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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高句麗)’의 독음에 대한 종합추론
[ 記 : By 카오스 2013. 10. 02 ]
[이 글은 팔공산님과의 토론과정에서 팔공산님의 도움으로 습득된 내용들을 참조하여 카오스가 종합,재정리한 것입니다. 따라서, 최종적으로는 카오스의 책임으로 쓰여진 글이므로 만일 이 글에 오류가 있다면 그 오류들은 전적으로 카오스의 책임임을 밝혀두면서 토론을 이끌어 주시고 또 도움을 주신 팔공산님께 감사드립니다.]
1. 서언
우리는 왕건이 건국한 우리나라 중세국가의 국호를 아주 자연스럽게 한자로 ‘高麗’라고 쓰고 그 독음은 아무런 의심없이 ‘고려’라고 읽는다. 그리고, 이 ‘高麗(고려)’는 그 이전의 ‘高句麗(고구려)’라는 고대국가의 별칭인 ‘高麗(고려)’라는 국호를 이어받아서 작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일부 재야사학계에서 ‘高句麗’는 ‘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리’로 독음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는 이 ‘고구리’라는 국호가 소위 말하는 치우천왕의 ‘구리국(九黎國)’이라는 국호와 연결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일과성으로 소흘히 취급하기 어려운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인다. 따라서, 관련자료가 거의없는 ‘고대국가 高句麗의 별칭인 주몽高麗’에 대한 독음을 관련자료가 풍부한 ‘중세국가 왕건高麗’의 독음을 살펴 봄으로서 간접적으로 추론해 내고자 한다. 또한 ‘중세국가 왕건高麗의 정확한 독음’을 확인함으로서 과연 ‘고대국가 高句麗(=주몽高麗)’라는 국호와 ‘중세국가 왕건高麗’라는 국호가 실제의 실사와 얼마나 부합되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2. ‘중세국가 왕건高麗’의 독음과 관련된 자료
1) Korea와 Corea
현재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우리나라의 영문호칭인 Korea는 대체로 그 이전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왔었던 Corea라는 표기에서 변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근세말 朝鮮시대에 우리나라가 대외에 대해 외교적으로 일본의 영향권에 편입되어 있었을 때, Corea(高麗) 혹은 Chosen(朝鮮)의 이니셜 ‘C’가 Japan(日本)의 이니셜 ‘J’보다 앞서는 것을 원하지 않은 일제의 영향으로 인해서 첫글자 ‘C’를 음이 비슷한 ‘K’로 바꾸어 Korea로 바꾸어 쓰게 되면서 일반화 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는 16세기 이후 우리나라와 직,간접적인 교류를 가졌었던 유럽사람들이 국호의 첫글자를 주로 ‘C’로 사용하였었음을 보아서도 사실로 인정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앞으로 국가사회의 공론을 거쳐서 우리나라의 영문표기를 Korea에서 Corea로 다시 환원시키는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도 판단한다. 그러나 그 경위야 어쨌든 Korea와 Corea는 모두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동일한 표기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이를 구분하지 않고 편의상 Korea로 일원화하여 검토하는 것으로 한다.
2) 高麗에 관한 독음자료
‘Korea’란 표기의 유래는 ‘왕건高麗’ 시기에 중국이나 몽골 등 주변국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우리나라와 관련을 가졌었거나 또는 직접 우리나라를 다녀간 유럽인 혹은 아라비아인들의 다양한 기록물에 나타난 국호표기에서 유래된 것이 정설이며, 본인도 이에 동의한다. 즉, 이에 대한 간단히 관련자료를 대략적인 시기 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참고 : 편의상 각명칭의 등장 순서에 따라서 번호를 붙여 구분하였다]
1.Coree(꼬레?) : 고려 때[13세기초,중엽? 부터]벽란도를 드나든 아라비아 상인들
2.Caule(까울레?) : 로마교황청특사 기욤-뤼브뤼크가 쓴 동방여행기 “몽골여행기(1255)”
3.Cauli(까울리?) : 1271년 몽골,중국을 여행한 마르코-폴로의 “마르코폴로의 여행(1295)”
4.Kaoli(카올리?) :1300년대 일칸제국의 라시드-알딘의 역사서 "종합사" [고구려=KaoKauli]
5.Cauly(까울리?) : 1477년경 “마르코-폴로의 여행(1295)”의 유럽내 번역서[동방견문록]
5.Kaoli(카울리?) : 1477년경 “마르코-폴로의 여행(1295)”의 유럽내 번역서
5.Kauli(카울리?) : 1477년경 “마르코-폴로의 여행(1295)”의 유럽내 번역서
6.Kaoli(카올리?) : 1516년 오스만터키제국의 알리-아크바르의 중국여행기 "키타이 서"
7.こうらい(꼬우라이?) : 1500년대 일본인들의 高麗발음 [麗발음=れい(레이?)]
7.Corai(꼬라이?) : 1500년대이후 일본과 교류한 유럽인들(주로 포루투칼인,네델란드인 등)
7.Couray(꼬라이?) : 1500년대이후 일본과 교류한 유럽인들(주로,포루투칼인,네델란드인등)
7.Corey(꼬레이?) : 1500년대이후 일본과 교류한 유럽인들(주로,포루투칼인,네델란드인 등)
7.Corei(꼬레이?) : 1500년대이후 일본과 교류한 유럽인들(주로 포루투칼인,네델란드인 등)
7.Core(꼬레?) : 1500년대이후 일본과 교류한 유럽인들(주로 포루투칼인,네델란드인 등)
7.Corea(꼬레아?) : 1500년대이후 일본과 교류한 유럽인들(주로 포루투칼인,네델란드인 등)
7.Coree(꼬레?) : 1500년대이후 일본과 교류한 유럽인들(주로 포루투칼인,네델란드인 등)
8.Core(꼬레?) : 1596년 네델란드인 잰반-린쇼텐의 "항해기"
9.Coree(꼬레?) : 1668년 네델란드인 헨드릭-하멜의 "스페러호의 불운한 항해표류기"
9.Corea(꼬레아?) : 헨드릭-하멜의 "스페러호의 불운한 항해표류기(1668)"의 독일어판
9.Korea(코레아?) : 헨드릭-하멜의 "스페러호의 불운한 항해표류기(1668)"의 독일어판
3. Korea의 유래
위의 자료들을 초성과 종성으로 구분해서 대략 분석한 뒤, ‘Korea의 유래’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초성은 ‘ㅋ’ 또는 ‘ㄲ’이 분명해 보이므로 이에 대해서 대체로 ‘C'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독일어 계통에서는 ’K'로 표기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들이 직접 ‘고려’와의 관계를 하는 과정에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C'를 초성으로 하는 타국의 표현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언어 관습에 따라 바꾸어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Korea의 원형은 일단 Corea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② 종성은 유사한 발음을 나타내는 자음인 ‘r’ 혹은 ‘l’자 와 그 다음에 오는 모음에서 '-ee', '-e', '-i', '-y', '-ai', '-ay', '-ey', '-ei', '-ea' 등이 나타나는데, 일단, 자음에 대해서는 ‘r(ㄹ)’ = ‘l(ㄹㄹ)’로 보아서 이는 동일한 독음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구분하지않고, 대신에 여러 가지의 독음으로 다양하게 차이를 보이는 모음자들에 대해서만 주목해야 한다고 보인다.
