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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기자클럽에서 퍼온 글입니다.
제가 여러분이 직접 가시는 노고를 들어드리렵니다.
내용에 나오는 <아! 고구려...>라는 소책자를 언젠가
풍경방에 소개하고 싶었었는데
<1,500년 전 集安(집안)고분 벽화전 아! 고구려...>
1994년 전국순회전시회를 기획하셨던 분의 이야기이고 제가
좋아하는 이동진 기자님이 쓴 글에다 내용이 너무 알찹니다.
아울러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작성자 : 이동진
제목 : 선배를 보내드리며
월요일 아침 9시.
폭설이 내리던 순간 어디에 계셨는지요.
저는 그 순간 선배를 보내드리고 있었습니다.
월요일자 신문을 눈여겨보신 분들이라면, 기억이 나실 수도 있겠지요.
그 시간은 조선일보 서희건 논설위원의 장례식이 있었던 시간입니다.
서희건 위원은 문화부 기자로만 30년 가까운 세월을 지켜오신 분입니다.
저는 그 분과 단 한번도 같이 직접 일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문화부에 왔을 때는 그 분이 이미 다른 쪽 일들을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화부 기자’를 입사전부터 꿈꿔왔던 저로서는 그분에 대해 정말 많은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선친께서 양계장을 운영해 학비를 대셨기에,
‘닭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평생 닭고기와 계란을 드시지 않으셨다는 분.
그 분은 선비 같고 학자 같고 무엇보다 아버지처럼 느껴지는 그런 대선배였습니다.
제게 그 장례식이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바로 그 분과의 마지막 인터뷰를 제가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동조합 사무국장인 저와 위원장인 김원배 선배는 한달쯤 전 그 분이 위독하시다는 말을 전해듣고 함께 ‘인터뷰’를 하러 갔습니다. 몸 조차 가누기 힘든 선배는 인터뷰를 시작하며 “내가 하는 마지막 인터뷰가 되겠구나”라고 말씀하셨는데,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직업이 기자인 저는 업무상 수많은 인터뷰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그 3시간 동안의 인터뷰만큼 저를 뒤흔들었던 인터뷰는 없었습니다.
일단 아래에 그때 그분을 뵙고나서 노보에 썼던 인터뷰를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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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맛있는 것 좀 먹자.” 부인의 부축을 받고 약속 장소로 들어서 악수를 청하면서 성성한 머리에 모자를 눌러쓴 그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이제는 자유를 얻었어. 의사가 이젠 마음대로 먹고싶은 것 다 먹고 하고싶은 것 다 해보래. 그런데 먹고싶은 음식을 간신히 생각해내서 입에 넣어보면, 옛 맛이 아니야.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자리에 앉자마자 느릿느릿 남 이야기 하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서희건 논설위원을 자하문 터널 옆 중국음식점 하림각에서 만났다. 서 위원은 24일부터 자택에서 암과 싸우고 있다. 지난 2월 위암 수술 후 항암치료를 받았던 서 위원은 6월에 다시 출근해 몇달을 근무했었다. 함께 자리를 같이 한 부인은 “이전엔 전혀 보이지도 않던 암 관련 기사가 매체마다 어쩜 그리도 많던지요”라면서 “요즘은 주변에서 알려주는대로 이런저런 방법들을 써보고 있어요”라고 일러줬다.
메뉴판을 보던 서 위원은 게살 수프와 해삼 쥬스를 주문했다. 후배들이 술 먹는 걸 보고싶다면서 고량주도 시켜 한 잔 가득 따라주었다. 서 위원도 잠시 입을 축이더니 “수술 후 술 맛을 본 게 처음이네”라고 말했다. 걱정되어 “술 조금만 하시죠” 했더니 “맛있다, 야. 나는 의사도 허용한 대자유인이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서 위원은 게살 수프를 첫 숟가락엔 가득 담아 입에 넣더니, 두번째부터는 조금씩 담았다.
