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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천주교 반공주의: 역사적 변동과 비판적 성찰
국문초록
이 글에서 필자는 역사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한국 천주교회와 그 지도자들의 반공주의를 분석했다. 그동안 식민지-해방-전쟁 시기에 머물렀던 천주교 반공주의 연구의 대상 기간을 전쟁 이후 시기와 현재까지 대폭 확대하여, 지난 한 세기 동안 천주교 반공주의에서 진행된 변화 과정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역사적 안목을 얻고자 했다. 또한, 이 연구는 한국전쟁에 일차적인 초점을 맞추었다. 한국 천주교 반공주의 역사를 ‘전쟁 이전’과 ‘전쟁 이후’로 양분할 수 있을 만큼, 전쟁은 천주교 반공주의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필자는 (1) 전쟁 이전, (2) 전쟁 과정, (3) 전쟁 이후라는 세 시기를 비교의 맥락 안에 위치시킴으로써, 전쟁이 천주교 반공주의에 끼친 영향을 좀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
전쟁은 반공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위상 격상, 반공주의의 담론적 집중성 제고, 반공주의의 종교성 강화, 순교 및 성모 담론과의 결합을 통한 감정동원 및 행위 동기화 능력 제고 등을 수반했다. 전쟁 후 천주교 반공주의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반공주의 종교화’ 과정의 전면화와 가속화였는데, 이는 전쟁에 대한 기억과 재현 방식에서 비교적 명확히 확인된다. 교리와 신념체계(해방 이전), 순교·성모신심운동(해방 후 전쟁 이전)에 그쳤던 반공주의의 종교화는 전쟁 후 교회조직(망명교구 설정, 교회분단 제도화 및 북한교회 소멸 공식화), 공식기억(교회사 편찬, 수난자 전기 편찬), 의례(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 현충일 추도미사), 순교신심운동(한국전쟁 희생자들을 순교자로 규정하고 현양하는 활동), 선교(북한선교, 선교요원 양성, 북한교회 재건 준비) 등으로 최대한 확장되었다. 교회와 민족의 재일치 · 재통합 문제에 대한 한국교회 지도층의 접근방식 역시 대체로 분단체제의 공고화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말부터 한국교회는 ‘종교화된 반공주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에 이르러 한국교회는 ‘분단-대결 패러다임’에서 ‘탈분단-평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사실상 완료했다. 이것은 평화주의적 전환(pacifist turn)이자 탈분단체제로의 전환이었다. 그 결과 고령 신자들을 중심으로 반공주의적 정서는 남아 있을지라도 한국교회 안에서 반공주의의 종교적 색채는 거의 사라졌다. 물론 교회 내 극우단체의 활동, 한국전쟁 당시 살해되거나 납치당한 교회 지도자들의 유해송환운동이나 시복운동 등은 ‘공격적인 종교적 반공주의’를 되살려낼 요인으로 작용할 잠재력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Ⅰ. 머리말
한국교회의 공식 매체에 반공주의적인 글이 처음 등장한 때가 1921년 초였으니, 한국 천주교 반공주의의 역사도 올해로 꼭 100년이 되는 셈이다. 같은 기간 동안 공산주의를 지지하거나 찬양하는 주장이 교회 공식 매체에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지난 한 세기 동안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교회 당국의 시각이나 대응 방식에서는 의미 있는 변화가 진행되었다. 이 글은 역사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한국 천주교회와 그 지도자들의 반공주의를 분석해보려는 시도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필자가 이번 연구에서 추구하는 바를 대략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동안 식민지-해방-전쟁 시기에 머물러 있던 천주교 반공주의 연구의 시폭(時幅)을 ‘전쟁 이후’ 시기까지로 대폭 확장하고자 한다. 한국 천주교 반공주의에 관한 연구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기존 연구들은 하나같이 식민지, 해방정국, 한국전쟁 시기를 다루고 있다.1) 둘째, 이 연구에서는 천주교 반공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었던 한국전쟁에 일차적인 초점을 맞출 것이다. 필자는 (1) 전쟁 이전, (2) 전쟁 과정, (3) 전쟁 이후라는 세 개의 시대를 비교의 맥락 속에 배치함으로써, 전쟁이 천주교 반공주의에 끼친 영향을 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려 한다. 셋째, 위의 세 시기를 한꺼번에 다룸으로써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천주교 반공주의 변천사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역사적 시각 내지 안목을 얻고자 한다. 넷째, 이 연구는 천주교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지향한다. 이를 위해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진행된 변화뿐 아니라, ‘전후(戰後) 시대’에 전쟁 시기 경험들이 ‘기억’되고 ‘재현’되는 방식, 전쟁으로 더욱 공고해진 민족과 교회의 ‘분단’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주목해볼 것이다.
한국의 천주교 반공주의와 관련해서 몇 가지 사실을 미리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첫째는 한국 역사에서 천주교회의 반공주의는 결코 단일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천주교 반공주의의 역사적 가변성과 관련하여,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는 1930년대 초를 비롯하여, 해방, 전쟁, 민주화 이행과 1990년대 등이 특별히 중요한 역사적 계기들이었다고 생각된다. 둘째, 대부분의 시점에서 한국 천주교회에게 반공주의가 ‘유일’하거나 ‘불가피한’ 선택지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대개의 시기에 한국 천주교가 선택했던 특정 형태의 반공주의가 아닌, ‘다른’ 역사적 선택지는 분명 존재했음을 강조하는 것, 그럼으로써 전쟁 전후 시기의 천주교 반공주의를 ‘상대화하는’ 것은 교회의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이 두 가지와 함께, 우리는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선택지를 제한하거나 특정한 쪽으로 방향지어 온 100년간의 박해 경험과 그로 인한 집단적 트라우마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교적 짧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기간을 이른바 ‘박해기’가 채우고 있다. 박해기라는 말은 종교의 자유가 완전히 부재했던 시기, 나아가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것이 사회적 지위·신분·재산뿐 아니라 목숨까지 위태롭게 만들었던 공포의 시기였음을 뜻한다. ‘박해 트라우마’는 한국 천주교회 지도층을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한데, 교회 지도층 가운데 박해 희생자의 후손이 유독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교회 지도층일수록 교회 역사에 관한 지식이 많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에서 박해 트라우마는 일차적으로 교회의 안위(安危), 특히 ‘제도로서의 교회(church as an institution)의 안위’와 ‘종교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집합적 멘털리티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박해 시대’에 천주교회와 신자들을 지배했던 정치적 태도는 탈(脫)국가화 혹은 국가와의 거리두기로 특징지어졌다. 그러나 ‘포스트(post) 박해 시대’에 박해 트라우마는 (1) 현존 권력에 대한 타협적 태도와 정치적 순응주의, (2) 교회에 대한 잠재적/현재적 ‘박해자’로 주관적으로 인지된 세력에 대한 강렬한 거부감이나 저항의식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정치적 순응주의는 교회의 제도적 이익(institutional interests)과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지 않는 한, 그것이 어떤 성격의 국가이건, 또 상당한 정치적 통제를 감수하고서라도, 기존 정치권력과의 평화로운 공존 나아가 협조를 추구하는 태도와 방침을 가리킨다. 교회 지도층의 경우 정치적 순응주의는 통상 국가권력과 집권세력에 대한 직접적인 협력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러나 교회 지도층은 상황에 따라 평신도에게 식민지 시기처럼 성속이원론(聖俗二元論) 고수와 정치참여 금지를 요구하기도 하고, 해방 후 시기처럼 적극적 정치참여를 요구하기도 한다.
교회의 안위와 종교 자유를 중시한다는 것이 반드시 ‘민주주의적인’ 정치체제에 대한 선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회를 보호하고 나아가 특권적으로 대우한다면 교회 지도층은 때로는 정교유착도 수용할 수 있고, 파시즘이나 권위주의 정권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 교회에게 안전과 종교 자유를 보장한다면 식민지 정권이나 민간독재·군부독재 정권도 협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교회 지도층에게 일본 식민당국이나 미군정, 이승만 정권, 초기의 박정희 정권은 교회 박해자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종교 자유라는 관점에서도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교회-국가 갈등이 종종 표출되었던 1950년대 후반이나 1970년대에도 당시의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이 ‘박해자’로까지 이미지화된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한국 천주교 지도층에게 ‘박해자’로 명확히 정의된 정치세력은 두 가지, 곧 봉건왕조(조선왕조)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18∼19세기의 박해자가 봉건왕조였다면, 공산주의 세력은 20세기의 새로운 박해자였다. 우리는 단순한 교리상의 이유를 넘어, 호교(護敎) 내지 교회 보호라는 교회의 제도적 이익 그리고 박해 트라우마라는 집단심성(collective mentality)이 반공주의와 결합하는 경향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런 경향이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탈식민지 시대에 본격적으로 나타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은 한국전쟁 시기의 천주교 반공주의이지만, 전쟁 시기가 반공주의의 최초 형성기인 것은 아니다. 전쟁기의 반공주의는 그 이전 시대에 형성되고 변화되어온 반공주의로부터 오는 제약이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전쟁 이전의 반공주의 형성 과정은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도 일종의 ‘집합적 아비투스’를 만들어냄으로써, 막상 전쟁이 발발했을 때 신자들을 특정한 정치적 태도나 선택 쪽으로 유도할 수 있다. 우리가 천주교 반공주의가 처음 형성되었던 식민지 시대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반공주의가 등장한 때는 천주교의 한국 전래 후 140년가량 지난 1920년대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반공주의를 수용한지 100년이 지나는 동안 천주교 반공주의 안에서 많은 변화가 진행되었다. 예컨대 (1) 교회에 대한 다양한 도전과 위협들로 구성되는 ‘종교적 위기담론’(혹은 ‘교회의 적[敵] 담론’) 안에서 공산주의가 차지하는 위상이나 비중을 가리키는, ‘반공주의의 담론적 집중성’ 정도, (2) 종교적 신념체계(교리), 의례, 교회력(敎會曆)과 절기, 대중적 신심운동, 선교전략, 교회 법규와 제도 등 여러 종교 영역 안으로 반공주의가 침투하도록 만드는 ‘반공주의의 종교화’ 정도, (3) 신자들의 감정을 자극·동원하고 신자들을 행동으로 동기화하는 반공주의의 능력과 직접 관련되는 것으로서, 반공주의가 순교 및 성모 담론과 결합하는 정도 등은 시기에 따라 부침(浮沈)을 겪었다. 오랜 박해 속에서 다수 발생한 순교자들로 인해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순교신심운동이 일찍부터 활성화되었으며, 1925년에 79위의 한국인 순교복자(殉敎福者)들이 탄생하면서 순교신심운동에 가속이 붙었다. 또 1840년대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가 한국 천주교회의 주보성인 혹은 대주보(大主保)로 정해짐으로써 성모신심운동도 일찍부터 활성화되었다.
