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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산 백학장원 원문보기 글쓴이: hwd
임락경 목사
개신교 목사, ‘맨발의 성자’ 이현필(1913~1964) 선생의 제자인 영성수도자이면서 30년째 중증장애인들을 돌보고 있는 사회복지가이자,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는 농부이면서 민간요법으로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는 재야 의사이기도 하다.
17세 때부터 빛고을 동광원에서 이현필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며 폐병, 결핵환자들과 15년을 지냈다. 1980년에 강원도 화천에 터를 잡고 중증장애인 등 30여 명을 돌보는 시골교회를 꾸려 지금까지 공동체생활을 하고 있다. 유기농 콩으로 된장과 간장을 만들고,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린다.
-상당한 기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의 3대 기인으로 꼽기도 합니다. 전남 승주의 한원식 선생, 서울 장안동을 개발한 황칠성 선생, 그리고 임 목사님을 지칭하는데, 세 분 모두 당시 초등학교만 졸업했다는 사실이 재미있는 공통점입니다. 학력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국졸 학력으로도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첫 질문부터 난감하네요. 그러나 내 학력을 무시하면 안 되지요. 5.16 났을 때 동광원에서 15년 가까이 생활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농민운동과 사회운동을 했고요. 독재 치하에서 고난도 많았고 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도 적지 않게 받았지요. 1980년대부터 강원도 화천으로 이사해 장애인, 안 장애인 30여 명의 식구들과 공동체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식구들도 먹고 나도 먹고 살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생계를 위한 생산 활동을 하고, 전국을 돌며 강연도 하고, 불편한 사람들 치료도 해주고, 수맥도 봐주고, 글을 쓰, 책도 여러 권 냈지요. <돌팔이 잔소리> <먹기 싫은 음식이 병을 고친다> <흥부처럼 먹어라> 등 건강 책도 있고 시골교회 만들어서 식구들과 살아온 그간의 내역을 담은 <시골집 이야기>도 냈습니다.
또 모임을 많이 맡아서 했습니다. 화천군친환경농업연합회 창립회장, 북한강유기농운동연합 초대 창립회장, 정농회 회장 등을 맡았지요. 그 외에 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천생 촌놈인지라 농사짓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목사님은 ‘나는 무소유 아니다’라고 주장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소유를 추구하신다는 뜻인가요? 평생 무소유 철학을 가지고 살지 않으셨나요?
무소유에 대해 청문회를 한다기에 ‘나는 유소유다’라고 대답했지요. 유소유도 좋으니까 와달라고 해서 나는 유소유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했습니다. 인도나 베트남에서라면 무소유로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무소유의 개념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나라에서 태어나셨다면 ‘겨울을 나려면 연탄 300장하고 쌀 한 가마니를 준비해라’라고 당부하셨을 겁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는 무소유를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권정생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초상 마당에서 한 달에 얼마나 쓰시며 살았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우표 값하고 전기세로 약 7000원 쓰셨더군요.
무소유의 화두를 던진 법정 스님도 큰 절에서 사셨습니다. 그 절 못지않게 우리 집도 대단히 큽니다. 400평이 되니까요. 내가 손수 지었는데 궁궐만큼 으리으리하게 지었습니다. 그래도 평당 200만 원 이상은 안 썼습니다. 이렇게 잘 살고 있으면서 무소유를 설파하면 어불성설이 될 수도 있겠으나 저도 무소유를 말할 자격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10살 때 초등학교에서 곱하기를 배우면서 가만 생각해보니, 인생이 100년을 살면 3만 6500일을 살겠더군요. 옛날에는 나이 70이면 고령이었지요. 내가 10살이니까 70살까지 산다고 치면, 앞으로 60년 남았고 60년이면 대략 2만 날이 남았는데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삶의 고민을 했지요.
어떤 직업이 좋을까 궁리하면서 제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학교에는 선생님이 계셨고, 교회에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목사님이 제일 훌륭하게 보였습니다. 또 촌에서 살았기에 다들 공무원을 우러러봤지요. 그런데 공무원은 없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목사가 없으면 사람들이 더 잘 살겠더라구요. 그래서 교회는 다니되 평생 집사도 하지 말자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농사꾼이 없으면 다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평생 농사 짓자고 결심했지요. 그 후로는 직업에 대해 고민하거나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농사는 내 땅이 있건 없건 어디에서든 할 수 있습니다. 그날 이후 아직까지 손에서 흙을 놔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농사를 짓느냐가 걱정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최초로 농사짓는 사람은 가인이고 아벨은 짐승을 길렀지요. 아벨과 가인이 하느님께 제사를 지냈는데 아벨의 제사만 받았습니다. 그 구절을 읽고 저는 하느님이 고기를 좋아하는구나 깨닫고는 짐승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니 고기는 없어도 살 수 있으나 곡식은 없으면 안 되겠더군요. 그래서 곡식을 선택했습니다. 지금 우리집에서 1년 내내 농사짓는 것 다 합쳐도 소 2마리 기르는 것만 못합니다. 소 2마리를 키우면 1200만 원이 생기고 송아지 한 마리를 낳으면 600만 원이 생깁니다. 농사는 1만 평을 지어도 영농자금 빼고 나면 몇 백만 원 남지 않습니다.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농사를 택했지요. 농사는 돈벌이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흔들리지 않고 평생 농사지어야겠다고 늘 마음을 다집니다.
