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나이가 들면 항상 외롭다. 될 수 있으면 살아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찾아오는 게 자식의 도리가
아니겠나'
결혼 후 처음으로 긴 시간을 부모님과 함께 하고 왔다.
친구를 만나러 대구에 갔다가 저녁에 구미 부모님 댁을 찾았다. 평상시처럼 하루나 이틀 정도 보내고 오려고
했는데... 남편이 데리러 온다고 기다리는 겸 이틀 밤을 더 보냈다.
친정에 가도 이틀 밤 이상을 지내는 경우는 드물다. 바쁘고 할 일이 있다는 핑계와 오래 머물면 연로하신
부모님을 귀찮게 해 드리는 것 같아서였다.
나이가 드실수록 외로움을 타는 것이 부모님이다. 자식들은 모두 출가해서 일 년에 몇 번 얼굴 보는 것이
전부이니 더 그립고 보고 싶은 것이다.
대구에서 수십 년간 뿌리내리고 살았고 친척과 친구들도 모두 그곳에 있는데 연세가 드시니 자식 곁으로
가고 싶어 하셨다. 딸 셋은 너무 멀리 있고 아들들이 있는 구미로 3년 전 거처를 옮기셨다. 나이가 들어서
새로운 곳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두 분 모두 연세가 드시니 병원 갈 일도 많고 가까이서 돌봐 줄 자식 곁에 가시고 싶어 하시니
가족들이 상의 끝에 결정한 것이다.
대구의 집을 팔고 구미에 집을 사서 가셨으니 남은 여생은 그곳에서 지내야만 한다.
가끔 친구들이 그리우면 대구에 갔다 오시지만 예전처럼 자유롭게 만날 수 없으니 더 답답해하신다.
사람 만나는 것보다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아버지보다 사람 만나기 좋아하는 엄마가 더 외로움을 탄다.
구미로 거주지를 옮긴 때가 코로나가 심하던 때이니 밖으로 나갈 수도 친구도 만날 수도 없었으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엄마는 낯선 곳으로 이사 온 후에 많이 외롭고 답답해서 우울증이 올 것 같았다고 했다.
아침에 걷기 운동 1시간 정도 하시고 TV 보는 것이 (엄마는 유튜브) 유일한 일과이다. 그러니 24시간이 얼마나
지루하고 답답했을까? 그렇다고 자식들 얼굴을 매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도 없고 좋아하던 운동도 못하고 집에만 있었으니 많이 힘드셨을 것이다.
울 엄마 이순선여사의 오랜 취미생활 "탁구"
울 엄마 이순선여사는 여든 살이 넘었지만 활동적이다. 오랫동안 수영을 했는데 눈이 안 좋아져서 그만두고
탁구를 시작하셨다. 나름 운동신경도 있어서 탁구장에 가면 인기도 많았다. 젊은 사람, 나이 든 사람 가리지 않고 사귀고 같이 운동했다. 전혀 꿀리는 법 없이 당당하고 승부욕도 강했다. 7~8년 탁구를 했으니 친구도 많고 재밌어하셨다.
운동도 좋아하고 벨리댄스를 하고 노래교실도 다니던 열혈 이여사가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만 있었다.
구미로 이사를 온 후에는 손 발이 꼭 묶인 것이다. 멀리 이사 와서 이 낯선 곳에는 친구도 없으니
그 답답함과 외로움이 오죽했을까?
엄마가 좋아하는 것은 탁구이다. 오 남매 중 유일하게 운동을 좋아하고 운동신경이 있는 것은 나다.
외모나 성격 다른 것은 아버지를 닮았어도 운동 좋아하는 것은 엄마를 닮았다.
아파트 단지 안에 헬스장 겸 탁구장이 있다. 한 달 등록을 하고 탁구장을 찾았는데
몇 시간을 기다려도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 안 했다고 한다.
탁구는 파트너가 있어야 가능한 운동이라 사람 오기를 기다리다 그냥 오셨다는 것이다. 그 후에는 혼자 기계로
탁구를 조금 치다가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엄마가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해드리는 것이 효도다. 관리사무소에 가서 등록을 했다. 한 달에 만 원.
탁구장은 넓은데 운동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엄마와 나. 둘 만의 독무대였다.
오래간만에 몸 좀 풀어볼까?
몇 년 만에 라켓을 드니 처음엔 공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몇 번 또닥거리니 호흡이 맞춰졌다.
