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저우 여행 3 - 강남수향 무두고진의 홍음산방에서 건륭제의 강남순행을 생각하다!
2023년 10월 25일 기차로 쑤저우역 (苏州火车站 소주화차참) 에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후 지하철
을 타고 무두(木渎 목독) MUDU 역에 내리니 무두고진은 4km 외곽 에 있는지라 15위안 하는
자전거 차 쌈러를 타고 10분을 달려서 무두구전(木渎古镇 목독고진) 에 도착해 운하를 구경합니다.
明月寺(명월사) 라는 절을 지나 홍음산방 (虹饮山房) 이란 고택에 도착하니 입구에 乾隆6下江南行程
记事表(건륭6하강남행정기사표) 라는 게시물이 보이니..... 청나라 황제인 건륭제가
여섯차례 강남에 순행 했다는 말이니 여기 홍음산방(虹饮山房) 에 들러서 숙식 을 했다는 모양 입니다.
고사성어에 "강건성세(康乾盛世)" 라고 있으니 청나라때 강희제- 옹정제 - 건륭제 로 이어지는
1661년 부터 1796년 까지 135년 동안의 태평성대 를 일컫는 말로..... 한(漢)나라
문제와 경제때의 문경지치(文景之治) 등과 더불어 중국사에서 이름난 태평성대 중 하나 입니다.
실제로는 이 두 황제 사이에 옹정제 가 끼어있지만 60여 년에 달하는 둘의 재위기간에 비해 10여년
으로 재위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았고, 민간에서는 폭군이라는 인상이 강한 편
이었기 때문에 생략하고 두 황제 만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강건(剛健) 이 아니고 강건(康乾) 입니다.
후금에서 시작한 청나라는 성장을 거듭하다가 4대 강희제 시대 부터 전성기를 맞으니.... 아들과 손자인
옹정제, 건륭제 를 거치며 135년에 걸쳐서 정복전쟁으로 영토가 크게 확장되고 문화, 민생,
경제, 무역등에서 번영을 누리고 농업, 상공업등 생산 및 기술력이 크게 향상되어 경제가 발달 했습니다.
그간 중국 왕조들이 차지한 영역인 중원(혹은 만주 포함) 외에 신장 위구르 자치구, 칭하이, 티베트, 몽골,
연해주 에 이르는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을 능가하는 광활한 영토 를 확보하면서, 이시기
청나라는 유럽과 러시아에서 관련 학파가 생겨날 정도로 관심을 받는 유라시아의 대제국 으로 군림합니다.
그러나 건륭제 말기부터 잦은 대외원정으로 군비 증가, 황실과 귀족들의 사치 등으로 쇠퇴의
조짐이 보이기도 했으니.... 19세기 들어 청은 산업혁명 등으로 빠르게 발전하던
서구 문명에 기술·사상·군사적 으로 열세를 보이게 되었고, 그럼에도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다가 가경제 때 부터 유입된 아편으로 인해 발생한 아편전쟁 이 터지면서 몰락하게 됩니다.
전한의 무제나 명나라의 영락제, 프랑스 왕국의 루이 14세, 무굴 제국의 아우랑제브와 비슷한
평가를 받는다는데, 건륭제 가 청나라 황제중 유일하게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이유는
존경하는 조부인 강희제의 61년 치세 라는 대기록을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으로
1795년 재위 60년만에 퇴위하여 상황(上皇) 이 되었고 가경제가 다음 황제로 즉위 합니다.
건륭제는 강희제 50년에 태어났는데 아들이 20명에 손자는 100명 에 달했으니 할아버지가
그를 알기도 어려웠지만.... 문재가 탁월했고 사서삼경 에 통달했으며 사냥에서도
용감하게 곰과 싸워 잡았으니 그 모습을 보고 강희제는 손자 건륭제를 칭찬하며
관심을 기울였고, 늙은 몸이었지만 손자에게 직접 학문과 무예 를 가르쳐주기도 했습니다.
강희제 마음에 드는 것은 건륭제가 아버지 옹정제와 적모(嫡母) 효경헌황후, 친어머니 효성헌 황후 에게
꼬박꼬박 예를 다하며 문안 을 올리는 것이었으니, 유교 가르침 에 감화되고 가족간의 정을 소중하게
여긴 강희제에게는 좋게 보인지라, 강희제는 죽기 직전에 황위를 물려준 옹정제에게 건륭제를 후임
으로 삼으라고 했다는데..... 조선인들은 이러한 여진족을 미개한 야만인 이라고 욕했으니 모를 일입니다?
