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아이는 어떻게 자라는가
나는 이 글에서 나의 체험을 통해 생활환경에서 벌어지는 일과 모험의 중요성이 아이들의 세계 내지 정체성 형성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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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가꾸기 수업 시간에 나는 생태수업을 겸한다. 그러며 며칠 전에는 수업시간에 문명의 자연파괴를 다룬 미와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를 같이 봤다. 만화영화가 나온 지 벌써 24년이나 되다보니 아이들은 처음 본다고 했다. 만화를 보고 각자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돌아가며 이야기했다. 나는 아시타카가 산을 구하고 죽어가며, 인간을 증오해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는 산에게 ‘넌 살아야 한다’ ‘넌 아름다워’라고 말하자 산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장면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도무지 죽으려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아름답다고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름답다’는 말이 내겐 ‘사랑한다’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말로 들렸지만 아이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슴도치도 제 새끼 함함하다는 속담처럼 우리는 사랑 때문에 그것을 아름답게 본다. 그리고 아름다움 때문에 의미 있고 중요한 존재가 된다.
‘아름답다’는 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의미이고 가치라는 걸 알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좀 더 살아야 할까?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정말 자기 스스로가 아름답다는 것을 알까? 나이를 먹을수록 아이들은 자신감을 잃는다. 아무리 부모가 자식을 예뻐한다고 해도 아이들은 그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부모니까 그런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세상이 온통 비교경쟁에 사로잡혀 이기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이겨서 아름답기보다 멋지기를 원한다. 하지만 멋은 아름답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아름다움이 흡족하게 차오르거나 응축되어 있을 때 멋을 느낀다. 아름다움이 부족한데 멋만 있다면 그것은 허영이고 꾸밈이다. 소비자본주의 사회가 심화될수록 아름다움이 적어지고 멋만 넘쳐나고 있다. 우리는 멋 때문에 오히려 열등감을 느끼고 질투심을 느끼고 허무감을 느낀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사람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멋을 내는 것보다 세상과 내가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는 것이 중요할 텐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여전히 사랑이다. 출발은 사랑이다.
아름다움의 체험은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아름다움으로 채워진 정체성은 영혼을 뿌듯하게 만들고 뿌듯함으로 온전해지고 세상과 삶에 대한 의욕을 갖게 된다. 그것이 건강한 자아의 모습이고 건강한 자아가 행복한 삶을 산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썼다. 그것은 ‘사랑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관계를 연결하고 통합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름답고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세상이 아름답게 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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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내 기억을 차지하는 세상은 매우 좁았다. 서울 변두리 창동을 벗어나지 못했다. 동네 골목길에서 아이들과 소꿉놀이를 하거나, 동네 뒷산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그 때도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하는 산들이 있었지만 그 산들이 내 경험과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소풍 이후였다.
또 하나의 기억나는 장소가 있었는데 그곳은 시골 할아버지 집이었다. 명절이나 방학 때가 되면 시골에서 지내다 오곤 했다. 나는 신기한 것과 놀 것이 많은 시골이 좋았다. 개구리, 메뚜기, 닭, 돼지, 개, 소, 말조개, 우렁이, 붕어, 메기, 대숲의 참새들, 아름드리 정자나무, 주렁주렁 감나무 시골은 신기한 것들이 넘치는 곳이었다. 새를 보러 뛰어다니고 물고기 잡느라 새까맣게 타고, 아궁이에 불을 때고 돼지 밥 주고 닭 모이주고 소 여물 주는 게 재밌었다.
먼 유년 어느 날 대여섯 살 무렵 뒷곁의 이끼밭에 매혹된 적이 있다. 우산이끼, 솔이끼 등 다양한 이끼들이 굴뚝과 처마밑에서 장독대까지 길자국만 빼고 빼곡했는데, 너무나 아름다웠다. 뒷곁 대숲이 서걱이며 흔들렸지만, 이끼들을 본 순간 나는 정적에 사로잡혔다. 가만히 웅크리고 이끼밭을 들여다보니 우산이끼 솔이끼 하나하나가 나무처럼 보였다. 그러자 내가 거대한 거인이 된 거 같고 새가 되어 높은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촉촉한 이끼밭에 내리는 햇살도 완벽했다. 매혹이랄까 감동이랄까? 이끼밭이 나를 변화시켰다.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인은 첫째 어머니와 어머니의 사랑이었고, 둘째 세계경험이었다. 어머니가 나를 예뻐했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했다. 어머니의 머리칼과 살에서 나는 향기며 치맛자락의 감촉은 잊지 못하는 것이다. 당신 스스로 배운 것이 없다고 생각하셔서 지식 따위를 가르치신 적이 없었지만 그래서 더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었다. 학교에 가면 열등감이 많았지만 집에서는 가장 예쁜 존재였다. 그것이 나의 출발이었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했듯 내가 뛰어논 동네 골목과 뒷동산들과 아이들과의 경험이 나를 형성해갔다. 세계경험이 자연과 아이들 사이에서의 상호작용이 놀이를 통해 나는 형성되었다.
