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산천은 봄이 한창이다. 봄의 한가운데 있지만 날씨는 가끔씩 변덕을 부린다. 오늘 일기예보도 바람이 많단다. 전국 곳곳의 산불 소식을 건조한 날씨 탓으로 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서해선 시흥대야 전철역 부근 골목에 차를 세우고 한 정거장 떨어진 소새울역에서 친구 M과 합류했다. 제2경인고속도로 시흥시 구간를 지날 때면 피라미드처럼 솟아 있던 소래산과 그 주변 산군을 둘러볼 요량이다. 마스크를 잘 챙기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염두에 두면서...
한산한 소새울역 3번 출구를 나서서 소사대공원 뒷편 봉매산 쪽을 들머리로 삼았다. 철쭉이 만개한 넓고 쾌적한 공원은 산책 나온 주민들이 드문드문 눈에 띌뿐 한적하다. 영문 '러브'와 '하트' 모형을 주제로 한 벤치 등 다양한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공원 뒤 봉매산이라 이름 붙은 암봉은 야트막하고 바위 벽면에 누군가 흰 페인트로 '山'이라 큼지막하게 써 놓았다. 봉매산에서 '늠내길'이라 적힌 이정표가 부천 소사본동과 시흥 대야동을 잇는 여우고개 위 생태 터널로 인도한다. 부천의 시조(市鳥) '보라매' 상이 터널 입구 석단 위에 앉아 '어서 오시라' 인사한다. 가장자리로 몰린 눈동자, 오동통한 몸집, 날개를 접고 껑충히 앉아 있는 모습 등이 날렵한 맹금류라기 보다는 순한 비둘기를 닮았다.
하우고개로 난 평탄한 숲길로 들어섰다. 솔숲 능선에서 백구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벤치에 앉은 노 주인 주변을 이리저리 신명나게 뛰어다닌다.
능선마루 가까이 베이커리 까페 'ㄴㅅ당'에서 고소한 빵 내음이 솔솔 흘러나온다. 그 뜨락에 잠시 발을 들여 놓으니 건너편으로 소래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천 심곡본동과 시흥시 대야동을 잇는 하우고개, 그 위로 놓인 다리를 건너면 부천둘레길 6개 코스 중 하나로 봉매산, 성주산, 거마산 자락을 따라 소사역과 송내역까지 이어지는 제2코스 '산림욕길'로 들어선다.
도심 가까운 여느 산처럼 등산로가 반듯이 정비되어 있다. 높은 계단을 한참 올라 능선마루 벤치에 앉아 자켓을 벗고 바나나 하나를 깨무니 씁쓸한 입이 반긴다. 성주산 주변에는 군 부대 훈련장이 산재하고 정상 좌측은 온전히 군 부대가 차지했다. 집을 지키고 보호하는 신을 뜻한다는 '성주(聖柱)'라는 이름답게 여러 고개와 많은 골짜기를 품고 있다.
해발 216.5미터 정상 턱밑에 자리한 정자를 지나 와우고개로 내려섰다. '솔내길', '두근두근 설레는 길', '자박자박 오르는 길' 등 생소한 길 이름을 알리는 이정표에 머리가 어지럽다. 안성 칠장산에서 시작해서 소래산, 성주산, 철마산을 지나 계양산, 필봉산, 학운산 등을 거쳐 김포 문수산까지 뻗어 가는 한남정맥, 개발이라는 망나니에 난도질 당하며 북서진하다가 시흥 부천 인천 경계지역에 일단의 산군을 흩어 놓는다. 이 부근에선 '인천종주길', '부천둘레길', 시흥늠내길' 등 지방자치 시대에 새로 생겨난 이름들에 묻혀 한남정맥 이정표는 눈에 띄지도 않는다.
6번 버스 종점을 지나 거마산 자락 '두근두근 설레는 길'로 접어든다. 군 부대 울타리를 왼쪽 옆구리에 끼고 나무 계단을 오르고 능선 마루에 올라서서 철책 보수공사가 한창인 능선을 한참 휘돌면 해발 210m 거마산 표지석이 반겨준다. 길 이름과 달리 마음은 그리 설레지 않는다. 평평하고 밋밋한 거마산 정상부에는 벤치에 앉은 사람들이 듬성듬성한 참나무 숲에서 세파의 때를 헹궈내고 있다.