수습 기자 시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서 위원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7층 강의실을 벗어나 박물관 나들이를 한다는 것 자체도 좋았지만, 신라 금관에서 고려 청자에 이르기까지 문화재 하나하나에 대한 그분의 해박한 해설은 정말 깊은 감명을 주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저 ‘선배’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사사편찬실장 할 때 정문에 걸려 있던 3호 신문에서 ‘바를 정(正)’ 글자가 거꾸로 인쇄된 것을 발견하는 순간 짜릿했지. 나중에 일부 입수된 창간호에서도 그렇게 되어 있더군. 당시 조선일보인들의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이 그렇게 발휘된거야. 그런 거 발견하면 참 행복해.”
그렇게 서 위원은 ‘행복한’ 기자생활을 했다. 86년 주간조선과 본지를 오가며 쓴 ‘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 ‘국사 교과서 새로 써야 한다’ 시리즈 기사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뒤 단행본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로 묶여 나와 모두 20만권이 팔리는 수퍼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덕분에 우리 두 아이들하고도 친해졌지, 뭐”라고 한 서 위원은 “인세 도장을 하나 찍으면 10원씩 준다고 했더니 당시 초등학교생이던 남매가 경쟁하듯 찍어대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고 덧붙였다.
“그러고보니 내일이 ‘일본 속의 한민족사’ 15차 탐방단이 떠나는 날이네. 80년대 말 처음 시작할 때 내가 직접 강사진을 짜고 오리엔테이션을 하던 일이 생생해. 저번에 건강이 잠시 좋아졌을 땐 올 강사 명단에 넣는다고 사업국에서 전화가 왔었는데.” 서 위원의 기사에서 시작해 기획 사업으로까지 이어진 이 프로그램은 그간 15차례에 걸쳐 모두 8000여명이 참가했다. 서 위원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94년 ‘아! 고구려’전 역시 300만명 넘는 관람객을 끌어들이며 국민들의 민족정신 고취에 큰 몫을 했다. “최근 보도된대로 고구려 고분 벽화들이 도둑맞았는데, 그때 김주호씨가 사진을 찍어 그거라도 남게 됐잖아? 역사라는 게 과거지만 결국 미래를 보고 하는 거야.”
69년 기자생활을 시작한 서 위원은 81년 조선일보로 옮겨와서 올해 20년 근속상을 받았다. 87년부터 문화재 전문위원을 지내는 등 문화재 종교 학술 분야의 전문 기자로 폭넓게 활동하면서 문화부 기자로만 30여년을 살아온 셈이다. 휘문고 1학년 때부터 교내 신문 기자로 활약했다니, 그때부터 치면 무려 40여년의 세월이다. “고등학교 때 그거에만 정열을 쏟는 바람에 대학에 떨어졌다고 생각해서 다신 안 한다고 결심했는데, 대학에 가서 월급을 준다는 말에 그만 솔깃해서 또 그 짓을 시작했지. 허허.” 그는 73개월 재임으로 98년 삼성언론재단에서 집계한 역대 최장수 문화부장이기도 했다.
84년 성철 스님과의 인터뷰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기사이다. 당시 서 위원은 백년암까지 세번이나 찾아갔지만 얼굴도 보지 못해 헛걸음을 한 뒤, 결국 법정 스님을 통해 절 밖에 서서 서면 답변서를 받는데 성공했다. 답변서를 받아든 서 위원은 “온 김에 인사라도 드려야죠”라며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들어가 성철 스님을 뵙자마자 삼배를 올렸다. 말문이 트인 스님과 서 위원은 득도 과정에서 어머니와 딸에 관한 이야기까지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성철 스님이 “장님한테 뭐가 보이겠어?”라고 반문했다는 이야기를 회고할 때, 그는 작은 소리로 “아, 기사 쓸 땐 장님이라고 쓰면 안 되지”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기자였다.
