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미(美)의 정의와 의미
미(美)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걸음 나아가 생각해보면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가장 본질적인 인간의 가치체계를 이루는 총체적인 요소들에 대한 사고인 것이다. 미(美)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크게 동양과 서양으로 나뉘어 설명될 수 있다.「說文解字(설문해자)」에 따르면 동양에서는 본래 미각, 즉 맛이 있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문자의 구성은 羊과 大字를 합친 것으로써 크고 살찐 양이 맛이 있다는 의미를 지녔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美와도 같은 뜻으로 쓰였으며 義, (유)와도 상통되었음을 여러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공자와 맹자도 그 중 특히 善과의 동질적 관계를 언급하였는데 공자는 「論語」에서 군자가 갖추어야 할 선행과 미덕을 기록하였으며 그 외 많은 문헌에서도 형상적 외관미 보다는 무형의 내관미를 강조하였다. 이에 반해 서양의 미에 대한 어의는 독일의 Schon 이라는 형용사가 사물, 행위, 마음, 사상, 언어 및 기술, 실험, 증명의 뜻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일반적 美의 본뜻은 아름다움, 고귀함, 훌륭함, 사랑스러움 등의 넓은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어, 라틴어에서는 좋다, 어울리다, 고귀하다, 뛰어나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아름다움」이라는 말의 어의가 우리가 일방적으로 생각해 왔던 단편적인 의미가 아니고 여러 가지의 큰 뜻이 혼합된 말임을 알 수 있다.
Ⅱ. 미의 본질과 가치
그렇다면 미의 본질과 가치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이에 관해서 17세기 후반부터 호움(H.Home)과 드 크루자(J.P.de.Crousaz) 는 미에 대해서 취미적이고 쾌락적인 것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고 보았으며 일찍이 미학을 명명한 바움가르텐(A.G.Baumgarten)은 미학이 미를 사()하는 학문으로서의 감각적인 인식의 학이라 하였고, 칸트(I.Kant)는 취미하는 능력으로 판정하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의 미학자 이택후는 미의 본질을 자연적 인화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두 갈래의 인화 즉, 대상의 인화, 자연의 인화가 있다고 말하고, 다시 외재자연은 객체세계를 미의 현실로 화하는 것이 미의 본질이라 하였으며, 내재적 자연은 주체심에서 얻어지는 미의 정감으로서 미감의 본질이라 하였다. 역시 중국의 미학자인 宗白樺(종백화)는 미의 본질이 우주, 자연, 인생과 예술적 형상의 표현 위에서 비롯되며 과학과 철학을 바탕으로 한 眞, 도덕과 종교를 바탕으로 한 善을 동반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미의 본질이나 가치 역시 여러 갈래의 뜻으로 접근될 수 있으나 몇 가지 원천적인 정리를 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미의 「구체적 체험성」을 들 수 있는데 美가 眞과 같이 모든 실천적 형태를 초월하는 내외적 상태라고 하는 공통점을 지니긴 하지만 자기 개별적이고 구체적 체험성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갖고 있다. 이는 快, 美 등이 지니는 내면적, 정신적, 추상성과 크게 구별되어지는 것이며 어느 의미에서 보면 철저히 주관적으로 체험되고 향유될 수밖에 없는 특성을 동반하게 된다. 두 번째는 객관과 주관의 합일성이 요구된다. 이에 관해서는 폴켈트(Johannes Volkelt)가 말한 주ㆍ객관의 긴장으로부터 비롯되는 통일성을 가리키는 것이며 주관적 충동이나 향유에서 초월한 보편적인 미적 자율성(die asthetische Autonimie)을 의미한다. 셋째로는 美와 快適(das Angenehme)과의 차이로서 여기에서 미는 블로(E. Bullough)가 말했듯이 일종의 심적 거리(Psychical distance)를 유지하는 신성에 기인하는 감각을 말하는 것이며 쾌적 또는 쾌락은 그러한 심적 거리가 제거된 주관성에 기인하는 생리적 감각을 말하고, 주관의 감정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가치체계에 변화를 일으킨다. 이를 쉽게 비유한다면 마치 「누드(nude)」와 「벌거벗음(naked)」이라는 말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전자는 결국 후자와 결과적으로는 동일한 상태이면서도 그 목적과 상태가 감각의 초월성에 기인하고 있으며, 자유로운 반면에 후자는 타율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측면을 요구하고 있음을 수반하게 된다. 넷째로는 「무목적 목적성」의 특징으로서 어떠한 실재적인 절대적 유용가치를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가 갖는 내포적 가치(intesiver Wert)는 이미 그 자체대로의 목적성을 지니는 것으로 영국의 철학자 칸트의 「美의 자기법칙성(die selbstgesetzlichkeit des Asthetischen)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는 일단의 특수한 형태의 범주가 형성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디자인, 공예, 건축 등의 장르에서 제기되어지는 절대적 미와 유용가치의 합일성이 바로 그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미의 가치는 이외에도 주관, 객관, 절대성의 성질과 본질, 영원, 생산, 이상, 보편적 원리로 나뉘어지기도 한다.