거마산 능선을 타고 인천수목원 쪽으로 내려와서 서울외곽순환도로 장수 IC 고가도로 밑을 지난다. 널빤지와 철망 등으로 얼기설기 지은 산기슭 견사에서 견공들이 일제히 짖어댄다. 낯선 발소리를 경계하는 건지 반기는 건지 모르겠다. 도로와 연결된 입구에 'ㅇㅇ진돗개 중앙회'라 적힌 푯말이 있다. 개는 수명이 사람보다 훨씬 짧다. 사람에게 사랑받으며 사는 것이 그 짧은 생에 대한 유일한 보상일텐데 허름한 막사에서 기약없이 분양을 기다리는 견공들이 애처롭다.
견공들의 우짖는 소리를 뒤로하고 무네미로 아래로 놓인 지하보도를 건넜다. 몇몇 라이더들이 눈에 띄고 자전거가 빼곡히 진열된 지하보도 저쪽 끝에는 노점주인이 두리번거리는 산객을 수박 서리꾼 감시하듯 주시하고 있다. 차량 소리만 요란하고 인적이라곤 없는 '수현 향토음식마을' 앞을 지나고 만수동으로 넘는 '보세이 고개'를 따라단다. 고갯마루에서 우측 물넘이뒷산으로 드는 길이 보인다. 고도가 그리 높지 않지만 산길은 가파르고 정상부는 유럽 어느 지방의 고성처럼 군부대 시설물이 차지하고 앉았다.
물넘이뒷산 정상부 아래로 휘돌아 광학산과 철마산 자락으로 건너 탔다. 오름은 가파르고 땀이 몸에 배이지만 시원한 바람이 천군만마다. 드문드문 눈에 띄는 리본은 한남정맥을 지나고 있다고 알려준다. 말이 정맥이지 군부대 철조망과 고개를 가로지르는 도로들이 맥을 군데군데 막고 끊어 놓았다. 철망은 코팅한 A4 용지에 '한남정맥 철마산 201m'라 적힌 안내표지가 나무 가지에 달려 있는 정상까지 치고 올라왔다.
철마산에서 만수산까지는 길이 좋은 편이다. 만수산 전망대에 서니 멀리 문학경기장과 그 너머 우뚝한 송도 빌딩 숲이 미세먼지에 싸여 희미한 윤곽을 보이며 신기루처럼 솟아 있다. 만수산도 해발 201미터다. 지나 온 산이나 앞으로 올라야 할 산도 모두 해발 200미터 남짓으로 높이가 엇비슷하다. '116봉'을 제외하곤 그 대부분이 '봉(峯)'이 아니라 '산(山)'이라 이름 붙었다. 진나라가 천하을 통일하기 전 작은 나라가 난립하던 춘추전국처럼 고만고만한 높이 산들이 모여 있어 어느 것은 산(山) 어느 것은 봉(峯)이라 이름하기가 어려웠던 것일까?
큰 동네를 끼고 있어서 제법 많은 산객들이 눈에 띄는 만수산 정상에서 내려와서 인천둘레길 제5코스를 따라 '거머리산' 쪽으로 향했다. 둘레길은 만수산 자락에 접한 만수동 골목을 지난다.
"가자미 있어요 가자미~".
"병어 낙지 도다리 있어요 도다리."
생선을 파는 차량 스피크가 갈치, 고등어자반, 조기, 쭈꾸미, 동태 등 온갖 생선을 고루 갖추고 있다고 연신 목청을 돋운다.
수현로를 사이에 두고 물넘이뒷산 건너편에 있는 두 산 가운데 국골산을 애써 외면하고, 평탄한 능선을 따라 표지석이 보도블록처럼 바닥에 놓인 해발 125m 거머리산에 도착했다. 잎이 돋지 않은 아카시아 고목들이 서 있는 거머리산 정상이 신록이 넘쳐나는 주변과 묘한 대조를 보인다.
거머리산과 116봉 사이에 자리한 '장수 정수장'으로 내려섰다. 진듸가 깔린 정수장 상부에 '장애인 파크골프장'이 조성되어 있지만 인적은 없다.