Ⅱ. 전쟁 이전: 천주교 반공주의의 최초 형성과 변화
한국 천주교의 공식 문헌에 처음 등장한 반공주의적인 글은 1921년 2월 『경향잡지』에 발표된 “교황 분도 제15위 폐하의 윤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교황은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사회주의에 물들지 말며 그런 자와 상종치” 말라고 경고했던 것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1925년경부터 공산주의에 대한 한국교회의 비판적 태도는 한층 강화되었고, 반공주의적 글들의 출현 빈도도 대폭 증가했다.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교회 출판물들에서 반공주의적 글들의 양적 팽창이 다시 한 번 두드러졌는데, 이 변화는 1931년 이후 반공을 가장 주요한 목표 중 하나로 삼은 가톨릭액션(Catholic Action)이 본격화되는 것과 관련이 깊다. 이 과정은 ‘반공주의의 종교화(宗敎化)’ 과정이기도 했다. 그 핵심은 ‘반공주의의 교리화(敎理化)’였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에 공산주의는 교회가 맞서 싸워야 할 여러 적수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반공주의의 담론적 집중성’은 비교적 낮은 편이었다. 반공주의와 순교담론 · 성모담론의 결합도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감정동원 및 행동 동기화를 위한 반공주의의 힘도 비교적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1930년대 이후 교계 언론매체들을 중심으로 천주교 반공주의가 본격 활성화된 이후에도 교회 지도층은 평신도로 하여금 반공주의의 정치문제화와 계급문제화를 피하라고 강력히 지시했다. 따라서 천주교 신자들의 반공주의적 활동의 범위는 협소한 편이었다.2) 그럼에도 식민지 시대에 반공주의의 교리화 과정이 상당히 진척되었다는 점에서, 해방을 맞을 당시의 천주교 반공주의는 이미 종교적 반공주의(religious anti-communism) 혹은 종교화된 반공주의(religiousized anti-communism)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해방 당시 천주교 신자들에게 반공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숙명’이자 ‘의무’였던 셈이었다.
그러나 8월 16일 소련군이 서울로 입성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노기남 주교가 서울역에서 열린다는 환영행사에 일반 신자와 신부 · 수녀들의 참여를 허락했던 일, 그리고 해방 후 며칠이 지났을 때 노 주교가 좌익 주도의 좌우합작기구였던 건국준비위원회의 사무실을 직접 방문하여 위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했던 일이 있었다.3) 이것이 ‘반공주의의 교리화’와 모순되는 행보였음은 분명하지만, 노 주교의 해방 직후 행보는 박해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국가순응주의 아비투스가 반공주의 집단심성의 발현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이런 일들은 반공주의의 일정한 종교화에도 불구하고 해방 직후에는 아직 천주교 반공주의가 충분히 강력하지 못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1946∼1947년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가 진행되던 시기에, 교회 지도층이 한편으로는 반공주의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에서 발간하던 일간지인 「경향신문」의 편집진이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는 행태를 용인했던 것에 대해서도 유사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해방 후 여러 차례의 좌우익 폭력 충돌 사건들 - 특히 여순사건과 제주4·3사건 - 과 한국전쟁이라는 계기들을 거치면서 반공주의의 성격과 이데올로기적 위상 자체가 변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반공주의 - 식민지 시대에는 종종 방공주의(防共主義)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 는 식민지 파시즘을 뒷받침한 지배이데올로기의 중요 구성요소 중 하나였지만, 핵심적인 중요성을 갖는 이데올로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해방 후, 특히 전쟁 후에는 집권세력에게 친미주의와 함께 핵심적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일반 대중도 전쟁 후 반공주의를 강하게 내면화하게(internalize) 되었다.4) 다음 두 가지의 의미 연쇄 속에 위치하게 된다는 점에서, 해방 후 한국에서 반공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복합적이고 다중적인 의미들을 동반하게 되었다. 따라서 반공주의도 따로 떼어 독립적 · 고립적으로 분석해서는 안 되고, 다른 것들을 한꺼번에 고려하고 조망하면서, 다른 것들과의 연관 속에서 다뤄야 하는 그 무엇이 되었다. 한편으로 해방 후 반공주의는 전쟁/평화, 정전체제/평화체제, 냉전, 분단/통일, 민주주의/인권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방대하고 광범위한 쟁점들과 연관되었다.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이 이어졌던 식민지 말기에도 ‘전쟁’과 ‘반공주의’는 대체로 무관했지만, 한국전쟁 시기에 와서 둘은 완전히 결합했다. 다른 한편으로 해방 후 반공주의는 국민/비국민, 양민(良民), 빨갱이, 친북 분자 등의 의미 연쇄 속에도 놓이게 되었다. 반공주의는 생존 수단이자 삶-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문제가 되었고, 반공주의의 강제적 성격도 극적으로 강화되었다. ‘반공주의자임’을 인정받는 일은 국민이나 양민의 자격을 얻는 것임에 반해, (빨갱이나 친북 분자처럼) ‘반공주의자가 아님’이라는 낙인에는 투옥과 고문·연좌제와 같은 엄청난 희생과 고통이 따랐다.
천주교로 좁혀보아도 반공주의는 해방을 계기로 큰 변화를 겪었다. 해방 후 한국 천주교회는 ‘정치적 불개입주의’에서 ‘전면적인 정치적 개입주의’로의 이데올로기적 전환을 단행했다. 식민지기의 정치 · 계급 문제 개입 금지령은 철회되었으며, 교회의 사회적 발언 창구로 『경향신문』이 창간되었다. 노기남 대주교 등 교회 최고위층의 권유로 신자들의 정당 가입이 활발했고, 각종 선거에서 신자 후보를 한 명이라도 더 당선시키기 위해 교회 차원의 노력이 경주되었다. 나중에는 ‘가톨릭정당’ 결성 논의까지 등장했다. 이 대부분의 일들이 반공주의 기조 위에서 행해졌다. 정치적 개입주의로의 전환에 동반된 반공주의의 변화는 다음 세 가지 측면에 집중되었다: 첫째, 천주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전통적인 강조를 지속적으로 재확인하는 것,5) 둘째, ‘민주주의’를 유신론(有神論) 혹은 가톨리시즘(Catholicism)과 결합시킨 후, 다시 ‘민주주의’ 지지 세력과 ‘자본주의’ 지지 세력을 등치(等値)시키는 것, 셋째, 공산주의의 ‘종교적’ 성격에 대한 대대적인 강조를 통해 천주교회와 공산주의 간의 적대적 성격을 최대한 강조하는 것. ‘공산주의의 종교성’이 강조될수록 ‘반공주의의 종교성’ 또한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6)
결국 20세기의 한국 천주교회는 1930년대 이전의 성속이원론과 사회적 무관심 내지 불개입(不介入), 1930년대에 ‘사회참여’로의 전환,7) 1945년 해방을 계기로 한 ‘정치참여’로의 전환이라는 세 국면을 거쳐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아울러 공산주의 세력이야말로 교회가 최우선으로 맞서 싸워야 할 주적(主敵)으로 간주됨으로써, ‘반공주의의 담론적 집중성’도 크게 높아졌다. 1950년 2월 주교들은 「사회질서 재건에 대하여 교도와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장문(長文)의 공동교서에서 “오늘날처럼 공산주의야말로 ‘인민의 아편’임을 뼈에 사무치게 깨달아야 할 필요가 절실한 시대는 다시없는 것이니, (1) 그것은 소수 공산당이 전 무산대중을 인민의 이름으로 착취하는 것이며, (2) 그것은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지상천국의 헛된 약속으로 무산자를 잠들게 하는 것이며, (3) 그것은 인간을 공산당의 한 부분품으로 만들어 독자적 창조력을 죽여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8)
식민지 시대와는 달리 해방 후 한국 천주교 반공주의는 ‘행동주의적 반공주의’였다. 다음의 몇 가지 요인들이 결합됨으로써 해방 후의 천주교 반공주의는 이전에 비해 훨씬 강력한 행동을 동반하게 되었다. 첫째, 미국과 소련을 양 진영의 맹주로 하는, 이극화(二極化)된 냉전적 세계질서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 둘째, 2차 대전 이후의 세계적 대립에서 한국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 셋째, 공산화된 지역들에서의 종교(특히 천주교) 탄압에 주목한다는 점, 넷째, 같은 맥락에서 중국 및 북한에서 진행된, 공산주의자들과의 ‘실제적인’ 접촉과 그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의 경험에 의해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훨씬 증폭되었다는 점, 다섯째, 공산주의의 ‘종교적’ 성격이 전례 없이 강조됨으로써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극적으로 강화되었다는 점, 여섯째, 자유민주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친화성을 강조한다는 점, 일곱째, 이른바 ‘자유진영’의 맹주인 미국과 교황청의 동맹관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등
이 그것이었다.9)