4학년 때는 색다른 결심을 했습니다. 평생 헌옷만 입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이 결심은 지키기가 여간 힘들지 않지요. 가끔 옷을 선물로 사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번은 여의도에서 만난 사람이 오리털 점퍼를 백화점에서 샀다며 저에게 주더군요. 나이 50도 안 돼서 오리털 입으면 환갑 때 뭘 입느냐며 바꿔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옷 3개로 바꿔왔는데 기러기털 옷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러기털은 70 돼서 입어야지’하고 다시 바꿔오게 했더니 새온 5개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라 돌려보냈습니다. 그래도 어쩌다 새옷을 입긴 입습니다.
시골집에 사람들이 헌옷을 보내오곤 하는데, 가끔 지나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멍 난 것, 스타킹 줄 나간 것도 보내요. 이제는 어느 지역에서 좋은 게 오는지, 안 좋은 게 오는지 그것까지 알겠어요. 헌옷 필요하냐고 물어보는 전화가 오면, 어디 사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래서 안 좋은 걸 주로 보내주던 지역이면 우리집에 옷 많다고 합니다. 지금 입고 있는 게 ‘메이드 인 미제’인데 1달러 주고 샀습니다. 미국에 갈 댄 헤지기 직전의 구멍 난 옷을 입고 가서 1달러짜리 사 입고 옵니다. 일본에 갈 때도 가능하면 구두도 구멍 난 것 신고 가서 벗어주고, 대신 헌 구두를 사 신고 옵니다. 국제저그로 놀고 있지요.
한번은 하도 급해서 옷을 산 적이 있습니다. 친환경농업연합 행사를 크게 하는 날인데, 입고 있던 바지가 헌옷이라 밑이 쭉 나가버렸어요. 하는 수 없이 그 날은 급히 사 입었습니다. 그래도 1만 원짜리 옷이지요. 그게 무소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돈은 많이 쓰고 다녀요. 한 달에 기름 값이 70~80만 원에서 100만 원까지 나오거든요. 그런데 그게 다 내 이익을 좇아 다니는 것은 아니지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다 보면 그렇게 됩니다.
또 한 가지 이야기하자면, 내 돈 주고 먹는 밥은 비빔밥 이상 안 사 먹겠다고 결심했고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어제 아침에 해장국 하나 사먹은 게 8000원짜리인데 그게 내 평생 최고로 비싼 밥이었습니다. 그래도 얻어먹을 때는 비싼 것 먹으니, 사줘도 됩니다.
내가 먹는 것, 입는 것을 비롯한 기초생활은 그렇게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동광원은 한국 최초의 공동체로 인정됩니다. 목사님께서 15년 가까이 생활하셨는데, 동광원은 어떤 곳입니까?
우리는 그곳에서 공동의 삶을 살았지만 실제 공동체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인식도 없었지요. 그래도 의미적으로 보자면 공동체가 맞기는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첫 번 째라고 할 수 있고 추구하는 이념과 방식에서도 첫째로 손꼽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라고 말하면서 내 가족과 네 가족을 분리하는 것은 진짜 공동체가 아닙니다. 동광원에서 고아원을 운영할 때는 보모나 주방에서 일하는 분들의 자녀들도 전부 고아들과 똑같이 생활하고 먹고 잤습니다. 당시 정인세 원장의 아들딸들도 고아들과 함께 차별 없이 생활했지요. 똑같이 생활하는 게 진짜 공동체입니다. 모든 친구들이 같이 지냈습니다.
당시 제 친구 어머니가 식당에서 근무했는데 아무래도 당신 아들 누룽지라고 주고 싶을 텐데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친구는 어머니가 멀리 보이면 도망갔다고 합니다. 혹시 불러다가 따로 뭘 주지 않을까, 그러면 어머니가 없는 사람은 얼마나 슬프겠나 싶어서 어머니 곁에 안 갔답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예수의 어머니가 아들을 찾아갔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지요. “누가 내 어머니고 동생이냐,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내 어머니이고 동생이다.” 그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던 것입니다. 옛날에 보면, 고아원 원장 아들과 고아들은 고등학교 때까지 친구로 지내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인생이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고아들은 고교를 졸업하면 공장으로 가고 형무소로 갑니다. 반면 원장 아들은 대학 가고 유학을 떠나면서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동광원에서는 원장 아들도 초등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대 동광원 고아들도 학교를 못 갔으니까요. 나중에 고아들이 학교에 가게 되면서 그때서야 함께 다녔습니다. 그거야말로 공동체로서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거기선 내 아들, 네 아들 따지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있건 없건 똑같이 지내고, 통장도 따로 갖지 않고 생활했습니다.