그런데, 종성에 사용된 모음자는 또 크게 나누어서 ‘이중모음’과 ‘단모음’으로 구분되는데, 麗의 일본어음인 'らい=rai, ray 혹은 rei, rey'에 사용된 '-ai', '-ay', '-ey', '-ei'는 그 독음이 분명히 확인되고 있으며, '고려 혹은 고리'와는 무관하다고 보이므로 이를 제외하고 보면, 나머지 서양식 국호표기들은 그 자체로서 麗를 직접 독음하기 위한 모음자이거나 혹은 거기에 ‘우리나라(국가 혹은 땅, 영토)’를 의미하는 라틴어(그리스어?)의 ‘영토나 국가를 뜻하는 접미사[-ia('i'음이 연음될 경우 때로는 'i'는 생략된 듯 함)]’가 추가로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즉, '麗=らい=rai, ray 혹은 rei, rey'를 제외한 이중모음 '-ee', '-ea'들 중 앞의 모음자 하나['-e']와 ‘단모음자들['-e', '-i', '-y']’은 ‘高麗의 麗자를 독음하기 위한 모음’이고 ‘이중모음’ 중 뒤의 모음자 하나는 ‘영토나 국가를 뜻하는 접미사['-e(프랑스어계통?)', '-a(영어계통)' ]’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러한 추론에 의해서 ‘영토나 국가를 뜻하는 접미사['-e(프랑스어계통?)', '-a(영어계통)']’를 제외하고 ‘麗자의 독음자’들을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 ‘麗자의 일본식 독음’ : 'rai', 'ray', 'rey', 'rei'
- ‘麗자의 서양식 독음’ : 're(레)', 'ri(리)', 'ry(리)'
즉, ‘麗자의 서양식 독음’들을 ‘麗자의 한국식 독음’인 ‘려’ 혹은 ‘리’와 비교를 해 보면, 오직 're(레)'는 어느정도 ‘한국음,려’와 유사한 면도 있긴하지만, 그보다는 ‘한국음,리’를 프랑스어식으로 차음한 것이라고 보이며, 'ri(리)'와 'ry(리)'는 분명히 ‘한국음,리’를 차용했었을 개연성이 크다고 여겨진다.
③ 따라서 ‘Korea(코리아)’에서 맨 마지막의 모음 ‘-a’는 라틴어(그리스어?)에서 ‘영토나 국가를 뜻하는 접미사로 사용되는 '-ia(이아)'에서 'i(이)'음이 연음됨으로서 생략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보이므로 ‘高麗의 독음’과는 무관하므로 ‘高麗의 독음 = Kore(코리)’로 추론할 수 있다고 보인다. 즉, ②에서 살펴 본 ‘麗자의 서양식 독음인 're(레)', 'ri(리)', 'ry(리)' ’와 일치하고 있다. 결국, 영어식 발음인 Kore(코리)가 직접적으로는 프랑스식 발음인 1.Core(꼬레?)에서 유래되었을 수는 있지만, 역시 같은 유럽식 독음인 3.Cauli(까울리?), 4.Kaoli(카올리?), 5.Cauly(까울리?), 5.Kauli(카울리?) 등의 영향을 받아서 ‘Kore(코리)’로 정착되었었고 그로 인해서 ‘i(이)’음이 중복됨으로서 최종적으로 ‘Kore+ia(코리+이아) = Korea(코리아)’로 정착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 : 프랑스어 계통에서는 ‘영토나 국가를 뜻하는 접미사’가 영어식의 '-ia' 대신에 '-e'가 아닌가 여겨지는데 잘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高麗의 프랑스식 독음 Core(꼬레?) + 영토의 접미사 '-e' = Coree(꼬레?)’가 되어서 영어식 표기인 ‘Korea(=Corea)'와 같은 용법이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 : 벽란도에 대한 인터넷 자료]
벽란도는 경기도 개풍군 서면의 예성강 하류에 있었던 하항(河港)으로서 부근 언덕에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관사(館舍)가 있어 고려시대에 중국 송나라의 사신 일행이 도착하였을 때와 떠나기 전에는 이곳에서 묵었다. 벽란도라는 이름도 처음에는 예성항(禮成港)이었다가 이 벽란정에서 이름을 따 벽란도라고 바꾼 것이다. 고려 시대 제일의 하항이자 실질적인 유일의 국제 항구로서 발전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중국의 송나라 상인뿐만 아니라 일본을 비롯하여 멀리 남양지방(南洋地方)과 서역지방(西域地方)의 해상들까지 자주 드나들며 교역을 하였던 곳이다. 따라서 국제적인 교역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나가거나 국내로 들어오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려의 관문적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국내에서 벽란도는 국도인 개성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나루터였다. 특히, 육로로 중국에서 오는 도로상에 있어 통행인도 많았던 교통의 요지였다.
고려 시대에 중요한 무역항이며 국제항이자 교통의 요지였던 벽란도의 기능은 조선시대에 들면서 점차 그 역할이 감소되었다. 더구나 철도교통을 비롯하여 육상교통이 발달하고 다른 항구들이 개항을 하게 되자 그 역할은 더욱 축소되었으며 마침내는 그 역할을 거의 상실하였다. 그러나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카오스의 검토) ---> 고려가 현,개성에 최종 정착한 시기가 현종시기인 1031년이며, 이 시기에는 고려는 요나라의 연호만을 사용한 시기이기 때문에 송나라와 공식적인 외교가 막혔던 시기이다. 그러다가 비공식적으로 송나라와 교역을 개시한 시기가 1070년경이므로 벽란정은 이때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 지역에는 극히 제한된 송나라사람만 출입하였으므로 본격적으로 타국인들이 등장한 시기는 아무리 빨라야 12세기 초가 된다고 보이며 아라비아상인들이 벽란도에 자유롭게 출입한 시기는 13세기초라고 해야 할 것이다.
4. 高麗에 대한 서양식 독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양식 독음을 근거로 살펴 본 바와같이 ‘高麗에 대한 서양식 독음’은 일단, 1.Core(꼬레?), 3.Cauli(까울리?), 4.Kaoli(카올리?), 5.Cauly(까울리?), 5.Kauli(카울리?)로 축약될 수 있다고 보인다.
1) 高자에 대한 서양식 독음
여기서 초성인 ‘C’와 ‘K’는 동일한 음가로 이해되므로 동일시하여도 무방하다고 판단되며, 高자에 대한 독음이 한국어로는 ‘고’이지만, 중국어에서는 ‘꼬’ 혹은 ‘까오’이므로, 서양인들이 ‘1.Co(꼬)’, ‘3.Cau(까우)’, ‘4.Kao(카오)’, ‘5.Kau(카우)’로 적고 있는 것은 高자에 대한 독음이 대체로 한국식 독음에 따르른 것이 아니라 중국식 독음에 따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보인다.
2) 麗에 대한 서양식 독음
麗자에 대한 독음이 한국식에서는 ‘려’, 혹은 드물게 ‘리’이지만, 중국식에서는 ‘리’가 일반적이므로 서양인들이 ‘1.re(레?)’, ‘3.li(리?)’, ‘4.li(리?)’, ‘5.ly(리?)’, ‘5.li(리?)’로 적고 있는 것은 麗자에 대한 독음도 대체로 한국식 독음에 따른 것이 아니라 역시 중국식 독음에 따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보인다. 특히 프랑스식 독음인 ‘1.Core(꼬레?)’에서 종성모음 ‘-e’는 영어식 모음 ‘-i’와 등치되는 사례가 많으므로 麗자에 대한 독음은 사실상 중국식을 따라서 ‘리’로 적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고 보인다.
