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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1월 11일 월요일
[(백)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마르티노 성인은 316년 무렵 판노니아(현재 헝가리의 솜바테이)의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한 다음 군인이 된 그는 어느 날 추위에 떨고 있는 거리의 걸인에게 자신의 외투 절반을 잘라 주었다. 그날 밤 꿈속에 그 외투 차림의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신비 체험을 하고 나서 곧장 세례를 받았다. 그 뒤에 사제가 되었으며, 370년 무렵 프랑스 투르의 주교로 뽑혔다. 착한 목자로서 모범을 보이고, 수도원들을 세웠으며, 성직자들을 교육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397년 프랑스 중부의 캉데생마르탱에서 선종하였다. 프랑스 교회의 초석을 놓은 그는 프랑스 교회의 수호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티토에게, 원로들을 임명하라며, 감독은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한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조심하고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원로들을 임명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티토서 시작입니다. 1,1-9
1 나 바오로는 하느님의 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입니다.
내가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의 믿음을 돕고
신앙에 따른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으로,
2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근거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거짓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창조 이전에 약속하신 것입니다.
3 사실 하느님께서는 제때에 복음 선포를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드러내셨습니다.
나는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이 선포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4 이러한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5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둔 까닭은,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고을마다 원로들을 임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6 원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자녀들도 신자이어야 하고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하며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7 사실 감독은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합니다.
또한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8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9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가르침으로 남을 격려할 수도 있고
반대자들을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2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4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이사 61,1-3ㄹ)와 복음(마태 25,31-40)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교정과 용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 형제의 죄는 꾸짖어 바로잡아야 하고, 그가 뉘우치면 기꺼이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가끔 형제의 잘못을 보고도 이를 바로잡지 않고, 그냥 혼자 용서해 버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아닙니다. 그 형제는 자신의 잘못을 모르기에, 회개하지 못한 채 죄에 머물게 됩니다. 혼자서 용서하고 마는 것은, 그를 꾸짖을 때 예상되는 갈등과 다툼이 싫어서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용서는 상대에 대한 사랑이 없고, 불편함의 회피일 뿐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그에게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없습니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을 멈추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와 불편해지는 결과까지도 감당하기로 결심하면서, 형제를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만일 죄를 저지른 형제가 자신의 잘못을 알고 뉘우친다면, 곧바로 용서해야 합니다. 하느님처럼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받기 어렵다고 생각한 큰 죄도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죄보다 늘 더 큽니다. 또 되풀이되어 고백하기도 부끄러운 죄도 하느님께서는 그때마다 처음처럼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용서하시는 데 지치시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과 같이 형제가 어떠한 큰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또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여 저지르더라도, 그가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큰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 마음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자매란 돌로 만든 방아입니다. 크고 둥근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는 것이지요. 이것을 소나 말이 끌어 돌려서 곡식을 찧고 빻습니다. 따라서 연자매 사이즈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즉시 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 말씀, 얼마나 섬뜩한지 모릅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루카 17,2)
강경한 예수님 말씀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마냥 오냐 오냐 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습니다.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러나 때로 자녀가 그릇된 길을 갈 때, 그 길이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 할 때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길에서 되돌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타일러보기도 하고, 눈물로 호소도 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강하게 외쳐보기도 하고 정신 번쩍 들게 혼도 낼 것입니다.
이런 극진한 자녀 사랑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는 손을 잘라버려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던져버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버리는 사형 방법이 없었지만, 로마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형과 함께 로마로부터 도입된 끔찍한 사형 방법 중에 하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사형 방법을 끔찍이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수장 후 시신을 되찾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차라리 연자매를 선택하라고 강조할 만큼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죄를 짓게 하는 죄를 중히 여기셨습니다. 일시적인 쾌락으로 지옥을 얻기보다는 불구가 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게 더 낫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다른 무엇에 앞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영혼의 구원,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토록 강조점을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글자 그대로 손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뽑아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밥 먹듯이 일상적으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다들 불구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죄 앞에서 목숨 걸고 맞서 싸우라는 격려 말씀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과 한국의 집 구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국에는 ‘현관(玄關)’이 있습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옵니다. 현관에는 신발장이 있고, 우산 거치대가 있고, 구둣주걱이 있습니다. 현관은 ‘정화(淨化)’의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직장에서 화나는 일이 있어도, 힘든 일이 있어도 현관을 지나면서 모두 털어버리면 좋겠습니다. 현관을 통해서 가정으로 돌아오면 그 가정이 작은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성당에도 현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수(聖水)’입니다. 달라스 성당에는 성전 입구에 세례대가 있습니다. 세례대에는 늘 일정량의 물이 흐르게 하였습니다. 성수를 찍거나, 세례대에 손을 적시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나서는 겁니다. 가톨릭 교리 중에 ‘연옥’이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연옥은 일종의 현관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성인들의 통공과 우리의 기도가 함께 하면 연옥 영혼들은 정화될 겁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초대받을 겁니다.
제가 있는 사제관은 복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계단에 ‘난관(欄干)이 있습니다. 난간은 공간을 구분하는 장치로, 실내와 실외, 안전과 위험, 자유와 제한 사이의 경계를 형성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난간은 인간의 본질적인 경계 설정 욕구를 반영합니다. 난간은 어떻게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자유를 제한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난간을 넘어서거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욕구를 어떻게 경험할까요? 아담에게 에덴동산은 낙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난간을 뛰어넘었습니다. 난간은 보호자나 사회적 안전망과 같은 역할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어려움에서 안전을 찾을 때 '난간'과 같은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삶에는 많은 보이지 않는 난간이 있으며, 우리는 항상 어떤 경계 내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난간은 규칙과 질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사회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규범과 법적 ‘난간’을 세워 둡니다. 이러한 난간이 보호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억압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원로와 감독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원로는 현관과 같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감독은 난간과 같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원로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교우들이 하느님께로 갈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감독은 세상 속에 있는 교우들이 하느님께 갈 수 있도록 이정표가 되어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원로와 감독의 역할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이고, 다른 하나는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이렇습니다.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은 이렇습니다.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자녀들도 신자이어야 합니다.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원로와 감독에게 요구되는 덕목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난하고 평가하기보다는 먼저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나에게 잘못한 이를 기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인연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내가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의 믿음을 돕고 신앙에 따른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으로,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근거합니다.”