사실 저는 동광원 소개를 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광원에 오래 있지 않고 나왔으니까요. 일테면 환속을 한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공동체의 이념을 제일 잘 지키고 있는 공동체라고 칭찬할 자격은 있습니다.
-목사님은 다석 류영모 선생님,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님과 관계가 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류영모 선생님은 워낙 유명하지만 돌아가신 지 오래되어 명성만 들었을 뿐입니다. 그분들과 목사님의 관계를 알고 싶습니다.
내가 어릴 대 류영모 선생께서 한국의 인물 중에 북에는 남강 이승훈, 남에는 이현필 선생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현필 선생은 몸이 자주 편찮으셨어요. 내가 제대를 하고 찾아뵈면 그전에 돌아가실 것 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생존 시 얼굴이라도 뵈려면 군에 가기 전에 가야 했어요. 다른 분들은 책으로라도 만나면 되지만 그분은 곡 직접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동광원으로 갔지요. 만약 그때 안 갔으면 얼굴 한 번 못 뵐 뻔했죠. 그래서 3~4년 함께 생활했지요.
당시 류영모 선생은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 번, 동광원 수련회 때 마다 일주일식 항상 고정 강사로 오셨습니다. 그때 처음 선생님을 뵈었고, 그 뒤에 이현필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박영호 선생하고 약속했습니다. 류영모 선생님을 한 달에 한 번씩은 찾아 뵙고, 생일날은 항상 찾아뵙자고 했고, 그렇게 했습니다.
사도와 제자는 다릅니다. 흔히 사도 바울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바울은 사도가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현필 선생과 류영모 선생을 직접 뵌 사람들 중에는 아마도 제가 나이가 제일 어리지 않나 싶습니다. 한번은 호남신학대학 총장이 이현필 선생에 대해 글을 썼는데 몇 가지 틀린 게 있더라구요. 내가 교정을 본다고 나서서 정정을 했지요.
그분의 글에 이현필 선생이 최홍종, 류영모 선생의 제자라고 나오는데 실제 그분의 문하생은 아니었습니다. 박영호 선생의 글에도 류영모 선생이 이현필을 가르쳤고 문하생이라고 나왔는데 그렇지 않다고 제가 지적해주었습니다. 2판을 찍을 대 교정을 해서 나왔습니다.
나는 두 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이현필 선생은 저를 제자로 만들어 어떻게든 동광원 안에서 데리고 살려 했고, 반대로 류영모 선생은 나가서 독립적으로 살라고 가르치셨죠. 저는 두 분 가운데 류영모 선생의 영향을 더 받았습니다. 이렇게 시골집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 증거랄 수 있죠. 우리집에서 평생 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고, 만나는 사람마다 “제자를 키우느냐”고 묻습니다. 제 대답은 똑 같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제자를 키우면 안 된다. 나는 제가 키울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가 잘 안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저는 제자 키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지요.
-류영모 선생에게서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으셨는지요? 혹시 류영모 선생이 해주신 말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요?
류영모 선생은 제가 어릴 때 이미 훌륭한 인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다행히 네가 동광원에 있을 대 강사로 오셔서 강연도 듣고 질문도 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운 좋게 선생님과 함께 지내면서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지요. 그 후에 제가 군대엘 갔는데 제대하고 돌아와 보니 전북 완주에 있는 용흥사라는 절을 사서 동광원에 기증하셨더군요. 류 선생님이 ‘진달네’ 시를 좋아하셨는데 절 입구에 선생님께서 진달네라고 써주신 것을 나무에 파서 붙여놓았지요. 그곳을 ‘진달네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제가 거기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선생께선 진달네교회에 해마다 다녀가셨는데, 광주에서 수양회를 마치면 내가 모시고 진달네교회에 왔습니다. 내가 진달네교회에 살고 있으니 더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선생께서 들려주신 가르침은 아주 많았습니다. 그중 “2시간만 자면 생명에 지장이 없고, 4시간만 자면 건강에 지장 없다”는 말씀을 지금까지 실천하고 있습니다. 류 선생은 밤 10시가 되면 드르릉 드르릉 코를 골며 주무시다가 언제나 새벽 2시에 정확히 일어 나셨습니다 그리고 낮잠을 자는 일이 없었죠. 함께 잠을 자고 일어나면 “나, 코를 몹시 골지?”라고 물으셨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요가체조를 1시간 정도 한 후에 무릎 꿇고 앉으면 온종일 계셨습니다. 잠을 그렇게 적게 자고도 괜찮을까 싶어 내가 “평생 낮잠을 주무신 적이 없느냐?”고 물었지요. 2층에서 떨어졌을 때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내가 왜 낮잠을 자지?” 하셨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앉을 때도 언제나 벽에 기대지 않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후, 그러면 나도 4시간만 자면 되지 않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4시간을 언제 자야 하느냐인데 그 말씀은 안 해주셨습니다. 내가 선생님 말씀을 듣고 생각해봤습니다. 아침 진지는 진시에 들고, 술은 술시(7~9시)에, 잠은 자시에 자야 합니다. 나도 그럼 류 선생님처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나서 거의 지키고 있습니다. 나는 9시 뉴스 보며 졸다가 10시에 자면 2시에 깹니다.