3) 高麗에 대한 서양식 독음
앞에서 검토한 바와같이 비록 아라비아 상인들이 현,임진간의 벽란도에 자주 왕래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중국과의 오랜 접촉을 통해서 고려에 대한 정보를 접하여 왓었던 것이므로 그들이 고려에 대한 호칭은 이미 중국식으로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수많은 아라비아 상인들이 다녀갔을 것인데, ‘고려’와 ‘고리’라는 두 개의 독음이 존재할 수 있었던 高麗에 대한 독음을 오직 ‘1.Coree(꼬레?)’라는 하나의 독음만 기록으로 남겼었다는 것은 이 ‘1.Coree(꼬레?)’라는 독음이 당시 일반화되었었던 중국식의 ‘고리’를 프랑스식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그들은 비록 고려인들로부터 ‘고려’라는 독음을 들었었을 것이지만, 제대로 구분해 내지 못하였거나 비록 구분이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널리 통용되는 중국식 독음에 따라서 ‘왕건高麗’를 호칭하였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즉, 결국 비록 ‘왕건高麗’에서는 ‘고려’라고 독음하였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중국이나 서양인들에게는 중국식 독음인 ‘고리’로 통용되어 잇었던 것이라는 추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인다.
5. 高麗에 대한 동양식 독음
‘高麗에 대한 서양식 독음’은 漢字가 아닌 표음문자인 알파벳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원음을 비교적 명확하게 추론할 수 있지만, 한자문화권인 한,중,일에서는 역시 ‘다른 漢字의 음'을 가이드 삼아서 ‘高麗에 대한 독음’을 표현하고 있으므로 그 가이드漢字의 독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高麗에 대한 독음’도 역시 같은 패턴으로 달라지게 되므로 명확하게 추론하기는 매우 힘든다고 보인다. 다만, 표음문자인 일본의 가나나 조선의 한글로 표기된 경우가 있으면 쉽게 알수 있지만, 그것은 또 여전히 일본식 독음체계 내에서 하나의 일정한 패턴을 형성하고 있거나, 또는 한국식 독음체계 내에서 하나의 일정한 패턴을 형성하고 있어서 개미 챗바퀴 돌 듯한 순환논리성을 보이므로 그 시말을 가늠하기가 어렵다고 보인다. 그러나 어쨌든 주어진 자료를 근거로 최대한으로 다양한 추론을 해 보아서 가장 순리적인 독음을 찾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동양삼국에서 高자는 대개 ‘고’로 독음하고 있으므로 각 글자를 구분하지 않고 '高麗'라는 글자 전체에 대해서 검토하는 것으로 한다.
1) 高麗에 대한 한국식 독음
‘高麗에 대한 한국식 독음’은 누구나 ‘고려’로 인정하고 있다. 물론 같은 배경에서 한국식으로는 ‘高黎’도 ‘고려’로 독음하고 있어서 그 순환성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인다. 게다가 대부분의 왕건高麗인들이 생존해 있었던 조선시대 초기에 한글이 발명되었었고, 그 한글로서 분명히 ‘고려’라고 적고 있으므로 ‘왕건高麗에 대한 한국식 독음’은 ‘고려’가 분명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고려말에 편찬된 제왕운기(1287)에서 高麗를 高禮로 적고 있는데, 역기서 禮자는 한국식 독음으로 盧啓切[례], 里弟切[레], 良以切竝音蠡[리 및 려]로 읽히므로, ‘(禮)音蠡=려’에 의해서 ‘고려’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미 수백년 동안 공식적으로 정착되었다고 말하는 高麗(고려)를 굳이 이상하게 高禮(고례,고리,고레,고려..등)로 기록하는 저의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禮자의 반절법을 중국식 독음으로 해석하여 볼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즉, 중국식 독음법을 따른다면, 禮자는 ‘盧啓切[洛乎切+康禮切=lú+qǐ=lǐ=리]’, ‘里弟切[良已切+徒禮切=lǐ+dì=lì=리]’, ‘蠡[盧啓切=lǐ=리]’가 되고 심지어 한국식 독음으로는 ‘례’가 분명한 ‘禮자도 중국식 독음으로는 盧啓切=lǐ=리’여서 이를 중국식으로 ‘리’가 아닌 ‘례,레,려’로 단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중국식 독음으로 ‘고리’인 高禮를 굳이한국식 독음으로 ‘고례’라고는 할 수는 있지만, 이를 ‘고려’로 보아서 ‘高禮는 高麗와 독음이 같다’라고 할만한 충분하거나 일반적인 사례가 없다고 보인다. 즉, 이와같이 ‘高禮’의 한국식 독음을 ‘고려’로 볼려고 하는 시도는 ‘무조건 독음이 고려여야 한다’라는 강박관념적 인식에 끼워 맞추려는 것이거나 혹은 제왕운기에서 의도적으로 國號의 글자를 달리 표기한 숨은 의도를 미처 캐치하지 못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사정이야 어땟던 일단, 제왕운기의 ‘高禮’에 대한 한국식 독음은 ‘고례’로 보아야 하지 이를 억지로 ‘고려’라고 독음하는 것은 일종의 선입견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된다고 보인다.
다만, 한글이 생긴 조선시대 이후에는 의도적으로 ‘고려’, ‘고구려’로 읽도록 성종 때 지은 삼강행실도 언해본이나 영조 때 지은 동몽선습 언해본, 정조 때 지은 오륜행실도 등등에 ‘고구려’, ‘고려’로 적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고려때 편찬된 삼국사기가 비록 ‘한반도 고려’를 전제로 해서 편찬된 것이지만, 그 방법이 주로 고유지명의 이동에 의한 방법에만 의존하다보니 실제의 한반도 내의 지명들만으로서는 중국측 고대사서나 일본측 고대사서에 등장하는 고유지명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맹점이 들어났으므로, 위화도 회군으로 완전하게 한반도 국가가 된 이씨조선에서는 지명의 한반도화에 치중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그 이전에 일부 중국식으로 독음되던 글자들(지명글자 포함)을 중국식과는 약간 다른 한국식 독음으로 바꾸어서 기록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교육을 하게 된 것이다. 즉, 결국 '국체의 자주성을 확고하게 했었던 한글창제'와 '반도사관의 최종적인 완성'이 함께 이루어졌다는 것은 역사의 아니러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정책기조에서 그동안 조금 섞여 있었던 중국식 독음은 한글의 보급으로 인해서 완전한 한국식 독음법으로 교체되어 정리되어 현재의 한국식 독읍법으로 완성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업은 태종조에서부터 시작하여 성종~중종조에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면서 최종 마무리된 것이고 삼강행실도 언해본, 동몽선습 언해본, 오륜행실도 등을 통해서 집중적으로 교육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한글이 발명되기 약700년전에 멸망해 버린 고구려의 國號字가 과연 ‘高句麗’였었는가하는 문제를 모두들 아무런 의심없이 간과하고 있지만, 그리 쉽게 확언하기 어렵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조선시대의 한글로서 高句麗를 ‘고구려’라고 적고는 있지만, 만일 700년전에 망한 나라의 국호의 글자가 ‘高句麗(=高麗)’가 아니였었다고 한다면, 역사전반에 걸친 문제에서 아주 크게 요동을 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비록 한국식으로 ‘왕건高麗’는 ‘고려’로 독음된 것이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주몽高麗의 독음’은 중국식인 ‘고리’였을 개연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 : 필자는 현재 ‘주몽고구려(고려)’의 국호(글자)는 ‘高句麗(=高麗)’가 아니라 ‘高句黎(=高黎)’였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2) 高麗에 대한 일본식 독음
‘高麗에 대한 일본식 독음’은 앞에서 조사된 바와 같이 ‘7.こうらい(꼬우라이?)’로 분명하게 그 음이 확인되는 것이므로 이 ‘らい(라이)’는 중국식의 ‘리’ 보다는 한국식의 ‘려’에 더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高麗에 대한 일본식 독음’도 역시 ‘高麗에 대한 한국식 독음’과 같이 중국식에서 약간 일탈된 독음일 개연성을 열어두고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같은 漢字를 두고 중한일이 ‘리’, ‘려’, ‘라이’로 달리 읽는다는 것은 3국의 음운체계상 어떤 의도적인 구분점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한국식과 일본식은 중국식과 다르다’라는 것은 분명해 보이므로 한국은 한국식대로 ‘고려’로 일본은 일본식대로 ‘7.こうらい(꼬우라이?)’로 독음되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한국에서는 같은 ‘려’로 독음되고, 중국에서는 ‘리’로 독음되는 黎자가 일본에서는 麗자의 독음(らい=라이)와는 조금 다르게 ‘れい(레이)’로 독음된다는 것은 麗자와 黎자의 독음법이 한국 및 중국에서는 같은 양상인데 비해서, 일본에서는 麗자와 黎자의 독음법에 약간의 다른 양상의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주목해 둘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3) 高麗에 대한 중국식 독음
