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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세이토(清藤寺七郞)의 책 《천우협》(千佑俠)에서는 1894년 6월 27일에 부산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일본의 극우 폭력 조직 천우협 회원 일부가 전봉준을 만나 동학 동민 운동을 지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천우협》에 나타난 만난 곳과 〈동도(東徒)의 죄인 전봉준 공초〉에 나타난 장소가 다르며, 〈동도(東徒)의 죄인 전봉준 공초〉에서는 당시 전봉준을 따른 군세는 고작 20여 명이었음에도 《천우협》에서는 5백여 명으로 기술하여 그 수치가 매우 차이가 크다. 결정적으로 《천우협》에 나타난 시기인 6월부터 8월 말까지는 전혀 전투가 없었음에도 《천우협》에서는 천우협 회원들과 전봉준 일동이 협조하여 관군을 격파했다고 하였다.[6] 게다가 일본의 폭력 조직 천우협은 팔굉일우를 바탕으로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바닥에 깔고 있는 조직으로 다른 나라의 독립이나 부국 강병을 도울 만한 조직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천우협》의 내용은 신빙성이 낮다고 하겠다.
<자료: 위키백과>
전봉준의 유언
전봉준의 사형을 집행한 집행총순의 말에 따르면
전봉준은 그가 듣던 것보다 탁월한 인물로 보였으며
외모에서도 그런 것이 느껴졌다고 한다.
또 그는 전봉준이 엄격하고 곧은 기상에 굳센 의지를 가진
대위인,대영걸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가족에게 마지막 남길 말이 없느냐는 법관의 질문에
"다른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나를 죽이려면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갑오농민전쟁 이전의 전봉준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병고 끝에 먼저 떠난 아내의 무덤을 자주찾는 자상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래의 시는 전봉준이 13세때 지은 시 백구(白鷗)라고 합니다.
두번 째의 시는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절명시라고 합니다.
백구(白鷗)
자재사향득의유(自在沙鄕得意遊)
설상유각독청추(雪翔?脚獨淸秋)
소소한우래시몽(蕭蕭寒雨來時夢)
왕왕어인거후구(往往漁人去後邱)
허다수석비생면(許多水石非生面)
열기풍상기백두(閱幾風霜기白頭)
음탁수번무과분(飮啄雖煩無過分)
강호어족막심수(江湖漁族莫深愁)
스스로 모래밭에 마음껏 노닐적에
흰 날개 가는 다리로 맑은 가을 날 홀로 섰네.
부슬부슬 찬비는 꿈결같이 오는데
때때로 고기잡이 돌아가면 언덕에 오르네
수많은 수석은 낯설지 아니하고
얼마나 많은 풍상을 겪었는지 머리 희었도다.
마시고 쪼는 것이 비록 번거러우나 분수를 아노니
강호의 고기떼들아 너무 근심치 말아라
유시(遺詩)
時來天地皆同力 시래천지개동력
運去英雄不自謀 운거영웅불자모
愛民正義我無失 애민정의아무실
愛國丹心誰有知 애국단심수유지
때를 만나니 천하가 뜻을 함께 하더니
시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의 일이 어찌 허물이랴.
나라 위한 참된 마음을 그 누가 알아주리.
전봉준 고택
녹두장군 전봉준의 자(字)는 명숙(明淑) 천안전씨(天安全氏)이다. 일부에서는
태안에서 출생하였다고 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고창을 그의 출생지로 본다.
그래서 고창에는 그의 생가 유허가 있다.
그가 녹두(綠豆)란 별호를 갖게 된데에는 그의 유난히 작았던 몸집때문이라고 한다.
어려서 조부를 따라 전주 구미리로 옮겨 살다가 정읍시 감곡면 계룡리로 이사했고
이곳에서 18세 때까지 살다가 20리 거리의 산외면 동곡리로 옮겨 살았다.
전봉준이 일생동안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이 지금실이지만 제일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이 38살에 이사를 한 지금의 고택이 있는 조소리라고 한다.
그의 고택이 있는 조소리..그는 이곳에서 그다지 오래 살지는 못했다.