학력이 국졸인 제가 목사에 상지대 초빙교수입니다. 어떻게 거기까지 갔을까요. 낮에 공부한다고 앉아 있어본 적 평생 없습니다. 일해야 하니까요. 공부가 먼저냐, 일이 먼저냐 하면 나는 언제나 일이 먼저입니다. 2시에 깨면 그때 책을 좀 봤습니다. 지금은 책 볼 시간도 없습니다. 출판사나 월간지에서 나를 가만 놔두지를 않습니다. 원고를 써달라고 합니다. 원고 쓰고 투고하고, 쓰리고까지 가야지요. 한 때는 7군데서 부탁받고 그 연재를 3년간 했습니다. 내가 지금껏 본 책 중에 사서 본 것은 3권이고, 평생 읽은 것은 100권 안 됩니다.
2시부터 4시까지는 숙제하는 시간입니다. 홍성사에서 출판한 <시골집 이야기>는 한 군데서 2년 쓴 것 모아서 낸 것이고, <흥부처럼 먹어라>는 <전원생활>에 3년 연재한 것을 모아서 책으로 낸 것입니다. <돌파리 잔소리>도 그렇게 모아졌습니다. 새벽에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아침에 조금 자두면 괜찮습니다. 안 자두면 피곤합니다. 호미질하고 밭일할 때는 졸아도 괜찮지만 운전할 땐 안 됩니다. 다행히 눈이 작으니 적게 자도 됩니다. 낮에도 반은 자니까요. 그게 다석 선생에게서 받은 교훈입니다.
가끔 불면증 환자들이 상담을 옵니다. 불면증 환자들은 주로 8시에 자고 2시에 깨면 그때부터 잠 안 온다고 난리예요. 잘 것 다 자고 어떻게 재워달란 건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잘 것 다 잤다고 그랬더니 불면증이 고쳐졌습니다. 11시부터 1시까지 2시간 자야 생명에 지장 없습니다. 잠은 자시에 자는 게 좋아요. 그 시간을 넘겨서 자면 8시간 자도 피로가 안 풀립니다. 서울대 수석으로 합격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잠 잘 것 다 잤다는 겁니다. 우리나라가 올빼미족 세계 3위인데, 포르투갈과 대만이 우리나라보다 늦게 잔답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우리가 지구상에서 최고로 일찍 자는 거지요. 12시 넘으면 자니까요.
-5년 전 귀농해서 경기도 남한강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저는 농사 지으면서 한없이 울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매일 풀과 싸워야 하고, 종자 사러 갈 때, 석유 사러 갈 때마다 고민이 됩니다. 목사님은 농민이 성직자라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항상 갈등을 느낍니다. 겉으로는 행복하다고 말해도 마음은 많이 아픕니다. 농업이 정말 성스러운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농업을 택한 것은 맞선 봐서 퇴짜 맞을 바엔 내가 먼저 싫다고 한 것과 똑 같습니다. 농업에서 벗어나 살 수 없으니 이왕이면 자신감을 갖고 사는 것이지요. 친환경농업을 하고 있는 데, 어릴 때는 비료가 없어서 관행농을 못했습니다. 관행농이 한참 퍼질 때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인데 그때 제가 다행히 군데 가 있어서 농사를 쉬었습니다. 제대하고 얼마 후 정농회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평생 비료농약은 안 쓰게 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정농회가 생긴 후 30년 간, 20년 간 유기농을 했다고들 하는데, 제 생각엔 5000년은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대대손손 조상 때부터 계산하면 몇 천 년은 되겠지요.
귀농학교가 열릴 때마다 강의하러 갑니다. 현재 귀농학교 출신이 1만 5000명인데 모두 귀농학교에서 배운 대로 유기농을 합니다. 그런데 요즘 강의할 때 한 가지 다르게 하고 있습니다. 귀농하려면 부부가 같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한 사람은 월급 받고, 한 사람은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말해요. 부부 중 한 사람만 귀농하라고 합니다. 먼저 혼자 농사지어보고 살 수 있을 때 사표 내면 되잖아요. 두 사람이 동시에 귀농해선 도저히 답이 안 나옵니다. 대대로 농사짓고, 부모가 농지 몇 만 평 상속해주고, 자식이 농대 나온 집안도 농사지으면 적자 납니다.
