梅軒 尹奉吉(禹儀)義士
매헌 윤봉길(우의)의사
尹義士의 본명은 尹禹儀이다. 지금에 알려진 奉吉 이름은 사실 별명이다.
尹奉吉(禹儀)義士의 업적
1.농민계몽운동
1926년 농민계몽 농촌부흥운동 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부흥에 전력을 다하였으며 이듬해 이를 더욱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農民讀本'을 저술하고 야학회를 조직하여 향리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1929년 復興院을 설립하여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하였으며 그해 1월초부터 1년간 己巳日記를 쓰기 시작하였다.
학예회를 열고 촌극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는데 대성황리에 마치게 되자 일제 당국에서 주목하기 시작했다.
지방 농민들을 규합하여 농촌진흥을 위한 '月進會'를 조직, 회장에 추대되었으며 또한 '修巖體育會'를 운영하여
건실한 신체위에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2.임시정부가담
1931년 8월 활동무대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겨 보다 큰일을 도모코자 했다.
생계를 위해 동포 실업가 박 진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종사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수업을 하는 한편, 노동조합을 조직한뒤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다 그 해 겨울, 임시정부의
김구선생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를 다짐했다.
그 당시는 이봉창의사가 일본 동경에서 일본 왕을 폭살하려다 실패하였고 그로인해 상해 일대는
복잡한 정세에 빠지게 되었다. 더욱이 일제는 1월 28일 고의로 죽인 일본승려사건을 빌미삼아 상해
사변을 도발하였다. 이때 일본은 시라카와 대장이 이끈 일본군이 중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한 껏 전승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3.일제 고관에 폭탄투척
윤의사는 1932년 봄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일본군의 정보를 탐지한뒤 이를 실천코자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김구선생의 주관하에 李東寧,李始榮,趙素昻등의 협의와 동의아래 4월 29일 이른바 天長節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뜻을 모았다.
철저한 준비 속에 진행된 폭탄 투척은 성공적으로 시라카와사령관,가와바다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등은 즉사하고
노무라 일본 제3함대사령관,우에다 일본군9사단장,시게쓰미 주중공사등이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잡힌 윤의사는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해 11월 18일 일본으로 호송되어 20일
오사카 위수 형무소에 수감,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서울 양재동 '양재시민의 숲' 입구에 있는 기념관.
한때는 정부와 서울시에서 지원이 미흡하여 폐관의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있는 忠義祠 전경
거사를 결의하고 한 손에는 권총을 또 한 손에는 수류탄을 들고
굳은 다짐을 하는 尹義士
윤봉길의사 '훙커우 의거' 당시 상황도
윤봉길의사의 한인애국단 宣誓文
김구 선생과 윤봉길의사
윤봉길의사의 총살형 직전.
일본 헌병들이 윤의사를 강제로 무릎을 꿇린채 형틀에 묶고있다.
윤의사는 이 곳 이시카와현 미고우시 육군 공병 작업장에서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에
일본 헌병에 의해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25세의 열혈 청년 시절이었다.
일본은 악랄하게도 윤의사를 무릎을 꿇린채 10미터 거리에서 정조준하여 단 한 발의 총으로
머리 한 가운데를 명중시켜 머리와 눈을 가린 흰 천 위에 피를 흘리게하여 소위 그들의 일장기를
연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윤의사의 총살형 집행후 의연하게 숨진 모습.
이마 한 가운데 일장기 모양의 윤의사 피가 흘러있다.
일본은 윤의사의 죽음을 가지고도 저들의 야욕을 상징화하려는 악랄함을 자행했다.
그러나 윤의사는 숨이 멎는 그 순간 까지도 굳세고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윤의사 사체검안서
윤봉길의사 운구 행렬
김구 선생을 비롯, 많은 이들이 윤의사 유해 뒤를 따르고 있다.
대한민국으로 송환된 윤의사의 유해.
많은 국민들이 나와 윤의사 유해 운구를 따르며 애도 하고 있다.
윤봉길 의사의 생애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광현당에서 출생
*1911년 3월 4세,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
*1918년 11세, 덕산공립 보통학교 입학
*1919년 12세, 3.1 독립운동에 자극받아 식민지 교육을 배격하고 보통학교 자퇴, 崔秉大문하에서 한학을 수업
*1921년 14세, 서당 烏峙書塾에서 유학자 매곡 성주록 선생의 문하생이 됨
*1922년 15세, 성주 裵씨 用順여사와 결혼
*1923년 16세,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
*1925년 18세, 시집 오추(嗚推),옥수(玉睡),임추(壬椎)등 발간
*1926년 19세, 오치서숙 한학수업 마침, 梅軒 아호를 얻음 농촌계몽 농촌부흥운동 독서회 시작
*1927년 20세, '농민독본'(3권)편저 *1928년 21세,부흥원 설립기념 우화 '토끼와 여우' 공연, 월례강연회 개최,
기사년 일기를 쓰심, 爲親契 조직, 月進會및 수암체육회 조직
*1930년 3월 6일 23세,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유서를 남기고 조국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
만주 독립군기지를 돌아보고 중국 청도에 도착함
*1931년 5월 8일 24세, 중국 청도에서 배편으로 상해로 옮김, 한인 공우회 조직하고 노동야학및 노동운동하며 김구,
이유필,최동오,김현구,김의한,김두봉,박창세,안공근, 등과 독립운동
*1932년 4월 26일 25세, 상해 거류민단 사무실에서 '한인애국단 선서식'을 거행하고 백범 김구선생과 기념촬영
*1932년 4월 29일 25세, 오전 11시 40분(한국시간 12시 40분) 거사,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의 천장절과 전승기념
축하식 단상에 수통형 폭탄을 투척하여 시라카와 대장 이하 중국 침략의 군관민 수괴들을 응징
*1932년 5월 28일 25세,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 그 해 11월 18일 일본 오사카로 호송되어
11월 20일에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
*1932년 12월 18일 25세,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
*1932년 12월 19일 25세, 아침 7시 40분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月進會旗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사적 제229호 윤의사 생가
2013년 12월 19일은 윤봉길의사의 순국 8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기억하시어 그 분의 애국 의지를 다시금 우리 가슴에 새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