공 떨어졌다고 웃고, 스매싱 세게 했다고 매너가 안 좋다고 지적하며 웃고.. 웃고 또 웃었다.
"몇 년 만에 처음 웃은 것 같다. 집에 둘이 있으면 천지에 웃을 일이 없다."
장장 세 시간을 정신없이 웃고 즐기며 탁구를 쳤다. 오래간만에 오랜 시간 운동을 했더니 피곤했다.
평상시에는 잠이 안 와서 힘들어하시던 엄마도 그날은 일찍 잠자리게 들었다.
며칠 집에 있는 동안은 엄마의 탁구 파트너가 되기로 했다.
무료한 시간도 보내고 치매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며 엄마에게 그림 그리기를 권했다.
다이소에 가서 미술용품을 사드렸다. 물감, 스케치북, 물통, 크레파스, 붓. 초등학생 미술 준비물 챙기듯
몇 가지 마련을 해드렸다. 그리고 약속했다. 5년 후에 모녀가 미술전시회 하자고...
그림 그리는 엄마의 모습을 가족 단톡방에 올리며 전시회 계획을 알렸다. 멋지다는 탄성이다.
엄마도 그림그리나? 엄마의 낯선 모습에 모두들 의아해한다.
82살에 그림에 입문한 울 엄마 이순선여사
86살에 딸의 권유로 그림을 시작한 할머니가 92살에 전시회를 했다는 사연과 치매 예방에도 효과가 크다며
엄마를 설득했다. 그 할머니는 86살에 그림을 시작했지만 엄마는 그 보다 네 살이나 적다고 하면서..
예전에는 뭐든 자신만만한 엄마였지만 연세가 드셔서 그런지 뭔가를 한다는 것을 두려워하셨다.
나이가 들면 포기하는 것이 많아진다는 말이 맞다.
인근 주민센터에서 하는 취미강좌 프로그램이 있으면 등록하기로 했다. 그런데 노인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적당한 프로그램이 있을지 걱정이다. 대부분이 4,50대 여성분이 주류(60대도 나이가 맞은편에 속한다고 하니)
80대의 참여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노인정에 가는 것은 싫다고 하신다. 노인정에 가면 온통 자식 자랑과 화투놀이를 해서 안 가신다고 했다.
다음 날은 남편이 왔다. 남편과 셋이서 탁구장을 갔다. 세기의 대결이 벌어졌다. 데스매치로..
남편이 나를 이기고 남편과 엄마의 대결.. 원래 승부욕이 강한 엄마라 만만치 않았다.
엄마가 남편을 이기고 1위.. 즐거워하며 웃는 엄마를 보니 흐뭇했다. 사실은 남편이 엄마 기분 좋게 해 드리려고 져준 것이라고 고백했다. 믿거나 말거나!
아버지도 함께 탁구를 하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니 아쉬웠다. 하루 한 시간 걷는 것이 전부이고
다른 운동은 취미도 해 본 적도 없는 분이다.
두 분이서 배웠으면 지금 오붓하게 탁구를 즐기셨을 텐데..
부부가 나이 들어서 공통의 취미 한 가지는 있어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부모는 나이가 들면 항상 외롭다.
그 말 뜻을 왜 몰랐을까? 나도 자식이 왔다 가면 그립고 외로워서 텅 빈 방만 쳐다보고 있으면서..
아들들 옆에 계신다고 안심하고 잘 지내신다고 마음 놓고 있었다.
나흘 밤을 보내고 차 막힌다고 아침은 안 먹는다고. 밥 차려준다는 것도 괜찮다며 집을 나섰다.
내복 안 입어서 못 나간다고 현관 앞에서 배웅하는 엄마를 뒤로 하고 신발을 신었다.
엄마를 한 번 안아드리고 와야 지하고 마음먹었는데.. 막상 눈이 마주치면 울 것 같았다.
돌아서는 순간 엄마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엄마를 볼 용기가 없어서 그냥 '엄마 갈게.'하고 문을 닫고 나왔다.
후회스럽다. 한 번 안아드리고 올걸..
건강하게만 잘 계시면 다음에 또 가서 탁구 쳐드릴 텐데..
부모님 살아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뵙고 효도해야 자식 된 도리인데...
늘 다음에 다음에라며 핑곗거리를 만든다.
살아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찾아오라는 엄마의 말이 귀에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