그 다음에, 농사 짓기 힘들다고 하는데 10대에 일을 익혀놓으면 뭐가 무거운지, 힘든지 잘 모릅니다. 지난번 손모내기를 했는데 같이 일한 장정들이 여럿 있었지만 70 넘은 노인과 나, 우리 둘만 허리가 괜찮았습니다. 10대부터 김을 매면 70살이 넘어도 그 자세가 나옵니다. 피곤하지 않습니다. 일은 10대에 익혀야 합니다.
귀농한 사람들에게 강력히 얘기하는 것이, 풀밭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풀이 모이면 벌레가 모이고, 벌레가 모이면 개구리가 모입니다. 그러면 다음에 뭐가 올지 뻔히 알잖아요. 뱀이 모입니다. 그러나 풀 없으면 뱀 없습니다. 풀 없애는 데는 비결이 있습니다. 풀이 자란 후에 뽑으면 이미 늦습니다. 풀이 나기 전에 호미로 긁으면 됩니다. 풀 나오기 전에 긁어버리면 편해요. 내가 농사를 다양하게 짓습니다. 바쁜 와중에 깨끗하게 밭을 유지하는 게 어떻게 가능하냐, 그렇게 잠깐 잠깐 긁어버리는 것이 비법입니다.
농사짓고 덕을 본 게 있습니다. 첫 번째, 현재 우리나라 암 사망률이 남자 32%, 여자 26%입니다. 그러나 정농회 회원 중 암 진단을 받은 사람이 딱 2명 있는데, 암에 걸린 후 정농회에 가입한 경우입니다. 35년 동안 암으로 죽은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정농회 회원이 몇 명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회원이라고 해도 회비를 안 내는 사람도 있으니까 몇 명인지 정확히 모릅니다. 그래도 사는 곳에 가보면 다들 농사 잘 짓고 있습니다. 정농회 회지를 5000부 찍는답니다. 회지를 받아보는 사람이 5000명인 겁니다. 그 사람들이나 가족 중에 누가 암 진단을 받으면 나한테 전화가 올 텐데 암 진단을 받았다고 전화한 사람이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가족까지 하면 몇 명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번 조직하면 깨지지 않는 단체가 3개 있습니다. 호남향우회, 고대동문회, ㅐ병전우회, 그리고 신종단체 귀농학교가 생겼습니다.
귀농한 사람들은 철새이고, 원래 살던 사람들이 텃새지요. 철새는 떼 지어 살고 텃새는 한 쌍이 삽니다. 철새와 텃새가 싸우면 텃새가 이깁니다. 텃새 못 이겨서 철새가 떠날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귀농학교 출신 중에 시골로 가자마자 이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녀회장은 그해에 합니다. 부녀회장은 젊은 사람이 해야 하기 땜ㄴ에 노인들은 할 수가 없고 마을에 젊은 사람이 귀농한 사람 한 사람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즘 시골에서 65살이면 젊은이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농사지어서 돈은 못 법니다. 그러니 덕은 건강에서 보자. 이겁니다. 건강으로 우리집이 공동체생활을 30년 넘게 했는데 아직 암 환자가 한 명도 안 나왔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열심히 돈 벌어서 병원에 가져다 줍니다. 죽을 대 포도 한 송이 먹다 죽으면 될 텐데 병원에서 포도당 5% 꽂고 죽어요. 나는 유기농 포도 한 송이 먹다 죽고 싶어요.
농사지어서 아이들 높은 학교에 보내고 학비 대주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학교는 안 보낼 생각해야 합니다. 요즘 대안학교를 준비하는 모임에 강의를 다니는데, 내가 대안학교 표준입니다. 중학교도 안 가고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학교에 갖다 줄 돈 모아서 차라리 시골에 땅 사면 부자 됩니다.
학교와 병원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농사지어서 이익 볼 생각 마세요. 다른 데서 덕을 봐야 합니다. 농사 수입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양봉을 했습니다. 그 수입이 1년에 1000만 원은 됩니다. 이렇게 농외소득이 있어야 하고, 귀농하더라도 부부 중 한 사람은 월급을 받아야 합니다.
-수입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여쭤보겠습니다. 시골집 공동체의 주 수입원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돈을 벌어 생활합니까?
방금 말했다시피 노아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우리집은 양봉으로 쭉 살았고, 몇 년 전부터 된장공장을 시작해 지금은 된장과 양봉으로 생활합니다. 농업은 농업인데, 애매한 농업입니다.
