿음을
유지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계속 설교를 들어야 하고
종교단체에서 계속 활동해야 믿음이 샘솟는 것 같다.
이런 것은 그 믿음을 설교가 잡아주고 있었고
종교단체 활동들이 잡아주고 있어서 그렇다.
석탄 한개가 홀로 있으면 쉬 꺼지지만 많이 있으면
쉬 꺼지지 않고 잘 탄다고 비유하면서.
이것은 그야말로 종교적일 때의 이야기이다.
종교가 유지되려면 사람이 많아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단체가 거대해지면 나라법도 이겨먹을려고 한다.
신앙이 홀로 있으면 신이 주신대로 존재할 수 있지만,
신앙이 모여 무리를 이루고 나아가 어떤 단체나 종교로
발전하게 되면 그땐 그 단체의 회칙이나 교리가 투입
되게 된다.
그래서 신앙 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단체의 회칙에
매이고 교리에 매이게 된다. 그리고 예수를 놓친다.
정말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은 설교를 안들어도
종교단체 활동을 안해도 창조주신과의 관계가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께서 잡아주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 속 선지자들은 그렇게 홀로 신앙을 지키고 있었다.
나단 선지자나, 이사야, 엘리야, 엘리사, 발람, 하박국,
등 선지자들이 지금의 종교 교주라고 알면 안 된다.
그들은 지금의 무속이다. 왕 옆에서 왕의 잘못을
신이 알려주신대로 꾸짖고, 전쟁에서 이길 것인지
질 것인지 신이 알려주신대로 알려주고 했다.
(사무엘하 12:1~15)
종교단체에 속했어도 이런 개인 적인 소통을 한 사람은
그 종교단체에서 나와도, 그 종교단체가 없어져도 당황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신과 소통이 계속 되면 되기 때문이다.
◐신앙
신앙은 종교라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종교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신을 만나는 것인데, 정확하게 말해선 신이 개인적으로
만나주신 것이다.
인간의 편에서는 내가 신을 찾은 것 같고 내가 신을 만난 것 같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인간이 먼저 신을 찾고 신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신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번 한번만
살려주시면 신을 믿겠습니다. 착하게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해서 자신이 신을 찾은 것 같지만 이것도
신께서 그런 생각을 주신 것이다.
누구에게나 이런 생각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일부 누구에게만 주신다. 신의 뜻에 의하여.
그 일부 중 하나로 선택되었다고도 잘란척 하면 안된다.
인간으로서 '잘란척'은 무조건 안 된다.
신앙이든 종교든 기술이든 학식이든 능력이든 재능이든
발명이든 주께서 주신 만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잘난척은 절대 금물이다.
"그때 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하신
말씀은 그때부터 신이 인간을 찾아 만나 주셨다는 것이다.
신이 인간을 찾으셨다는 것을 신앙이나 종교로만 찾으셨다고
풀면 안 된다. 누구든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방편과, 삶의 지혜도
주시고, 슬기를 주시고, 리더자가 되는 길도 일러주셨다.
신앙적인 것에서는 다 만나 주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신을 믿는 사람이 있고 안 믿는 사람이 있다.
만나주셔도 다 똑 같은 방법으로 만나주신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달랐고 부족마다 달랐고 나라마다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귀신처럼 느껴질 정도로.
신께서 안 만나 주신 인간은 버림 받은 것이 아니다.
'만남'과 '안만남' 종류별 속의 한 부분일 뿐이다.
하지만 신께서 안 만나 주시면 정말 신의 존재가
1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단독으로 신을 만났다고 해서 "나는 천국을
갈 구원을 받았다"는 신념을 얻지는 못한다.
그냥 신과의 만남과 신께서 명하시는 것을 행할
뿐이다. 그리고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살고 복도 받고
징계도 받고 산다.
신께서 어떤 인간을 선택해서 쓰실 때에는 무슨
목적인지를 이루시기 위해서 그냥 선택해서 쓰시는
것이지 갸만 구원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신을 만난 인간들 편에선 내가 만난 신이 진짜 같고,
남이 만난 신은 가짜 같다. 그러면서 참신 악신 사탄
귀신 마귀 악마 악령 등 그런 무시무시한 단어들이
마구 생겨난 것인데 없는 말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영의세계의 존재들을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인간들 편에서 무서워서 절절 매는 것이지 창조주신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악령 이라는 존재도 창조주 신께서 부리시는 영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신다.
