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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가 되는 인생
(에스겔 24:15-27)
[ 서론 ]
사람의 인생은 메시지가 됩니다. 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 여러분도 이 말에 공감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고자 하는 대학의 학과에 입학한 대학생이 있다면 어떨까요? 그의 입시 생활 이야기는 여러분에게 큰 도전을 줄 것입니다. ‘나도 저런 마음과 저런 방식으로 공부해야지.’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가정폭력과 가난 등 온갖 삶의 풍파를 겪고서도 다른 이들을 돕는 사람의 삶은, 큰 울림을 줍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헬렌 켈러, 이순신, 테레사 수녀 등의 위인전을 읽으며, 인생이 메시지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인생 역시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처음 에스겔이 선지자로 임명받았을 때, 7일 동안 두려워 떨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이 선지자로서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힘을 주셨습니다. 에스겔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시길” 또는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실 것이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강하게 하셔서, 그의 인생이 곧 메시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메시지로 드린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을 들읍시다. 그리고 우리와 같은 인생을 메시지로 빚어가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갑시다. 마지막으로 우리 인생을 어떻게 메시지로 드릴 수 있을지 배우며 그렇게 살기를 결단합시다.
[ 메시지가 된 에스겔의 인생 ]
첫째, 메시지가 된 에스겔의 인생을 주목합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선지자에게는 ‘말’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선지자는 “말 못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전혀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만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대부분,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유다와 그 수도였던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는 심판 예언이었습니다.
“말 못하는 선지자”답게, 에스겔은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시키신 행동은 대부분 우스꽝스러운 것들이었습니다. 몇 가지만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에스겔은 온몸을 줄로 꽁꽁 묶고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채로 430일을 지냈습니다. 이 기간은 하나님의 백성이 범죄한 430년을 상징했습니다. 에스겔은 그중 390일 동안 사람들 앞에서 쇠똥에 불을 피워서 그 위에 보리 떡을 구워 먹으며 지냈습니다. 상상만 해도 더럽고 부정한 일이었습니다.
또 에스겔은 칼로 머리털과 수염을 깎고선, 성안에서 불로 태우고, 성 사방에서 칼로 치며, 바람에 흩었습니다. 백성들이 전염병과 기근을 당하거나, 칼에 죽임을 당하거나, 사방으로 흩어지는 심판을 상징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에스겔은 한밤중에 포로 차림을 하고 사람들 앞에서 성벽을 뚫고 지나갔습니다. 벌벌 떨면서 음식을 먹고, 놀라고 근심하면서 물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이런 에스겔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유배지의 미치광이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에스겔에게 종종 하나님의 뜻을 묻기도 했지만, “비유로 말하는 자”라며 그를 비웃었습니다.
어쩌면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마다, 또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두렵지 않았을까요? 오늘 본문 24:15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또” 에스겔에게 임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에스겔의 인생에서 받아들이기에 가장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1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눈에 기뻐하는 것”을 빼앗겠다고 하십니다. “기쁨”이라는 말만 듣고서도, 에스겔은 그 “기쁨”이 가리키는 대상을 바로 압니다. 에스겔이 최고로 기뻐하는 대상은 바로 그의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의 아내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가 되었을 때 그의 아내도 함께 포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에스겔이 선지자가 되었을 때, 그의 아내도 함께 험난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에스겔이 줄로 몸을 묶고 누워 지낼 때, 누가 쇠똥에 떡을 구워서 그에게 먹였을까요? 에스겔이 미치광이처럼 머리카락과 수염을 불태우고 칼로 치며 흩날릴 때, 누가 곁에서 그 모습을 진지하게 지켜보았을까요? 한밤중에 포로 차림을 하고 성 밖으로 나가는 에스겔을 도운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이 모든 일을 겪고도 에스겔의 곁에 끝까지 머무른 단 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에스겔의 “눈에 기뻐하는 것”, 곧 그의 아내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떠나도 에스겔의 아내만큼은 끝까지 그의 곁에서 함께하며 그를 사랑한, 에스겔의 기쁨 중의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에스겔의 아내를 갑자기 죽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에스겔에게 애도 행위를 금지하십니다. 이 당시 가족이 죽을 때 지키던 풍습이 있었습니다. 베옷을 입고 재나 먼지를 머리에 뿌립니다. 턱수염과 머리를 깎고 땅에 눕습니다. 그리고 맨발로 다니며 큰 소리로 애도합니다. 이렇게 슬픔을 한껏 표현한 후에, 죽은 사람과 그에 대한 슬픔을 모두 떠나보냅니다.