해방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영향력은 한반도 전체와 만주 지역 일부(연길교구)에까지 미쳤다. 한반도 38선 이남을 통치하는 임시국가였던 미군정에 대해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종교적 태평성대’ 혹은 ‘종교적 평화시대’를 연 세력으로 간주했다. 반면에 교회 지도자들이 보기에 소련군과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이 통치했던 38선 이북, 그리고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군사적으로 점령한 만주 지역에서는 60여년 만에 ‘박해시대’가 다시 시작되었다. 해방 후의 공산주의는 식민지 시대의 공산주의와는 전혀 다른, 한반도의 절반을 직접 통치하고 있고 거대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국가/국가권력으로서의 공산주의’였다. 만주 지역(연길교구)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이 시작되었고, 북한 지역에서도 1946년 3월 시행된 토지개혁으로 방대한 토지를 소유한 덕원수도원교구 등이 큰 피해를 입었다. 북한 천주교회는 1946년까지는 북한 당국과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1947년경부터 교회와 국가 간의 긴장이 급격히 고조되는 가운데 북한의 교회 지도자들도 반공적 태도를 분명히 하기 시작했다. 북한 당국은 이미 1947년 6월경부터 남한과의 비밀연락 근거지 혐의로 교회기관들을 조사했고, 1949년 5월부터 전쟁 직전까지 북한 지역의 거의 모든 성직자들을 체포했다. 1948년 이후에는 38선으로 나뉜 서울교구와 춘천교구의 ‘교구 분단’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10) 더구나 “가톨릭과 악마의 전쟁”으로까지 묘사되면서 1947년 3월부터 1948년 말까지 계속되었던 남한 천주교회의 연길·덕원교구 돕기 운동, 헝가리를 비롯한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가톨릭교회 탄압에 직면하여 “인권과 자유와 종교를 옹호하기 위하여 공산당의 음모와 과감하게 투쟁할 것을 결의”하는 강경한 입장을 밝힌 1949년 봄 남한 주교들의 성명서, 앞서 인용한 1950년 2월 남한 주교들의 반공주의적인 공동교서 등은 북한 천주교의 입지를 더욱 위축시켰다.11) 38선을 경계로 한 남북한 분단 상황에서 남-북 천주교 사이에서 나타났던 ‘정치적 반작용 효과’는 이처럼 남한 교회의 강경한 반공적 입장이 북한 지역에서 교회에 대한 국가권력의 억압을 가중시키고, 북한에서 월남 이동한 신자와 성직자들로부터 교회-국가 충돌 소식을 전해들은 남한 교회와 신자들이 반공주의 입장을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처럼 해방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한국 천주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박해자’로 각인되는 가운데, 반공주의는 순교 담론과 자연스럽게 결합되었다. 공교롭게도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은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이 되는 해였고, 전쟁이 발발한 1950년은 한국순교복자 79위의 시복 25주년이 되는 해였기에 한국 교회 차원에서 대대적인 기념사업이 전개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교회 박해라는 상황정의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공산주의자들과의 실제적인 충돌 및 피해 경험은 ‘호교’(천주교 보호)라는 교회의 제도적 이익 관념과 결합하여 강렬한 감정동원을 가능케 했다. 이런 박해 상황에서 한국인 신자들은 한국교회의 보호자인 성모에 대한 신심운동에 더욱 매달렸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의 회개를 촉구한 ‘파티마의 성모’에 대한 대대적인 강조는 반공주의와 성모 담론의 결합을 더욱 촉진했다. 바야흐로 ‘공산주의 붉은 신(神) 대(對) 성모 마리아의 일대 결전’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보통의 한국인들은 ‘전쟁을 거치면서’ 반공주의를 내면화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는 반공주의의 내면화 과정이 ‘전쟁 이전에’ 이미 완료된 상태였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의 이른바 ‘해방정국’은 민족주의 열기의 고조 속에 친일파 숙청 등 식민지 잔재 청산에 대한 대중적 요구가 분출하는 가운데, 독립국가의 성격·주체 및 수립 경로를 둘러싼 치열한 좌익-우익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특히 독립국가 수립과 관련해서, 해방정국은 반탁(反託)-찬탁(贊託) 갈등 국면(1945년 12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좌우합작운동 찬성-반대 국면(1946년 3월부터 1947년 7월까지), 남한 단독정부 수립 대 남북협상 노선의 갈등 국면(1947년 8월부터 1948년 8월까지)이라는 세 개의 국면으로 구분된다. 남한 천주교 지도층은 ‘반탁 → 좌우합작운동 반대 → 단독정부 수립 지지’의 방향으로 움직였다. 나아가 종교적 교리로까지 발전된 전투적이고 절대화된 반공주의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타협’을 철저히 배제하게 마련이다. 이 때문에 천주교의 전투적 반공주의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운동’과, 그리고 단독-분단정권 수립 후에는 ‘북진통일 담론’과 결합되기 쉬웠다. 따라서 조금 확대해서 말하자면, 해방 후 남한 천주교회가 추구한 정치참여의 방향은 (1) 전투적인 반공주의로 인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운동 및 북진통일 담론 지지,12) (2) 식민지 잔재 청산에 대한 소극적 태도, (3) 친미주의와 미국의 전후(戰後) 한반도 구상에의 동조, 즉 미국 주도의 냉전체제에 대한 지지 등 세 가지로 특징지어진다고 정리할 수 있다. 한국 천주교는 반공주의를 무기로 분단체제 형성에 크게 기여했던 일등공신 중 하나였던 셈이다.
그런데 해방정국 초기 한국사회의 이데올로기지형은 ‘좌경 반쪽’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만큼 압도적으로 친(親)좌파적이었다.13) 반면에 한국천주교회의 부문 이데올로기지형은 반공주의 일색인 ‘우경 반쪽’에 가까웠다. 이런 상황은 해방 당시 한국 종교 영역을 분할하고 있던 ‘6대 종교’(불교, 유교, 천도교, 대종교, 개신교, 천주교)의 이데올로기적 성향과 비교해보아도 매우 독특한 현상이었다. 당시 최대 종교였던 불교의 경우 좌파 성향의 승려들이 비교적 큰 세력을 형성했고,14) 제2의 종교였던 천도교의 경우 교단이 직접 설립한 정당(천주교청우당)이 중도좌파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따라서 천도교는 신탁통치, 좌우합작, 남북협상/단독정부 수립 문제에 대해 천주교와는 상당히 다른 정치적 선택을 했다. 천도교청우당은 남한 단독·분단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 1948년 봄 열렸던 남북협상에도 참여했다. 유교에서도 비록 소수파이나 전국유교연맹이라는 좌파 단체가 존재했고, 이 단체는 남북협상에도 참가했다. 유교 내 다수파인 우파 성향의 유도회총본부가 출범할 당시 대표였던 김창숙은 비록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남북협상을 지지했고, 유도회총본부 창립 당시 부대표였던 김성규 역시 좌우합작운동에 이어 남북협상에도 참여했다. 천주교와 유사하게 우파 입장에 가까웠던 종교가 대종교와 개신교였는데, 조완구나 이극로 등 대종교 지도층 인사 중 일부는 남북협상에 나섰고, 김규식과 강원용 같은 개신교 인사들은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다. 개신교 안에는 김창준 목사가 이끄는 기독교민주동맹 같은 좌파세력이 일부 존재했고 이들은 남북협상에도 참여했다.15) 따라서 종교 영역에만 한정해 보더라도, 해방정국에서 천주교의 정치적 선택이 불가피하거나 유일하게 가용한 선택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해방정국의 좌경 반쪽 지형 안에서 천주교의 일관되고도 전투적인 반공주의는 오히려 소수파적 선택에 가까웠다. 물론 6대 종교 내에서 좌파 · 중간파 인사들이 분단정권 수립 이후 대부분 제거되거나 전향하거나 월북함으로써 종교지형의 급속한 ‘우경적(右傾的) 동질화’가 진행되었고, 그런 맥락에서 한국전쟁 당시에는 주요 종교들 모두가 이승만 정부 편에서 전쟁 협력 입장을 표명하는 쪽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16)
Ⅲ. 전쟁 과정
한국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한국전쟁은 반공 성전(聖戰) 혹은 반공 십자군전쟁, 곧 ‘유사종교(quasi-religion)로 간주된 공산주의와의 성전 내지 십자군전쟁’으로 선언되었다. 한국전쟁은 “무신론 공산주의 침략자들의 마수”(서울교구 노기남 대주교)에 의해 발생한 전쟁, “양을 가장한 일희(一喜)의 아편에 중독된 동족 아닌 동족이 가능한 온갖 악마적 방법을 다하여 빚어낸 참극”(대구교구의 최덕홍 주교)이었다.17) 이 전쟁은 공산주의와의 싸움이기에 사상전(思想戰), 더 구체적으로는 “선악(善惡)의 싸움인 사상전”(최덕홍 주교)이기도 했다.18) 나아가 한국전쟁은 일종의 ‘종교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반(反)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전쟁”이자 “무신론 폭군에 대한 신앙자유 수호의 십자군전쟁”이었다.19) 이런 맥락에서 전쟁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천주교 지도자들에 의해 “사탄의 괴뢰집단”, “악마의 붉은 괴뢰”, “적색 레비아탄”, “흡혈귀”, “공산 악귀”(共産惡鬼), “공산 마귀(魔鬼)”, “적귀”(赤鬼) 등으로 다양하게 호명되었다. 덜 종교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공산주의자들은 “제국주의”, “괴뢰 폭권(暴權)”, “혁명의 법칙으로써 인류사를 역전하려는 소아병자들”, “20세기의 휘광이”, “평화의 좀”, “인류의 공적”, “언어도단의 원수” 등 부정적으로 낙인찍혔다. 반면에 공산주의자들과 맞서는 천주교 신자들은 “반공십자군”, “멸공구국(滅共救國)의 십자군”으로 호명되었다.20)
교회당국에 의해 어떤 전쟁이 성전(holy war)이나 십자군전쟁(crusade)으로 정의되면, 전쟁 참여는 신자들의 ‘의무’가 된다. 그 때문에 교회 지도자들은 “신자여! 멸공에 총궐기하라”(노기남 대주교), “순교의 정신으로 전쟁에 용약 출전(勇躍出戰)하라”(최덕홍 주교), “청년학도여 군문(軍門)으로 나아가라”(신상조 신부)고 명령하거나, “반공십자군에 총궐기할 때”(군종신부단 대표 조인원 신부)임을 강조했다.21) 교회 기관지인 『천주교회보』에는 “철저한 말살의 신념을 갖고 남보다 맹렬히 적을 공격하라”(1951.11.10, 사설), “그리스도와 반그리스도의 세력이 싸우는 이 마당에서……가톨릭 신자로서 전사(戰士)가 아닐 수 있는가?”(1952.1.15, 4면)와 같은 선동적인 기사들이 여럿 실렸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은 교회 지도층의 참전과 전쟁 협력 요구에 순순히 따랐을까? 대체로 그랬던 것 같다. 천주교 신자들은 피난지인 부산에서 3천 명 규모의 전투부대인 ‘가톨릭청년결사대’를 조직하려고 했으며, 신학생들은 단체로 자원입대했다. 전쟁 중 창립된 군종제도에도 적극 참여했고, 군병원에서의 봉사 활동, 포로수용소에서의 사상교육과 선교 활동, 후방에서의 출판과 교육을 통한 사상전, 신자들과 교회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활동 등을 펼쳤다.22) 황해도 지역의 서울교구 신자들은 ‘가톨릭십자군유격대’를 결성하여 구월산 일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기도 했다.23) ‘공산주의 악마들’과의 협상이나 타협은 있을 수 없을뿐더러 전쟁은 공산주의를 폭력으로 멸망시킬 절호의 기회로 간주되기도 했으므로, 천주교 신자들은 ‘오로지 북진통일’을 외치면서 전쟁의 조속한 종결을 위한 휴전회담에도 반대했다.