인간들 편에서 다르게 느껴져서 신들이 무지 많은 것 같지만
영의세계 들어가보면 신은 딱 한분 창조주신밖에 없으시다.
능력이 무한한 사람 하나에 능력이 없는 무한적으로 많은
개미떼들이라고 비유해도 되겠다.
인간들 편에서는 이렇게 복잡한 인간사에, 우주에,
이런 무한적인 일들을 어떻게 신 혼자 다 감당할 수 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신의 전지전능 하시다는 능력을 인간은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never.
핸드폰, 컴퓨터, 자동차, 대형선박, 높은 빌딩, 비행기, 전투기,
우주선, 미사일, 온갖 전자제품, 로봇, 인공지능, 인공위성 등
인류문명을 보면 신이 계신 것 같지 않다.
인간의 힘으로 창조해낸 것 같다.
(출애굽기 31:3) "창조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창조주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 아멘.
이 말씀을 가지고 그건 이스라엘에나 해당되는 이야기고
현대의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주장하려면
성경을 거들먹 거리지 말라.
인간이 이 사실을 믿든지 말든지 알든지 말든지
절대로 신은 없다고 테클을 걸든지 말든지 신께서는
아무 상관 안하신다. 무시하신다.
(욥기 37:23~24)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 아멘.
창조주신께서 인간에게 어떤 능력의 생각을 주시지
않으시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껍데기, 벌래, 안개, 티끌 정도.
구석기 시대때 선배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때를
안 살아봐서 잘 모르겠지만 원숭이가 조상이라고 할
정도로 짐승 비슷하게 살았다.
창조주신께서 그나마 조금씩 지혜를 주셔서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문명시대
해가면서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수탉에게 슬기를 주신 자가 누구냐?" 하신다.
앞으로 얼마나 더 과학적으로 지혜를 주실지
미지수이다. 신의 세계를 따라가는 것이겠지만
비슷하게 가는 것일 뿐이다.
창조주신의 능력이야 말로 '생각대로 팅' 이시다.
그런 신께서 어느 사람을 선택해서 부족을 세우시고
그 부족을 통해서 나라를 세우시고 하신다.
어느 한 사람을 선택해서 신앙인으로 세우시기도 하신다.
아브라함을 종교인으로 부른 것 같지만 부족의 대표성으로
불렀고 나라의 근본으로 부르신 것이다.
조선으로 따지면 '이성계' 같은 개념이다.
노아, 모세, 사울, 다윗 등은 부족과 나라의 지도자로 부르신
것이다. 삼손, 드보라, 기드온 등 이런 사람들도 부족의
대표로 전쟁용사로 부르신 것이지 종교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사도바울도 종교인으로 부르신 것 같지만 식민지 시절에
독립군으로 부르신 것이고, 식민지 시절 연약한 지도자로
부르신 것이다. 예수를 만난 신앙도 더불어서.
우리나라 일제식민지 시절 안창호 선생 같은 개념이다.
이때는 종교가 아닌 무속으로 있는 상태이다.
엘리야, 엘리사, 나단 선지자 등 이런 사람들은 신앙으로
부르신 것이다. 지금 우리 말로 무속인들이 왕 옆에 있었던
것이다.
신앙으로 만난 인간들끼리는 그래도 전쟁을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신앙이 개인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뭉치면 사고를 친다.
좋은 일로도 사고를 치지만 나쁜 일로 더 사고를 친다.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럿이 뭉치면 그 중에 대장이 생기고,
이 대장은 무리의 힘을 얻어 더 큰 힘을 발산하게 된다.
그래서 무리끼리 싸움이 벌어진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신앙'이 모여 '종교단체'가 형성되는데 이때부터가 문제다.
종교로 존재하게 되면 분쟁이 생기고 전쟁이 터진다.
프랑스 여왕 마고의 피의 결혼식에서도 보면 종교가
종교를 이기려고 가톨릭교와 신교의 전쟁이 일어난다.