Ⅲ. 미학
美라는 말이 동ㆍ서양에 존재했던 것은 이미 그 어의 해석에서 접근되었지만 미학이라는 말과 학문은 오로지 서양에서만 독자적인 체계를 이루어 왔다. 물론 그 이유에는 동ㆍ서양이 갖는 사상체계의 본질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겠지만 가장 함축된 원인이었다면 아마도 동양의 사상이나 학문체계가 총체적인 관념성을 특징으로 하였기 때문에 많은 학문의 체계가 분석적이고 독자적인 면을 형성하지 않았으리라 추측된다. 고대 서양에 있어서 미학이 싹트게 된 시기는 기원전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플라톤(Platon, BC 427∼347)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는 미를 학문적 체계화하는 초석이 되었던 사상가들이다. 플라톤은 사랑을 논하면서 자연적 사물로부터 출발해서 인간의 자태, 행위, 인식, 이데아에 이르는 로고스(logos)적인 상승 단계에 미를 대응시키며, 아름다운 육체→모든 아름다운 육체→ 인간의 아름다운 활동→아름다운 모든 학문→미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으로 설명되는 단계적 미학을 말하였다. 이는 BC 8세기경의 호메로스(Homeros)이후 7세기 일련의 서정시인들을 거쳐 BC 5세기 아테네 3대 비극의 시인들인 아이스퀼로스(Aeschylos), 소포클레스(Sophokles), 에우리피데스(Euripides)등이 말한 미의 감성적, 정서적, 윤리적, 전개를 바탕으로 초기이긴 하지만 미를 학문적인 영역으로 도달케 하였던 중요한 전기를 이루었다. 또한 예술가의 신분으로서 미를 유형별로 이상화하고 반성적으로 보았던 사람은 조각가 폴리크레이토스(Polykleitos)였으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미학이라는 말은 18세기 중엽 울프 (Leibniz-wolff)라는 학파인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ieb Baumgarten, 1714~1762)이 1750년에 「Aesthetica」에서 「감성적 인식학 (Scientia Cognifionis Sensitivae」의 뜻으로 사용되면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 칸트는 바움가르텐이 사용한 Aestheticd란 명칭에 대한 비판을 가하게 된다. 그는 비판적 판정을 이성원리 가운데 그 규칙을 학문의 차원으로까지 높이려는 바움가르텐의 희망은 과오라고 지적하면서 美의 學은 있을 수 없고 오직 비판만이 있을 뿐이며, 미적 기술(Schone kanst)인 예술만이 존재한다고 하였고 바움가르텐의 과오는 인간의 감성의 선천적 원리의 學인 선험적 감성론(transzezden tale Aesthetik)을 위해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후 쉴러(Johann Christoph von Schiller, 1758~1805)는 그중 「Aesthetik」이란 용어를 「미학」이라는 말로 대체하여 사용함으로써 오늘날의 「Aestheties, Asthetik」이란 말이 성립되었다.