건륭제는 여러차례 원정에서 조부 강희제 처럼 최고 지휘관 이 되지는 않고 전쟁은 장군들 에게
맡겨놓았는데, 건륭제의 부대는 팔기군 대신에 만주족과 한족이 합쳐진 군대 로 준가르
정벌군 총사령관이었던 보르지기트 반디 준가르 및 동투르키스탄 정벌에서 활약한
우야 자오후이 아구이, 건륭제의 처남 푸차 푸헝, 그의 아들 푸차 푸캉안 등이 활약을 했습니다.
보갑제(保甲制) 는 100 가구를 모아 갑(甲), 10개의 갑을 모아 보(保) 를 만들어 공동체 사람끼리 질서와 치안
의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였고, 이갑제 (里甲制) 는 보와 갑에서 세금을 인구에 따라 모아서 재정을 충당
하는 제도였는데, 지방 관리들이 인구와 세수를 줄여서 보고하고 뒤로 세금을 무겁게 매겨 사익을 취했습니다.
건륭제는 매 가구 사람의 수를 군역을 지는 장정 이 아닌, 집안의 여자들까지 모두 다 계산
하였으니 백성들의 수는 나이, 성별과 이름을 패에다 적어 각자의 집 문 앞에 걸어
놓고 매년 인구 조사를 하여 북경의 군기처와 호부 에 보고하도록 하였으니....
사익을 취하려는 것을 차단했고 세금을 빼돌린 총독이나 순무에게도 중징계를 내렸습니다.
강희제 처럼 건륭제도 남순을 6번 이나 했으니 황자와 공주, 대신, 환관, 시녀, 요리사, 호위병등
3,000여명 이 움직였는데, 유명한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풍류를 즐기는 것을 좋아했으니
특히 시와 그림 을 좋아하며 관심이 많았기에 시인과 화가들도 초청해서 같이 식사하고
차를 마시면서 시와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백성들이 일부 부담을 지기도 했습니다.
건륭제는 60년 치세 동안 10회의 원정 을 수행했다 하여 자신의 별호를 십전노인(十全老人) 으로
자칭했는데, 위구르나 진촨(金川) 처럼 현재의 중국 영토인 곳도 있고 베트남이나
미얀마 처럼 외국에 감행한 것도 있으니 그 결과 원나라 다음으로 중국 사상 최대의
판도를 이룩하였으며.... 영토는 캐나다 보다 큰 1,470만㎢ 에 달하고 인구는 3억을 넘었습니다.
건륭제의 최대 업적은 준가르의 복속 이라고 할수 있는데, 강희제, 옹정제 때부터 이어져 온 청나라 최대의
위협 세력인 준가르를 굴복시키는데 성공함과 동시에 청나라의 국경을 신장 일대까지 넓혔고, 이후
대금천과 소금천을 완전히 굴복시키는데 성공하고 네팔을 정벌해 티베트 서부 국경 을 안정시킴
으로써, 청나라와 뒤를 잇는 현대 중국의 서부 국경을 확정한 것이며 대만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습니다.
신강 면적은 한반도 10배 로 만주와 맞먹으니 현재 중국 영토의 1/6을 늘려놨고 티베트를 보호국 으로 병합해
강희제 시절의 청나라의 영토에서 40% 가깝게 늘려놓았는데, 신강지역은 후에 이슬람교도의 난 이
벌어지기도 하며, 100년 후에는 야쿱 벡이라는 중앙 아시아의 모험가가 침입해서 난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청나라의 혼란을 증폭시켰지만 대부분의 영토는 고스란히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로 이어집니다.
버마 원정 은 4번 침략이 모두 실패로 끝났으며 베트남(여왕조) 정벌 에 있어서는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형과 전염병 등의 문제로 인하여 완혜에게 패하고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형식적 복속을 얻어내는데 그쳤으나 전쟁 결과 청나라는 버마와 베트남과 형식적인 조공관계 는 맺었습니다.
이런 조공관계는 국내적, 대외적으로도 의미가 있었으니 국내적으로는 건륭제의 정치적 성공
으로 선전되면서 황제의 권위 를 높이는데 기여했고, 외교적으로 조공관계는
형식상의 명분을 받으면서 경제적으로는 "황제의 배포" 라는 이름으로 더 큰
답례품을 줘서 조공국을 회유 하는 성격이 강했으니 공식적인 외교 채널이 열린 셈이었습니다.