116봉 기슭에 우리나라 초초로 천주교 세례를 받고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종 등과 함께 순교한 베드로 이승훈의 진묘(塵墓)가 있다. 유골은 1981년 경기광주 천진암 성지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의 묘 아래에 장남 이택규와 3남 이신규 마티아도 함께 잠들어 있다. 이신규는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에 이어 1868년 병인박해 때도 체포되어 결국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무덤 주위에 만발한 분홍빛 꽃잔듸, 하양 패랭이꽃, 노란 가락지나물꽃, 보라빛 제비꽃 등 앙증맞고 귀여운 꽃들이 그의 고귀한 신앙심을 찬양하고 고달팠을 생애를 위로하고 있다.
116봉을 내려서서 무네미로 지하보도를 지나면 별천지처럼 캠핑장, 족구장, 축구장, 인라인스케이트장 등 체육시설을 비롯해서 꽃 전시관, 수목원, 식물원, 조각원, 야행초화원, 백범광장 등이 자리한 인천대공원이 나타난다.
공원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용등산을 지나쳐 백범광장을 거쳐 관모산으로 오른다. 피라미드처럼 삼각뿔 모양의 관모산 정상까지는 가파른 나무계단이 놓였다. 힘겹게 600여 개 계단을 올라서니 먼저 오른 산객들과 상춘객들이 마루처럼 목판이 평평히 깔린 정상 곳곳의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다.
해발 162미터 관모산은 사방이 툭 트인 전망을 선사하지만 미세먼지와 황사 때문인지 시야는 멀지 않다. 건너편 소래산이 의젓하고 그 사이에 봉긋 솟은 달아산은 아담하다.
방향을 잘못 잡아 내려갔던 계단 270여 개를 거슬러 정상 쪽로 다시 오르는 알바를 했다. 계단 중간 중간에 적힌 안내문 대로라면 수명을 20여 분이나 연장하는 기꺼운 알바인 셈이다.
해발 151미터 상아산을 거쳐 마지막 코스로 남겨둔 오늘 산행의 백미요 하일라이트인 소래산으로 향한다. 상아산과 소래산 사이 만의골로 내려가서 조선시대 관료 김재로의 묘 쪽에서 소래산 자락으로 들었다. 지그재그 급경사를 올라서니 안부 건너편에 소래산이 거대한 피라미드처럼 솟아 있다.
안부에서 시작된 비탈길은 난간이 있는 나무계단 길로 인도한다. 해발 299미터 정상까지 고도 차이가 약 200미터 쯤으로 짐작된다. 계단 하나 높이를 25cm로 치면 800 계단을 올라야 한다. 300, 500,... 간간이 멈추어 서서 숨을 고르고 다리를 쉬다보니 앞서 간 친구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산행 막바지 고비는 신록과 바람과 산 밑 차량의 굉음이 동행을 한다.
경사로 보아 계단이 없다면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하지 싶다. 계단은 850개를 헤아라며 정상에서 끝이 난다.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이 바위로 덮힌 길쭉한 형세의 정상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있다. 다들 소래산이 펼쳐놓은 멋진 경관에 마음이 들떠서 오래도록 자리를 뜰 줄을 모른다. 산 아래 대야동 고층 아파트 군락과 멀리 시흥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조망도에 표시된 군자봉, 마산, 수암봉, 수리산, 구름산과 서울의 관악산, 잠실 L타워 등은 먼지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서쪽으로는 문학구장, 문학산, 송도 빌딩군이 흐릿하게 보이고 햇빛을 반사하는 인천 앞바다가 손바닥만큼 얼굴을 내밀고 있다.
'소래(蘇萊)'라는 지명은 소라처럼 생긴 지형, 숲이 많은 냇가라는 솔내(松川), 지형이 좁다는 뜻의 '솔다'에서 각각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한편,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 공략을 위해 산동성 래주(萊州)를 출발하여 덕적도를 거쳐 이 산에 머물렀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단다.
시흥대야역 방향으로 하산을 재촉했다. 정상 북단 아래 절벽의 마애보살입상과 소래산 남쪽 자락의 내원사, 소산서원 등은 다음 기회에 찾아 봐야할 듯 싶다. 청룡약수터 약수 한 모금에 산행 피로가 말끔히 씻기는 듯 하다. 철쭉 동산을 지나 소래산 산림욕장 입구로 내려섰다. 대략 10시간 동안 24km, 11개 산(山)과 1개 봉(峯)을 둘러본 기록?에 남을 만한 날이다. 에어샷으로 등산화의 먼지를 털어내며 긴 산행을 마무리하니 마음까지 산뜻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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