‘高麗에 대한 중국식 독음’은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까오리’가 가장 일반적인 독음이다. 물론 ‘高黎’도 역시 같은 ‘까오리’로 독음되고 있으므로 중국도 역시 중국식대로 음운체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런데, 한,중,일 3국이 모두 같은 漢字를 ‘각각의 모국어 수준’으로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으며, 또 漢字가 중국측에서 발명되어 전파된 것이 분명하므로 한국식이나 일본식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먼저 중국식을 면밀히 검토해야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중국측 기록에서 ‘麗자의 독음법에 대한 기록’을 조사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高句驪(亦作麗音離) >高句驪는 역시 高句麗이라고도하고, 麗의 음은 離이다’
이 기록은 “高句驪라는 국호는 高句麗와 같음을 말하면서, 麗자의 음은 離자의 음과 같다”라는 것을 말하는데, 중국측 자전을 확인하면, 거의 대부분이 離자의 음은 ‘li(리)’로서 離자의 한국식 독음인 ‘리’와 동일하다 따라서 ‘高句麗의 중국식 독음은 분명히 (한국식으로 말해서) 고구리’임을 중국측의 여러기록과 이를 해설한 한국측 기록에서도 증언하고 있다. 즉, 그 근거 사료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책부원구(1005-1013년)
-신당서(1044-1060년) 끝에 붙어 있는 송나라 동충진(董衝進)의 당서석음(唐書釋音)
-자치통감감(1065-1084년)의 호삼성(1230~1302년)의 주석
-(강희자전 관련 부분 : 꽁트님의 지적이 있었던 부분으로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어서 삭제합니다)
-용비어천가 (1477년) 5장 [麗運이 衰]에 대한 주석(麗音裏高麗也),
-全韻玉篇(조선,정조때)
위의 중국측 사료들에서는 분명히 ‘麗’는 ‘리’로 독음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특히 분명히 ‘려’로 독음된다고 알고 있는 한국측 사료인 ‘용비어천가’ 및 ‘全韻玉篇’에서는 ‘麗音裏高麗也 >麗의 음은 裏인데, (麗는) 高麗를 말한다’라 하고 있어서 당시 麗의 일반적인 한국식 독음이 ‘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음을 당시 일반적인 한국식 독음이 ‘리(이)’인 裏자로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은 ‘高麗=고려’라는 독음이 일반화 된 조선시대에도 ‘高麗의 원래 독음이 고리였음’을 은연중에 설명하고 있다고 보이는 것이다. 즉, 이는 현재에도 麗자와 離자의 음을 모두 같은 ‘li(리)’로 독음하고 있는 중국에서의 ‘高麗에 대한 중국식 독음’이 ‘고리’였었음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 藁離에 대한 중국식 독음
일단, 고대역사서에 신화적으로 등장하는 藁離國이 고구려의 전신인 것으로 인정하는 바탕에서 이 藁離에 대한 중국식 독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중국측 사전을 확인하면, ‘藁[古老切=gǔ+lǎo=gǎo(까오)’로서 高자의 독음과 동일하고, ‘離[呂支切=lǚ+zhī=lí(리)’여서 藁離에 대한 중국식 독음은 ‘藁離=gǎolí(까오리)’가 되어서 ‘高麗=gǎolí(까오리)’나 ‘高黎=gǎolí(까오리)’라는 중국식 독음과 일치하고 있으며, 위의 (1)에서 보듯이‘ 離자의 한국식 독음’이 ‘리’뿐이므로 ‘藁離의 한국식 독음은 고려가 아닌 고리’이므로 ‘藁離에 대한 중국식 독음은 분명히 고리’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藁離國(고리국)이 高句麗, 혹은 高句黎의 전신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중국에서는 ‘藁離=고리’, ‘高麗=고리’, 혹은 ‘高黎=고리’로 독음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고 한국에서는 ‘藁離=고리’, ‘高麗=고리 또는 고려’, 혹은 ‘高黎=고리 또는 고려’로 독음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4) 高麗에 대한 아라비아식 독음
고려 때 벽란도를 드나든 아라비아 상인들은 高麗의 독음을 Coree(꼬레)로 적었고, 이것이 훗날 Corea나 Korea로 바뀐 것은 거의 정설이다. 그런데, 이 아라비아 상인은 물론이고 모든 유럽인들은 최초에 高麗를 먼저 접촉한 것이 아니라 모두 중국(혹은 나중에는 일부는 일본)을 통해서 이미 高麗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습득한 상태에서 高麗(한반도)에 도착을 했었고 또 자기나라로 되돌아가서 이미 중국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자국 사람들에게 高麗에 대한 추가 정보를 소개했을 것이다. 즉, 고려를 다녀간 아라비아상인이나 그들의 말을 전해들은 유럽사람들은 이미 중국을 통해서 고려에 대한 기본정보를 알고 있었었고 그 기본정보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국호에 대해서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서로 동일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당시 고려에 관심을 가진 모든 외국사람들은 중국을 통해서 ‘高麗[gǎolí(까오리)=고리]라는 중국식 독음’에 익숙해져 있었었고 또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본다. 다만, 중국식 독음인 ‘gǎolí(까오리)’라는 발음을 들은 유럽사람들의 언어습관이 나라마다 약간씩 달랐음에 의해서 각각 ‘1.Coree(꼬레?)’, ‘2.Caule(까울레?)’, ‘3.Cauli(까울리?)’, ‘4.Kaoli(카올리?)’, ‘5.Cauly(까울리?)’, ‘5.Kaoli(카울리?)’로 약간씩 다른 알파벳 글자로 표기하였었던 것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종성은 그 어디에도 ‘려’에 해당되는 독음이 아예 없었던 것이고 ‘레(-e)’ 혹은 ‘리(i,y)’로 끝나고 있을 뿐이다. 즉, 이 차이는 유럽인들의 각 나라에 따른 언어습관과 문법상의 차이에서 오는 차이이지 ‘려’라는 음을 표현할려고 한 흔적은 아니라고 보인다. 즉, 서양인이나 아라비아인들은 이미 충분히 익숙해진 ‘중국식 독음[gǎolí(까오리)=고리]’을 ‘자기나라식의 표기법으로 표기한 것일 뿐’이지 ‘의도적으로 한국식 독음인 려를 표기하려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결국, 아라비아인들도 중국식 독음을 채용한 ‘고리[=gǎolí(까오리)]’로 받아들여서 자기들의 언어습관대로 ‘1.Coree(꼬레?)’라고 기록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추론은 아라비아상인들이 직접 고려에 와서 ‘고려’와 ‘고리’의 독음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1.Coree(꼬레?) 혹은 2.Caule(까울레?)라고 고쳤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1.Coree(꼬레?) 혹은 2.Caule(까울레?)는 3.Cauli(까울리?), 4.Kaoli(카올리?), 5.Cauly(까울리?)는 모두 같은 독음의 다른 표기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결국 유럽인이나 아라비아인들도 高麗의 중국식 독음을 따른 것이지, 한국식 독음을 따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6. 고려의 중국식 독음인 ‘高麗=고리[=gǎolí(까오리)]’와 ‘Korea(=Corea)’의 관계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高麗에 대한 외국인들(중국,몽골,유럽,아라비아 등등)의 독음’은 기본적으로 중국식 독음인 ‘高麗[gǎolí(까오리)=고리]’를 자국의 언어습관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확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의 영어식 표기인 Korea(=Corea)에는 어미에 ‘-a'가 붙어 있는 것이 지금까지 조사된 독음들과는 조금 차이가 난다. 즉, 그래서 혹자는 Korea(=Corea)를 ’Kor+ea'로 보아서 ‘Kor=고=高의 독음’이고, ‘ea=려=麗의 독음’이라고 주장하기도하지만,... “ ‘Korea(=Corea)의 끝글자 -a’를 ‘라틴어(그리스어)에서 기원하는 것으로서, 영토나 국가를 뜻하는 접미사(-ia)의 변형자’로 볼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즉, 高麗에 대한 중국식 독음인 ‘高麗[gǎolí(까오리)=고리]’가 서양으로 알려져서 대체로 어미가 ‘-e'로 끝나는 ‘1.Coree(꼬레?), 2.Caule(까울레?)’와 어미가 ‘-i, -y’로 끝나는 ‘3.Cauli(까울리?), 4.Kaoli(카올리?), 5.Cauly(까울리?)’의 두계통으로 나뉘지만, 이들은 모두 ‘영토나 국가를 뜻하는 접미사(-ia)’가 부가된 단어가 아니라 ‘高麗에 대한 중국식 독음인 高麗[gǎolí(까오리)=고리]’ 자체를 각국의 언어습관대로 그대로 옮겨서 독음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서양인들이 高麗에 대해서 ‘영토나 국가를 뜻하는 라틴어 접미사(-ia)를 부가한 파생단어를 만들게 된 것’이 바로 Korea(=Corea)가 된다는 것이다. [참고 : Australia, Mongolia, Siberia, Somalia, Malaysia 등등...]