본인들은 자기들의 신에게 충성하고 자기들의 종교에
충성하는 차원이지만 이것은 살인인 것이다.
이런 것이 합법이라면 나에게 어떤 의미를 두고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합법적이라는 말 밖에 안된다.
자기 종교를 위한 살인.(프랑스 종교전쟁 1562~1598)
예수도 "내가 평화를 주러 온줄 아느냐?" 하신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래도 신께 누를 끼치지 않게하기
위해서 몸가짐, 마음가짐, 사회생활을 신경쓸 수 있다.
이웃과 싸우지 않으려고 하고, 타인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고 하고 나라의 법과 지역의 법 가정의 법을 지키려고
노력할 수 있다. 완벽하지 못하고, 안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하지만 종교를 가진 자들은 남의 종교야 어떻든 말든,
남이야 어떻든 말든, 타인이 스트레스를 받든 말든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으려 하고,
싸우고, 내 성격대로 하고, 남에게 욕을 먹더라도
아무생각 없이 자기 신께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다.
나도 지난날 일요일에 예배를 드릴 때 어떻게 해야
복음성가 가사 처럼 주께서 찾으시는 그 한사람의
예배자가 될 수 있을까? 생각 많이 했다.
사회에서의 생활은 어떻든지간에 교회에서만
똑바로 서서 움직이지 않고 딴짓하지 않고
단상을 주시하고 설교를 잘 듣고 기도에 동참하고
찬송을 크게 열심히 부르고 남들이 볼때 참
열정적으로 신실하게 예배를 드리면 되는 줄 알았다.
◐종교의 단점
신앙과 종교는 인격과 상관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인간 싸움닭도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다.
큐티도 하고 성경쓰기도 잘하고 새벽예배도 잘
드릴 수 있다.
남을 험담하고 이간질 하는 사람도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다. 불평불만이 많아도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다.
전쟁을 하고도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다.
안하무인, 아전인수, 무개념인 사람도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다.
'개과천선' 아닌 이상 종교와 인격은 아무 상관이 없다.
'욥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욥기 17:6) "창조주신이 나로 백성의 이야기거리가
되게 하시니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 아멘.
"에잇! 퇘" "못됐다 퇘!" "더럽다 퇘!"
"너나 잘 먹고 잘 살아라 퇘!"
(사무엘하 16:6) "또 다윗과 다윗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아멘.
(사무엘하 16:10)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신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아멘.
너희가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와 이웃에게 잘 못한
것이 있으면 가서 해결하고 오라고 하셔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건 그것이고 이건 이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신께 예배의 행위만 잘 하면, 그 신께 회개의
기도를 드리기만 하면 그 신이 용서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저들의 신보다 나의 신이, 우리 신이 우월하다고
알고 있어서들 그렇다.
종교의 큰 단점은 신이 자기들만 구원시키 위해서
불렀다고 착각하고 산다. 개인적으로 신을 만난
신앙인들은 이런 착각을 하지 않고 그냥 사는데
유독 종교인들은 자기들만 부름받았고 자기들만
천국에 간다고 착각한다.
왜냐하면 자기 종교에 사람이 몰려오기 바라서이다.
그래야 자기 종교가 타 종교보다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야 종교전쟁에서 이길 수도 있다.
전쟁의 종류들을 보면 식량전쟁, 여자전쟁, 자원전쟁도
있지만 종교전쟁이 주를 이룬다.
게다가 우리 종교가 우월하고 저따위 종교들은
열등하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신이 '창조주신' 한 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 신앙 주체도 창조주 신이시고, 저 신앙 주체도
창조주 신이시라는 공식이 성립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 신앙의 뭉침과 저 신앙의 뭉침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공식도 성립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종교는 창조주신이 만나 주신 것이고,
저들의 종교는 귀신이 만나 주신 것이 아니다.
우리 종교가 참 종교고 너희 종교는 귀신의 종교라고
치부한다면 그런 것도 성령 모독죄가 아닌가.
왜냐하면 신이 인간을 만나주신 것이기 때문에.
만남도 너무 다양하게 만나주셔서 그런 것이다.
신의 이름도 다르고 신의 섬김법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다.
