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을 떠난 무자치 (거제사투리---무재수)
신문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갑자기 번쩍번쩍, 천둥번개가 지축을 흔들면서 낮밤이 혼돈에 빠진 오후, 하늘이 열린 듯 한바탕 빗줄기를 땅에 퍼붓는다. 이삼십 분 쏟아지던 빗줄기가 돌연 멈추더니 짙은 구름 사이로 한줄기 햇살이 비친다. 여름이 한층 무르익는 이때, 하늘과 땅이 통했다. 용이 된 이무기가 승천하기 딱 좋은 날이다.
지구온난화에 힘입어 이른 여름부터 전에 없이 뜨겁지만 아직 장마 전이라 그런지 눅눅하지 않다. 빠른 걸음으로 동네를 작심하고 돌면 몸은 땀에 흠뻑 젖지만 그리 불쾌하지 않다. 이맘때 전국의 농촌은 모내기로 바쁘다. 멀지 않은 과거, 천수답은 논 가장자리에 마련된 물웅덩이에 소중하게 담은 빗물을 용두레로 퍼올렸을 테고, 변태를 거의 마친 올챙이들이 서둘러 뭍으로 올라간 물웅덩이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을 것이다. 모내기를 마치고 허해진 장정들은 물웅덩이를 뒤져 토실토실한 가물치로 기를 보했겠지.
가물치를 잡으려 바닥 드러낸 물웅덩이를 뒤질 적에, 적지 않은 무자치가 “재수 없게!” 거치적거렸다. 움켜쥐어 획 집어던지는 장정들은 무자치의 안위에 별 관심이 없었겠지만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떨어진 무자치는 혼비백산 풀숲에 숨어들 테고, 조용해진 논둑에서 먹이를 노리던 참개구리들은 무자치의 출현에 소스라치며 논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무자치를 물뱀이라 했다. 여름이면 물웅덩이를 떠나지 않는 뱀이기 때문이리라. 그랬던 무자치. 요사이 몹시도 보기 어려워졌다.
분류학적으로 사촌간이지만, 집안에서 칙사 대접받던 구렁이와 달리 물가의 무자치는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다. 몸이 50센티미터에 불과하고 흔해빠졌기 때문이었을까. 차가운 호수에서 5백년을 묵은 구렁이는 이무기가 되어 천둥번개가 휘몰아치는 날, 용의 자태로 승화돼 승천한다지만 사실 구렁이는 무자치가 터 잡은 호수에 여간해서 들어가지 않는다. 승천하는 이무기, 혹시 무자치가 아니었을까. 하늘의 기운을 지배하는 용이 농사와 관련된 신화의 주역이라면 아무래도 초가지붕에 똬리 트는 구렁이보다 천수답의 물웅덩이를 지키는 무자치가 농경사회의 신화와 잘 어울리지 싶다. 다만 꾀죄죄한 담갈색의 무자치를 내세우기 민망하니 황갈색의 우람한 구렁이가 그 명예를 대신했을지 모른다.
무자치가 아무리 꾀죄죄하더라도 명색이 뱀인지라 손이 억센 구릿빛 농군이라도 가까이하기 흔쾌할 리 없다. 논일하다 물리면 재수가 없다. 그래서 그랬을까. 호남지방은 무자치를 ‘무재수’라 한다. 들리는 소문을 수록한 한 파충류 학자는 뱀 때문에 논에 들어가길 꺼려하는 삯일꾼에게 논 주인이 “독이 없는 뱀에 3번 물리면 부자가 된다!”며 독려해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전한다. 뙤약볕이 내리쪼이면 물 밖에 머리만 내밀고 체온을 낮추던 무자치는 선선해진 여름밤이면 논둑 주변에서 열을 식히는 개구리를 노리는데, 그때 족제비와 너구리는 물론이고 살모사도 잡아먹는 능구렁이를 조심해야 한다. 사람이 비킨 여름밤은 그렇듯 뭇 생명의 소리 없는 카니발 현장이었다.