Ⅳ.동양의 미술사
1. 한국
한국미술의 시대적 분류는 선사시대(구석기 시대∼삼국시대이전), 삼국시대(4세기∼7세기 전반), 통일신라시대(670∼935년), 고려시대(943∼1392년), 조선시대(1392∼1897년), 근대(19세기후반∼1957), 현대(1957∼) 등으로 나눌 수 있다. (1). 선사시대 선사시대의 미술은 경남 울주군에서 발견된 암각화에서 그 대표적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절벽 바위에 새겨진 암벽조각은 천전리와 대곡리, 양전동 등에서 발견되었으며, 반구대 암각화라고도 부른다. 바위에는 사슴, 호랑이 등과 사냥하는 장면, 각종 무늬, 인물상, 탈 등이 음각으로 형상되어져 있으며 때로는 쪼거나 두드려서 가형적인 선이 형성되기도 한다. 선사시대에는 이와 같은 암벽조각이 이외에도 공예품으로서 토기가 만들어졌는데 가장 오래 된 것으로는 약6,000∼4,500년 전 신석기 시대쯤으로 추정되며 무늬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가지가 발견되었다. 무늬가 있는 것은 有門土器(유문토기)라고도 하며 대체로 櫛文(즐문), 즉 빗살무늬가 많고 신석기 시대 것으로 바닷가나 강변의 낮은 언덕 등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토기의 형태는 남한 지역에서는 밑이 둥글고 뽀족한 것이 주로 많이 발견되었고 밑이 평평한 것은 북쪽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무늬는 빗살형으로서 대각선을 대칭되도록 하여 반복한 것이 많은데 날카로운 용구로 긋거나 누르고, 찍는 것들이 많으며 모양으로서는 추상성이 강하지만 전나무, 새 날개 모양과 波狀(파상)모양, 번개모양 등이 많다.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 토기> 암사동 출토 선사시대에는 토기에 이어서 석기가 제작되었는데 석기의 종류는 제작기술에 의거한 打製(타제) 석기와 다시 갈거나 비벼서 만든 磨製(마제)석기로 나뉜다. 마제는 불을 일으켰던 나무 마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마제석검, 마제도끼, 칼, 뾰족한 촉 등이 제작되었다. 선사시대 청동기로서는 칼, 촉 등의 무기와 도끼, 칼자루, 끌, 송곳 등의 생활용구와 器(의기), 장신구 등이 만들어 졌고, 주거형태는 크게 동굴주거와 竪穴(수혈)주거가 많았다. (2). 삼국시대 삼국시대는 대체적으로 1∼3세기의 형성시기인 위 삼국 시대를 지나서 4세기 격부터 국가체계가 성립되고 불교의 유입과 중국의 문물이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시기의 미술은 역사적으로 보아 한국 미술사의 본격적 생성 시기였음과 동시에 최초의 회화흔적이 발견되는 등 한국적 미술세계의 형성에 많은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삼국 중 가장 가까이 인접하면서 미술의 영향을 받았던 고구려는 회화에 있어서 삼국 중 70여 개에 달하는 많은 벽화를 남겼다. 벽화는 진흙으로 만든 封土石室墳(봉토석실분) 즉 토총이나 돌 위에서 제작되었으며 잘 다듬어진 판석, 흙 면 위에 먹과 채색 등을 사용하여 그려졌다. 그 시기에 따라 크게 3기로 나뉘는데 1기는 4세기말∼5세기경이며 중국의 영향이 강하 였다. 평남 용강군 안성동대총, 감신총과 강 서군 연화총 등이 대표한다. 2기는 6세기 전 반경이며 무용총, 각저총, 개마총 등이 대표적 이고 전실의 폭이 좁아져 현실의 폭과 같아진 ☞ 신라<천마총> 다. 삼국시대의 공예는 크게 금속공예와 토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금속 장신구 토기는 관, 귀걸이, 목걸이, 팔지 등이 많았으며 무기, 마구등도 제작되었다. 한편 토기는 항아리, 도가니, 器臺(기대), 高杯(고배), 土偶(토우) 등이 있으며, 대개가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독자적 형태로 변모되어져 갔다. 조각에서는 수많은 불교 조각이 대중을 이루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백제의 미소」「古拙(고졸)의 미소」라 불리 우는 백제불상의 미소가 유명하다. 그리고 서예는 광개토왕릉비,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등이 널리 알려졌다. (3)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는 삼국시대 미술을 진전 시켜나가면서도 내면적인 정신성에 그치지 않고 외형적 변화를 추구하여 그 규모 면에서도 세련된 미가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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