해방 후 한국전쟁까지의 시기에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던 천주교 반공주의의 틀은 전쟁 시기에도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반공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위상, 반공주의의 담론적 집중성, 반공주의의 종교화는 최고 수준으로 상승되었다. 전쟁을 거치면서 반공주의는 광적인 반공주의(fanatical anti-communism)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지극히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것으로 변했다. 또한 전쟁 시기에 반공 담론이 순교 및 성모 담론과 더욱 긴밀하고 단단하게 결합됨으로써 신자들의 감정을 동원하고 행위를 자극·동기화하는 힘도 크게 증대되었다. 전쟁 전에는 북한과 연길에 국한되었던 교회-공산주의 충돌 사건들이 전쟁을 통해 거의 남한 전역으로 확대된 가운데, 남한 신자 자신들이 직접 공산주의 세력과 적대적으로 조우하는 체험을 겪게 되었다. 여기에 전쟁 시기 월남자들의 생생한 ‘박해 체험담/목격담’까지 더해짐으로써, ‘공산주의자=박해자’라는 의식은 더욱 강해졌고 반공주의와 순교 담론의 결합은 더욱 공고해졌다. 전쟁 중 ‘파티마 성모’와 관련된 담론이 두드러지게 늘어나는 가운데, ‘붉은 군대’에 대항한다는 취지로 미국에서 시작된 ‘파티마의 푸른 군대 운동’도 도입되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전쟁으로 북한 지역 교회 전체를 상실한 것을 비롯하여 크나큰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전쟁은 교회의 눈부신 발전을 가져온 ‘천주교 부흥(復興)’의 기회이기도 했다. 남한 천주교는 1953년 이전에 파괴된 성당의 절반 이상을 복구했고 늦어도 1954년까지는 복구 과정을 사실상 완료했다. 한국사회 전체의 전후 복구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신자 수 급증에 따른 성당 신축과 증축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24)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이던 1949년 6월에 남한 교회의 신자 수는 약 15만 8천 명이었으나, 상당한 인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3년에는 신자 수가 16만 6천여 명으로 오히려 증가했다. 신자 수는 1955년에는 21만 5천여 명으로, 1957년에는 28만 5천여명으로, 1959년에는 41만 7천여 명으로 증가했다.25) 전쟁 기간 동안 교회는 미국교회로부터 전달된 막대한 원조물자와 시설들을 활용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포함한 피난민 · 전재민(戰災民)·고아들 그리고 부상자와 사망자 유족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그런 면에서 전쟁은 구호, 사회복지, 의료 분야에서 교회의 위상을 크게 향상시켰고, 그로 인해 천주교가 한국 사회에 더욱 확고하게 뿌리내리는 데 기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교회의 폭발적인 양적 팽창과 한국사회 착근에 크게 기여한 계기로도 작용했던 것이다. 교회 지도층에게는 전쟁이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체험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반공 성전’ 혹은 ‘반공 십자군전쟁’으로 규정했던 것이 과연 옳은 판단이었을까? 그 전쟁은 정말 성스럽고 거룩한 전쟁이었나? 종교사회학자 밀튼 잉거는 전쟁에 대한 그리스도교 대응방식의 역사적 유형들을 다음의 여섯 가지로 요약한 바 있는데, 이것은 곧 그리스도교 전쟁교리/평화교리의 유형론이기도 하다: ① 십자군, 성전, ② 정의로운 전쟁(just war), ③ 내키지 않는 슬픈 전쟁(reluctant and mournful war), ④ ‘이번 전쟁’에 대한 반대(opposition to ‘this war’), ⑤ 비폭력 저항(nonviolent resistance), 소명으로서의 평화주의(vocational pacifism), ⑥ 무저항(non-resistance), 징집대상자 등록의 거부(refusal to register), 세상에서 물러나기(withdrawal).26) 여기서 ① 쪽으로 갈수록 전쟁은 종교적으로 정당화되기 쉬운 반면, ⑦ 쪽으로 갈수록 전쟁의 정당성은 강하게 부정된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천주교 지도층에 의해 가장 호전적인 전쟁교리의 틀로 해석되었음이 명백하다. 그러나 한국전 당시에는 화학전(化學戰)이 실제로 벌어졌고, 세균전이 시도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초토화를 목표 삼은 민간인과 비(非)군사시설에 대한 무차별 공중폭격이 가해졌고, 쌍방에 의해 크고 작은 민간인 학살극이 무수히 벌어졌고, 핵무기 사용마저 심각하게 검토되었다.27) 과연 이런 전쟁이 ‘성전/십자군전쟁’은 고사하고 ‘정의로운 전쟁’의 범주에라도 포함될 수 있겠는가 하는 반론이 당장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반공 성전/십자군전쟁’이라는 전쟁 정의, 그리고 이런 정의에 기초한 ‘맹렬한 반공주의적 참전(參戰)’으로 요약되는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정치적-종교적 선택은 두 가지 의미에서 유일하게 가용하거나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 천주교의 차원에서 볼 때 한국교회의 선택은 세계적 흐름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교황청은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정통적 전쟁교리로 채택하고 있었다. 더구나 교황청은 이미 2차 세계대전 말엽부터 ‘전쟁 정당화’의 손쉬운 수단으로 오용되어왔던 정의로운 전쟁 교리를 ‘전쟁의 탈(脫)정당화’ 수단으로 되돌려놓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 과정에서 정의로운 전쟁 교리의 내부로 평화주의의 요소들이 상당히 침투해 들어왔다. 교황 비오 12세는 한국전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19일에 전쟁이 초래한 것은 “폐허, 죽음, 온갖 종류의 비참함”뿐이었음을 강조한 데 이어, 같은 해 12월 23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오늘 참담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무기들은 너무나 파괴적이어서 이 지구를 마치 일몰만이 거듭되는 사막처럼 ‘텅 비고 공허하게’ 황량한 카오스 상태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모든 민족들이 몸부림치게 될 것입니다.”28) 그러나 이런 흐름에 정면으로 역행하면서, 한국교회는 ‘악용된 정의로운 전쟁론’에조차 훨씬 미치지 못하는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성전론/십자군전쟁론에 매달려 열광적 전쟁 지지에 나서는 시대 착오성을 한껏 드러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주어진 전쟁이 ‘성전/십자군 전쟁’과 같은 방식으로 적극적인 해석을 획득할 때, 그 전쟁은 일련의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측면들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기 쉽다. 한국전쟁 직전의 태평양전쟁 당시 한국 천주교 매체들에는 전쟁의 여러 미덕과 유익함, 승리와 적 시설 파괴의 쾌감 등을 부각시키는 노골적인 ‘전쟁예찬론’이 등장한 바 있는데, 이와 유사한 주장들이 한국전쟁 때도 교회 매체들에 다시 등장했다.29)
두 번째로, 한국전쟁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일부 개신교 계통 평화 교회들(peace churches)은 용기 있게 전쟁 반대 입장을 드러냈고, 그로 인해 크나큰 고통과 희생을 겪어야만 했다.30) 이들은 19세기 미국에서 발원하여 20세기 초 한국으로 전래된 두 개의 작은 개신교 계통 교단들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Seventh-day Adventists)와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es)이었다. 한국에서의 활동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경우 1904년에, 여호와의 증인 교단의 경우 1912년에 각각 시작되었다.31) 여호와의 증인 교단의 입장은 잉거의 유형론에서 ‘세상으로부터의 철수’와 징집대상 연령층에 요구되는 ‘등록의 거부’로 기울어져 있다.32) 이와 달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직접적인 전투준비 및 전투행위에 가담하는 것만을 거부하는, 양심적 집총(執銃)거부 혹은 비무장 군복무(noncombatancy)라는 입장을 취해왔다.33)
전쟁 시기의 눈부신 구호와 사회복지 활동이 입증하듯이, 한국교회가 전쟁의 비참함과 고통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전쟁 시기에 겪은 천주교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뼈저린 수난에 대해서도 한국교회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 자체에 대한 심층적인 신학적 성찰, 다시 말해 전쟁의 비극성, 부조리, 공포, 잔혹성, 비인간성, 나아가 전쟁의 죄악성과 악마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부족했다. 모든 죄악성과 악마성은 ‘전쟁’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에게 귀속되었다. 2차 대전 이후 교황청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가톨릭 전쟁교리에 대한 동시대의 치열한 논의는 한국교회와 완전히 무관한 일이었다. 전쟁에 대한 신학적 성찰성은 전쟁 참여 · 협력을 신의 명령으로 손쉽게 해석하거나, 혹은 박해-순교라는 익숙한 논리 회로 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또 한국에서 일부 소수파 개신교 교단들이 국가권력의 탄압 속에서도 양심적 전쟁거부(conscientious objection to war) 혹은 양심적 병역거부(conscientious objection to military service)를 고통스럽게 실천하고 있었을 때, 천주교회는 평화 감수성의 부족을 드러내면서 ‘전쟁의 성화(聖化)’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전쟁교리와 관련된 무지(無知)와 무성찰성(non-reflexivity) 혹은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맥락에서 제기한) 무사유(thoughtlessness)의 중첩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호교(護敎)라는 제도적 이익의 절박성에 압도되어, 한국전쟁 시기의 천주교회는 맹목적이고 열광적인 종교적 반공주의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Ⅳ. 전쟁 이후
열광적인 감정동원이나 행동주의가 감소하기는 했을지언정, 전쟁이 끝난 후에도 천주교 반공주의의 골격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반공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위상, 담론적 집중성, 종교화 수준은 여전히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었고, 순교·성모 담론과의 결합을 통한 감정동원 및 행위 동기화 추세도 여전했다. ‘공산주의자=박해자’라는 도식은 전쟁 후 고착되었다. 천주교 반공주의의 이런 성격은 대략 1980년대까지도 유지되었다.
