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산(212m)의 봄맞이 산행
시절마저 예사롭지 않던 봄날의 꽃 시샘은 오늘도 짙은 구름과 함께 비 소식까지 덤으로 안겨주었다. 지난 3/4일에도 부부산악회에서 상황봉(644.1m, 전남 해남군 완도읍)을 겨냥했지만 강풍과 짙은 안개비로 현장의 즉석회의에서 일정을 취소했고, 아쉬운 마음을 가누면서 ‘청해진 터’를 비롯한 정도리 구계동 자갈밭(영승3호)을 돌아보고 생선회로서 산행을 대신하고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오늘 날씨도 구름을 잔뜩 머금은 채 심술이 줄줄 흘렀고, 그 가운데도 한우리 신협산악회는 입추의 여지없는 두 대의 버스를 앞세우고 목적지 연화산(경남 통영시 연화도)으로 청솔부동산 앞에서 아침 7:20 정시에 출발(07/3/10)하였다.
배포된 연화산(212.2m)산행의 개념도를 보며 길쭉한 길이의 A 코스를 생략하고 연화사(蓮花寺)로 곧바로 내려오는 B 코스를 택했고, 산행대장이 작성한 사찰의 내력을 탐독(耽讀)하였다. 스님의 유언에 따라 수장(水葬)했더니 그 자리에 큰 연꽃이 피어 승천한 까닭으로 연화사라 했다는 내용이 있었고, 특히 비구니 세 자매가 장군 이순신과 더불어 왜군에 대항하여 장군은 자운대사(慈雲大師)라 불렀다는 대목에서 가슴은 왠지 찡함을 느꼈다. 비운의 시대에 피어난 불심(佛心)의 맑은 영혼은 거룩한 연꽃이고도 남았고,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빈약한 애국심을 크게 힐책(詰責)하는 따가운 아픔이기도 했다.
내 곁엔 자운대의 모(某)씨와 뒷자리엔 퇴임한 선배교수님 내외분이 탔으며, 구 의원을 비롯한 둔산동 성당의 낯익은 교우들이 여럿이 동행 하였다. 버스는 통영 해운여객터미널에 정확하게 도착(10:30)했고, 연화도로 출항하기까지의 빈 시간을 수산물 쇼핑으로 이용하라 산행대장님은 광고했다. 배는 예정보다 늦은 시간(11:05)에 출항했고, 나는 선실 2층 바닥에 앉아 약밥으로 점심요기를 대신했고, 맞은 편 모 씨 일행의 내외가 준 호박죽의 기막힌 맛에 감사의 마음은 끊이지 않았으며, 건너편 선배님은 약술 한잔까지 따라주어 얻은 떡이 두레반이 되었다. 삼삼오오(三三五五)의 밝은 얼굴들은 배안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연화도 포구에 도착(12:00)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아담한 어촌이었고, 우리가 이용할 ‘네 바위 횟집’을 지나 ‘푸른 바탕에 붉은 글씨의 등산로’ 입구표시에서 산행은 시작(12:10)되었다. 비스듬히 닦은 길은 오래지 않은 듯 새 자갈을 깔았고, 박 교수를 비롯한 낯익은 음성들(12:15)이 바다를 건너 먼 이곳까지 내 귓전을 울러주었다. 처음부터 닦달하던 힘겨움에 신선한 청량제였고, 용기를 부추기던 응원의 뿌듯함으로 한참동안 메아리로 남았다. 50여개의 가파른 바위계단이 굽이치더니 이들은 잠시 능선(12:30)으로 이어졌고, 다시 허물어진 낡은 계단으로 바뀌더니, 가로세운 철문 앞(12:35)에서 멈추었다.
누구나 이용할 길을 이렇게 막은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 암자(庵子)를 수시로 기웃거리던 산행꾼들의 무례함 때문이 아닐까 짐작되기도 했다. 그 다음엔 나무로 만든 사각정자가 쉼터(12:39)노릇을 했고, 일행 몇몇은 느긋한 자세로 쉬기도 했다. 하기야 돌아서면 바다인 판에 B 코스를 염두에 두었다면 서두를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 '5층 석탑 0.8km과 연화봉 0.4km 직진. 보촌 0.9km 좌회전'의 안내판(12:40)이 있었고, 40여계단의 가파른 길(12:34)은 진땀을 흘리게 하더니 평탄한 길을 주었으며, 계단 끝엔 평상을 남겨 숨을 돌릴 겨를도 있었다. 자연의 깊은 뜻을 헤아림은 스님의 수행(修行)처럼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연화산 정상(1:00)이었다. 기껏 212m의 높이에 ‘산’의 호칭은 가당치도 않았지만, 높이가 무슨 대수인가 싶어 묻어두기로 했다. 구 의원에게 사진 한 장 부탁(1:10)하고 나 역시 찍어주었으며, 바위로 연이어진 풍광은 금강산 만물상(萬物相)인가 싶어 구 의원을 모델로 사진(1:20)찍었다. 바다로 바위섬의 꼬리를 서서히 감추어버린 절묘한 현상에서 자연이 빚어낸 신비에 넋을 잃었고, 이것 하나만으로도 오늘 산행의 진가(眞價)를 대신해도 좋을 듯싶었다. ‘용머리 직진, 보덕암 우측’(1:22)이란 표시에서 더 이상의 욕심은 거두었고, ‘용 머리’가는 길목에서 멋진 풍광에 심취한 몇몇 산우(山友)들과 사진으로 정을 주고받았다.