이사와서 막 훈장생활에 탄력을 받을 즈음에 수천명의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에게 억울함을 호소했고 그는 분연히 그들의 앞에 서기를 주저 하지 않았다.
그후 이집은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서 태워졌다가 최근에 다시 세워졌다.
고부봉기때부터 그는 사실 빈한한 훈장으로 살았던 탓에 탐학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주변의 무식한 농군들 사이에서 흔치 않게 글을 아는 탓으로 지도자로
옹립이 되었다.
초기의 봉기는 주로 탐관오리의 학정에 반발한 경향이 있지만 2차 봉기 이후에는
열강의 틈바구니..그것도 군대까지 동원하여 나라를 삼키려는 일본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열망이 더욱 드셌다. 당시만 하여도 그는 알려지지 않은 동학접주(東學接主)로
동학농민전쟁을 이끈 선각자요 더불어 의지력과 영도력을 함께 지닌 인물이었다.
사실 조선 말엽에는 전국의 많은 곳에서 민란이 들불처럼 일어 났지만 대개의 경우는
조정에서 안핵사라는 직책의 벼슬아치를 내려 보내면 평정이 되었지만 고부에서 일어난
만석보와 관련한 최초의 동학란은 그렇지 못했다.
안핵사 이용태가 정규군을 거느리고 내려와 동학교도를 역적으로 몰아서 마구 처단하는등
압박을 가했지만 전봉준은 무장의 대접주 손화중을 움직여서 마침내 동학교도가 정식으로
참여를 하게 만들었다.
이해 6월 21일 (양 7월 23일) 일본군이 궁성에 침입하여 고종 임금을 연금하는 사태를
맞아 전봉준은 삼례에서 구월봉기를 일으켜 서울로 진격하다가 10월 23일 공주에서
15일 동안 혈전 끝에 패하고 후퇴하여 11월 27일 태인싸움을 최후로 농민군을 해산했다.
태인싸움을 최후로 농민군을 해산한 전봉준은 수행원 몇 명과 이틀뒤인 29일 입암산성으로
들어 갔다가 일본군 三尾(모리오) 부대와 이규태의 관군이 추격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다음날 30일 다시 백양사로 이동했다.
백양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인 30일 해질 무렵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이르러
예전의 친구였던 김경천을 찾았다.
그는 공초(심문 조사)에서 서울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올라가는 길이라고 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의 지도자들을 밀고하는 자에게는 엄청난 상금과
고을 수령을 제수한다고 현상 공고를 했다. 당시에 고을 수령을 제수 받는다는 것은 돈과
비교 할 수 없는 대단한 매력이 아닐수 없었을 것이다.
김경천은 전봉준을 맞이해 잘 대접해 안심시켜 두고 전주감영 포교(지금의 현역장교)로
이웃에 살고 있는 한신현이라는 이에게 밀고를 했다.
한신현은 김영철, 정창욱 등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전봉준을 포위했지만 전봉준은 담을
뛰어넘어 도피하려다 다리를 얻어맞고 붙잡히고 말았다.
1894년 12월 2일(양 12월 28일)이었다.
생포된 전봉준은 순창을 거쳐 담양의 일본군에 인계되어 나주, 전주를 경유 12월 18일에
서울에 압송되었는데 동학군들의 난동을 두려워한 나머지 무력이 탁월한 일본영사관
감방에 수감되었다.
전봉준은 다음해 2월 다섯번에 걸쳐 우리 관리및 일본 영사의 심문을 받고 1895년 3월
30일 손화중, 최경선 등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나이 41세였다.
당시의 신문기록을 통해서 전봉준의 사상을 엿볼수 있을듯 해서 그의 공초(심문)기록
중에서 조금 뽑아 보았다. 먼저 그가 처음 거사를 하게되었던 원인에 대해서 알수 있는
부분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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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 : 汝是全羅道東學魁首云 果然耶
너는 전라도 동학의 괴수라 하는데 과연 그런가?
供 : 初以倡義起包 無東學魁首之稱
처음은 창의로 기포하였고 동학괴수라 일컬은 것은 없었다.
問 : 汝於何地 招集人衆乎
너는 어디 곳에서 인중을 불러모았느냐?