“인생에서 일원짜리 길과 백원짜리 길이 있다면 백원짜리 길을 가는 게 당연하다”는 성철 스님의 말을 인상적으로 되옮기는 서 위원 모습을 보다가 철없게도 “참 행복한 기자생활을 하셨죠?”라고 물었다. 그는 “그렇지”라고 바로 말을 받았다. “난 신문기자직을 후회해본 적이 한번도 없어. 지난 6월에 의사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다시 출근했더니 다들 놀라더군. 하지만 지난 몇달동안 난 정말 즐거웠어. 동료들은 좀 측은했겠지만. 기자란 직업은 내게 정말 딱 맞는 직업이었던 것 같아. 훌륭한 선배들 은덕도 참 많이 입었지만, 일일이 지시 안 해도 제대로 해내는 똑똑한 후배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도 정말 행운이었어. 명예만 좇지 않는다면 기자는 참 좋은 직업이야. 사회에도 봉사할 수 있고, 얼마든지 꿈을 펼쳐갈 수도 있고.”
곁에 앉은 부인 차명희 여사는 서 위원과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다. 가정법률상담소 부소장을 지내고 여성특별위원회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면서 평생 여성운동을 해왔다. “이 사람은 평생 자기 일 열심히 한 사람이예요. 그러면서 내 일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밀어줬죠. 이렇게 돈도 안 되는 일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남편도 없을 거예요.” 서 위원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이규태 고문”이라며 “그 분이야말로 정말 정년도 필요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신문기자는 넓고 깊게 보는 기획을 해야지, 짧게 특종싸움만 해서는 안돼”라는 말을 남겼다.
혹시라도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할까봐 극도로 조심을 했지만, 두시간 반 동안의 점심 식사 시간 동안 정작 서 위원은 너무도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갔다. “이달 초 의사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소리를 들었어. 아직 정신이 멀쩡한데, 정말 황당하더라. 그 소릴 들으니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어서 아내와 함께 제부도에 가서 방파제에 올라갔더니 갑자기 구토가 나고 통증이 몰려와요. 결국 다시 돌아오다가 일부러 저녁을 먹으러 마포 최대포집에 갔지. 드럼통 화덕에 돼지갈비를 굽고 백세주를 먹는데 도통 맛이 없어서 못 먹겠더라구. 식당에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각자 얘기를 왁자지껄 풀어놓으며 식사를 하는데, 참 기분이 이상했어.”
서 위원은 “정년 퇴직 후 할 일들을 많이 기획해놓았었는데 그걸 못하게 되어서 아쉽다”면서 “내 마지막 취재가 오늘 나를 대상으로 한 취재가 됐다”고 말했다. 고개를 숙인 채 붉은색 냅킨을 접고 또 접던 사모님이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얼마나 충실한 운전기사인데요. 또 나가면 되지”라고 말하자, 그는 “그냥 인생을 열심히 잘 살아서 조기졸업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사실 별 것도 아닌 거야”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대선배의 차분한 눈빛을 받아내기 어려워 머리를 박고 짜장면을 꾸역꾸역 입에 처넣고 있는 스스로가 너무도 미욱스럽게 느껴졌다.
