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1일(토) 고향에서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도리돈이란 식당에서 만남을 가졌는데 그곳에 이런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영월광업소, 1950년대와 60년대 남한에는 이렇다할 산업체가 없었습니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60년대 중반) 사회교과서 '영월화력발전소'와 '쌍용양회'가 나왔습니다.
영월화력발전소에 석탄을 공급하는 광업소가 '마차리'에 있었습니다.
쌍용양회 시멘트공장은 영월군 서면 쌍용리에 있습니다.
영월화력발전소는 석탄 대신 LNG를 사용하고 쌍용양회는 그대로 시멘트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북한의 아오지탄광 개발을 시작으로 남한에는 영월, 삼척, 문경에 1934년경
광업소가 개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영월군 북면 마차리는 대여섯가구 화전민이 살던 곳이었는데 일제의 탄광개발로 도시화가
되었고 석탄산업은 하향할 때인 60대말까지 대한민국을 이끌던 제일의 산업이었습니다.
마차리에 있는 '도리돈식당'에 옛날 사진들이 있습니다.
영월읍 석정여고 교사로 계신 정의목선생께서 마차에 대하여 정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소화16년, 1941년도 입니다. 차량으로 석탄을 실어 날랐던 것 같습니다.
양반사택이란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소장사택은 일본식정원으로 아주 멋진 곳이었는데
지금은 없습니다. 양반사택이란 곳엔 광업소 과장, 계장들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1958년 이승만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였던 모양입니다.
서울 청량리에서 기차로 제천역, 제천에서 승용차로 영월까지 왔겠죠.
충북 제천군, 강원 영월군, 평창군, 정선군 경찰이 모두 불려와 제천에서 영월 마차리까지
도로변에서 일렬로 경계를 섰다고 합니다. 비포장길은 모래로 덮었다고 합니다.(40리길)
친구 윤동환이 아버지와 악수를 하고 '뭐 필요한거 없어?'하고 대통령이 물으니
'고등학교' 세워 달라고 했답니다.(이건 친구 윤동환의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 여기저기를 다녔지만 면소재지에 고등학교가 있는 곳은 드뭅니다.
1962년, 대통령으로 권력을 잡기 전, 박정희국가재건회의의장으로 방문한 사진.
왜 왔을까요? 광산에서 큰 사고가 났던 것은 아닐까요?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부친이 안계신 친구들이 몇명 있었습니다. 광산매몰 사고로.....
1966년 정일권국무총리의 방문.
마차리는 북면의 면소재지였기에 우체국, 지서(파출소), 소방소 등이 있었습니다.
준종합병원도 있었고 문화관이란 영화상영과 연예인이 쇼를 하는 공간도 있었습니다.
(다섯살때 탈장이 와서 기구를 차고 5년을 살았고 4학년 겨울방학때 이 병원에서 수술하였죠.
무서웠죠. 입원실 밑에는 영안실이었으니까요.)
문화관이 있는 덕에 어릴적부터 영화는 많이 보았습니다.
여름엔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반공영화를 봤습니다. 박쥐가 날던 초저녁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홀쭉이와 뚱뚱이, 백금녀 등등 지금도 황금장(여관)에서 머물렀던 기억이 납니다.
갱도에 입항하기 전에는 하얀 얼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광에서 나올 때 이(齒)만 하얗고 온통 검정투성이입니다.
이를 드러내놓고 웃는 모습, 지금도 생생합니다.
국민학교 옆에 대중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1km남짓 걸어서 목욕탕까지 갔습니다.
마을주민들에게는 토,일요일만 개방되었습니다.
삭도(索道).
영어로 Cable away. 국민학교 다닐 때는 삭도란 말을 몰라서 그냥 '사또바가지'라고 불렀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삭도'라고 하는줄 알았습니다.
삭도는 영월광업소에서 생산된 석탄을 영월화력발전소로 운반하는게 1차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몰래 교통수단으로 이용했습니다.
사람도 탔고 도시락도 실어 보냈습니다.
가끔 삭도가 뒤집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여 사람이 죽기도 하였습니다.
60년대 아오지탄광이 나오는 전쟁영화는 이곳에서 많이 촬영하였습니다.
지금도 장동휘, 이대엽, 허장강, 오지명...이런 분들을 본 기억이 납니다.
간부사택은 일제시대 1936년경 세워졌을겁니다.
폐광 후 이 사택을 살렸으면 지금은 참으로 좋은 관광상품이 되었을 것인데....
일제가 지은 이 사택, 송판이 아주 좋은 목재였기에.......
마차6리, 영월광업소 본사건물과 탄을 적치하였던 곳입니다.
이 적치장 건너편 산등성이에 허름한 판자집을 짓고 막장에서 일하는 광부들이 살았습니다.
남편이 없는 과부들은 선탄장(選炭場/질 좋은 탄을 고르는 작업)에서 일했고요.
막장이나 선탄장에서 탄가루 마시면서 열심히 일해도 월1만원도 못받았습니다.
2~3,000원 받았던 것 같습니다. 교사월급 15,000원 정도 했나요?
국민학교 월사금이 100원 안된 것 같았고요.
나는 배급소에 대한 기억은 없습니다.
월급 대신 돈표를 주었던 모양입니다. 그것으로 쌀과 바꾸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장사(세탁소)를 하셨기에.....광업소 공무과(전기)에서 일했으나 5.16군사쿠테타 이후
박정권이 군에 갔다오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짤랐다고 합니다.
중3때 6.25가 발발하고 아버지는 소아마비로 장애인이었습니다만 그건 고려사항이 아니었다고....
태완선
찾아보니 경남 하동출신이네요.
하지만 1947년 영월광업소 소장으로 오면서 정치적 기반을 영월로 삼은 것 같습니다.
제2대 민의원도 영월지역을 기반으로 하였고요. 배우 태연실씨와 친척이라고.....
1972년도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내신 분이죠.
이 분 뒤를 이은 분이 장승태(체신부장관까지 지냈던 분)란 국회의원이었습니다.
이 당시 대한석탄공사 사장을 총재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아직 한국산업은행은 행장이라고 안하고 총재라고 합니다.
광업소, 매몰사고가 잦았죠.
엥~? 전두환씨가 왜?
아, 사북사태 이후 탄광촌 사람들 위로한다고 방문한 것 같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두환을 전임대통령이니...존칭을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망월동에 계신 분들이나 그 유족들,,,,상처을 안고 사시는 분들을 생각하면....아,....!
이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