전후(戰後) 반공주의는 그 자체로 직접 숙고되기보다는, 좁게는 한반도 분단과 통일, 넓게는 동북아시아의 냉전과 평화와 같은 개념들과의 연관 속에서 간접적으로 혹은 매개적으로 사고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따라서 필자는 ‘전후의 천주교 반공주의’를 (1) 반공 성전으로 간주되었던 그 전쟁에 대한 기억(memory)과 재현(representation), (2) 북한 · 통일 · 분단 · 평화에 대한 태도라는 두 개의 축을 통해 접근해보는 것이 유용하리라고 판단한다.
1. 침묵의 교회와 순교: ‘반공 전쟁’에 대한 기억과 재현, 그리고 반공주의의 종교화
“‘공산주의 악마’를 상대로 한 성전”이라는 한국전쟁 정의는 전후에도 거의 당연시되었다. 그러나 분단이 장기화되고 분단체제가 고착화됨에 따라, 또 군사력에 의한 북진통일론의 현실성이 빠르게 감소하면서, 천주교 반공주의에 동반되던 열광의 감정은 점차 사그라졌고, 그 자리를 슬픔의 감정이 채웠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공산주의에 대한 분노와 적대의 감정은 여전했다.
전쟁에 대한 기억에서 천주교의 독특한 면모를 드러내는 두 키워드는 ‘침묵’과 ‘순교’였다. 이 가운데 침묵은 휴전선 이북에 소재한 천주교회에 대한 ‘부재와 상실의 기억’이다. 물론 이런 기억은 ‘재건과 회복의 의지’로 발전될 수 있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는 현실로 나타났다. 한편 순교는 전쟁 당시 사망한 이들, 특히 북한 지역에서 체포되거나 남한 지역에서 납북당한 외국인·한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향한 ‘추념 · 현양(顯揚)의 기억 혹은 의지’이다. ‘침묵’과 ‘순교’가 결합함으로써, 공산 세력은 압도적으로 ‘교회를 적대하는 사악하고 비정한 박해자’ 이미지로 재현되는 반면, 희생자들은 ‘무죄하고 연약한 피해자’로 이미지화된다.
필자가 보기에 전쟁 후 천주교 반공주의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반공주의의 종교화’에서 찾을 수 있다. 반공주의의 종교화 과정은 ① 교리/신념체계(1920∼1940년대 중반)에 이어, 해방 후에는 ② 순교 · 성모신심운동(1940년대 후반∼1950년대), ③ 조직(1950년대), ④ 교회사(공식기억) 편찬(1950∼1960년대), ⑤ 의례(1960년대), ⑥ 순교신심운동(1960년대 이후), ⑦ 선교(1980년대)의 방향으로 그 영역을 점차 확장해왔다. 한국전쟁 이후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먼저, ‘조직’ 측면을 보자.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교회 조직의 남북 분단은 가시화되고 있었는데, 다른 종교들과 달리 천주교는 종교조직의 남북 ‘분단’을 넘어 (신자들은 남아 있을지언정) 북한 지역의 교단조직인 교계제도 자체가 완전히 ‘소멸’에 이른 독특한 경우에 해당된다. 전쟁이 끝났을 때 정상적인 천주교 조직에 필수적인 ‘신부’가 북한 땅에 단 한 명도 남지 않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주교에서 교회의 분단은 북한 천주교회의 ‘소멸’과 ‘부재’를 공식화 · 제도화한 것이었다. 그것은 향후 북한 지역에 대해 남한 교회의 ‘종교적 주권’(가톨릭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드는 과정이기도 했다. 교회 분단 과정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북한 교구들의 책임자를 남한 측 인사로 교체하고, 북한의 해당 교구에서 활동하던 성직자·수도자들을 새로 임명된 교구장 서리(apostolic administrator)의 감독 아래 두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1950년 11월 교황청은 북한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홍용호 주교의 후임으로 해방 후 서울로 복귀한 메리놀회의 캐롤(George Carroll) 신부를 평양교구장 서리로 임명하였고, 1952년 9월에는 역시 북한 당국에 체포되어 한국전쟁 직전에 옥사한 것으로 알려진 자우어(Bonifatius Sauer) 아빠스의 후임으로 베네딕트회의 비테를리(Timotheus Bitterli) 신부를 덕원 및 함흥교구장 서리로 임명했다. 개신교의 망명노회 · 망명연회와 비슷하게, 천주교에도 한국전쟁 기간 중에 일종의 ‘망명교구들’이 탄생된 것이다.34) 두 번째 방식은 종전에 북한에서 활동하던 선교회들을 남한에서 재조직하면서 이들로 하여금 남한 교회의 일부를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분단 전까지 함경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베네딕트회는 1952년 6월 대구에서 재조직되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경상북도 6개 군과 1개 시를 포함한 ‘왜관 감목대리구’가 신설되어 베네딕트회에 위임되었다. 해방 이전에 평안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메리놀회에게는 1953년 9월 충청북도 지역(청주 대목구)이 위임되었다.35)
두 번째로, 교회의 공식기억인 ‘교회사 편찬’과 한국전쟁 때 희생된 이들을 대상으로 한 ‘수난자 전기 편찬’인데, 이 과정은 곧 ‘순교자 만들기’이기도 했다. 1954년과 1955년에 두 권의 수난기(受難記)가 출간되었다. 유홍렬에 의하면, “공산 국가로부터 석방되어 제 나라로 돌아간 외국인 신부들은 신문이나 책을 통하여 온 세계에 비인도적인 공산 국가의 정체를 알리었다. 그러한 책으로 유명한 것은, 33개월 간의 감금생활을 하다가 1953년 5월 3일에 불란서로 돌아갔던 서울 혜화동 갈멜수녀원의 마리 마들렌(Marie Magdarene) 수녀가 지은 『귀양의 노래』라는 북한 납치기(拉致記)이다. 이 책은 6·25 직전에 거의 앞을 보지 못하게 된 마들렌 수녀가 같이 잡혀갔던 두 수녀의 도움을 얻어 지은 책으로서, 그가 1954년 1월 29일에 다시 한국 땅을 밟은 후 그해 11월 20일자로 발행한 것이다. 또 하나의 유명한 책은 1955년에 미국 뉴욕에서 출판한 『쇠사슬에 얽힌 사절』(Ambassador in Chain)이라는 책인데, 이것은 초대 한국주재 교황사절이던 미국인 번 주교가 북한 감옥에서 겪은 생활의 모습을 그의 친구인 만주 무순(撫順)교구의 레인(Laymond A. Lane) 주교가 엮은 것이다.”36) 파리외방전교회 셀레스뗑 꼬요스(Célestin Coyos) 신부의 『나의 북한 포로기』(Ma Captivité en Corée du Nord)도 1954년에 처음 출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37) 한국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는 아니지만, 미군 군종장교로 한국전쟁에 파견되었다가 세상을 떠난 에밀 카폰(Emil Kapaun) 신부의 전기 『카폰 군종신부 이야기』(The Story of Chaplain Kapaun)도 1954년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1956년에는 정진석 신학생에 의해 『종군 신부 카폰』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었다.38) 카폰 신부는 중국군의 참전 이후 전세가 역전된 가운데 1950년 11월 부대 철수 명령에도 불구하고 부상병과 함께 남아 원산에서 포로가 되었고, 이듬해 5월 평안북도 벽동포로수용소에서 병사들을 돌보다 이질과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39)
해방 이후의 한국교회사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서술 작업은 1956년 서울대 교수이던 유홍렬에 의해 행해졌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연감”인 『한국천주교연감: 1956』에 수록된 「한국 천주교회 약사(略史)」가 바로 그것인데, 전체 54쪽 중 해방 후 부분이 2/3 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 있게 다뤄졌다.40) 이 내용은 노기남 대주교가 추천사에서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에 의한, 또 한국 천주교회 역사 일부만이 아닌 전체를 다룬 최초의 한국교회사 저작으로 높이 평가했던 유홍렬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거의 그대로 수록되었다. 이 책은 천주교 신자 수가 처음 50만 명을 넘어서고 한국에도 ‘3개 대주교 관구 및 13개 교구’로 구성된 정식 교계체제가 설정된 1962년에 맞춰 출간되었다. 해방 후 북한 교회사에 대한 유홍렬의 기술에서 주목되는 점 가운데 하나는 천주교 박해가 (‘사회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위한 준비과정’일 뿐 아니라) ‘전쟁 준비의 과정’으로, 또 ‘순교자들의 대규모 발생 과정’으로도 자리매김 된다는 것이다.41) “이들 성직자들은 공산군의 마수를 피하여 탈출할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또 그러한 방법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나 오로지 이 땅의 천주교우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초대 교부 성 베드루의 행적을 따랐을 뿐이었다.”42)
