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나마 꿈같은 행복을 안겨준 집을 내어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 지친 몸을 쉬어도 좋으련만 이젠 공부하는 것이 취미가 되어버렸다는 그는, 또 다른 집을 만들기 위해 느리지만 오늘도 촉수 세우고 그의 길을 가고 있다."
민달팽이의 집 - 정정님
나는 한때 입버릇처럼 기도를 했다. 산길에서 만나는 돌탑 위에 돌멩이 하나 쌓아놓고 빌었고, 절에 가면 미소가 자비로워 보이는 부처님께 빌었다. 높고 푸른 하늘이나 낮게 내려앉은 잿빛 하늘을 볼 때에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었고, 소박한 밥상을 차릴 때도, 진수성찬 앞에서도 빌었다. 민달팽이 같은 그의 알몸을 가릴 수 있는 집을 달라고. 차마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하는 기도였지만 마음속에는 산더미 같은 호소와 간절한 바람의 말들이 쌓여갔다.
그가 알고 있는 다른 달팽이들은 대궐 같은 큰 집을 등에 지고 꽤 여유롭고 자랑스럽게 살아갔다. 애당초 그에게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집이 있었다. 운명이었을까? 작지만 평온했던 그의 집은 어느 심한 태풍에 날아가 버렸다. 한순간에 집을 잃은 그를 나는 민달팽이라 생각했다.
연갈색의 얇은 막에 싸여 두 쌍의 촉수로 살아가는 민달팽이처럼, 집을 잃은 그는 밟히고 치이며 세상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느리지만 침착하게 그리고 끈기있게 또 다른 집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여러 차례 집을 만들어도 보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번번이 허물어졌다.
결국 너무 늦은 시기에 험난한 가시밭길로 잘못 들어서고야 말았다. 주변에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이고 돌아오기엔 너무 먼 길을 택했다고, 걱정인지 조롱인지 가슴 후비는 이야기들을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아스라이 먼 길을 이미 들어서버린 민달팽이는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걸었다. 그 누구도 함께 가 줄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혼자 풀어야 했고 칼바람 같은 추위도 숨 막히는 무더위도 여린 맨몸으로 견뎌내야 했다.
누군가 그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어렵게 모아놓은 곡식은 많은데 쌓아놓을 집이 없어서 너무나 아쉽다고. 그 집을 만들기 위해 십수 년의 세월 동안 연구하고 써내려간 수많은 책들이 쌓여 갔다. 이렇게 많은 알곡들을 쌓을 집이 언젠가는 생기겠지. 막연한 기대를 했지만 실낱같은 희망은 무너지고 민달팽이는 점점 지쳐갔다.
그를 위한 기도와 바람이 헛되지 않았을까? 박사학위 공부 시작한 지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그가 그림자처럼 함께하던 컴퓨터 앞에서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정식으로 교수임용되었다는 메일을 보여줬다.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 누군가 다른 사람이 가져가야 할 기적이 우리에게 잘못 왔을까? 아마 꿈일 거야.’ 너무도 오랜 세월 기다리다 지쳐서 이미 포기한 일이었기에 믿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두려웠다. 혹시 잘못 전달해서 취소됐다고 할 것만 같아 얼마 동안 조심조심 살얼음 위를 걸었다.
며칠 뒤에야 드디어 꿈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집안의 가구 중 절반도 더 차지하고 있던 책장과 그 안에 있던 책들이 그의 연구실로 입성하게 되었다. 그동안 많은 공부로 머릿속에 넘치도록 쌓아놓은 알곡들을 마음껏 풀어놓을 집이 생겼다. 너무 늦게 만났기에 비록 오래 머물 수 있는 집은 아니었지만 얼마나 간절한 기다림이었던가. 허기진 삶을 채우기 위해 이 대학 저 대학 가리지 않고 묵묵히 다니던 안쓰러운 시간강사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오랫동안 가슴 위에 얹힌 바윗덩어리가 떨어져 나간 듯 마음은 새털처럼 가벼워졌고, 끝이 보이지 않게 긴 터널 속 같은 어둠이 서서히 걷히는 소리가 들렸다.
배워야 된다는 열망으로 첫딸아이 태어나던 해 그는 야간 대학생이 되었다. 가장이면서 대학생인 그는 직장까지 다니느라 무거운 짐을 졌지만, 항상 성실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다. 결혼 후 몇 해 안 되어 대학 졸업도 마치기 전 제법 괜찮은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고 힘든 시간이 흘렀다.
트럭에 가득 실려 나가는 책장과 책들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힘이 들 때마다 나의 곱지 않은 시선을 말없이 받아준 애증의 물건들이다. 늦은 밤까지 둘이 직접 책장에 책을 정리하고 벽엔 액자도 걸면서 연구실을 예쁘게 꾸몄다. 모든 역경을 이겨내며 한 걸음 한 걸음 끝까지 완주한 민달팽이가 가장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잠시나마 꿈같은 행복을 안겨준 집을 내어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 지친 몸을 쉬어도 좋으련만 이젠 공부하는 것이 취미가 되어버렸다는 그는, 또 다른 집을 만들기 위해 느리지만 오늘도 촉수 세우고 그의 길을 가고 있다.
정정님 ---------------------------------------------
전북대 평생교육원 수필반 수강, 아람수필 회원.
당선소감
추운 겨울의 숨고르기는 따스한 봄을 위한 것이었나 봅니다. 삶의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글이 되어 등단이라는 선물로 찿아왔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가슴속에서 꺼지지 않고 버텨준 ‘글’이라는 작은 불씨에 이제 막 불을 붙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꿈만 꾸던 일이었는데 늦은 나이에 글밭이라는 길에 조심스레 내디딘, 제 발길이 헛되지 않았음에 감사합니다. 힘든 날들은 기억 저편으로 남기고 굳게 닫힌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 새로운 봄을 맞이하렵니다. 열심히 살아온 세상의 모든 민달팽이들에게도 집이 생기는 새봄이 되었으면 합니다.
마음속에서만 꿈틀대던 글을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용기를 주시고 처음부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선생님과 늘 힘이 되어준 문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아직 채 여물지도 못한 제 글을 선택해주신 ≪수필과비평≫심사위원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항상 긍정적으로 힘이되어준 남편과 두 딸들 고맙고, 내 글에 과분한 칭찬을 해주는 동생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