<행복하여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루카 17,1)
행복하여라
벗들을 믿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희망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사랑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곧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빛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맑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바르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참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곱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착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부드럽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아름답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솔직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어울리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일어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나아가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살맛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살게 하는 사람
오늘의 성인
성 마르티노(Martin)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투르(Tours)
활동연도 : 316?-397년
같은이름 :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헝가리 판노니아(Pannonia)의 사바리아(Sabaria) 태생인 성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는 이교도 장교의 아들로 부모가 파비아(Pavia)로 전속될 때에는 15세였다. 이때 자신의 뜻과는 달리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고 로마(Roma)로 유학을 가서 그곳에서 예비자가 되었다.
아미앵에서 지내던 337년 어느 추운 겨울날, 그는 거의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면서 성문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한 거지를 만났는데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입고 있던 옷과 무기밖에 없었다. 그는 칼을 뽑아 자기 망토를 두 쪽으로 잘라 하나를 거지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속에서 자기가 거지에게 준 반쪽 망토를 입은 예수가 나타나 “아직 예비자인 마르티누스가 이 옷으로 나를 입혀 주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이 신비 체험 후 마르티누스는 18세 때 세례를 받고 군대에서 제대한 후 푸아티에(Poitiers)의 힐라리우스(Hilarius)를 찾아가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먼저 어머니를 개종시키고 또 수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했고, 일리리쿰(Illiricum)으로 와서는 공개적으로 아리우스파(Arianism)와 싸움으로써 매를 맞고 쫓겨나는 봉변을 당하였다. 그가 이탈리아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아리우스파이던 밀라노(Milano)의 주교로부터 추방되었다.
그는 잠시 갈리나리아 섬에 숨어 있다가 360년에 프랑스 지방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푸아티에의 주교인 성 힐라리우스로부터 도움을 받고 리귀제에서 은수자가 되었다. 이윽고 다른 은수자들이 그에게 몰려오므로 이 공동체는 갑자기 큰 공동체가 되었는데, 이것이 프랑스에서의 첫 번째 수도 공동체가 되었다. 이곳에서 10년을 지낸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개인생활은 마르무티에(Marmoutier)에서 은수자로서 계속 생활하였다.
그가 정열적으로 주교직을 수행하니 이교 신전의 파괴와 개종이 잇달아 일어났다. 그는 또 계시와 환시로도 유명하며 예언의 은혜도 받았다. 또한 그는 프리실리아누스 이단을 격렬히 반대하고 격퇴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한 뒤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저는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그는 프랑스 지방의 최고의 성인이며,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이전에 서방 수도원 제도를 개척한 탁월한 지도자였다. 순교자가 아니면서도 성인이 된 최초의 인물인 마르티누스의 경당은 유럽의 주요 순례지이다. 프랑스의 수호성인 중 한 분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멘나 (Mennas)
활동년도 : +303년?
신분 : 군인, 순교자
지역 : 이집트(Egypt)
같은 이름 : 메나스, 멘나스, 멘나쓰
성 멘나는 아마도 이집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순교한 듯하다. 그는 로마군의 이집트인 군인으로서 소아시아 중서부 프리지아(Phrygia)에서 복무하던 중,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코티에움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소위 군인 성인으로 널리 알려졌고 영웅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경당은 카름 아부 미나에 있는데, 이곳은 리비아 사막의 국경 지대이다. 그는 이집트의 대 성인들 중의 한 명으로 큰 공경을 받고 있으며, 메나(Menas)로도 불린다.
성 테오도로 (Theodore)
활동년도 : 759-826년
신분 : 수도원장, 신학자
지역 :
같은 이름 : 데오도로, 데오도루스, 떼오도로, 떼오도루스, 테오도루스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태어난 성 테오도루스(Theodorus, 또는 테오도로)는 소아시아 북서부 비티니아(Bithynia) 올림푸스 산의 성인인 플라토(Plato) 원장의 조카이다. 그는 자신의 부친이 비티니아의 사쿠디움(Saccudium)에 세운 수도원의 수련생으로 공부하던 중 삼촌인 성 플라토(Plato)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고 794년에는 플라토를 계승하여 수도원장이 되었다.
그와 플라토는 본처를 버리고 테오도타(Theodota)와 재혼하는 콘스탄티누스 6세 황제의 행위를 맹렬히 비난한 결과 테살로니카(Thessalonica)로 유배당하였다. 그래서 그의 공동체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겨 로마인이 세운 수도원에 정착하였다. 그의 지도로 이 공동체는 비잔틴 수도원의 신기원을 수립할 만큼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두 차례나 유배당하였으며, 더욱이 레오 5세 황제는 성상파괴 정책을 재개하는 등 온갖 내외적 어려움을 극복한 위대한 성인이었다. 성 테오도루스는 속권과 교회의 권리를 구분지어 교회의 독립을 주장했던 인물이며, 성상공경의 정당성을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순수한 의미에서의 수도회 개혁자였다. 그는 교의에 관한 논쟁적인 글을 비롯하여 교리서, 강론집 그리고 찬미가 등을 남겼고, 뛰어난 서예가로 알려졌으며 수도자들에게 예술을 장려했던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