영의세계에 대해서 보여주시는 것도 다르고,
신에 대해서 설명해주시는 방법과 내용도 다르고,
인간의 생각과 많이 달라 혼란스럽기도 하다.
오죽하면 예수와 공생했던 제자들도 예수의 설명을
알아듣지를 못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냐고
옆사람에게 묻기도 했다.
사람들끼리도 서로 너무 달라서 백인, 황인, 흑인 해가면서
인종차별이 심했다가, 현대에 와서는 다문화시대가 되어서
서로를 품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면서 서로 틀린 게 아니라 서로 다름을 인정해 주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그 종교가 틀렸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냥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준다면 싸우고 전쟁할 일이 없다.
◐종교의 종류
■흰두교
'인도교(印度敎)'라고도 한다. 힌두교를 범인도교라 함은 힌두(Hindū)는
인더스강의 산스크리트 명칭 ‘신두(Sindhu:大河)’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도와 동일한 어원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기원전 2500년경의 인더스 문명에까지 소급될 수 있으며,
아리안족의 침입(기원전 2000∼기원전 1500?) 이후 형성된 브라만교를 포함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아리안 계통의 브라만교가 인도 토착의 민간신앙과 융합하고,
불교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300년경부터 종파의 형태를 정비하여 현대 인도인의
신앙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에 특정한
교조와 체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다양한 신화·성전(聖典) 전설·의례·제도·관습을
포함하고 있다.
고대 브라만교와 차이점이 있다면, 브라만교가 '베다'에 근거하여 희생제를
중심으로 하며 신전이나 신상(神像) 없이 자연신을 숭배하는 데 비해,
힌두교에서는 신전·신상이 예배의 대상이 되고 인격신이 신앙된다는 점이다.
또한 공희(供犧)를 반대하여 육식이 금지되고 있다.
힌두교의 근본 경전은 '베다'와 '우파니샤드'이며 그 외에도 '브라흐마나'
'수트라' 등의 문헌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은 인도의 종교적·사회적 이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또한 경전에 준하는 것으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의 2대
서사시가 유명하다. 특히 '마하바라타'의 일부인 '바가바드기타'는 널리
애창되고 있다. 이외에 '푸라나' '탄트라' '아가마' '삼히타' 등이 힌두교
각 파에서 존중되고 있다.
힌두교의 특징적인 사상은 윤회(輪廻)와 업(業), 해탈(解脫)의 길,
도덕적 행위의 중시, 경건한 신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윤회와 업 사상은
민간신앙을 차용한 것으로 이미 '우파니샤드'에 나타나며 '마하바라타'에
이르러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인도인의 도덕관념을 키웠지만,
한편으로는 숙명론을 심어줌으로써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인간의 사후 운명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이 있었다.
신들도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그러한 속박에서 해탈하는 방법으로서, 출가 유행(遊行)의
생활과 고행 또는 요가가 교설되었다.
■불교
불교라는 말은 부처(석가모니)가 설한 교법이라는 뜻과 부처가 되기 위한
교법이라는 뜻이 포함된다. 불(佛:불타)이란 각성(覺性)한 사람, 즉 각자(覺者)라는
산스크리트 ·팔리어(語)의 보통명사로, 고대 인도에서 널리 쓰이던 말인데
뒤에는 특히 석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불교는 석가 생전에 이미 교단(敎團)이 조직되어 포교가 시작되었으나
이것이 발전하게 된 것은 그가 죽은 후이며, 기원 전후에 인도·스리랑카
등지로 전파되었고, 다시 동남아시아로, 서역(西域)을 거쳐 중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교권(敎圈)이 확대되어
세계적 종교로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14세기 이후로는 이슬람교에
밀려 점차 교권을 잠식당하고 오늘날에는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아직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 티베트에서
몽골에 걸친 지역, 한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에 많은 신자가
있으며,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다른 여러 종교와 비교하여 불교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신(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불타가 후에 이상화(理想化)되고 확대되어
절대(絶對)·무한(無限) 및 그 밖의 성격이 부여되고, 각성과 구제의 근거가
되고 있으나 창조자 ·정복자와 같은 자세는 취하지 않는다.
②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 대표된다.
③ 자비는 무한이며 무상(無償)의 애정이라 할 수 있어, 증오(憎惡)나
원한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광신(狂信)을 배척하고
관용(寬容)인 동시에 일체의 평등을 관철하고자 한다.