버마와 베트남은 조공무역이 짭잘하다는 것을 알게되자, 형식상의 "상국" 인 청나라 영토인 북쪽
으로의 확장은 단념 했고, 버마는 동서 (타이 및 아라칸) 로, 베트남은 남쪽 (참파) 으로 진출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버마와 베트남 방면에서는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별 충돌이 없었으므로
건륭제의 원정은 군사적 완승은 거두지 못했지만 그래도 남방을 안정시킨 업적 으로 칠 수 있습니다.
건륭제는 89세로 죽었으니 가장 장수했는데 중국의 황제들은 혹독한 업무로 인한 과로나 스트레스 혹은 궁중
생활에서 비롯된 비만과 질병등 문제 때문에 40~ 50세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건륭제는
"하루에 식사를 두 끼만" 먹었으며 콩과 나물류 등의 채식과 생선 을 위주로 한 소박한 음식과
제비집 요리를 즐기는등 극히 절제된 식습관을 지니고 있었으니 이게 장수의 비결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지고 보면 일 중독자 였던 조부와 아버지 에 비하여 여유를 가지고 놀았던 것도 장수의 비결 이지
않을까 싶은데, 왜냐하면 조부와 아버지, 특히 아버지 옹정제의 행적은 그야말로 과로사
하기 딱 좋았기 때문이며 실제로도 옹정제는 과로사했는데, 특히 명나라 주원장이 만든
권력 제도에서 황제의 일은 만기친람 이라...... 사실 제대로 한다면 쉴 시간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청나라는 황실의 사치로 멸망한 전대의 명나라 를 항상 타산지석으로 삼아 황제들은 근검 절약의 모범
을 보였으니, 중국에서는 새 왕조가 개창하면 옛 왕조의 왕궁을 사용하지 않고 새로 지었으나,
도르곤과 순치제는 명나라의 황궁인 자금성을 그대로 청나라 황궁 으로 사용했으며.....
뒤를 이은 강희제나 옹정제는 검소함 으로 유명했고 예술을 즐길 시간도 없이 정사에만 몰두 했습니다.
건륭제는 청교도적인 선대 황제들 과는 달리 노는 것을 좋아하고 예술을 애호하여 예술품을 광적으로 수집
했으며 본인 스스로도 서예나 서화에도 능했고 시도 즐겨 지었으니, 건륭제는 유명한 예술가들을
후원하거나 황궁에 초청해 다회(茶會) 를 여는 것을 좋아 했는데.... 예술가들은 초청받은 댓가로
황제 앞에서 글씨나 그림을 기증해야 했지만 그림값 명목으로 두둑한 은자 나 값비싼 다기를 받았습니다.
건륭제의 글씨와 그림은 수준급 이라 여러 작품이 남아 있으니 건륭제의 글씨는 송나라 시대의
왕희지, 미불, 명나라의 동기창체(體) 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명필 이라고 불릴만 한데,
문제는 본인의 글씨에 너무 자부심이 많아서, 자신이 수집한 여러 명화에다가 자신이 직접
감상평이나 시 를 남겼는데.... 건륭제의 시재는 필체에 미치지 못한지라 그게 흠이 되었습니다.
건륭제는 고서화들을 많이 수집했는데, 원나라 화가 방종희의 "고고정도(高高亭圖)" 나
조맹부의 걸작인 "작화추색도(鵲華秋色圖)" 그리고 북송의 휘종이 그린
"계산추색도" 에 쓸데없이 큰 도장을 찍거나 시를 적는등 훼손해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건륭제의 글씨나 그림은 우수 하지만 시재는 평범 한데, 시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평생 4만편이 넘는
시 를 썼지만, "조조의 시 는 몇십 편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하나하나가 오늘날까지 입에
오르내리는 명문인데, 건륭제의 시는 많이 남아 있지만 도서관 구석에나 꽂혀있을 뿐이다" 라는....
그러고는 고색찬연한 저택 훙인산팡(홍음산방) 을 나와서 앞에 있는 선착장에서 운하 를 떠다니는
배를 타는데, 많이 타면 6명까지 타는 배에 우리는 부부 둘만 타니 관광센터인 유객중심은
1인당 30위안이고 엄가화원은 20위안이라기에, 20위안을 내고 엄가화원 까지만 가기로 합니다.
그런데 배를 젓는 여자분이 우리가 외국인인게 신기한지 이것 저것 물어 보느라 노래 부를 생각은
하지도 않는데.... 하기야 노래를 부르면 추가 요금 을 더 내야 한다는데, 서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 “워(我) 팅부동(听不懂 tīngbudǒng), 니(你) 팅부동, 콴부(全部) 팅부동”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