농외소득을 올리고자 하면, 지금은 할 게 많습니다. 25년 전에 콩을 사려고 보니 강원도에 콩이 없어서 전북 정읍까지 내려가 콩 2가마를 사왔습니다. 그때 우리의 목화농사가 침략당했고, 밀농사도 침략당했고, 이제 콩농사마저 침략당했구나 생각했습니다. 안 되겠다. 우리 마을 콩이라도 살려보자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제초제 치지 않은 콩을 내가 다 산다고 했더니 그해에 300가마가 나왔습니다. 전부 사들여서 쌓아놨는데 그 콩이 썩어가기에 두부장사를 시작했고 서울까지 두부를 팔러 다녔습니다. 그 후 메주공장을 시작했고 된장, 간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사료 안 먹이고 풀 베다 먹이고 여물 끓여 먹이면서 소 2마리를 키웠습니다. 그 쇠고기는 아토피 환자나 암 환자가 먹어도 부작용이 없고 괜찮더군요. 그 다음엔 돼지 길러서 한 마리에 40만원씩 받고 팔면 됩니다. 쌀겨하고 구정물을 먹이면 되니까요.
이런 식으로 하면 할 것 많습니다. 채소나 곡식은 필요한 만큼 농사지어서 먹고, 농외소득으로 나머지 용돈은 해결하면 됩니다. 저도 이렇게 농외소득으로 살고 있습니다.
-충북 괴산으로 귀농한 지 4년째입니다. 올해 논 4마지기(800평)를 지었는데 싸리 한 가마(80키로) 조금 더 나왔습니다. 아울러 2000평짜리 과수원도 합니다. 교회에서 다음 주가 추수감사절이라고 하느님께 감사예배를 드린다고 하더군요. 제가 농촌 들녘을 볼 때마다 하느님에게 감사할 게 아니라 농약님에게 감사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농법은 말은 좋지만 실천이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농약과 싸우지 않으면 쌀 농업의 미래는 어둡다고 봅니다. 목사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올해(2010년)처럼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많이 온 것은 내 평생 처음입니다. 80 먹은 노인들에게 물어도 똑같습니다. 올해 쌀 수확이 12% 줄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50% 이상 삭감됐습니다. 우리 논에서도 작년에 열 가마 나오던 자리에서 두 가마밖에 안 나왔습니다. 옛날에는 정치를 잘못하면 농사가 그렇다고 했는데..... 어쨌든 금년 같은 날씨는 처음입니다. 이상하지요.
정치도 잘 하시는데.... 암튼 농사는 때를 놓치면 안 됩니다. 갈아엎어야 합니다. 기회를 조금만 놓치면 안 됩니다. 늙은 농사꾼들은 그걸 알지요. 노인들은 노는 것 같지만 그분들 밭은 제초제를 안 써도 항상 깨끗합니다. 우리 밭에도 항상 풀이 없습니다. 기회를 안 놓쳐서 그런 겁니다. 식구들에게 우리집에서 지내는 소감을 얘기하라고 했더니 김매기와 풀 뽑기 이야기를 합니다. 김매기를 해야지, 풀 뽑으면 안 됩니다. 늦어요. 어떤 이리 있어도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내가 바빠서 못하면 식구들이라도 빨리 하게 해야 합니다. 3~5년으론 그렇게 되기 힘들 겁니다. 절대 농산물 수입으로 살아갈 생각 말아야 합니다.
-요즘 흙살림 등의 단체에서 자연친화적인 농약을 연구하고 있는데, 그런 농약을 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근본적으로 저는 농약에 관심 없습니다. 농약이 필요 없는 농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처음 농토를 사서 1~3년은 진딧물 때문에 거의 수확 못하고, 나중엔 딱정벌레가 문제됩니다. 온 마을의 딱정벌레가 다 모입니다. 진딧물을 먹으려고요, 그 다음엔 사마귀가 모입니다. 딱정벌레 먹으려고. 2~3년이 지나면 사마귀가 없어집니다. 자연히 천적이 생깁니다. 사마귀가 없어지면 새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그 다음엔 병충해가 없어집니다. 이렇게 사마귀가 새에게 먹힐 때까지 7년 걸리지요. 그 후엔 농약 필요 없습니다.
금년에 고추 농사가 다 망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고추가 얼마나 잘 됐는지 모릅니다. 고추가 남아서 팔게 생겼습니다. 농약 치지 않아도 벌레가 생기거나 그렇지도 않습니다. 비료를 안 하면 농약을 안 해도 됩니다. 제초는 어쩔 수 없습니다. 친환경인 제초제가 나오긴 어렵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풀을 매야 합니다.
-목사님 저서 중에 두 권이 건강에 대한 책입니다. 또 강연도 많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많이 걸리는 관절염, 아토피, 고혈압 등을 생활 속에서 예방, 치료할 수 있습니까?