하지만 16-1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큰 소리로 애도하지 말고, 울거나 눈물을 흘리지도 말며, 그저 조용히 탄식하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라고 하십니다. “수건”으로 번역된 말은, 축제 때 머리에 쓰는 터번, 모자입니다. 아내의 죽음 앞에 축제 의상을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에스겔에게 허락된 유일한 기쁨인 아내를 빼앗으시고서는, 슬퍼하지도 못하게 하신 이 말씀! 순순히 받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에스겔은 18절에서 담담하게 말합니다.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이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서 축제 의상을 입고 조용하게 장례를 치르는 남편의 모습이 어떻겠습니까? 너무도 이상하기에, 오히려 너무도 무거운 슬픔이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이 모습을 본 백성들은 차마 에스겔에게 아무런 위로도 건네지 못합니다. 에스겔의 충격적인 행동이, 그만큼이나 충격적인 다른 무언가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껏 에스겔을 무시하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던 백성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19절입니다. “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너는 우리에게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에스겔이 자기 기쁨과 사랑을 걸고서 보인 행동이, 드디어 백성들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에스겔은 21절에서 백성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전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성소는 너희 세력의 영광이요 너희 눈의 기쁨이요 너희 마음에 아낌이 되거니와 내가 더럽힐 것이며 너희의 버려 둔 자녀를 칼에 엎드러지게 할지라”
에스겔의 아내가 에스겔에게 최고의 기쁨이었듯이, 백성들에게는 성전이 최고의 기쁨이자 자랑거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이 있는 한,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더라도 절대 망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습니다. 비록 그들은 잠시 포로로 잡혀 왔지만, 그들의 자녀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옛 영광을 되찾으리라고 소망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이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듯이, 백성들이 사랑하던 성전과 자녀를 잃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이 아내를 잃고 조용히 슬퍼할 수밖에 없었듯이, 백성 역시 성전과 자녀를 잃고 멍하니 탄식할 수밖에 없으리라 말씀하십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에스겔이 그랬던 것처럼, 백성들도 애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축제 때 쓰는 터번을 머리에 쓰고 신발을 벗지도 못할 것입니다. 충격을 받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탄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의 상실과 조용한 슬픔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걸 보고도! 내 선지자가 자기 인생과 기쁨과 사랑을 다 걸고서 보여주는 이 모습을 보고도 돌이키지 않겠느냐?!” 이처럼 에스겔이 삶으로 전한 메시지는 애절하고 강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지자가 인생을 걸고서 전한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이 강렬한 메시지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끝내 돌이키지 않은 그들에게 비극이 일어나고야 맙니다. 성전은 파괴되고 자녀들은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애도할 힘도 없이 그저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제 우리가 두 번째 내용을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만으로는 세상은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인생이 되신 메시지, 육신이 되신 말씀이 필요합니다.
[ 인생이 되신 메시지 ]
2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표징”이라고 부르십니다. 에스겔의 상실과 슬픔은 백성들의 상실과 슬픔을 가리키는 표징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날 때,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 여호와이신 줄 알게 됩니다.
“여호와”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백성들을 아내처럼 기쁘게 여기시고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죄에 빠져 망해가는 것을 두고 보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를 보내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바벨론과 같은 강대국을 보내어 그들을 심판하셔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백성을 갈라놓는 죄에 대해 분노를 참지 않으셨습니다.
에스겔은 이처럼 거룩하고도 애절한 사랑으로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징이었습니다. 아내를 잃고 조용히 슬퍼하는 그의 인생은, 백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에스겔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의 삶이 되었습니다. 에스겔은 말씀의 성육신을 미리 맛본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참으로 육신을 입고 오신 말씀을 압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분은 마치 에스겔처럼,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이상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으로 불리셨습니다.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치셔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미움을 사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종처럼 섬기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병든 자를 고치시는 하나님, 우리를 섬기시는 하나님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에스겔은 그가 기뻐하던 아내를 잃음으로써 그 자신이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이제 에스겔의 메아리가 복음서에 울려 퍼집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3:17입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기뻐하는 자”라는 말은 이사야 42:1에서 구원을 베풀 여호와의 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또한 에스겔의 아내를 가리키던 “기뻐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실 때, 이삭을 부르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에스겔에게서 빼앗으신 그의 아내, 아브라함에게 바치라고 하셨던 이삭처럼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실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에스겔의 아내를 거두어가시고 애도를 금지하셨던 하나님께서 그 상실과 슬픔에 동참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에스겔의 자리로 오셔서 “기뻐하는 자”를 잃으셨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친히 에스겔의 아내의 자리로 오셔서 “기뻐하는 자”로서 죽으셨습니다. 기뻐하는 아들을 상실하신 아버지께서 이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걸 보고도!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를 내어준 이 사랑을 보고도 돌이키지 않겠느냐?!” 이것이 바로 인생이 되신 메시지, 인간이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메시지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26절에서 성전이 파괴되고 자녀들이 죽는 날에 예루살렘에서 도망친 사람이, 에스겔과 백성들이 있는 바벨론 땅으로 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27절에서처럼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만 이야기하던 에스겔의 입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때부터 에스겔은 더 이상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지 않습니다. 이방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입이 회복된 에스겔이 또다시 “표징”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24절에서는 에스겔이 아내를 잃고 애도하지 못했던 것이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27절에서는 에스겔의 입이 회복되어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리키는 표징이 됩니다. 표징이 된 에스겔은 두 번 모두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여호와이신 줄 알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분의 상실뿐만 아니라 회복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줍니까? 에스겔의 상실, 그리고 우리의 상실이 영원한 상실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잃은 줄 알았던 기쁨을 다시 찾을 것입니다. 그 기쁨은 잃을 수 없는 참된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0:29-30입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 상실과 회복의 대상에 ‘아내’ 역시 포함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에스겔이 누구보다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을까요?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위하여 기쁨을 잃은 자는 영원히 그 기쁨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생명을 상실하시고 되찾으시며 확증해주신 말씀입니다.
