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2월 12일 이야기
이 날은 유신헌법 존속과 박정희대통령의 임기유지를 묻는 국민투표가 있던 날이다.
나는 이 날의 투표를 어디에 할 건지를 몇 날을 두고 고심하였다.
쉽게 생각하면 간단하다. 군인 신분이 아니라면 반대에 그냥 기표를 하면 그 뿐이다.
문제는 내가 반대에 투표를 한 뒤 , 발생될 여러가지 사건들을 생각해 보니 영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였다.
1969년 6월 ,3선개헌 헌법안이 발의된 후 ,이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대학,고교로
일파만파 번지고 있었다.
다른 고교에서도 3선개헌 반대 데모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속으로
우리 학교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있어야 할 거 아니냐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우연히 이창국이와 이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도 한번 시도해 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왕 하려면 우리 학교에서 시작한 2.28의거가 4.19 혁명의 모태가 되었듯이 ,전국에서 고등학교로는 처음으로 시도를 해보자는 데 까지 의기가 투합하였다.
이런 취지로 행동대원(?)들이 구성되었다.
그때의 구성멤버는 학생회장,부회장,이창국,나,이임수,박홍규,정상학,… 기타 여러 친구들이 있었으나 기억이 나지않는다. 수십년이 지난 최근까지도 당시 자신이 멤버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확신이 가지 않는다.
거사당일 우여곡절 끝에 목표지인 2.28기념탑까지 진출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거사 성공을 확정 지으려면 거사를 시작한 동기를 밝히는 선언문을 낭독하여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선언문 낭독을 담당한 친구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은 다가오고 잘못 하다간 몇날며칠 고생한 수고가 물거품이 될지 모른다는 초조함과
더불어 일을 성사하지못한 자책감으로 평생 후회하며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깊이 들었다..
선언문은 나도 한 부 갖고 있었기 때문에 탑 위에 올라가서 읽어 버리면 상황 끝이다.
그 짧은 시간동안 내 마음의 심연은 천당과 지옥사이를 심하게 오르내리는 갈등을 겪었다.
그런던 중 나도 모르게 소지하고 있던 여분의 선언문을 가지고 탑 위에 올라가 읽고 말았다.
암만 생각해도 그 행동은 내 역할이 아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그와 같은 경우를 다시
만나도 나는 같은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확신을 한다.
그 사건 이후 약 한달간 내가 받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형식적이지만 학교에서는 나를 무기정학 처분을 하였고, 담임인 서성보 선생님은 매일 우리집을 방문하여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고 가셨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어둠의 세력들이 집을 방문하거나 ,전화를 하여 나에게 자기들의 세계에 입회하라는 회유성 권유와 협박에 많이도 시달렸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앞산 대공분실에 불려간 사건이다.
수사관: 대한민국에 살면서 불만이 뭐냐?
나: 없습니다.
수사관: 박정희 대통령이 그렇게 싫으냐?
나: 아닙니다.
수사관: 그럼 왜 네가 앞장을 섰냐?
나: 앞장 선게 아니라 친구들을 도와준 것 뿐입니다.
수사관: 그렇다면 데모에 가담한 이유가 있을거 아니냐? 그걸 말해봐.
나: 저는 개인적으로 박정희 대통령께 불만은 없지만 한분이 너무 오래 집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장기집권은 제가 배운 민주주의와도 맞지 않고요..
사실 그 당시 내가 가진 정치적인 소양은 지금도 그렇지만 수준 이하이다.
수사관의 책상위 서류에는 나에 관한 수사자료가 수북히 쌓여 있어서 나에 대한 기본 조사는 일단락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사관: 너의 아버지께서는 경주에서 유지이고, 현 정부에서 대접받는 분인데 너는 왜 그러냐?
너 임마 공부하기 싫어 그러지? 이번은 그냥 보내 주는데 다음에 여기에 오면 그때는 죽여버린다. 그럼 집으로 가라.
이렇게 해서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때 중정에서 내가 뱉은 말
“장기집권은 민주주의에 맞지않다’는 말은 지금까지 내 생활 철학의 첫번째 좌우명이다.
장기집권의 폐해는 정치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고 사람이 살아가는 조직 내에서는 어디서나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박수 받을 때 떠나라’는 말이 장기집권을 하지 마라는 다른 표현이 아닐까?
유신시대때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는 한국적 민주주의를 견지하겠다’는 말을 되받아 그 당시 야당국회의원(이름 기억이 나지 않음) 모씨가 ‘한국적 민주주의로는 살 수 없다. 오로지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밖에는 없다.’라고 들은 말이 아직도 기억나는 멋진 말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주장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와 그 국회의원이 생각한 자유민주주의, 내가
생각하는 자유민주주의가 같은지 다른점이 있는지가 몹시 궁금하다.
1970년 해인사 말사 약수암에서 몇 개월 있으면서 거기에서 만난 이광호형(당시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재학중 데모로 지명수배되어 거기에 은신하고 있었음)과 효성여대에 재학중이면서 결핵치료 휴양차 나와있든 강누나와 만난 것도 어쩌면 앞으로 내가 살아가면서 알고 있어야할 사상의 기틀을 만들어준 소중한 인연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 끼여들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서 내가 모르고 있던 사회의 많은 어두운 면과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많은 지식들을 알게 되었다.