제가 수맥 짚는 법을 일찍 배워서 물을 찾아다녀 보니 물은 멀리서 끌어다 먹어도 되겠더군요. 그런데 집터를 잘못 앉히면 환자가 생겨요. 40년 전엔 집터를 봐준다고 하면 목사 명단에서 제명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목사는 살아남을 가치도 없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나 지금은 신학교에 가서 강의하고, 방송 촬영도 합니다. 이제 이러한 풍속을 기독교에서도 받아들인 겁니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 집터가 좋은데도 환자가 생기는 걸 봤습니다. 그때 새로 생긴 병은 새로 생긴 음식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음식이 뭔가 추적해보았는데, 그걸 여기서 얘기할 순 없습니다. 그 음식 회사에서 소송을 걸 경우 어떤 나라에서는 돈 많은 쪽에 유리하게 재판 결과가 나온다더군요. 우리나라는 그럴 리 없겠지만요.
어쨌든 관절염에 대해 실험해봤습니다. 임상실험은 대개 쥐나 토끼를 대상으로 하는데, 쥐와 토끼는 사상체질에서 음에 해당합니다. 그걸 양에다 쓰면 안 맞ㅇ요. 그래서 임상실험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면 가장 좋습니다. 우리 식구가 30명 넘으니 다양한 체질별로 수시로 해볼 수 있습니다. 노인도 해보고, 어린이도 해보고, 여자도 해보고, 남자도 해보고, 음체질도 양체질도 다 해봤습니다. 문제는 사람한테 임상실험을 하면 살인미수잖아요. 먹여보면 살인미수인데 나는 안 먹이는 실험을 했습니다. 먹이는 건 문제가 되지만 안 먹이는 건 괜찮으니까요. 그렇게 해보니까 되더라구요. 우리집엔 관절염 환자가 없습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안 먹여보니 아토피도 없어졌습니다.
암 얘기인데, 의사들이 모르는 것 몇 가지를 터득했습니다. 어떤 사라은 항암제 맞지 마라, 수술하지 마라, 방사선하지 마라, 그러는 데 나는 그런 것들에 반대 안 합니다. 우리나라 암 사망률이 32%라고 하지만 정확한 통계는 아닙니다. 얼마 전 80 넘은 노인이 항암치료 받으러 다니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그런 경우 암 사망률에 안 들어가지요. 또 한 분은 암 진단을 받고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는데 역시 암 사망률에 안 들어갑니다.
나는 우리나라 실제 암 사망률은 2%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암은 고치더라고요. 그런데 아을 고치고 나서 항암제 독으로 죽습니다.
감기약을 먹어도 감기가 낫지 않는다고 감기약 3일치를 한꺼번에 먹고 죽은 아이의 아버지가 하는 말이, 감기는 고쳤다고 하더군요. 암은 고치는데, 항암제 독이 문제입니다. 내게 항암제 독을 해독시키는 비결이 있습니다. 약으로 하면 의료법에 걸립니다. 약사법으로 걸려요. 음식으로는 괜찮습니다.
먹으면 구토도 안 하고 머리도 안 빠지게 할 수 있는 음식이 있습니다. 죽 한 그릇 먹으면 됩니다. 우리 식탁 위에 있는 것 얘기입니다. 의사 분들이 모르는 것 두 가지를 가지고 독을 해독시킵니다. 지금 감리교 연수원에서 3박 4일씩 1년에 여섯 번, 상주 친환경농업관에서도 1년에 네 번 강연하는데 매번 암 환자들이 절반 이상 옵니다. 지난 10년 동안 제가 만난 사람들은 아주 많지만 그중 암으로 죽은 사람은 10명이 안 됩니다. 비결은 항암제를 맞자마자 음식으로 해독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알려준 방법대로 해서 나아지면 다행이지만, 다른 음식을 잘못 먹고 죽으면 그것 때문에 죽었다고 하니까 공개적으로 얘기는 못합니다.
-‘적게 먹고 절약하면’ 친환경 밥상을 차릴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요즘 사람들은 친환경일수록 돈이 많이 든다고 생각합니다. 도시 생활자들이 친환경 식단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유기농산물이 비싸다고 하면 벌 받습니다. 유기농과 농약농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풀을 간단히 없애기 위해서는 제초제를 한 번만 뿌려주면 됩니다. 그러나 유기농 농부들은 절대 제초제를 쓰지 않고 직접 호미를 들고 김을 네 번이고 다섯 번이고 맵니다. 성장촉진제를 쓰면 수확이 3~5배 더 나오지만 그런 것은 일체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람 몸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약품, 자연적 성장에 저촉되는 약품은 절대 사용하지 않고 모든 일을 직접 다 합니다. 값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적게 먹고 절약하면 친환경 밥상을 차릴 수 있습니다. 적게 먹는다고 해서 무조건 절약하라는 강요는 아닙니다. 비싼 육류를 줄이고 공산품 과자를 먹지 않으면 그 돈으로 유기농산물을 충분히 먹을 수 있습니다. 또 식단에서 튀긴 음식을 없애면 신선하고 건강한 자연식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외식비만 줄여도 가능합니다. 유기농산물을 먹으면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기 때문에 병원비 지출이 없습니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서 돈을 낭비하느니 몸이 아프기 전에 유기농을 먹으면 건강도 지키고 돈도 절약할 수 있지요.