供 : 於全州·論山地招集矣
전주, 논산 땅에서 의병을 모았다.
問 : 昨年三月間 於古阜等地 都聚民衆云 有何事緣而然乎
작년 3개월간 고부 등지에서 민중을 도취하였다 하는데 어떤 사연이 있어
그렇게 하였는가?
供 : 其時古阜 額外苛斂幾萬兩 故民心寃恨 而有此擧
그 때 고부군수는 액외의 가렴이 기만량인 고로 민심의 원한으로 이 거사가 있었다.
問 : 雖曰貪官汚吏 名色必有然後事 群言之
비록 탐관오리라 하여도 반드시 명색이 있었을 것이나 상세하게 말하라.
供 : 今不可盡言其細目 而略告其槪 一, 築洑民洑下 以勒政傳令民間 上畓則 一斗落收二斗稅
下畓則一斗落收一斗稅 都合租七百餘石 陳荒地許其百姓耕食 自官家給文券 不爲徵稅云及其
秋收時 勒收事 一, 勒奪富民錢葉二萬餘兩 一, 其父曾經泰仁 故爲其父建造碑閣云 勒斂錢
千餘兩 一, 大同米民間徵收以精白米十六斗式準價收斂 上納則貿 米 利條沒食事 此外許多
條件 不能盡爲記得
지금 그 세목을 다 말하지 못하겠으나 그 대개를 간단히 고하리라. 일(一)은 민보아래
축보하고 늑정으로 민간에 고시하여 상답인즉 일 두락에 이수세를 거두고 하답인즉
일두락에 일두세를 거두니 벼가 도합 700여 석이요 진황지를 백성들에게 그 경식을
허하고 거두니 관가로부터 문권을 주어 징세아니한다 하더니 그 추수시에는 늑징한
일이요 일(一)은 부민에게 돈을 2만냥을 늑탈한 일이요 일(一)은 그의 부가 일찍이
태인현감을 지낸고로 그 부의 비각을 건립한다고 돈을 늑렴한 것이 천여량이요.
일(一)은 대동미를 민간에서는 정백미로 16두씩을 준가로 수렴하고 상납시에는
추미로 바꾸어 이조를 몰식한 일이요. 이외 허다한 조건은 이루다 기득할 수가 없다.
問 : 今所告中之二萬餘兩勒奪錢 行以何名目乎
지금 고한 가운데 2만냥의 늑탈한 돈은 어떠한 명목으로 행하였는가?
供 : 以不孝·不睦·淫行及雜技等事 構成罪目而行矣
불효 불목 음행 및 잡기 등 명목으로 죄목을 구성하여 행하였다.
問 : 此等事行於一處乎 且行於各處乎
이 같은 일은 한곳에서만 행했나? 또는 각처에서 행하였나.
供 : 此等事非止一處 爲數十處
이 같은 일은 한곳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수십처가 된다.
問 : 至爲數十處 其中或有知名者耶
수십처에 이른다니 그 가운데 혹 이름을 아는 자가 있는가?
供 : 今不可記得姓名
지금은 이름을 기득할 수 없다.
問 : 此外古阜 行何等事耶
이 외에 고부군수가 어떠한 일을 행하였는가?
供 : 今所陳事件 皆民間貪虐事 而築洑時勒斫他山數百年邱木 築洑役之民丁不給一錢勒役矣
지금 진술한 바 사건이 모두 민간탐학의 일이나 축보시에 타산(他山)에서 수백년된 거목을
늑작(勒斫: 늑탈해 베는것)하고 축보하는 역사(役事)에 민정을 일전도 주지 않고 늑역하였다.
問 : 古阜 姓名誰
고부군수 이름은 누구냐?
供 : 趙秉甲
조병갑이다.
問 : 此等貪虐事 但止於古阜 耶 抑或無吏屬輩作奸耶
이러한 탐학의 일은 다만 고부군수에게만 그쳤느냐 혹 이속배들의 작간은 없었는지?
供 : 古阜 獨行矣
고부군수 단독으로 행하였다.
問 : 汝居生泰仁地 何故起?古阜乎
너는 태인 땅에서 거생 했는데 어찌하여 고부에서 기요했느냐?