④ 지혜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데, 일체를 종(縱)으로 절단하는
시간적 원리인 ‘무상(無常)’과, 일체를 횡(橫)으로 연결하는 공간적 원리인
‘연기(緣起)’가 중심에 있어, 이것은 후에 ‘공(空)’으로 표현된다.
⑤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경향이 강하다.
⑥ 모든 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는 실천만이 강조되고 있다.
⑦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覺性:解脫)을 이상의
경지(境地)로 삼아 이를 ‘열반(涅槃)’이라 한다. 그 교의(敎義)는
석가의 정각(正覺)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8만 4000의 법문(法門)이라 일컫듯이 오랜 역사 동안에
교의의 내용은 여러 형태로 갈라져 매우 복잡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불(佛)도 본래는 석가 자체를 가리켰으나 그의 입적(入寂) 후
불신(佛身)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 2신(身) ·3신 등의 논, 또는
과거불 ·미래불, 또는 타방세계(他方世界)의 불, 보살(菩薩) 등의
설이 나와 다신교적(多神敎的)으로 되었다.
팔만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
(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000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000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만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내외, 세로 24㎝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 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또한 대장경은 국보 32호이며,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기독교
기독교(基督敎), 크리스트교(Christian religion)[3] 또는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적을 본받고, 그를 인류를 구원한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이다. 신자 수는 모든 교파를 합쳐
약 24억 명에 달한다.
기독교의 경전은 성경으로, 신약과 구약으로 구성된다.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종교로,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와
함께 세계 4대 종교로 꼽힌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서 따르는 절대자의 계시의 전통과 역사성을 표방하였다.
때문에 학술적으로 유대교와 나중에 발생한 이슬람까지 포함한 세 종교를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일부 개신교 신학과 상당수 기독교
종파의 전통주의·근본주의 신학에서는 학술적 견해와는 달리 이슬람에 대해
'아브라함 계통의 계시종교에 속하지 않는다'고 간주한다.
원본인 유대교와의 차이는 크게 다음과 같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야훼와 동급인 신으로 보고 신약성경을 정경
(하느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책)으로 인정하지만, 유대교는 소수의
메시아주의 분파를 제외하면 예수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때문에 유대교 경전인 타나크가 기독교 기준에서의 구약성경으로
불리는 것 역시 인정하지 않으며, 히브리 성경의 권위를 매우 높게
보고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신약성경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슬람과의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 성령과 다른 위격을 가질지언정
본성에서는 동일한 유일신으로 본다는 점이다.[7] 이를 삼위일체론이라 한다.
삼위일체론에 따라 하느님과 동일 본질을 가진 한 예수를 신으로 믿는 경우가
많지만, 모든 기독교 종파가 삼위일체 교리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에서는 예수를 신이 아닌 수많은 예언자 중 하나로만 보며 예수보단
그 수많은 예언자 중 최후의 예언자인 무함마드를 더 중시한다.
알라(한국어 번역시 하느님)라는 존재를 유일신으로 믿는다는 점에서는
일신교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기독교가 유대교, 이슬람교와 다른 가장
큰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시각과 어떻게 인정하느냐
하는 관점이다. 물론 세세하게는 그 말고도 차이점들이 아주 많다.
bible(성경))은 그리스어 biblion(책)에서 온 말.
4세기의 그리스 교부 크리소스토무스(Chrysostomus) 이래로
구약과 신약의 정경(正經)들을 to biblia(책들)라고 칭하였다.
성경은 한 권의 문서가 아니라 기원전 1000년 경으로부터
기원후 2세기에 이르는 동안에 기록된, 저자와 내용과 형식과
부피가 다른 66권의 책들의 묶음이다.
구약(舊約)은 유대교의 경전으로서 서기 90년 경에 현재의
39권으로 확정되었고 신약(新約)은 서기 397년에 현재의
27권이 정경(正經)으로서 확정되었다.
이때의 편집에서 제외된 문서들을 외경(外經)과
가경(假經)이라고 한다. 성경은 계시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절대적이고 유일한 권위를
가진다고 믿어진다.