이 과정을 조금 추측해 보면,...모든 독음에 일단 일률적으로 ‘라틴어 접미사(-ia)를 부가’하면,... ‘1.Coree(꼬레?)+ia=꼬레이아, 2.Caule(까울레?)+ia=까울레이아’, ‘3.Cauli(까울리?)+ia=까울리이아’, 4.Kaoli(카올리?)+ia=카올리이아, 5.Cauly(까울리?)+ia=까울리이아’가 되어야 했으므로 종성에서 모음이 여러개 중복되는 것을 간략화 시킴으로서 ‘꼬레이아-->꼬레아’, ‘까울리이아-->까울리아’로 축약되어 결과적으로 ‘라틴어 접미사(-ia)’에서 ‘-i(이)'음이 생략되게 된 것이라고 보인다. 그래서 결국, 여러 서양식 독음들은 ‘라틴어 접미사(-ia=이아)가 부가되었다가 (-i=이)음이 생략’됨으로서 어미가 ‘(-a=아)'음만 남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즉,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17세기 이전에 가장 일반적이었던 ‘1.Coree(꼬레?)+ia=꼬레이아’란 독음이 18세기 이후에 ‘Corea(꼬레아)’로 정착되어 일반적으로 통칭[高麗에 대한 대표적인 호칭]되었었다고 보인다. 물론 이때 독일어 계통에서는 ‘C’자 대신에 ‘K’자를 사용한 ‘Korea(코리아)’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그 원형은 ‘Corea(꼬레아)’였었던 것을 19세기말경 올림픽관련 회의에서 국호의 순서를 정할 때, ‘Japan(일본)’을 ‘조선(Chosen 혹은, 高麗=Corea)’보다 앞세우기 위한 일제의 농간으로 독일식 독음인 ‘Korea(코리아)’를 조선의 영문표기로 확정시킴으로서 현재의 ‘Korea(코리아)’가 국제적인 호칭으로 정착되게 된 것이다.
어쨌든, ‘Korea(코리아)’이든 ‘Corea(코리아)’이든 앞부분 ‘Kore(코리) 혹은 Core(코리)’는 高麗에 대한 중국식 독음인 ‘高麗[gǎolí(까오리)=고리]’를 인용한 것이고, 뒷부분인 ‘-a'는 ‘영토나 국가를 뜻하는 라틴어 접미사(-ia)가 (i)음이 중복됨으로서 생략되어 (-a)만 남은 것이라고 추측된다
7. ‘고대국가 高句麗(=주몽高麗)’라는 국호와 ‘중세국가 왕건高麗’라는 국호의 실제성
이상과 같이, ‘중세국가 왕건高麗’의 독음이 한국식 독음으로는 ‘고려’임이 분명하지만, 고려시대에는 중국식 독음인 ‘高麗=gǎolí(까오리)=고리’로도 통용되다가 점차 한국식 독음인 ‘고려’로 변화되어 조선초기에 한글이 발명되면서 확실하게 ‘고려’로 정착되어 집중적으로 교육되고 또 공권력에 의해서 강제되어왔다고 보인다. 따라서 ‘중세국가 왕건高麗’ 보다 수백년이 앞서는 ‘고대국가 高句麗(=주몽高麗)’의 독음은 ‘고려’가 아닌 ‘고구리(고리)’로 독음되었을 개연성이 농후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고 보인다. 즉, 이는 다른 경로로 확인이 되는 ‘중세국가 왕건高麗’의 최초 건국지가 중국(현,산동성과 하남성의 경계지역으로 추정=제1개경)이었었고 이 초기의 ‘왕건高麗’가 중국의 5대10국의 혼란기에 중국세력들에게 밀려서 현,중국 요녕성인 요하의 요양(제2개경)으로 일단 옮겨왔다가 거란의 2차공격시에 급하게 현,황해도 개성에 임시로 몽진했다가 결국 환도하지 못하고 거란의 3차침입 이후에 아예 도성을 현,황해도 개성(제3개경)에 눌러 앉아버려서 자동적으로 강제천도하게 된 과정을 보더라도 ‘중세국가 왕건高麗’의 유지기간 470여년 중 약100년은 현재의 중국땅에 도읍하고 있었으며 최종적으로 고토(현,중국땅)에 대한 회복노력을 포기하기까지 약110년은 사실상 ‘국호 高麗에 대한 중국식 독음인 ‘高麗=gǎolí(까오리)=고리’를 사용하였었다고 보인다. 그러다가 1145년의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등 점차 ‘한반도 국가로 정착’해 가면서 ‘국호 高麗에 대한 한국식 독음인 ‘高麗=고려’로 변환하게 되었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당시에는 표음문자인 ‘한글’이 없었던 관계로 漢字만을 사용하여 ‘고려’로 독음하도록 유도하였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어서 사실상 한글이 발명되어 확실하게 그 음을 ‘고려’로 특정하게 된 조선초기까지도 사실상 ‘고리’와 ‘고려’가 공존했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 알려진 ‘高麗에 대한 서양식 독음’은 모두 ‘高麗에 대한 중국식 독음’인 ‘高麗=gǎolí(까오리)=고리’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중세국가 왕건高麗’ 보다 수백년이 앞서며, 현,하북성에 주도읍지를 설치하고서 현,중국의 북방영토 전체를 장악했었던 ‘고대국가 高句麗(=주몽高麗)’에 대한 독음은 ‘高(句)麗에 대한 중국식 독음’인 ‘高(句)麗=gǎokulí(까오꾸리)=고구리’였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할 것이다.
