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유관순 열사의 유언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중략>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의 보통과 졸업 사진
1996년 이화여고에서 명예 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유관순 열사는 실제로 유언처럼 당했다고 합니다. 시신 인도시 머리 몸통 사지 등 6토막, 코와 귀도 잘려 있었다는군요.
그녀의 마지막 유언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너무 가슴 절절하게 와 닿지 않습니까?
일제가 3.1만세 독립운동을 무력진압하면서 시위 도중,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주동자로 잡혀 꽃다운 17세 때, 처참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운명을 달리하셨습니다.
===========================
삼일운동때의 순국처녀, 충남 천안출신
예수교 공주교회(公州敎會) 부인선교사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16세의 소녀로 시위대열에 끼어 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시 이 운동의 전국적인 파급의 일익을 담당키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주야을 가리지 않고 천안, 연기, 청주, 진천등지의 학교와 교회를 방문하면서 시위운동을 계획, 음력 3월 1일 일제히 궐기하였다.
삼일운동은 당시의 조선민중의 뿌리깊은 독립의지에서 일어난 것으로서 이름 모를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로 합류한 민족운동이다. 한국의 잔다르크로 불리우는 유관순은 당시 16세의 이화학당의 학생으로서 고향인 천안시 목천면 지평리로 내려가 수천명의 시위군중의 앞장을 섰다. 이때 그녀의 아버지 유중권은 헌병의 발포로 즉사하고 어머니역시 참살당하고 말았다. 유관순은 체포되어 오빠 관옥과 함께 유치된 뒤에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그녀의 옥중 법정투쟁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그녀는 "죄를 지은 것은 일본인이다. 그런 일본인에게 우리를 재판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라는 주장을 시종 굽히지 않았다. "죄를 뉘우치고 제국신민이 되겠다고 다짐을 한다면 관대한 처분을 내리겠다."는 재판관의 회유에 "강도를 몰아낸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살아서도 독립만세 죽어서도 독립만세다."라며 한 걸음도 물러설 줄 몰랐다. "너희들 조센징이 무슨 독립이란 말이냐."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한 재판장의 검사를 향해서 의자를 집어던지기도 하였다.
날밤으로 계속된 고문은 그녀의 죽음을 앞당겼다. 그녀의 밥에다가 모래와 쇳가루를 섞어서 먹게했다. 머리에는 콜타르를 칠해 머리 전체를 잡아 당기고, 가발처럼 머리가죽을 벗겨내기도 하였다. 겨드랑이와 음부의 털도 불에 달군 인두로 태워 버렸다. 코와 귀는 면도날로 잘리우고 손톱, 발톱은 몽땅 집게로 뽑아 버렸다. 그러면서도 유관순은 '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1920년 10월 12일 그처럼 가혹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그녀는 끝내 숨지고 말았다.
17세의 꽃다운 나이 그녀의 사망소식을 접한 이화학당의 프라이교장은 국제여론에 호소하여 그녀의 시신인도를 거듭 요구했다. 학교측에 인도된 유관순의 시신은 눈뜨고는 볼 수 없을 만큼 무참히 머리, 몸통, 사지가 따로따로 여섯토막으로 절단되어 있고, 코와 귀가 잘리우고 머리와 손톱, 발톱이 뽑혀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흉보하기 그지없는 일제의 고문은 그녀의 육신을 무참히 죽게 할 수 있었으나 그녀의 애국심만은 죽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