서 위원은 긴 점심 시간 내내 즐거워했다. 식사를 마치기 직전 사진을 찍었더니 부인이 옆에서 “웃어, 웃어요. 얼굴에 살이 빠지면 사진이 더 잘 나와”라고 했다. 음식점을 나서며 서 위원은 “오늘 오랜만에 참 잘 먹었다”고 했다. 그 말이 더없이 고맙게만 들렸다. 엘리베이터에서 그는 “무슨 일이든 아이디어가 있으면 미루지 말고 그 자리에서 해. 난 정년 이후로 미뤄뒀다가 못하게 됐잖아?”라는 말을 남겼다. “건강하십시오”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황망하게 서 있는 우리들을 향해 차 안에 탄 서 위원은 세 번이나 거듭 손을 들어 미소를 머금은 채 인사를 했다. 그때 제대로 하지 못했던 마음 속 말을 쏟아놓을 공간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서희건 선배 건강하십시오. 지난 유월에 그러셨던 것처럼 갑작스레 다시 회사로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입사 후 한번도 보지 못했던 화 내시는 모습도 꼭 한번 보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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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기사의 말미에 간절한 소망을 담아 그렇게 썼지만, 솔직히 저도 선배가 다시 돌아오시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 글이 힘겹게 투병중인 그 분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쓰는 내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존경할만한 한 선배의 삶을 저의 졸렬한 글로라도 꼭 한번 다시 반추하고 싶었습니다. 선배가 그 노보기사를 읽고 눈물을 흘리셨다는 이야기를 전해오시며 사모님이 감사를 표하실 때, 더 감사한 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위엄있는 선배의 마지막은 제게 잊지 못할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사모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음식을 힘겹게 드시다가 흘리기도 하면 옆자리에 앉았다가 곧바로 닦아주기도 하셨던 사모님의 얼굴은 제게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희에게 느릿느릿 말씀하시는 서 위원을 세시간 내내 쳐다보고 있는 사모님의 표정은, 안타까움이나 슬픔의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을 한없이 자랑스러워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 표정을 보면서, 저는 철없게도, 이제 예순도 안 되어서 돌아가시게 될 선배가 ‘행복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곤 그 선배의 삶이 부러워졌습니다. 20여년 조금 넘는 세월이 지나서, 제가 혹시 암에 걸렸을 때, (그리고 운이 좋아서) 까마득한 후배 기자가 저를 인터뷰하러 온다면, 그때 제 옆에 앉아서 지켜보는 아내의 눈빛에도 저런 표정이 담길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모님의 그 표정은 그대로 선배 삶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습니다.
토요일 오전에 돌아가신 선배의 부음을 처음 전해들은 것은,
바로 이 클럽 신년회가 있었던 토요일 밤이었습니다.
제 핸드폰에 문제가 있어서 연락을 늦게 받았던 거지요.
그때 저는 공교롭게도 회원분들과 함께 술집에서 ‘4차’를 하고 있었습니다.
참 재미있고 행복한 자리였는데, 선배가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일순간 멍해졌습니다. 자리를 뜨기 어려웠던 그는 애초 마음먹었던대로 모임을 2시까지 진행했습니다. 신년회의 흥겨운 분위기와 선배의 부음 사이에서 혼란스러웠지만, 나름대로는 티 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긴 했습니다.
일요일에 상가에 가서 밤을 꼬박 새면서,
가장 슬펐던 순간은 선배의 영정에 절을 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서희건 위원과 오랜 세월 함께 일하셨던,
지금은 조선일보를 떠나 계신 또다른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서셨을 때였습니다.
걸쭉한 욕설로 유명한 그 선배는 통음 끝에 만취하셔서 서 위원의 아들을 끌어안으셨습니다. 그리곤 자신의 구두를 찾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향해 욕설을 퍼붓다가 바닥에 주저 앉아 마침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장면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문사 일도 세상 일과 같아서 결국 점점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아직 우리에게 이런 풍경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서 전 한줌의 안도감을 느낍니다.
12월의 첫째날 이 코너에 서 위원의 투병과 관련해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날’이란 일기를 쓴 적이 있습니다. 이제 한달만에 다시 쓰는 일기는 그 선배의 마지막을 전하는 일기가 됐네요.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셨던 서 선배.
이제 그곳에서 편안히 쉬십시오.
당신은 정말 훌륭한 기자였습니다.
2002-01-23 11:19:17
첫댓글 할 말이 너무나 많아서 아무말도 못 하겠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동명이인이 참 많기도 하구요.
선배 기자와 후배 기자의 모습이 ,,무척 감동적이어서 가슴 저리며,,,,눈시울이,,,,자기의 할 바를 모두 충실히 해가며 지낸 언론인이 맞는 죽음의 순간에,,,의연할수있는 모습,,,우리 모두에게 언젠가는 닥칠 일인데, 그렇게 그 상황을 맞을 수 있을까?,,,,,,,,,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