세 번째로, ‘의례’ 측면과 관련해서는 1960년대에 시작된 두 가지 연례행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1965년 2월 전국주교회의가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구 날이 매년 6·25 다음 주일에 전국적으로 실천될 것”을 결정한 데 이어 같은 해 7월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를 제정한 일이다.43) 이후 매년 한국전쟁 발발일에 즈음하여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 메시지’가 발표되었고, 이 메시지가 전국의 모든 성당에서 특별미사의 지향으로 기념되었다. 이를 통해 북한의 천주교회가 ‘침묵의 교회’로 명확히 규정되었다. 한국교회는 1968년부터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현충일 추도미사’를 거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군종신부단이 미사를 거행했지만, 1970년부터는 서울대교구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1971년부터 서울대교구 교구장과 군종신부단 총재 공동명의의 ‘현충일 메시지’가 매년 발표되었다.44) 전쟁 발발일과 현충일로 의례의 시간을 각각 고정시켰다는 점에서 두 의례 모두 한국전쟁과 관련된다. 아울러 이 의례들은 전사자 의례, 순교자 의례, 반공주의 의례의 성격을 두루 띠고 있었다. 의례의 등장 시기를 고려할 때, 둘 모두 1965년 초부터 본격화된 한국군의 대규모 베트남 파병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회는 한국전쟁 당시와 유사하게 베트남전쟁에 대해서도 여전히 ‘반공 십자군 전쟁’이라는 시각을 견지했다.
네 번째로, 천주교의 전쟁 희생자들을 위한 ‘순교신심운동’ 혹은 ‘순교자 현양운동’으로서, 이 운동은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순교자 시복운동’으로 발전되었다. 병인순교 100주년을 1년 앞둔 1965년부터 한국교회에서는 순교자 시복운동이 본격화되었고, 이런 노력은 1968년 10월 3일 로마 성베드로성당에서 열린 병인 순교자 24위 시복식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전쟁 시기 순교자들의 시복운동에도 시동이 걸렸다. 교황청에 시복을 신청하기 위해서는 순교자들과 관련된 자료의 수집과 출판이 급선무였다. 이를 위해 1969년 10월에 열린 전국주교회의는 “6·25전란을 전후하여 남북한에서 순교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의 목격담을 소속 교구장 책임 하에 작성하여 출판키로 결정”하고, 발굴 · 수집된 자료는 “통일된 일람표에 따라 교구장을 거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CK)로 보낼 것”을 전국 본당에 지시했다.45) 한국전쟁 순교자 현양운동이 반공주의를 강화하는 효과를 발휘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마지막으로, 1980년대 초부터 한국교회 차원에서 ‘북한선교’가 활성화되었다. 전쟁 직후부터 평양교구 및 함흥 · 덕원교구 출신 사제와 신자들을 중심으로 북한선교의 문이 열릴 때에 대비한 ‘신학생 및 성직자 양성운동’이 시작되었다.46) 그런데 1980년대에는 북한선교가 한국교회 전체의 과제로 격상된 것이다. 1982년 12월 ‘한국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산하에 ‘북한선교부’가 설치되었고, 1984년 11월에는 북한선교부가 주교회의 상설기구로 재편되었다. ‘침묵의 교회’라는 표현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한국교회는 북한에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주하므로, 북한선교의 업무 중 일부는 결국 북한 땅에서 ‘지하교회’를 육성하거나 원조하는 일이 된다. 공식적으로는 한국교회 전체의 과업으로 설정되어 있었음에도, 한동안 북한선교는 해방 이전 북한에서 활동했던 ‘망명 교구 · 수도회들’에 의해 실질적으로 주도되었다. 따라서 1980년대의 북한선교에서는 종교적 고토(故土)회복주의(religious irredentism) 지향이 강하게 드러났다. 이런 식의 북한선교는 강한 반(反)북한 및 반공의 지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2. 분단과 통일: 분단 및 교회/민족 재통합에 대한 태도와 접근방식
분단체제와 교회/민족 재통합에 대한 한국교회의 접근방식에 초점을 맞출 경우, 필자는 한국전쟁 이후 1980년대까지를 대략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시기별 특징들을 대략 <표 1>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47)
우선, 휴전 직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 교회/민족 재통합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접근방식은 ‘멸공통일 노선에 입각한 단계론적 통일지상주의운동’(교회 지도층)과 ‘재건주의에 기초한 정교분리적 교회재일치운동’(북한 출신 신자들)으로 나타났으며, 둘 모두 분단체제의 공고화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단계론적 통일지상주의’는 교회 재통합에 대한 관심은 약하나 민족 재통합에 기여하려는 의지는 강한 경우를 가리킨다. ‘단계론적 통일지상주의’에는 민족의 통일이 거의 ‘자동적으로’ 교회의 재통합을 가능하게 하리라는 ‘민족통일 만능주의’, 혹은 ‘선(先)민족통일 후(後)교회재일치’라는 ‘단계론적 접근’ 등이 포함되며, 당시 교회 지도층의 태도는 전자에 해당한다. 한편 ‘재건주의’는 북한 교회와 신자들의 존재를 사실상 부정함과 동시에 남한 교회의 일방적인 주도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가리키며, ‘정교분리적 교회재일치운동’은 민족 통합의 과제와 교회 통합의 과제를 분리한 다음 후자의 과제를 우선시하여 ‘순수한’ 종교적 활동에만 주력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다음으로,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말까지의 시기에 천주교회의 대응은 ‘의례주의(ritualism) 혹은 구두선(verbalism)’(교회 지도층)과 ‘선(先)민주화-후(後)통일의 간접적인 통일운동’(교회 내 민주화운동가들)으로 상이하게 나타났다. 전자가 분단체제의 승인 효과를 냈다면 후자는 분단체제의 부분적 균열에 기여하는 효과를 냈다. 이 시기 천주교의 전반적인 특징은 ‘행동의 결여 혹은 무관심’으로 요약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교회 혹은 민족 재통합의 당위성과 필요성에 대해 종교의례나 기도의 형식으로만 긍정하는 의례주의 혹은 구두선의 태도, 그리고 통일의 가능성이 남한사회 내부의 개혁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증가된다는 태도(선민주화-후통일의 입장)의 공통점은 이 모두가 민족 통일이나 교회 재일치를 위한 ‘실질적인’ 행동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1980년대 천주교의 대응은 ‘재건주의에 기초한 정교분리적 교회재일치운동’(교회 지도층)과 ‘평화통일 노선에 기초한 단계론적 통일지상주의운동’(교회 내 진보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전자가 분단체제의 승인 효과를 냈다면 후자는 분단체제의 해체에 기여하는 효과를 냈다. 따라서 이 시기 천주교의 전반적인 특징은 ‘통일운동의 내적 분화 및 갈등’으로 압축될 수 있다. 북한선교를 내세워 교회 재통합 문제에만 몰두했던 1980년대 교회 지도층의 입장은 1950년대에 북한 출신 신자들이 취했던 입장과 유사하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나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와 같은 교회 내 진보세력의 입장은 교회 재통합 문제에 대한 관심은 약한 상태에서 여전히 ‘선민족통일 후교회재일치’라는 단계론적 접근에 머물러 있었다.