하지만 우리 집에도 텔레비전이 들어오면서 몇 년을 텔레비전에 푹 빠져 지냈다. 고등학교를 시내 대학로에 있는 곳을 다니면서 서울의 이곳저곳이 내 자아 안에 들어오게 되었고, 북한산, 한강, 고궁, 과천대공원 같은 곳도 내 체험의 영역에 들어오게 되었다. 학교보다 대학로의 흥사단, 화랑들, 거리공연, 소극장, 성균관대학과 시위들은 당시 내가 세계를 경험하는 내용을 이루었다. 물론 그때 만난 책들도 나를 형성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그 뒤로 성인이 되어 살며 전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일을 하고,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배낭여행을 하고 나의 정체성도 점차 변화하였다.
내가 구차하게 내 성장과정을 이야기한 것은 나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나를 둘러싼 세계와 그 안에서 벌어진 상호작용 자체가 곧 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세계와 나 사이의 상호작용인 놀이와 노동, 그리고 그 안에서 누린 감동과 깨달음이 없었다면 나는 관계가 단절된 무의미한 존재일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세계와 나 사이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의 감동이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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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강진에 내려와 살면서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하지만 요즘은 시골도 도시처럼 산다. 아이들은 스마트폰과 게임에 빠져있고, 필요한 것은 인터넷으로 주문한다. 어떤 면에서는 도시아이들보다 더 심하다. 그러다보니 세계는 그대로지만, 아이들이 자라나는 세계 자체가 달라졌다. 더 이상 자연이 아니며 더 이상 마을이 아니며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아이들의 놀이란 게임이고, 아이들의 소통이란 스마트폰이다. 삶은 인터넷으로 주문한 소비로 이루어진다. 세계와의 소통이 없다. 더 불안하고 더 외롭다.
요즘 아이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경험은 더 빈곤해졌다. 부모를 따라 해외여행, 맛집여행의 관광은 하지만 삶 안에서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부딪힘이 없다. 소비할 뿐이다. 어릴 때부터 각종 학원을 다니고 어학연수를 다니지만 정작 놀며 일하며 살아가는 삶의 체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나를 둘러싼 자연에 의존하기보다 인터넷 주문과 대형마트에 의존하다보니 세계와 소통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지만 바로 이곳에서 이방인이다. 생활이 나를 둘러싼 자연과 세계와 단절되니 정체성 또한 불안할 수밖에 없다. 내가 세계와 무관한 존재가 되니 돈에 대한 의존도가 오히려 절대적으로 높아졌다. 나의 과제는 이제 시장에서 살아남느냐 마느냐의 생존문제가 되어버렸다.
고향이 사라지거나 희미해졌다. 어머니는 어떨까? 요즘은 어머니의 역할도 점차 분산되는 추세인데, 문제는 그것이 아버지나 친척, 마을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돈에 의해 구매한 돌봄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사랑과 돌봄도 돈으로 대신할 수 있고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추세가 대세가 되고 있다. 부모들도 돈을 더 많이 벌어야만 자신과 자식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금도는 서울에서도 멀고 먼 곳이다. 소비자본주의사회에서는 더욱더 중심과 먼 변방일 수 있다. 하지만 권력의 지형으로 세상을 보지 말자. 그러면 곧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가 첨단일 수 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세계에서 풀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세계화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우리는 지금 여기의 장소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그 장소에 추억이 없고 감동이 없고 아름다움이 없다면, 만약 그렇다면 여기는 그냥 변방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마을과 자연을 만나고 지금 여기의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면, 그리고 이곳의 장소와 시간을 정체성으로 품은 아이가 자랄 수 있다면 바로 지금 여기가 첨단이 된다. 그렇게 아름다운 아이들이 탄생하고 자란다고 생각한다.
아이들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야말로 첨단이며 진짜 세계다. 이곳의 산에서 바다에서 들에서 뛰놀고 일하고 교감하며 뿌듯하게 자라는 아이가 진짜 아름다운 아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