돈 많이 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농약 듬뿍 친 농산물 많이 드십시오. 값 싸고, 때깔 좋고, 크고, 탐스럽습니다. 그런데 생산자들도 농사 짓기 쉬워집니다. 돈도 되고요. 같이 편하게 살아가는 방법이지요. 또한 같이 빨리 죽는 방법이기도 하지요.
-목사님이 주장하시는 ‘섞어복지’는 무엇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하나 이상의 소질이나 특기는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머리는 빠르지만 몸이 늦기도 하고, 몸은 빠르고 건강하지만 머리가 둔한 사람도 있습니다. 숫자에 밝은 사람은 예술에 약하고, 창작에 뛰어난 사람은 행동이 느립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 사람은 섞여서 살아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돌봐야 하고, 노인들은 아이들의 재롱을 보면서 늙어가야 하고, 아이들은 노인들의 경험을 배우면서 자라야 합니다.
우리 생각엔 어른들만 있으면 점잖고 교양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실제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 사람이 있어야 어른들이 체면을 지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혼재와 공존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사람들을 자꾸만 나누고 분류하려 합니다. 노인은 노인시설에서 살게 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장애인들은 시설에서만 살게 합니다.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는 수학자만 살고, 어느 마을에는 화가만 살고, 어느 마을에는 운동선수만 살면 어떻게 될까요? 세 마을 사람들 모두 불행해집니다.
노인, 일반인, 어린아이, 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어울려 살면서 서로를 돌보고 이끌고 배우고 가르침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두가 행복하고 외롭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섞어복지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평생을 베풂과 농업에 헌신하셨는데, 앞으로 목사님의 꿈, 비전은 무엇입니까?
사람은 노망을 해야 합니다. 노망이란 늙을 老(노), 잊을 忘(망)으로서 늙음을 잊고 젊은 줄 알고 사는 것이 노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늙음을 잊고 사는 것처럼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곁에 있는 젊은이들이 피곤할 뿐입니다. 노망이 좋은 점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잊고 저세상 먼저 가보고, 저세상 갔다가 이 세상 왔다가, 갔다 왔다 자주 하다 저세상에서 아예 오지 않으면 간단한 일이 노망입니다. 노망이란 신께서 인간에게 주신 마지막 선물인 줄 알고 있습니다.
철모르는 노망의 뒤처리는 자녀들이 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녀들 어릴 적에 3년 동안 대소변 처리를 해주었기에 그렇습니다. 원님도 자기 부모님 요강은 하인들 시키지 않고 직접 처리했습니다. 자녀들과 부모들의 오줌똥 치워주는 것은 모두가 계약관계이고 60~80년 전에 저축해둔 것이고, 일종의 보험이지요. 찾아 쓰는 것입니다.
자녀가 없는 승려들이나 수녀, 수사들은 이미 사제 간에 맺어진 관계입니다. 예전에 조실 스님들께 저축해놓은 공로를 후학들에게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노망이란 자기가 어릴 적에나 젊었을 때 했던 버릇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집에는 노망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예전에 한 할아버지는 수시로 무엇이든 훔쳐왔어요. 무척 착실하신 분이었습니다. 어릴 적 습관이 나타난 것이지요. 지금 노망하는 한 노인네는 쓰레기를 늘 주워옵니다. 마을까지 가서 주워옵니다. 담배꽁초를 주워가 장롱 안에 모아둡니다. 어릴 적 담배가 귀할 때 했던 버릇이지요. 노망이란 자기가 어릴 적이나 젊었을 때 하던 버릇이 나온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나이 먹으면 노망을 하게 됩니다. 다만 곁에서 못 느끼는 것뿐이지요. 나 또한 지금 노망하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 버릇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뭐 즉문즉설이라는 이 귀한 시간에 헛소리나 하는 것이 노망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이 글을 읽는 이들이 못 느끼거나, 느껴도 나에게 표현하지 않는 것뿐이지요.
늙어서 일 벌이는 것은 무척 싫습니다. 다만 하던 일이나 잘 마무리하렵니다. 아직 시작은 안 했으나 정읍에 농사짓는 사람들을 양성해내는 대안학교를 열고자 합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점점 없어지니 그렇습니다. 나머지 일들은 내가 만들지 않고 내가 필요로 하는 곳에 할 일이 있으면 해주는 것뿐이지요.
꿈을 펼치고 살아가려는 젊은이가 아니라 하던 일을 잘 마무리해야 하는 늙은이에게 꿈을 묻는 것은 적절치 못합니다. 질문을 했으니 대답하는 것이고, 터무니없는 질문에 진지한 척하고 대답하는 것이 노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