‘5층 석탑’(1:30)은 아직도 손 떼 묻지 않은 석조물이었고, 하필이면 그곳에 둔 것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포구 뒤 바위들은 마음 비운 듯 점처럼 하나씩 작은 섬이 되었고, 그들은 바다로 숨어 수평선 끝자락에서 파란 물빛으로 그리움이 되었다. 문득, 지난 일요일에 돌아온 ‘푸켓’에서의 아름다운 기억들이 해풍을 타고 잔잔한 물결위로 파동치고 있었다. 모두가 잊기엔 너무 벅찬 사랑 같은 그리움이었다. 구 의원을 비롯한 십여 명은 새 건축물 연화사를 둘러본 후 B코스 따라 어촌(1:39)에 들어섰고, 이방인에 놀란 흑염소 한 마리는 지붕 위(?)로 올라갔으며, 우리는 그 옆집에서 빵을 먹으며 잠시 머물기도 했다.
원량초등학교 연화분교(2:03)를 지날 때, 30여년이 훨씬 넘긴 녹도분교(충남 보령군)에서의 봉사활동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지금은 고인(故人)인 의학과 K군! 방학 때 그 불볕더위에도 동분서주하며 온 정열을 쏟던 그가 합격자 발표를 눈앞에 두고 계룡산 암벽에서 그만... 그는 의학과 학생으로서 보기드믄 암벽 등반가였다. 어느새 하산 후 집합 장소인 ‘네 바위 횟집’(2:15)에 구 의원과 함께 도착했고, 비닐 임시천막 아닌 따끈한 방에 자리를 잡아 선배의 친구부부와 함께 선배님을 기다렸다. 참 지루했던 시간, 이럴 때를 가정하여 어떤 대책도 세우지 않았던 집행부에 소리 없는 화살을 우리 모두 날리던 순간이기도 했다.
한 상(床)에 네 명씩 짝을 지었고, 도착한 순서대로 소주와 갖가지 술을 곁들여서 산행 후의 푸짐한 만찬은 시작(3:10)되었다. 어느새 방안은 산행의 열기(熱氣)와 거나한 술판으로 뜨거웠고, 맞은편의 젊은이 부인은 술병에 숱 가락을 꽂아 흥겨운 노래로 불을 붙이니 전염병처럼 ‘얼시 구나’로 산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어느 나라에도 보기 어려운 우리의 독특한 술판문화, 어쩌면 한(恨)에 젖은 외로움이 따스한 정(情)으로 승화(昇華)되던 가녀린 정서가 이렇게 발전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 뜨거움은 배가 출항(4:50)한 후에도 술판과 손바닥 때리기(5:30)로 이어졌고, 박장대소(拍掌大笑)는 선실 안에서 웃음으로 계속되었다.
소란스러움이 엄청났음에도 누구하나 불평하지 않았고, 곤히 잠들거나 구경하는 사람 등 천태만상의 소중한 그림으로 다가왔으며, 어쩌면 인내(忍耐)에는 이골이 난 서민의 참 모습인지 몰랐다. 조금 후엔 여객 터미널에 도착할 예정이라, 혼자 밖으로 나가 마지막 햇살이 빚어낸 일몰(日沒)의 장관(壯觀, 5:48)을 지켜보았다. 남쪽 섬 어촌엔 버들강아지가 움을 틔었고 목련이 망울지던 봄의 길목은 기억의 소중한 파편이었다. 그래서 오늘 산행은 해물이만큼이나 아름다웠고, 웅장한 몸집의 ‘카페리 여객선’이 서서히 접안한 것으로 산행은 마감(6:00)되었으며, 대전으로 향하던 우리버스가 점차 모습(6:30)을 잃은 것은 그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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