이처럼 한국전쟁 후 약 40년 동안 한국교회의 공식 입장을 대표하는 지도층의 접근방식은 대체로 분단체제를 승인하거나 공고화하는 효과를 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1970년대 중반부터 교회 일각에서 시작된 민주화운동이 분단체제의 질곡을 돌파할 잠재력을 보여주었지만,48) 적어도 1980년대 중반까지는 ‘민주화’를 선차적 과제로 삼고 ‘통일’을 후차적 과제로 미뤄두는 단계론적 접근을 고수함으로써, 분단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Ⅴ. 맺음말: 1990년대의 대전환과 그 후
1980년대 한국교회 안에서 갈등적으로 공존하던 두 흐름은 1990년대를 거치면서 하나로 합류하게 되었다. 1990년대는 한국교회가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 말하자면 ‘분단-대결 패러다임’에서 ‘탈(脫)분단-평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사실상 완료한 시기였다. 그것은 평화주의적 전환(pacifist turn)이자 탈분단체제로의 전환이었다. 그것은 멸공통일에서 평화통일로, 절멸에서 공존과 화해로, 적대에서 평화로, 분단체제 인정 혹은 공고화에서 탈분단 혹은 분단 극복으로의 전환이었다. 그것은 ‘재건주의’에서 ‘협력주의’로의 전환, 즉 북한의 천주교 신자 혹은 교회에 대해 ‘배제적인’ 재건주의로부터, 북한 신자·교회에 대해 ‘포용적인’ 협력주의로의 전환이기도 했다. 아울러 이 전환은 교회 재통합과 민족 재통합 중 어느 하나에 대한 편향적 강조로부터 양자의 균형 추구로의 전환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이것은 교회 재통합과 민족 재통합 모두에 기여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가운데, 민족 재통합 과제와 교회 재통합 과제가 역동적인 상호 연관관계 속에 놓여 있다고 보면서, 두 과제 간에 균형을 유지하면서 둘 모두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려는 입장으로의 전환이었다.
1988년 5월 북한선교위원회는 산하에 통일사목연구소를 설치했다.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북한선교’에서 ‘통일사목’으로의 변화에는 북한 사회와 교회에 대한 인식의 변화, 통일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의 변화도 어느 정도 함축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49) 1992년 3월에 주교회의는 지역 교회법전의 권위를 갖는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의 ‘북한선교’ 관련 조항을 개정하여 1988년의 변화를 공식화함과 동시에,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변경했다. 1995년에 최종 확정되고 발간된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 200조를 통해 북한선교는 “분단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형제적 나눔을 실현하면서 민족의 평화통일에 대비하여 북한교회의 부흥과 북한 동포의 복음화를 위한 사목적 역량을 갖추는 교회의 활동”으로 새롭게 정의되었다.50) 해방 50주년이 되는 1995년 11월 4일에는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하여」라는 기념비적인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분단 고착과 민족사회 분열에 대한 참회” 차원에서 “분단의 구조적 악을 말하기에 앞서서 광복 50년을 맞아 우리 한국교회도 남북의 분단과 민족사회의 분열에 커다란 책임이 있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아울러 “통일은 항상 평화를 전제로 하고, 평화를 누림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므로 “흡수통일 또는 적화통일이라는 유혹으로부터 참으로 자유로워질”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한국교회가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에 의해 갈라진 형제를 화해시키고, 분단에 의해 이질화된 삶의 구조 속에서 동족의 삶의 본질을 회복시켜야 할 역사적 짐”을 지고 있다고 선언했다.51) 같은 해 3월에는 한국 최대 교구인 서울대교구가 (‘북한선교’가 아닌 ‘민족화해’를 내세운) ‘민족화해위원회’를 창립했다. 한국교회는 1997년에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를 설치한 데 이어, 1999년에는 주교회의의 ‘북한선교위원회’마저 ‘민족화해위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2021년 현재 주교회의에서는 민족화해위원회와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가, 전국 16개 교구에서는 민족화해위원회가 활동하고 있고, 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산하에 통일사목연구소(수원교구), 평화나눔연구소(서울대교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의정부교구) 등 3개의 연구기관들이 설립되어 있는 등 활동 기반도 튼실해진 편이다.
전쟁교리의 평화주의적 전환도 명백하다. 한국교회 기관지인 『사목』지의 1968년 2월호와 5월호로 나뉘어 연재되었던 「평화와 전쟁에 관한 역대 교황들의 태도(Ⅰ·Ⅱ)」라는 정진석 신부의 번역 글은 19세기 이후 천주교 전쟁교리의 역사적 변화를 비교적 충실하게 설명하는, 21세기 이전에 소개된 거의 유일한 문헌이었다. 그러나 이 글은 베트남전쟁 참전 분위기에 휩쓸려 있던 당시의 한국교회 안에서 별다른 반향을 가져오지 못했다. 우리가 주목할 만한 변화는 『사목』 2002년 2월호에 실린, ‘전쟁과 테러’라는 주제의 특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때 가톨릭 전쟁교리 문제가 30여년만에 다시금 본격적으로 다뤄졌다. 특집에 포함된 6편의 글 가운데 「전쟁과 평화」(권혁주 주교), 「가톨릭교회의 전쟁에 대한 이해」(이정우 신부) 등은 이즈음의 한국교회가 종전의 성전/십자군전쟁 교리와 완전히 결별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이런 변화들을 거치면서 한국교회와 반공주의의 거리도 점차 벌어졌다.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라는, 좁은 의미의 반공주의는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지 모른다. 상대를 악마화하거나 비인간화하는 과도한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는, 상대와의 생산적인 대화와 공존을 기꺼이 허용하는 비판이라면 큰 문제가 되겠는가. 물론 ‘반공주의 유령’이 시대를 거슬려 재소환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신자들의 빠른 고령화 추세를 고려할 때, 2015년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가 실시한 ‘북한복음화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드러난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평신도 의식도 우려할 만한 지점이다.52) 극단적 반공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 수호 천주교인 모임’(대수천) 같은 교회 내 극우단체들도 있다. 한국전쟁 당시 죽임을 당했거나 납치당한 교회 지도자들의 유해송환운동이나 시복운동도 반공주의 정서를 환기시키거나 자극할 수 있다.53) 북한 지역 교구장으로 임명된 남한 지도자들이 교도권을 강하게 주장하고 나설 경우에도 북한 신자들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반공주의 정서를 확산시킬 수 있다. 교회 안에 잠복한 공격적 반공주의 부흥의 불씨들을 지혜롭게 관리하면서,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 정착을 위한 ‘가톨릭 평화운동’을 차근히 발전시켜 나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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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까지 한국 천주교 반공주의에 대해서는 변진흥, 강인철, 여진천, 최경선 등이 주로 연구해왔다. 가장 많은 연구 성과를 선보인 이는 강인철인데, 그가 발표한 논문들은 대부분 다음 두 권의 책에 실려 있다. 강인철, 『전쟁과 종교』, 한신대학교출판부, 2003; 강인철, 『한국 천주교의 역사사회학: 1930∼1940년대의 한국 천주교회』, 한신대학교출판부, 2006. 아울러, 변진흥, 「1930년대 한국 가톨릭교회의 공산주의 인식」, 김흥수 엮음, 『일제하 한국기독교와 사회주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2; 여진천, 「한국전쟁에 대한 교회의 입장」, 한국사목연구소 엮음,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2: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을 중심으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1; 여진천, 「천주교회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인식과 기여」, 『교회사연구』 32, 2009; 최경선, 「한국 가톨릭 신심과 그 역사적 배경: 해방과 한국 전쟁 시기」, 『인간연구』 7, 2004 등을 볼 것. 천주교 반공주의를 ‘직접’ 다루는 것은 아닐지라도, 해방∼전쟁 시기 북한에서 진행된 천주교회와 국가의 충돌을 다룬 변진흥과 한모니까의 연구도 참고할 가치가 있다. 변진흥, 「북한 ‘침묵의 교회’와 공산주의: 북한의 소비에트화 시기(1945.8∼1950.6)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6, 1988; 변진흥, 「해방공간에서의 북한 공산정권과 교회」, 한국천주교회 통일사목연구소 엮음, 『가톨릭교회와 민족복음화』, 일선기획, 1990; 한모니까, 「해방 직후 황해도 신천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기독교계의 대응」, 『교회사연구』 54, 2019.
2) 강인철, 『전쟁과 종교』, 191∼198쪽.
3) 박도원, 『노기남 대주교』,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262∼264쪽.
4) 강인철, 『경합하는 시민종교들: 대한민국의 종교학』,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9, 241∼259쪽 참조.
5) 이를 통해 천주교 신자들은 ‘건국’이나 ‘조국재건’과 같은 민족사적 과업들을 해결할 책임을 부여받은 ‘행위주체들’로 호명되었다.
6) 강인철, 『종속과 자율: 대한민국의 형성과 종교정치』, 한신대학교출판부, 2013, 252∼253쪽.
7) 1930년대부터 가톨릭액션의 일환으로 각종 사회교리(social doctrines)나 사회적 가르침들(Catholic social teachings)이 활발하게 소개됨에 따라, 성속이원론에 기초한 종전의 ‘사회적 불개입’ 입장에서 벗어나 ‘사회적 개입/참여’로의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 시기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천주교회의 지도자들은 가톨릭액션의 대상 영역에서 정치문제와 계급문제를 명확히 배제시켰다.
8) 『경향잡지』, 1950년 4월호, 52쪽. 반공주의의 교리화 과정이 해방 이전의 경우 ‘세계교회’(교황청) 차원에서 형성된 기존 사회교리 가운데 반공주의적인 대목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면, 해방 후에는 ‘한국교회’ 차원에서 형성된 독자적인 사회교리를 통해서도 진행되었다. 그 단적인 사례가 1950년 2월 주교단 공동교서와 1953년 4월 주교단 공동교서(「도덕은 모든 문화의 기초」)였다.
9) 강인철, 『한국 천주교의 역사사회학』, 135∼143쪽; 강인철, 『전쟁과 종교』, 198∼214쪽.
10) 북한교회사집필위원회, 『북한교회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350∼406쪽; 강인철, 「현대 북한 종교사의 재인식」, 김흥수 엮음, 『해방 후 북한교회사: 연구, 증언, 자료』, 다산글방, 1992, 164∼177쪽.
11) 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 『함경도 천주교회사 자료집』 제3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9, 92쪽; 『경향잡지』, 1949년 4월호, 69쪽.
12) 한국 천주교회의 수장(首長)격이던 노기남 대주교는 1949년 3월 기자회견에서 남북통일을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동아일보』, 1949.3.24.