供 : 居生泰仁 移寓古阜爲數年矣
태인에서 살다가 고부로 이사한지 수년이 되었다.
問 : 然則古阜有汝宇乎
그런즉 고부에는 너의 집이 있느냐?
供 : 入於燒灰中矣
불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고부에 있는 집은 불타버리고 없다고 진술했다. 안핵사
이용태가 태웠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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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동학과 관련하여 그의 사상을 짐작해 볼수 있는 기록이다.
사실 그는 고부군수에게 그다지 탐학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가 농사를 지었던 것은 아니고 글줄이라도 배워야 사람구실을 할 수 있다는 염원으로
자식에게 글공부를 시키기를 원했는데 전봉준은 당시 훈장으로 글공부를 시키고 보리
몇말..쌀 몇되씩 받아서 연명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고부봉기시에 방을 만든다거나 관에 소청을 하거나 하려면 글자를 아는 사람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자연히 우두머리로 추대되었다고 보는게 맞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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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 :汝於古阜 被害不多 緣何意見而行此擧사
너는 고부군수에게서 피해가 많지 않았는데 어떠한 의견으로 연유하여 이 거사를 행했는가?
供 :世事日非 故慨然欲一番濟世意見
세상살이가 날로 그릇되어 가는 고로 개연히 한번 세상을 건져보고자 하는 의견이었다.
問 :汝之同謀孫化中 崔慶善等 皆酷好東學者사
너와 동모한 손화중, 최경선 등은 모두 동학을 대단히 좋아했는가?
供 :然矣
그렇다.
問 :所謂東學 何主意 何道學乎
소위 동학이라는 것은 어떤 주의이며 어떤 도학인가?
供 :守心 以忠孝爲本 欲輔國安民也
마음을 지켜 충효로 본을 삼고 보국안민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問 :如亦酷好東學者사
너도 동학을 대단히 좋아하는 자인가?
供 :東學是守心敬天之道 故酷好也
동학은 이에 수심경천의 도이기 때문에 매우 좋아한다.
問 :東學始自何時
동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供 :東學之始 始於三十年前
동학의 시초는 30년 전에 비롯되었다.
問 :始於何人乎
어떤 사람이 시작했는가?
供 :始於慶州崔濟愚矣
경주에 사는 최제우가 시작했다.
問 :至今亦全羅道內 尊%東學者多乎
지금 역시 전라도 내에 동학을 존중하는 자가 많은가?
供 :經亂之後 死亡相幾 至今太減
난을 겪은 후 죽는 자가 계속 있어 지금은 크게 감해졌다.
問 :汝起包時所率 皆是東學사
네가 기포할 때 거느린 바는 모두가 동학인가?
供 :所謂接主 皆是東學 其餘率下 稱以忠義之士居多
소위 접주는 다 동학이나 그 나머지 솔하는 충의의 사로써 일컬은 자가 많았다.
問 :接主司何名色
접주사란 어떤 명색인가?
供 :領率之稱
영솔의 호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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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을 생포한 포교 한신현(韓信賢)은 금천(金川, 황해도) 군수에 제수되고 상금은
한신현 1천냥, 김영철 3백냥, 정창욱 2백냥, 동인(洞人 마을사람) 9인에 2백냥, 그리고
2백냥을 피노리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전봉준 생가
<사진출처: 부산부동산 투자정보클럽>
전봉준(全琫準)
▶ 동학에 입교하다
1890년(고종 27) 경인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 그뒤 얼마 안되어 동학의 제2세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동학은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하여서였다고 한다. 동학을 사회개혁의 지도원리로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 탐관오리 조병갑
농민봉기의 불씨가 된 것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서 비롯되었다. 조병갑은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庶姪)로서 여러 주·군을 돌아다니며 가렴주구를 일삼아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이래 농민들로부터 여러가지 명목으로 과중한 세금과 재물을 빼앗는 등 탐학과 비행을 자행하였는데, 한재(旱災)가 들어도 면세해주지 않고 도리어 국세의 3배나 징수하였고, 부농을 잡아다가 불효·음행·잡기·불목(不睦) 등의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만석보(萬石洑)의 개수에 따른 탐학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