둘다 운동권이고 의식자체가 좌편향이었기에 서로의 의견을 소통하는데는 적절한 파트너들이였다.
그들이 대화하는 내용중의 민주주의와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많이 달랐다.
어쨋든 그들 덕에 ‘나는 사람마다 생각이 같을 수는 없다’라는 보편 타당한 사실을 내 행동지침속의 절대 진리로 받아들이고 살아왔다.
인사과 내에 투표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투표하러 들어가기 전 나는 많은 갈등을 겪었다.
그 당시 군대투표는 선임자가 보는 앞에서 투표를 하는 공개 투표였다.
그러니 찬성 반대에 신경이 쓰일수 밖에….
찬성에 기표를 하려니 그동안 내가 간직해온 ‘집권장기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위배된다’라는 내자신의 생활 모토를 위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절대로 찬성에 투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반대를 하려니 위에서도 말했지만 투표 후 야기될 여러가지 비슷한 상황을 이미 겪어본 나로서는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반대투표후에는 군인신분으로 정부정책에 반대한 행위로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 모르지만
하여튼 불이익을 당하는 건 기정 사실이다.
줄을 서서 투표할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머리속은 반대,찬성의 갈림길에서 머릿속은 복잡하였다.
바로 내 앞에서 투표하고 나오는 김팔봉이가 환하게 웃으며 V자를 그리며 나는 반대했다라고
나에게 말한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지금까지 갈등하고 있는 내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서동철의 장기인 일시적인 충동심이 억제된 감정을 뚫고 솟아오르는 순간이었다.
X도 모르겠다.. 나도 반대에 찍는다.
이렇게 결심하고 바로 반대란에 힘차게 기표를 하였다.
투표함 앞에서 내 투표지를 지켜보던 인사과 박병장이 나를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어, 이새끼 봐라”
이 말을 귓 뒤로 흘리면서 나는 인사과를 빠져 나왔다.
투표와 동시에 나는 이 부대를 떠난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마음은 오히려 가벼웠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니 인사과에서 연락이 왔다.
10시에 김팔봉이와 같이 인사과의 자기네들 막사로 오라는 전갈이 왔다.
속으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고 있었다.
이미 여러 상황을 가정해 놓고 각각의 경우에 내가 대처할 상황을 시물레이션 해놓았으므로
그냥 당당히 이들과 맞서 보자는 생각으로 그 방으로 들어섰다.
그 때는 아직 이병이었으므로 군대생활도 많이 서툴어 어느 부대에 가서 근무하던지 졸병 생활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방의 분위기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보통 이런 일로 인사과 막사에 불려가면 바닥에 밀대 자루등 가혹행위에 필요한 여러 물건들이 있었지만 이 날은 달랐다.
이런 물건 대신 술과 안주등 음식이 준비돼 있고 인사과 사병들이 둘러 앉아 있었다.
박병장이 나와 팔봉이를 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새까만 졸병 들이,이렇게 겁대가리 없는 놈들은 처음 봤다. 내가 보고 있는대 반대를 찍다니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하여튼 둘이서 반대표를 찍는 거 보니 내가 기분이 좋더라
오늘 실컷 마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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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차례 시도가 있었던 것같은데 내가 기억하는 것은 옥상에서 반대투쟁하기로 하고 교무회의가 열리는 시간을 이용해서 계단을 책걸상(?)으로 바리케이트를 쌓고는 로프로 서로 연결하여 단단하게 묶기로 하고 ...
바리케이트 작업이 차질없이 진행되는 것을 본후에 내가 맡은 2학년 반으로 가서 거사를 알리면서 옥상 집합을 선포하고는 3층으로 움직이는데 분명 3학년 2반쪽에서 의자하나가 1층 교무실쪽으로 떨어지면서 엄청난 소리가 바로 로프를 확인하니 아직 제대로 연결되지도 않았더군
그때 손호권 선생부터 선생님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바리케이트를 헤치고 올라오시는데 결국은 실패를 ...
이때 바리케이트 실행방법에는 얌체가 아이디어를 특히 로프로 엮자는 것으로 제안한 것으로 기억!
하도 오래전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않음. 곡강 기억력 대단하시네. 그런 소상한 내용까지도 기억하고 있으니.. 여러명이 모여 예전 기억을 소환하면 잊혀진 우리들의 역사가 되살아날지도 모르겠네..
처음 1~2번은 학생단과 각반 대표들(주로 공부잘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모임을 가졌는데 제대로 실행되지 않으면서 좀 발언권이 쎈 사람들도 함께 경대 근처 중국집에서 몇차례 회의도 가졌던 것같고 '사상계'를 정기구독한 박홍규군이 주로 연설문을 담당했던 것같네
30주년 기념식에서 회상문을 만들자고 했었는데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더군 간간히 동기회 홈피에도 언급했지만 내 말빨이 영 서지를 않더군 ㅎㅎ 헌데 딱 하나 어느 놈이 의자를 1층바닥으로 던졌는지는 정말 알았으면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