[ 메시지가 되는 우리의 인생 ]
에스겔과 그리스도를 지나 마지막으로, 메시지가 되는 우리의 인생을 살펴봅시다. 고린도후서 2:14-16, 3:3에서 이야기하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입니다. 그리스도께 매료되고 사로잡혀서 그분을 알리는 자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2:9에서 이야기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과 행동, 전인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토대로, 메시지가 되는 우리 인생의 세 가지 특징을 배웁시다. 첫째, 메시지가 된 우리 인생은, 세상의 거짓되고 부실한 생각들을 드러냅니다. 에스겔의 메시지를 통해, 성전만 있으면 괜찮다고 하던 백성들의 안일한 생각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성전이 백성들을 지켜줄 것이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뿌리가 없는 안일한 생각에 젖어있었습니다. 결국 성전은 파괴되었고, 그들의 자녀들마저 죽임을 당했습니다. 거짓되고 부실한 생각은 우리 삶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자기 삶을 지켜줄 것들을 찾아 방황합니다. 거짓되고 부실한 생각에 쉽게 사로잡힙니다. 잘못된 대상에게서 안전과 평화를 찾습니다. 중고등학생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좋은 성적을 받고 소위 “좋은 대학”에 가면 꽃길이 펼쳐진다는 말들이 들리지 않습니까? 반대로 입시에 실패하면 영원한 패배자가 된다는 말들도 들리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좋은 대학 뒤에는 좋은 직장이, 좋은 직장 뒤에는 좋은 배우자, 좋은 배우자 뒤에는 좋은 자녀, 좋은 자녀 뒤에는 좋은 노후라는 것들이 줄줄이 여러분을 압박할 것입니다.
그런 말들과 생각들이 어떤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까? 생존경쟁에서 패배했다는 생각, 자기 인생만 풀리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가 능력과 기능으로 결정된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인간성을 고갈시키고 있습니다. 자녀를 완벽하게 길러야 한다는 생각들이 교사를 함부로 대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이런 거짓되고 부실한 생각들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이들은 이런 생각들을 따르지 않기에, 때로 에스겔처럼 무시당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그렇게 살다가는 망한다’며 바보 취급을 당합니다.
하지만 성실히 공부하면서도 성적과 입시에 얽매이지 않는 학생은, 성적으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폭력적인 교육 환경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기에 가진 것 없어도 감사하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소유와 성취로 일희일비하는 세상의 가벼움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존귀하게 대하는 이들은, 서로 차별하고 차별받는 속 좁은 세상에 빛을 비춥니다(마 5:16).
이처럼 거짓되고 부실한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매인 우리 삶은, 세상을 고발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따라야 할 메시지, 그 말씀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세상과 하나님 말씀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삶을 살아갑시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실과 슬픔조차 선하게 사용하십니다. 에스겔의 상실과 슬픔은 하나님의 심판과 그분의 신실한 사랑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전에 겪은 상실의 경험은 어떻습니까? 비슷한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로하는 힘이 됩니다. 우리 가슴을 멍들게 했던 슬픔은, 서로의 아픔을 공감해줄 수 있는 너른 품을 만들어 줍니다.
상실과 슬픔의 이유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상실과 슬픔마저도, 우리 인생을 그분의 메시지로 빚는 재료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롬 8:29).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상실과 슬픔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사건으로 반전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상실이 우리의 상실을 압도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회복은 우리의 상실을 회복으로 바꿀 소망을 줍니다.
셋째, 메시지가 되어가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십니다. 에스겔은 선지자로 임명받자마자 근심하며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강하게 하셔서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며 행동하게 하셨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점점 그분의 마음을 알아갔을 것입니다. 백성을 사랑하시되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갔을 것입니다. 결국 에스겔은 인생의 가장 큰 슬픔 앞에서도 담담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만큼 강해졌습니다.
에스겔을 강하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역시 강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에스겔이 멀리서 기다리던 참 선지자, 우리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더욱 분명히 알고 믿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한없이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로마서 8:31-32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갈수록, 우리 삶을 하나님의 메시지로 드리고 싶은 갈망이 커집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까지 내어주신 분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신다는 확신이 커집니다. 지금도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담대하게 말씀
따라 살아갑시다.
[ 결론 ]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분의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로 빚어가십니다. 그 메시지는 말씀에 생명을 거신 메시아, 우리 주님입니다. 메시아이신 주님의 복음, 그 메시지를 우리 온 인격으로 전하는 메신저가 됩시다. 우리의 메시아는 메시지가 된 메신저, 우리를 통해 영광 받기를 기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