高句驪 | 句驪 | 高句麗 | 句麗 | 高 驪 | 高 麗 | 고마(こま) | 貊,陌,貉 |
漢書 | 漢書 | 後漢書 | 漢書 | 宋 書 | 宋 書 | 일본서기 | 여러사서 |
그런데, 여기서...이 독음 문제보다 아주 더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고대국가 高句麗(=주몽高麗)’에 대한 국호를 표기하는 漢字가 정규 사서에서도 아주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藁離, 高利, 高離 등등은 비록 의도적이긴 하지만, 誤字性 기록으로 간주하여 제외함]
여기서, 貊,陌,貉,고마(こま) 등은 ‘고대국가 高句麗(=주몽高麗)’에 대한 일종의 비칭일 것으로 보아 무시하면 되겠지만, 高句驪, 高句麗, 句驪, 句麗, 高驪, 高麗 등은 공신력있는 25史에 등장하는 명칭인 점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중국의 북방지역을 700년~900년 동안 점유하고 있었고 광개토대왕릉비와 같은 거대 漢字금석문을 남길 정도의 문화적 수준을 가진 나라가 자기나라에 대한 國號字 하나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해서 중국측에서 제멋대로 지어붙여준 ‘高句驪, 高句麗, 句驪, 句麗, 高驪, 高麗 등등으로 혼란스러운 國號字’를 사용했다고 하는 것은 이 여러 國號字들이 실제가 아니었다는 것 외에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결국 ‘그 음은 서로 유사하였을 것이지만, 글자(漢字)가 변조되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런 가정하에서 상고대사 전반을 감안하여 고려할 수 있는 國號字는 ‘高九黎’였었다고 추론하는 것이다. 즉, ‘高’는 ‘高九黎의 통치주체세력이 高씨였었음’을 말하는 것이고,...‘九’는 ‘아홉(9)의 의미로서 whole(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黎’는 ‘나라, 땅, 국가’를 지칭하는 단어였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高九黎=고(高)씨가 다스리는 천하(九)의 땅(黎)’이라는 의미의 국호였었던 것이고 여기서 ‘九黎’라는 국호는 소위 ‘치우천왕의 九黎國’을 계승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었다고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高九黎’를 줄여서 ‘九黎’ 또는 ‘高黎’라고 한 것인데,...후대의 ‘역사왜곡자들’이 중국대륙의 절반을 차지하였었던 ‘고대국가 高九黎(=주몽高黎)’의 위상을 변방국가로 전락시키기 위하여 ‘黎자를 驪자 혹은 麗자’로 변조하고 ‘九자를 句자’로 변조하여 高句驪, 高句麗, 句驪, 句麗, 高驪, 高麗 등등으로 설왕설래해가면서 혼란스럽게 표기를 해 오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점차 驪자 보다는 麗자의 어감이 더 좋다는 이유로 高句麗, 句麗, 高麗로 통일되었었고, 최종적으로는 ‘高句麗=高麗’인 것으로 낙착되어 삼국사기 등에 등재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남북국시대를 경유하여 왕건이 나라를 건국하면서 ‘고대국가 高九黎(=주몽高黎)’에서 변조된 國號字인 ‘고대국가 高句麗(=주몽高麗)’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國號字를 高麗라 하게 됨으로서 ‘중세국가 왕건高麗’라는 國號字가 탄생되게 된 것이다. 즉, 여기서 글자는 ‘黎->麗’로 ‘九->句’로 변조된 것이지만, 이 글자들이 같은 독음을 사용하는 글자들이므로 외관상의 독음에는 차이가 없었으므로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호도하여 변조된 것을 감추고 넘어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변조과정에는 강력한 공권력의 지원과 치밀한 학술적 이론체계의 구축이 뒷받침된 것이다]
다시말해서, ‘중세국가 왕건高麗’가 대륙에서 건국되어서 점차 한반도로 밀려나면서 漢字의 한국식 발음을 적용하는 관례가 생기면서, 당초에 중국식 독음으로 ‘리’음이었던 黎자와 麗자가 한국식으로 ‘려’음으로 함께 변화되고 마찬가지로 당초에 중국식 독음으로 ‘구’음이었던 九자와 句자는 역시 한국식으로도 ‘구’음으로 독음됨으로서, 애당초와 같이 ‘고구리(고리)’가 되어야 할 ‘高九黎(高黎)’가 ‘고구려(고려)’로 독음되면서 변조된 글자인 ‘高句麗(高麗)’와 같은 독음으로 취급되어서 아예 ‘國號字 변조(역사왜곡)의 과정이 감추어져 버리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변조(역사왜곡)의 과정’에는 한,중,일 삼국에서 서로 맥을 맞추어서 진행되엇으며, 당시의 최고권력자들과 최고의 학자들이 개입되어 있으므로 그 ‘왜곡구도의 체계’는 그리 허술하지 않았으며, 철저하게 상호 보완적으로 이루어져 있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대국가 高句麗(=주몽高麗)’는 ‘고대국가 高九黎(=주몽高黎)’에서 변조된 글자이다.
2) ‘고대국가 高九黎(=주몽高黎)’의 독음은 중국식 독음이어야 하므로 ‘고구리(고리)’이다.
3) 변조된 ‘고대국가 高句麗(=주몽高麗)’의 독음도 중국식 독음으로 ‘고구리(고리)’여야한다.
4) ‘중세국가 왕건高麗’는 변조된 ‘고대국가 高句麗(=주몽高麗)’를 계승한 것이다.
5) 따라서 ‘중세국가 왕건高麗’도 원칙적으로 그리고 초기에는 ‘고리’로 독음되었었다.
6) ‘중세국가 왕건高麗’가 한반도로 이주함으로서 한국식독음인 ‘고려’로 독음되기시작했다.
7)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 ‘高句麗와 高麗’의 독음은 모두 ‘고구려와 고려’로 통일되었다.
8. 맺음말
이상의 과정을 거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정리한다.
1) ‘고대국가 高句麗(=주몽高麗)’는 ‘고대국가 高九黎(=주몽高黎)’에서 변조된 글자이며, ‘고대국가 高九黎(=주몽高黎)’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중국식 독음인 ‘고구리(고리)’로 독음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 ‘중세국가 왕건高麗’는 변조된 ‘고대국가 高句麗(=주몽高麗)’의 國號字를 결과적으로 계승한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그리고 또 초기에는 ‘고리’로 독음되었었지만, 한반도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부터 한국식 독음으로 바꾸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표음문자인 한글이 창제되기 전인 조선초기까지는 ‘高麗’에 대한 독음에 일관성이 없어서 ‘고리’와 ‘고려’가 공존한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에 중국을 통해서 ‘高麗’에 대한 정보를 습득한 서양인들과 아라비아인들이 ‘高麗’에 대한 독음을 중국식인 ‘高麗=gǎolí(까오리)=고리’로 각각의 자국들로 소개한 것이 ‘1.Coree(꼬레?) 혹은 2.Caule(까울레?)는 3.Cauli(까울리?), 4.Kaoli(카올리?), 5.Cauly(까울리?)’ 등등이다.
3) 유럽에 알려진 ‘高麗에 대한 독음’인 ‘1.Coree(꼬레?) 혹은 2.Caule(까울레?)는 3.Cauli(까울리?), 4.Kaoli(카올리?), 5.Cauly(까울리?)’에 ‘영토나 국가를 뜻하는 라틴어 접미사(-ia)가 부가되면서 발생된, (i=이)음의 연음에 의한 음운변화(i음생략)를 거쳐서 파생된 단어’가 바로 Korea(=Corea)가 된 것인데, 19세기말경 올림픽관련 회의에서 국호의 순서를 정할 때, ‘Japan(일본)’을 ‘조선(Chosen 혹은, 高麗=Corea)’보다 앞세우기 위한 일제의 농간으로 독일식 독음인 ‘Korea(코리아)’를 조선의 영문표기로 확정시킴으로서 현재의 ‘Korea(코리아)’가 국제적인 영문호칭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 끝-
첫댓글 아니.. 저렇게 긴 장문을 글을 쓸 수 있는 대실력자가 여기 카페에 오시다니요..??