봄에 허물을 벗은 무자치들은 수십 마리가 뒤엉켜 짝짓기에 돌입하고, 뜨겁던 여름의 낮 기온이 식어갈 무렵, 늦은 8월에서 이른 9월 사이에 10에서 12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살모사 종류처럼 난태생이기 때문인데, 날씨가 쌀쌀해지면 양지바른 돌 틈이나 고목의 뿌리에 많은 개체들이 무리지어 동면에 들어간다. 개구리와 올챙이, 곤충과 그 애벌레, 두더지와 등줄쥐 들을 충분히 먹고 겨울잠에 들어가는 무자치는 새 생명을 잉태할 봄을 기다리는 것이리라. 그렇게 농촌의 풍요로운 생태계를 반영했던 무자치들은 시방 어디로 갔을까. 논이 남은 섬마을에 가면 더러 볼 수 있다던데, 밟힐 듯 많았던 무자치가 마술처럼 사라진 원인은 당연히 농약이었을까.
물을 떠나지 않는 무자치에게 농약이 치명적인 건 사실이지만, 옆 논보다 진해야 벌레를 쫓아낼 수 있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인 까닭에 섬마을이라고 농약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런데 무자치가 섬마을에서 이따금 눈에 띄는 까닭은 무엇일까. 관개와 기계화가 육지보다 철두철미하지 않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계단 식 논의 경사가 심하거나 좁고, 물이 부족한 지리적 여건으로 삐뚤빼뚤한 논둑과 물웅덩이를 그대로 두자, 섬마을의 논에는 겨울에도 물이 고인다. 논에 물이 사시사철 고여야 개구리가 유지되고 개구리가 살 수 있어야 무자치가 남을 수 있는 게 농촌의 오랜 이치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무거운 농기계로 논바닥을 꾹꾹 누르지 않았으니 겨울잠을 잘 공간이 그대로 있다. 비록 농약으로 오염되었어도 노골적으로 짓밟히지 않은 덕분에 무자치는 섬마을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과 시베리아 동남부의 사정은 짐작할 수 없지만 우리의 실상은 현재 이렇다.
논에 개구리가 없으니 무자치도 없고, 개구리와 어린 무자치를 노리던 때까치와 청호반새도 물웅덩이가 없는 농촌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우리 농촌은 레이첼 카슨이 일찍이 경고했던 이른바 ‘침묵의 봄’을 맞았다. 숱한 생물들과 어우러지던 오랜 문화 공간에서 돈벌이를 위한 산업농의 살육 현장으로 농촌이 바뀐 이후, 개구리와 새 소리는 물론이고 이제 아기 울음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밭을 가는 농기계로 몸통이 잘려나가는 누룩뱀도 머지않아 사촌인 무자치처럼 농촌을 떠나야 할 것이다. 초가지붕을 잃고 진작 자취 감춘 구렁이처럼.
유기농업으로 땅을 되살린 한 농사꾼은 자신의 논에 개구리가 다시 나타나자 하느님께 고마워했다. 먹이를 찾아 논밭을 찾아온 개구리들이 내내 번성하려면 낳은 알이 마르지 않고 올챙이가 탈 없이 자랄 물웅덩이가 보전돼야 한다. 물웅덩이의 생태계가 살아난다면 무자치가 돌아올 테고, 때까치와 청호반새도 족제비와 너구리도 다시 기웃거리겠지. 그러면 그 농사꾼은 “하느님! 무자치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기도할 게 틀림없다.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구석리에는 ‘12폭포’로 유명한 무자치골이 있다. 금산군은 “옛 선비의 멋이 배어있는 12폭포가 웅장하고 아름답다!”고 홍보하는데, 무자치가 많았을 무자치골. 어쩌면 12마리의 용이 폭포를 타고 승천한 골짜기는 아닐까. 하늘에 오른 용이 천둥번개를 치며 한바탕 비를 퍼부어야 농사도 신명나는 법인데, 무자치가 사라진 농촌은 심심하기만 하다. 무자치가 돌아와야 온난화로 뜨거워진 하늘의 용도 신명날 것이거늘. (물푸레골에서, 2009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