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밥을 먹을 때 나는 전통적인 매너인 “식불언(食不言) 침불언(寢不言)”에 의지해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꾸역꾸역 밥과 반찬을 입에 넣고 묵묵히 저작에만 힘을 쏟는 타입이다. 그런데 하루 세 끼를 빠짐없이 집에서 먹다보니 식사시간 중에 아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필요를 느꼈다.
그런데 아는 것이 별로 없는데다 말주변도 형편없는 나로서는 식탁 앞 화제를 찾기가 지난한 일이다. 밥이나 반찬 투정을 했다가는 당장 쫓겨나리라고 잘 알므로 그런 것을 화제로 삼을 생각은 꿈에도 하질 않는다. 다음 더럽거나 혐오스런 것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허용되지 않는다. 덧붙여 정치, 사건 사고, 스캔들도 밥맛을 떨어뜨리는 화제로 간주된다. 100억 아파트나 쓰레기장의 금괴와 같은 부자들 이야기도 밥상 위에 올리면 안 된다. 결국 얄팍한 내 실력으로는 날씨와 스포츠 정도만 화제로 말을 꺼낼 수 있다.
오늘 식탁에서도 나는 “오늘은 오전 오후 다 강수확률 90%래.”라고 말을 꺼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장마철에 오늘 비 올 거라는 말처럼 싱거운 말이 어디 있는가? 아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스포츠로 넘어가자.
나는 프로 야구 전반기 성적을 꺼내 든다. “기아가 단독 선두고 좀 떨어져서 LG, 두산, 삼성이고 쓱(SSG)하고 NC가 공동 5등이네. 밑에는 KT, 롯데, 한화, 키움 순이네.”
나는 인천을 좋아하므로 쓱의 미지근한 팬이고, 아내는 밀양 태생이므로 롯데와 NC를 약간 응원한다. 그 다음으로는 아들이 다니는 LG를 조금 성원한다. 그러므로 기아가 선두를 달리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지역적 편견으로 해석하지 말기 바람).
“그러니까 그 노인네와 어린애가 안타를 못 치게 해야 된다고요.”
우리 부부는 일전에 이미 기아가 선두를 질주하는 데에는 만 사십세의 노장 최형우 선수와 스물 한 살의 김도영 선수의 눈부신 활약이 있기 때문이라는 매스콤의 보도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먼저 노인네와 어린애라는 표현은 내외 간에 나눈 편한 대화에서 사용한 호칭으로 양해해 주길 바란다. 다음 두 선수의 올 전반기 성적을 살펴보며 박수를 보내자.
최형우 선수: 타율 0.286, 안타 85개, 홈런 16개, 타점 73점, 장타(2,3루타) 20개, 득점 49점, 퍼볼 34개.
김도영 선수: 타율 0.341, 안타 109개, 홈런 23개(2위), 타점 60점, 장타 17개, 득점 78점(1위), 퍼볼 36개, 도루 26개(5위), 장타율 0.622(1위), 전반기 20-20 달성,
“두 선수에게는 퍼볼을 주더라도 안타나 홈런을 치지 못하게 해야 되는데 왜 그걸 모르지?”
예전 미국 NBA에서 시카고 불즈팀의 마이클 조단 선수가 경이적인 개인 기록을 세우고 있을 때 어떤 농구 평론가가 언급한 “조던을 막으려고 하지 말라. 조던이 원맨쇼를 하도록 하고 다른 선수를 마크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것은 조단이 원맨쇼를 하게 하여 다른 불즈 선수들의 열의를 떨어뜨리게 하면 상대팀에게 승산이 있다는 분석이었다.
아내의 대책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두 스타 선수들이 홈런이나 안타를 펑펑 쳐서 팀의 사기를 올리게 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다. 퍼볼이 되는 한이 있어도 나쁜 볼을 던져서 기아 선수들의 맥이 빠지고 김이 새게 하자는 것, 예로 최형우 선수를 들자면 안타 85개와 퍼볼 34개인데 이것을 퍼볼 85개를 주더라도 안타를 34개만 치도록 투구를 바꾸라는 것이다.
중언부언하자면, 야구는 타격에서 타자가 한 명씩 타석에 들어서는 다분히 개인적 성격의 경기이다. 그러나 앞에 나선 선수들이 연속 안타를 치면 다음 타순의 타율이 낮은 선수들도 없는 실력, 아니 숨은 실력을 발휘하여 안타를 치게 되는데 이렇게 기세를 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최와 김, 두 선수가 현재 잘 수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 두 선수가 안타를 치지 못하게 하고 다만 퍼볼로 출루하게 만든다면 뒷 타석 선수들의 숨은 실력도 끌려나오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내의 주장이었다.
"후속타가 없으면 무사 1,2루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
“에이! 석감독 더티하네.”라고 나는 아내를 비판했다.
“지는 거보단 낫지. 져서 잘리는 게 좋아?”
얼마 전 야당 대표가 깨끗한 패배보다는 더러운 승리가 낫다는 취지의 언급을 해서 식자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아내도 욕하면서 물이 든 걸까? 조금 걱정된다.
이렇게 대화하면서 오늘 아침 식사는 끝냈다. 모처럼 활기찬 식탁 풍경이었다. (끝)
첫댓글 100++ 동감, 찬동 ! 헌데, 유감스럽게도, 소생 옆에는 '인 필드 플라이 선언' 관련 룰 설명을 한참, 반복해서 듣고 이해 할 듯 싶을 즈음 게임 끝나는 '관중 님' 밖에 없스니 '활기 ~ 재미 --' 이올시다.
극히 私的인 件, 배탈은 잘 조절되고 있으신지요? 한 열흘 뒤 몇몇이 모여 制憲節 기념 모임을 갖는 것은 어떨지요? RSVP.
서군에게 답. 좋습니다. 문제는 컨디션이 그날 그날 자꾸 바뀐다는 점입니다. 좋다가 갑자기 나빠지고. 늙은 탓이겠죠. 노문
암튼 살살 주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