쿠투넷에 빨랑 가서 거기서 노셔야 하는거 아닙니까? ㅋㅋㅋ (뭐 읽어 보지도 않았지만요^^)
이곳에 먼저 올리고 난 다음에 저곳에도 바로 올려 두었으니 아무곳이나 선택해서 '어른스럽게' 논의하시지요...
불필요한 언급은 '무시'하기로 했으므로,...이것이 마지막 '순리적인 응대'입니다...
카오스님/
오랜만에 제대로 된 님의 글?을 읽게 되어 반갑습니다.
위 님의 글을 읽다가 드는 의문이 있어 하나 여쭤보고자 합니다.
님이 주장하시는 바,
고려와 신라의 國都를 시대별로 정리해 주실수 있으시겠습니까?
언제부터 언제까지는 지금의 어디어디라는 식으로요...
님의 주장을 한번 확인해보고 싶어서입니다..
元史의 고려北極出地三十八度少와 맞는가 체크해보려고요...
위 글에 대한 반론은 나중에 제시하겠습니다
꽁트님>...아직 조금 성급해서 '발표를 보류'하고 있는 문제인데,...굳이 말씀 하시니까...조금 틀리더라도 간략히 말씀드립니다. [다만, 아주 정확한 현재지명의 위치가 아니라 대략 반경 100km 정도의 범위내에 위치해 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신라는,...
1) 지증마립간이전에는 현,산동성중서부에서 몇군데 옮겨다님...
2) 지증마립간 부터 대략 현,양주시 일대..
3) 헌강왕때부터는 현,경주...
왕건고려는...
1) 대략 940년 이전 : 현,하남성과 산동성의 중간부근(숭산의 동쪽지역?) =제1개경..
2) 1010년까지 : 현,요하요양 =제2개경
3) 1010년이후 : 현,황해도 개성=제3개경
물론, 백제나 고구려도 수차례 이동함
카오스님/
일단, 님의 위 주장을 보니, 바로 지명 비정이 잘못-솔직한 표현으로 엉터리-이라는 것을 바로 알겠습니다..
아, 그런가요?....'엉터리'로까지 평을 하시니 '얼마나 다르길레?'라는 의문이 드는군요....'일단, 간단하게나마 (한두가지라도) 그 이유'나 들어 보지요....그리고 만일 (조금 농담을 섞어서 말씀드리면,)....그 '엉터리가 엉터리가 아닌 것으로 규명'된다면, 그 때는 '님이 엉터리가 되는 것'을 감수하셔야 할 것으로 봅니다....길고 짧은 것은 재 봐야하고, 그 기준이 되는 잣대가 올바른가도 확인하여야 하지 않을가요?....카오스가 보기에 현재의 모든 사학계(강단+재야)는 모두 그 잣대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어디 '님의 잣대'를 간단하게나마 소개해 주시지요...
님이 주장하시는 헌강왕대 현 경주에서 제1개경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경순왕이 신라 경주에서 고려 왕건이 있는 개경으로 항복하러 가는 일정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시면 위 비정이 엉터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에?....'꼴랑' 그건가요?....실망했네요.
누가 경순왕이 제1개경으로 항복하러 갔다고 했나요?....카오스는 그런적이 없는데요?...콩트님께선 아직 젊으셔서 너무 지레짐작이 심하시군요...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한말씀만,...'세상을 볼 때 항상 바로 한없이 멀리 올려다 보이는 하늘만 높은 것이 아니라 둘러 보아서 눈에 들어오는 곳 보다 더 먼곳에도 역시 땅이 있으므로, 잘 안보이더라도 땅도 하늘과 같이 한없이 넓고 멀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시기'를 조언드립니다....
어쨋든, 경순왕은 '고려의 제1개경'으로 항복하러 간 것이 아니며, '고려의 제1개경'에는 '예성강'도 없습니다...그러니 다시 좀 더 깊이 '고민해 보시길'...
조금 '힌트'를 드리면, '예성강[禮成江]'이란 명칭을 잘 음미해 보시면 답이 보입니다. 다만, 고대사서를 접할 때는 반드시 '다각적으로 음미'해야 합니다. 즉, 단순해 보이거나 간단히 찾아지는 답은 거의 항상 '정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고대사서를 쓴 사람들은 콩트님이나 카오스 보다 IQ가 10배는 더 좋은 사람들'인데, 그런 분들이 '절대절명의 절박한 상황에서 수수께끼를 내면서' 아무나 쉽게 정답을 찾을 수 있도록 만들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어쨋든 '예성강[禮成江]'이란 명칭의 수수께끼에서 최소한 두개의 답을 찾으셔야 하는데, 진짜 정답은 아마 더 찾기 어려운 두번째일 것입니다. 먼저 예성강을 풀어보시지요.
카오스님/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935년 기록을 먼저 보시기 바랍니다.
꼴랑이 아닐 겁니다.
물론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935년 기록'은 대충 훑어 봤습니다....지금 중국25사 중 사기에서부터 시작해서 구당서를 수색하고 있습니다. '도둑님이 내가 도둑이요'하는 경우도 있을까요?...극구 아니라고 하지만, 여기저기에 '펑크나는 곳'이 있어서 결국 '실토'하게 되지요...우리나라 고대사는 '역사학자의 몫'이 아닙니다. '탐정의 몫'입니다. 역사학자라는 분들은 너무 '고고하셔서' 손에 흙을 묻히려하지 않으므로 흙 속에 묻힌 실사를 결코 찾아낼 수 없습니다. 남이 입에 넣어주는 '왜곡사'만 이리저리 꿰맞추어서 밥벌이하고 있는 것이지요...그것도 '권위자랑'하면서요... '예성강[禮成江]'을 먼저 풀어 보시라니까요...
현 경주에서 하남성 登封시까지 직선거리로도 1470km입니다...
'하남성 登封시'를 '고려의 제1개경'으로 보시는 어떤 이유라도 있나요?...카오스도 아직 정확하게 찾지는 못해서 콩트님의 조언을 듣고 싶네요....카오스는 대략의 위치를 비정하고 있으므로 아직 정확한 지점은 짚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정확한 지점은 '카오스가 지정하는 주제를 기반으로 한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서 확인되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 현재의 사학자분들이 일상적으로 발굴을 하게되면, 실제 '발굴작업'은 잘 하는데,... 결론(해석)이 삼천포로 흘러서 '왜곡역사에 끼워 맟춰 버리게' 되니 아예 발굴하지 않는 것 보다 더 못한 결과가 나오기 때문입니다...'직선거리보다는 경로'에 대해 연구해 보시길...
숭산 동쪽이면 그 위치 아닌가요??
고려 개경은 당연히 지금의 북한 개성이지만요..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저는 고려가 대륙에 있었다는 망상에 전혀 동조하지 않습니다
현,황해도 개성은 '고려의 제3개경'입니다...
'망상'은 서로 상반된 주장이 있을 경우, 확실히 틀린 것이 확인된 뒤에 언급하시길...
['역사기망'에 속아 오신 것은 아닌지?...를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카오스님/
19세기말경 올림픽관련 회의에서 국호의 순서를 정할 때, ‘Japan(일본)’을 ‘조선(Chosen 혹은, 高麗=Corea)’보다 앞세우기 위한 일제의 농간으로 독일식 독음인 ‘Korea(코리아)’를 조선의 영문표기로 확정시킴으로서 현재의 ‘Korea(코리아)’가 국제적인 영문호칭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 라고 하신 위 글의 근거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일본이 올림픽에 참가하지 도 않았던 19세기말에, 그것도 남의 나라 국호를 지 마음대로 좌지우지했다는 근거를 보고 싶습니다
지적하신 것은...별로 본래의 주제와는 무관한 내용이므로 틀리던 맞던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카오스가 여기저기 주어들은 이야기들을 엮은 것이니 적의 감안하시기 바랍니다....'달(高九黎)'를 보시라 했는데,...자꾸 '손가락(Korea-Corea문제)'만 탓하시지 마시길...이 분야에 관심이 있으시면, 심층 연구하셔서 카오스에게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카오스님/
영어식 표기인 ‘Korea(=Corea)'와 ...