오늘날 우리가 한글로 읽는 성경은 세 가지 원어로 기록되어 있다.
①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된 구약성경
히브리어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언어로서 구약성경 대부분은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창세기, 에스라, 예레미야,
다니엘서의 일부에서 아람어가 사용되고 있다.
고대 히브리어는 성경에서 ‘유다 방언’(왕하 18:26; 느 13:24; 사 36:11)
또는 ‘가나안 방언’(사 19:18) 등으로 불린다. 특히 ‘가나안 방언’이라
불리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면서 가나안
사람들의 언어를 자신들의 언어로 만들어 사용한 것이 히브리어이기
때문이다.
한편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된 이후(B.C. 586년경) 히브리어는
주로 문서 등 문어체로 사용되고, 일상 생활에서는 대부분 아람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라를 잃고 뿔뿔이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의 후손들은 점차 히브리어를 잃어버려 성경을 읽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70명(정확하게는 72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애굽에 있는
지중해 연안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모여 각처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헬라어로 된 구약성경을 번역하게 된다.
이 성경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셉투아긴타’(Septuaginta, ⅬⅩⅩ)이다.
‘셉투아긴타’는 라틴어로 70을 뜻하는바, 성경 번역 학자들이 70명인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②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 -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광대한 헬라 제국은
지중해 연안을 비롯하여 소아시아, 애굽, 인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라에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헬라어는 대부분 나라에서 공용어처럼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이 헬라어 중에서도 보편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쓰고 읽는
‘코이네’로 번역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코이네는 헬라 사회에서 대단한
문학적 가치를 지닌 수준 높은 고급 언어는 아닐지라도 모든 사상을
충분하게 전달하고 문법 체계가 단순하며 가장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여 복음 전파에 아주 유리한 특징을 갖고 있어
신약성경의 언어로 채택된 것 같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슬람교
이슬람(اسلام)이라는 말은 아랍어 어근 'س ل م(S-L-M)'에서 온 것인데,
이는 아랍어로 (신에게의) 복종이라는 뜻이다.[7] 평화를 뜻하며,
구체적으로는 '(하느님에게) 복종함으로써 얻는 마음의 안식과 평온함'을
의미한다.
무슬림들의 인삿말 "앗살라무 알라이쿰"(평화가 당신께 함께 하기를),
유대인들의 인삿말 "샬롬"[8]에 이 낱말이 들어가있다.
성경에서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한 것도 이런 셈족 언어의 전통에서 이해하면 된다.
예수가 생전에 썼던 아람어도 셈어족에 속하므로.
한자로는 회교(回敎)라 표기한다. 회흘(回鶻; 현재 중국의 신장 위구르족
자치구 행정구역) 지방에서 건너온 종교라는 뜻으로 추정되며, 명나라 때에는
회골 지방에서 건너와 중국에 정착한 기독교인과 유대인도 회회인(回回人)이라
칭하였다.(이를테면 기독교인 십자회회(十字回回) 유대인은 남모회회(藍帽回回)
등등 회회 앞에 특징을 붙여 칭함)
그러나 명나라 때에 이르자 명의 쇄국 정책의 일환으로 서역 출신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한족하고만 혼인하도록 강제 하는 정책으로
이들을 한화시켜버렸고 이에 따라 이슬람 회회인 이외에 기독교와 유대교
회회인은 아예 한족과 동화되어 버리거나 차라리 중국 내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결국에는 '회회'라는 말이 무슬림을 칭하는 말로 굳어지게 된다.
한국 이슬람중앙회에서는 ‘회교’라는 명칭은 정확한 이름이 아니므로,
‘이슬람’ 또는 '이슬람교(敎)'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슬람을 '마호메트교'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으나,
이슬람은 무함마드를 신으로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므로
‘마호메트교’라는 명칭도 쓰지 않을 것을 권고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속
종교는 우리 서로 흩어지지 말자고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다. 시날땅에서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 탑을 쌓은 것과
같이.
신은 인간들이 너무 많이 한 단위로 뭉치지 못하게 막으신다.
대홍수로 막으시고, 언어로 흩어버리시고, 나라로 설정하고,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큰 단위로 뭉치지 못하게 하신다.
