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식 이름은 George Augustus Frederick(Georg August Friedrich).
1762. 8. 12 런던~1830. 6. 26 잉글랜드 버크셔 윈저.
하노버·영국·아일랜드의 왕(1820. 1. 29~1830).
정신이상자가 된 아버지 조지 3세의 섭정을 시작한 1811년 2월 5일부터 사실상 군주노릇을 했다.
조지 3세와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조피 사이에 태어난 장남으로 자신이 말했듯이 17세부터 "포도주와 여자를 다소 지나치게 좋아했다". 방탕한 생활태도와 찰스 제임스 폭스 등 휘그당 정치가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 때문에 조지 3세는 그를 경멸했다.
1784년 그가 진심으로 사랑한 유일한 여성 마리아 피츠허버트를 만나 1785년 12월 15일 몰래 결혼했으나 25세가 안 된 왕족들은 왕의 허가 없이 결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혼은 무효였다.
1795년 4월 8일 의회로 하여금 자신의 빚을 갚게 하려고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과 조지 3세의 누이 오거스타의 딸인 사촌 캐롤라인과 애정 없는 결혼을 했으나 외동딸 샬럿 공주(1796~1817)가 태어난 몇 주 뒤 별거에 들어갔다.
캐롤라인은 1820년 조지 4세가 즉위한 몇 개월 뒤, 6년 동안 이탈리아에 살고 있다가 돌아와 왕후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녀에게서 이 권리를 빼앗고 그녀의 부정(不貞)을 근거로 결혼을 무효로 하는 법안이 상원에 제출되었으나 하원은 표결에 부치지도 않았다. 이 문제는 1821년 8월 7일 캐롤라인이 죽자 해결되었다.
1810년 11월 조지 3세가 정신이상자가 되자 그는 섭정법 조항에 따라 섭정이 되었다(1811). 1812년 2월 이 법령의 제한조항이 시효만료로 소멸되자 살아 있는 휘그당 옛 친구들(폭스는 1806년 죽음) 가운데서 각료를 지정하지 않고 아버지를 모시던 장관들을 유임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국가에 이득이 되었는데, 원래 그레이 백작 2세를 비롯한 휘그당의 지도적 인물들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포기하고 나폴레옹 1세를 유럽 대륙의 지배자로 인정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영국과 동맹국들은 1815년 나폴레옹에게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그는 조지 4세로 즉위했지만 섭정 때 이상으로 권력이 강해진 것은 없었다.
그는 1820~27년에 총리를 지낸 리버풀 백작 2세를 모욕하고 음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1822년 외무장관을 지낸 조지 캐닝은 리버풀의 뒤를 이어 1827년 총리직에 올라 국왕의 신임을 받았는데 이러한 신임은 부분적으로는 왕의 주치의이자 내탕금(內帑金) 관리인인 윌리엄 나이턴 경과 맺은 친분 덕택이었다.
조지는 지나치게 나이턴 경의 충고를 따랐지만 1827년부터는 두 당파 어느 쪽에도 개인적 편애를 갖지 않았다. 어학 실력이 좋고 지적인 능력이 뛰어나 성격의 결함을 메울 수 있었으며 특히 예술에 대한 날카로운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건축가 존 내시가 런던의 리전트 거리(1811~25경)와 리전트 공원을 만드는 것을 지원했으며, 제프리 와이어트빌 경이 윈저 성(城)을 복원하는 것을 후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