독일식 독음인 ‘Korea(코리아)’를 조선의 영문표기로 확정시킴으로서 .../
Korea가 영어식 표기란 말씀입니까? 독일식 독음이란 말씀입니까?
잘 모르겠네요...그냥 그럴것이라고 생각해서 쓴 것입니다.
카오스님/
중세국가 왕건高麗’는 변조된 ‘고대국가 高句麗(=주몽高麗)’의 國號字를 결과적으로 계승한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그리고 또 초기에는 ‘고리’로 독음되었었지만, 한반도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부터.../
고려가 한반도로 이주하여 정착했다는 근거도 밝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바로 반론해드리겠습니다
'고려가 한반도로 이주하여 정착했다는 근거'는 '카오스의 보따리의 일부(약5%정도됨)'입니다...그리고 아직 공개하기에는 조금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제1개경, 제2개경, 제3개경을 대략 구분해서 말씀드렸으니 나름대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굳이 더 확인하시고 싶으시다면, '보따리를 통채로 풀라'라는 식으로 주문하지 마시고 '실타래 풀듯이 단서가 될 만한 것을 하나하나 단문식으로 질문'해 주시면 가능한한 충실히 답해 드리겠으니 활용하시길... 어쨋든 본문에서 카오스가 주장하는 핵심은 '우리가 아는 고구려인들 스스로의 국호자는 高句麗가 아닌 高九黎였었다'는 것이고 '그 독음도 중국식 독음인 고구리였었다'는 것입니다.
[본문내용 수정합니다]
본문항목 5. 3) (1)에 포함되어 있었던 .../-강희자전(청)과 그 후속의 자전, 옥편 등 : 麗자를 국명으로 읽을 때는 "離"로 읽는다/...는 꽁트님의 지적을 받아 재검토한 바 적절한 근거를 찾지 못해서 삭제하였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 麗가 나라이름일 경우, 본래의 음은 '려'가 아니라 '리'였다는 내용의 한자자전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 강희자전은 아니지만, 아마 강희자전을 참조하였었을 것으로 추측은 되지만, 잘 알 수는 없네요...일반적으로 보아서,...한국어에서 "離"의 음을 '리'가 아니라 굳이 '려'라고 강변하지는 않겠지요...]
아래 글의 댓글[자오지천왕]에 소개되어 있네요...
http://www.coo2.net/bbs/zboard.php?id=con_4&page=1&sn1=&divpage=4&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9259
님/
별 내용은 보이지 않네요.
그 곳 인용대로라면 麗가 '례'로 발음되어야 하니, 高는 '괴'가 되어 괴구례네요?? ㅋㅋ
반절이 우리나라 발음사전입니까?? 그렇게도 이해가 안가시나....
강희자전에
麗...《正韻》鄰溪切,竝音離。이거나 설명해보시지요.
그 논리라면 린계절이니 발음이 '례'인 데, 音은 '리'라 했으니..
꽁트님> 참, 답답하시군요....高에 대해서 누가 뭐라합니까?....그 링크로 걸어드린 사전에 麗에 대해서 ‘本音 리’.....라고 되어 있는 부분만을 지적하여 소개드린 것입니다...즉, 한글로 분명히 .../‘리’가 麗의 본래의 음이다/...라고 하고 있으니, 그것을 말한 것입니다. 엉뚱하게 高에 대한 음과...“강희자전에 麗...《正韻》鄰溪切,竝音離。”가 왜 나옵니까?...다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설령 꽁트님이 제시하는 강희자전의 내용을 보더라도...해당 글자들의 음을 중국어 자전에서 찾아서 살펴보면,
[鄰溪切] = [《唐韻》力珍切 = lin ] +[《廣韻》苦奚切 = xi ] = [ li ]로서,
[ li ]음은 ‘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카오스가 말하는 ‘중국어식 독음’으로 ‘리’가 될 것입니다.
또한, 꽁트님의 지적대로 [鄰溪切]을 [린계절]로 보아서 ‘례’로 보는 것은, 카오스가 말하는 ‘한국어식 독음’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중국어식과 한국어식을 각각 구분해서 살펴야 된다고 보는데, 링크한 한국어 한자자전에는 ‘례’가 아니라 ‘리’라고 명기되어 있으니 왜 그런가? 하고 여쭙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麗) 竝音離’라고 하고 있는데,... 離자도 중국어 자전에서는 [《唐韻》呂支切 = li ]로 되어 있어서 아무래도 이를 한국어식으로 독음하면, ‘리’라고 해야하는 것이지 ‘려’나 ‘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는 [呂支切]자체에 대한 한국어식 독음도 [려지절]이어서 이래저래 離자는 한국어식이든지 중국어식이든지 ‘리’로 독음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지 ‘려’나 ‘례’로 독음된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어쨌든,...‘高句麗’란 문자에서 麗의 독음이 ‘리’인지? ‘려’인지?가 ‘본질문제’가 아니므로 이정도로만 하겠습니다...
카오스님/
본음 '리'가 도대체 뭐가 문제가 된다는 건지??? 중국애들이 리로 읽건 말건..
제가 진작에 알려 드린 사이트 있죠?(위 제글중 보시면 본문 제일 하단에 있읍니다)
http://www.toegye.ne.kr/dic/dic_first.asp
여기서 麗를 검색해보세요.
나라이름 '려' 예시) 고구려 본음 '리'
익히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게 뭐 어때서요??
본음은 리이지만 나라이름일 때는 려라 읽으라 하지 않습니까?
글씨 우리나라 한자음이 중국어느시대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때의 중국 원래음은 리였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려로 읽었다는 거 아닙니까??
이제 대동지지의 문구가 이해되십니까?
離자도 같이 찾아보세요
카오스님/
"물론 여기서는 [呂支切]자체에 대한 한국어식 독음도 [려지절]이어서 이래저래 離자는 한국어식이든지 중국어식이든지 ‘리’로 독음된다고 ===
문장을 아무렇게나 자르지 마시고 잘 보십시오.
正韻》鄰溪切,竝音離. 즉, 린계절이라하고 음은 리라 되어 있지 려지절과 음리는 별도의 문장부분입니다.
단장취의하시면 안되죠...린계절이 음이 리가 아니니 이 반절은 우리나라 독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독음문제는 이제 그만하지요...개미챗바퀴도는 이야기이니...꽁트님이 그 중요도를 아시게 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예성강'은 풀으셨나요?... 아마, 우리들 이야기의 첫 갈림길이 '예성강'이었었지요?...항상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니 아직 풀지 못하셨다고 하더라도 계속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성강'을 알아야 경순왕이 왕건에게 항복하러간 장소를 알 수 잇게 되어 있으니까요...[건투를 빕니다]
예성강은 추후에 찾도로 하고 제1개경의 위치 알려달라고 부탁진작에 드렸습니다.
열려주시는 순간 님의 비정은 이상하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제1개경?, 이미 말했는데?.....'경순왕의 항복루트' 이외에도 근거가 또 있다는 말씀이시겠군요...당연히 그러실 것입니다만, '우리가 아는 고대역사'는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역사스토리'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 경계점이 왕건고려의 건국이므로 '왕건고려의 건국스토리'는 '실사와 허사가 뒤범벅'되어 있으니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즉, 대략 왕건고려의 건국초기에 가까울수록 현재의 통설은 대부분 '허사' 쪽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반도사관이라는 틀 속에서는 실사가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과감히 '반도사관(식민지사관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해부해야만 비로소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건승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