'무속'은 창조주신과 1:1이 관계라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지만, 종교는 큰 단위로 뭉치지 못하게 하시고
여러갈래로 갈라놓으신다.
'무속'은 신이 찾아오시는 것이고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는 것이다.
종교들은 신을 찾는다는 목적은 같지만
행위는 서로 다르다. 그것을 인간들은 서로
틀렸다고 한다.
틀렸다고 하니까 전쟁을 하는 것이다.
틀린 것을 고쳐주기 위해서.
다른 것을 틀렸다고 고쳐주려고 할수록
사고가 따르고 전쟁도 따르고 죽음도 따를수
있다.
유다가 사마리아인들을 개같은 족속이라고,
자기 종족으로 쳐주지 않고, 틀렸다고 하면서
선민 자랑질 했을 때 주께 큰 봉변을 당했다.
◐사람과의 관계
유대인들의 자기신께 향한 믿음과 절개는
그 어느나라보다 뛰어나다.
그들은 하늘의 신 외에 그 어떤 것도,
혹 예수 사람이라 할지라도 용납을
1도 못하는 기질을 가진 종족이다.
그렇게 신께 향한 믿음과 행함(?)이 뛰어났다 해도
사람들과의 관계성이 바닥을 칠 때 혼났다.
잘란척이 하늘을 찌를 때 혼났다.
이들이 믿는 신이 '창조주 신'이 아니고 그들만의 신이었다면
그들이 망하면 안 된다. 2천년 가까이 나라도 없이 떠돌면 안 된다.
어느 나라에 의해 그렇게 떼죽임을 당해도 안 된다.
그들의 신은 힘도 없고 자기 종교의 백성들을 지키지 못하는
가짜 신이다.
하늘의 신께 징계를 받는 '죄' 라는 것은 사람 혼자 있을 때는
거의 일어나질 않는다. 인간이 하늘의 신께 화를 품과 욕을
하는 것 아닌 이상 인간 혼자있을 때 하늘의 신께 죄를 지을
확률은 거의 없다.
타이타닉 영화에서 보면 부자 남자가 거대한 배에 오르면서
그냥 탈 것이지 쓸데없이 "이런 배는 신도 못 부신다"고 한다.
그 속 마음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배가 암초 하나에 걸려서
침몰하고 만다. 쓸데없는 말을 진심으로 했나.
그러면 그 남자의 말 한마디에 죄도 없는 불쌍한 시민들이
다 죽었냐? 하늘의 신이 줄로 매어준 구역은 아름답다에
들어간 것이다. "합당하다!"
사람 둘 이상이 모였을 때 '죄'의 종류들이 생겨나게 된다.
1인자나 리더자가 되기 위한 발버둥, 전쟁, 미움, 다툼, 용서못함,
이간질, 험담, 눈짓, 발짓, 속임, 거짓, 남을 발로 밟고 올라섬,
그런척, 안그런척, 바른척, 좋은척, 잘하는척, 스트레스 주기
등 사람과의 관계성에서 죄가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법으로 그러면 안돼, 저러면 안돼, 이래야 돼,
여기까지 등 약속을 정해놓아야 한다.
인간들끼리의 삶에서 이러면 안돼 저러면 안돼 하는
기본적인 약속을 성경에 말씀해 놓으셨다.
하늘의 신께 향한 종교적인 믿음과 행위들은 '죄'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이 종교를 가지고 잘란척 하고 다투고
전쟁을 하고 할 때는 죄가 성립이 된다.
잘란척 하다 죽을 수도 있다.
싸우다 죽을 수도 있다.
하늘의 신께 봉변을 크게 당한다.
기독교도 '영적레위인'이라고 자칭하면서 선민 자랑질을
일삼으면 타 종교에 의해 봉변을 당할 수 있다.
선민타령을 하지 말라, 선민은 오직 이스라엘이다.
신앙은 이스라엘이 아닌 옛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선민은 이스라엘이다.
그것도 성경을 쓰게 하시고, 기록의 모델로 삼으시고,
예수가 어린양 제물로 태어나게 하시고 죽으시기 위한
방편인 것이지 이스라엘만 잘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선민이라고 들까불면 봉변을 당하게 된다.
우리 종교가 최고라고 들까불면 봉변을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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