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계가 있었다. 자연만물에 담긴 기운을 특정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으며, 이 세계의 사람들은 그것을 몸에 담고 도식화된 형식과 논리에 따라 움직이면 인간 이상의 힘을 내거나 외부로 힘을 분출할 수도 있으며, 자연 현상을 모사할 수도 있었다.
그런 세계의 서쪽에 명교라 불리는 집단이 있었다.
화르르...
"이제 정사파 연합이 코앞까지 도달했습니다. 교주님께서는 교의 고수들과 함께 무림맹 절대다수를 척살하고 생을 도외시한 채 중원 무림의 고수와 중책들과 함께 산화하여 심대한 피해를 입혔으나, 여전히 많은 고인과 노괴들이 은거를 깨고 나왔습니다. 호법들이 교인들을 통제하고 있지만, 이제는 바람 앞의 등불입니다."
다음 대 교주를 선출할 권한이 있는 교당의 수장이 소리없이 일어나 남자에게 훈계했다.
"성화 앞에서 쓸 표현이 아니로구나. 상황이 나쁘다 한들 결코 꺼지지 않는 것이 성화이니라. 명교의 가르침은 모두 성화에서 나왔고 명교의 모든 이들이 죽어 사라져도 성화는 영원불멸하게 타오를 것이다. 저들 중원무림의 세력이라한들 천년이 가고 만년이 갈까, 땅속에 묻혀 잊힌다 한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며 땅이 흔들리다보면 결국 다시 빛을 발할 것이다. 그리한다면 우리 명교가 영원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느냐."
대교당은 지금의 명교가 사라진다하더라도 언젠가 다시 사람들이 성화를 보며 다시금 부활할 것을 말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러한 미래를 연속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한들 지금 명교의 가르침과 후대 명교의 가르침이 같겠나이까.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며 교리의 해석으로 흘린 피가 강을 일궜고 바다를 덮었습니다. 처음의 교주께서 내린 가르침은 천금보다 무거울진데 후대의 명교주가 단견하여 처음의 해석을 그르친다면 애석할 일입니다. 그러한 명교가 지금의 명교와 같겠나이까. 맞지 않는 교리를 공부하여 사교가 될 것입니다."
대교당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 교주님께선 바다속에서 타오르는 성화를 꺼내시어 50년간 바라보시다 명교의 가르침을 깨우치셨다. 우리 명교 이전에 다른 명교가 있었다면 우리가 그들과 같겠느냐? 그들 눈엔 우리가 사교일 것이다. 그러나 성화는 영원불멸하고 결코 꺼질 일 없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 명교의 가르침은 성화에서 나오고 성화를 향한다. 시작이 같고 끝이 같다면 과정이야 어떠하랴, 근심할 일이 아니다."
"하오나.."
그럼에도 근심과 불안을 버리지 못한 남자를 바라보는 대교당의 눈이 부드러워졌다. 대교당은 사려깊은 목소리로 타일렀다.
"성화를 보거라. 세상에 연료 없이 타는 불은 없으며 영원히 타오르는 불 또한 없다. 그럼에도 성화는 우리가 알지 못한 세월 동안 타올랐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쩌면 종래엔 이 세상을 모조리 불태워 없애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것이 어찌 현실에 존재한단 말이냐? 우리 명교는 한때 백련교라고도 불렸으며 이 세상은 거짓된 것이라 진짜 세상으로 나가 진짜 세상을 살아야 한다 가르친다. 성화는 진실이며 증거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진실이라 생각되느냐? 성화가 성스러운 것은 우리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진실의 표상이며 증거이기 때문이다. 근심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우리는 원래의 세계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 뿐이니라."
일주일이 지나지 않고 명교의 모든 구성원은 도륙을 당하였고 그들이 세운 서원과 조각들은 파괴되어 가루가 되었고, 그들이 작성한 모든 서책과 기록 역시 말살되었다. 그들의 의복, 무기, 식기와 기르던 작물까지. 그들의 손이 닿았던 것이라곤 아무 것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부수고 이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이제 명교를 잊어버리는 일만 남았으며, 강력한 강령에 의해 명교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되었다. 그렇게 명교는 영원히 잊혀질 것이다. 남은 것은 영원히 타오르는 명교의 성화를 꺼뜨리는 일.
가장 강경한 주혈사태와 어느 절간에서 파계되었다 수십년 뒤 다시 모습을 드러낸 무혁괴승의 주도하에 꺼뜨리기 위한 온갖 시도가 자행되었다. 물을 뿌리고 흙에 묻고 강에, 호수에, 바다에 집어던졌음에도 여전히 타오르고, 비오는 하늘 아래 던져놓아도 푸르른 불길은 영롱하게 타오를 뿐이었다.
이에 비급으로도 남지 않은 비밀스러운 법술과 초절한 신공, 서역의 요망한 사도 주문과 사람의 피를 매개로 하는 남만의 사이한 주술까지도 시행되어서야 멈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성화를 꺼뜨리는데 성공했다는 것은 결코 아닌지라, 결국 토번 남쪽의 하늘에 닿는 높이의 거대한 산맥 아래 가장 깊은 곳에 비밀스럽게 매장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잊혀질 것이라 믿으며.
***
처음 세계를 만들 때 지나치게 순환 위주로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성과 달과 태양만이 존재하는 아주 좁은 우주이기에 많은 자원이 필요하지 않았고, 거꾸로 말해 많은 자원을 쓸 수 없었다. 그렇기에 소모되지 않고 순환하는 에너지를 만든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너무 지나치게 효율적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멸망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어쩌면, 거의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유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서로를 죽여 사라질지언정 세상이 사라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관리자는 한가지 요소를 추가했다.
고정된 값이지만, 영원히 엔트로피를 발생시키는 요소를 말이다.
좁은 세계이다. 엔트로피의 한계도 대단치 않다. 이제 세상은 필멸하게 되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점으로 앞당겨지게 되었다.
첫댓글 올ㅋ 명교의 재해석이 신선하네욬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