13) 손호철, 『한국정치학의 새 구상』, 풀빛, 1991, 160쪽.
14) 불교에서는 좌파 세력이 중심이 된 불교단체들이 1947년 5월 ‘조선불교중앙총무원’과 맞서는 별도 교단이자 전국 조직인 ‘조선불교정통총본원’을 발족했을 정도로 강력했다. 불교사학연구소 엮음, 『한국 현대 불교사 일지』, 중앙승가대학, 1995, 16쪽 참조.
15) 강인철, 『종속과 자율』, 2장과 8∼11장 참조.
16) 강인철, 『전쟁과 종교』, 172∼173쪽.
17) 『천주교회보』, 1950.11.10., 1951.1.14.
18) 『천주교회보』, 1950.11.10.
19) 『천주교회보』, 1950.11.10, 1953.1.15.
20) 강인철, 『전쟁과 종교』, 219∼223쪽.
21) 『천주교회보』, 1950.11.10, 1951.1.14, 1952.3.3.
22) 강인철, 『전쟁과 종교』, 271∼289쪽.
23) 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 『황해도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508∼511쪽.
24) 강인철, 『전쟁과 종교』, 292∼299쪽.
25) 유홍렬, 『한국 천주교회사』, 가톨릭출판사, 1962, 1014·1021쪽.
26) Milton Yinger, “Religion and War,” The Scientific Study of Religion, London: Macmillan, 1970, p. 460.
27) 강정구,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역사비평사, 1996, 217∼231·243∼276쪽.
28) CCIA & PCJP eds., Peace and Disarmament: Documents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and Roman Catholic Church, Geneva: WCC, 1982, pp. 123∼124.
29) 식민지 시대에 대해서는, 문규현, 『한국천주교회사Ⅰ』, 빛두레, 1994, 210∼239쪽, 한국전쟁 시기에 대해서는 『천주교회보』, 1950.11.10, 1951.1.14 등을 참조.
30) 강인철, 「한국사회와 양심적 병역거부: 역사와 특성」, 『종교문화연구』 7, 2005, 108∼116쪽.
31) 이영린, 『한국 재림교회사』, 시조사, 1965, 12∼26쪽; 탁명환, 『한국의 신흥종교: 기독교편 2권』(개정판), 국종출판사, 1992, 205쪽.
32) Yinger, op. cit., p. 467.
33) 오만규, 『집총거부와 안식일 준수의 신앙양심』, 삼육대학교 선교와사회문제연구소, 2002; 오만규, 『네 검을 내려놓으라: 재림교회와 비폭력』, 삼육대학교출판부, 2004.
34) 1960∼1970년 사이에 남한의 평양교구 소속 성직자·수도자·신학생들은 서울대교구로 편입되었고, 1968∼1969년 사이에 남한의 함흥·덕원교구 소속 성직자·수도자·신학생들은 부산·대구·서울교구로 편입되었다. 함흥·덕원교구의 교구장 서리직은 여전히 베네딕트회 지도자에게 맡겨져 있지만, 평양교구의 교구장 서리직은 1975년 이후 서울대교구 교구장에게 맡겨지고 있다.
35) 강인철, 「종교문화: 조직적 단절과 통합의 역사」, 김승렬·신주백 외, 『분단의 두 얼굴: 테마로 읽는 독일과 한반도의 비교사』, 역사비평사, 2005, 369쪽.
36) 유홍렬, 앞의 책, 1023∼1024쪽.
37) 셀레스뗑 꼬요스, 조안나·이혜자 옮김, 『나의 북한 포로기: 죽음의 행진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분도출판사, 1983, 11쪽. 패트릭 번 주교의 전기인 Ambassador in Chain도 1994년에 한국어로 출간되었다(레이먼드 A. 레인, 박준영 옮김, 『기억의 돋보기: 패트릭 번 주교의 생애』, 성바오로출판사, 1994).
38) 이 책은 1992년에 재출간되었다. 아더 톤, 정진석 옮김, 『종군 신부 카폰』, 가톨릭출판사, 1991.
39) 교황청 시성성은 1993년 카폰 신부를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했고, 미국 정부는 2013년 그에게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2021년 3월 미국 하와이주 국립태평양묘지에 안장된 신원 미상의 참전용사 유해 중에서 카폰 신부의 유골이 뒤늦게 확인된 데 이어, ‘유엔군 참전의 날’인 7월 27일에는 한국 정부가 카폰 신부에게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이에 대해서는, 『연합뉴스』, 2021.3.6.의 「‘한국전의 예수’ 미 에밀 카폰 신부 유해 70년 만에 찾았다」 기사(정윤섭 기자)와 『한겨레』, 2021.7.27., 27면의 「‘한국전의 예수’ 전사한 종군신부 에밀 카폰 ‘무공훈장’ 받는다」 기사(조현 기자) 참조. 몇 년 전 카폰 신부에 관한 연구논문도 발표된 바 있다. Franklin Rausch, ““All Man, All Priest”: Father Emil Kapaun, Religion, Masculinity, and the Korean War,” Journal of Korean Religions, Vol.6 No.2, 2015.
40) 유홍렬, 「한국 천주교회 약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엮음, 『한국천주교연감: 1956』,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56, 14∼67쪽, 이 가운데 해방 후 역사는 35∼67쪽에 해당됨.
41) 유홍렬, 위의 논문, 52∼56쪽; 유홍렬, 앞의 책, 1015∼1019쪽.
42) 유홍렬, 위의 논문, 56쪽.
43) 북한선교위원회 엮음, 『한국천주교 통일사목 자료집(1)』, 사람과사람, 1992, 44∼48쪽.
44) 강인철, 『저항과 투항: 군사정권들과 종교』, 한신대학교출판부, 2013, 21∼22쪽.
45) 『경향잡지』, 1970년 1월호, 59쪽.
46)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엮음, 『천주교 평양교구사』, 분도출판사, 1981, 254∼277쪽.
47)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다음을 참조할 것. 강인철, 「종교와 통일운동: 한국천주교회의 사례」, 『종교문화연구』 1, 1999; 강인철, 「분단과 한국교회: 반성적 고찰」, 『한국 교회와 민족화해』(민족화해와 일치를 위한 전국 심포지움 자료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2000.6.10.
48) 우리가 반공주의를 자유주의적 반공주의(liberal anti-communism)와 국가주의적 반공주의(statist anticommunism)로 구분할 경우, 파시즘이나 제3세계 권위주의를 포함하는 국가주의적 반공주의는 민주주의와 이율배반(antinomy) 관계에 놓이기 쉽다. 한국에서도 민주화운동과 반공주의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양립하기가 어려워졌고, 민주주의로부터 완전히 일탈한 유신체제 등장 이후 이런 양상이 두드러졌다. 198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양자 간의 긴장과 모순이 극대화하자, 민주화운동은 반공주의와 분단체제를 넘어서는 통일운동과 평화운동으로 도약하게 된다.
49) 변진흥, 「가톨릭과 개신교의 통일사목에 대한 입장」, 『현단계 가톨릭 통일사목의 과제와 전망』(우리신학연구소 제1차 심포지움 자료집), 우리신학연구소, 1995.11.4., 7쪽.
50)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천주교 사목지침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77쪽.
51) 이와 유사하게 대희년에 즈음하여 2000년 12월 3일 주교회의 명의로 발표된 「쇄신과 화해」 문서를 통해서도 한국교회는 다시 한 번 “광복 이후 전개된 세계질서의 재편과정에서 빚어진 분단 상황의 극복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소홀히 한 점을 반성”했다.
52) 박문수, 「2015년 한국 천주교인의 통일의식: ‘2015년 북한 복음화에 대한 설문조사’, 2005년 조사 및 일반 국민의식 간 비교분석 결과를 중심으로」, 『한국 천주교인 통일의식, 무엇이 변했고 어디로 갈 것인가?: “2015년 북한 복음화에 대한 교회 구성원 의견 조사” 발표』(2016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심포지엄 자료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2016.6.10.; 변진흥, 「한국천주교회 통일사도직의 새로운 방향 모색: 2015년 주교회의 민화위 설문조사 결과를 중심으로」, 같은 책.
53) 1990년 8월에 당시 주교회의 의장이던 김남수 주교가 대한적십자사 총재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전쟁을 전후해 수난 당한 117명에 대한 생사 확인을 요청했던 바 있다. 교황청이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현대 순교자’ 혹은 ‘새 순교자’를 선포할 계획으로 각 대륙별로 순교자 명단을 접수하자, 한국교회도 1998년 말부터 번 주교와 사우어 아빠스 등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239명의 명단을 작성하여 교황청으로 보냈다[『동아일보』(온라인판), 1999.10.20.; 『가톨릭신문』(온라인판), 1999.12.26]. 1999년 6월부터는 수원교구 안성 구포동본당 신자들이 초대주임 공안국 신부의 유해 송환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에 나서기도 했다(『가톨릭신문』, 1999.7.4.; 『평화신문』, 2000.6.6). 2009년부터는 주교회의가 앞장선 가운데 한국전쟁 전후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운동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홍용호 주교와 동료 80위’에 대한 시복운동이 먼저 시작되었고, ‘사우어 아빠스와 동료 37위’에 대한 시복운동도 이어졌다.
* 이 논문은 2020년 11월 12일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가 “끝나지 않은 전쟁”(The Unended Korean War)이라는 주제로 개최한 제4회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 「6·25전쟁과 그리스도교: 교회의 반공주의에 대한 성찰」(The Korean War and Christianity: Reflections on the Church’s Anti-Communism)을 일부 수정하고 보완한 것이다. 아울러 이 논문은 한신대학교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다.
[학술지 교회사학 제19호, 2021년(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강인철(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