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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 12017 ♧ 이름: 김영배 ( 남 ) ♧ 2015/6/14(일) 07:16 (MSIE10.0,WindowsNT6.1,Trident/6.0) 110.35.159.50 1051x591 ♧ 조회: 402 | |
여기 임진강 나루 고랑포 지역에 경순왕릉이 있습니다.(2) 권신기 전우님은 우리들 세명을 "역사의탐방"이 아닌 "역사의 현장"으로 안내했습니다.옛날에, 수학여행 때 에야 사실,"수학여행"의 연장인 "역사탐방"으로 경주를 갔었지만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을 못했고 (당시 분위기가 그랬음)회사에 다닐 때 에,출장일로 오며가며 숙박만하고 바로 현장으로 떠났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없음에도 석굴암에가서 상당히 오래 관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임진강 주변을 달리며 권신기 전우님 말씀이, "여기 근방에 신라 마지막 王 '경순왕의 墓가있다'." 라는 말에(?!!)의아함을 느꼈습니다. (아니? 신라王들은 전부 경주에 모셔져 있는거 아니였나?) 그러고 보니 경주 갔다온 전우님들 견문록을 읽어봐도 '경순왕의 墓는 어떻터라!' 는 등의 말을 들어본 적 이 없었다는 걸 느꼈습니다. 마치...지난날...강만구형님과 이상수전우님.홍석진.나 이렇게 넷이서 어딘가 가다가 발견한 윤보선 대통령 묘소를 발견하고 찾아서...찾고 찾아서 산 꼭대기에 있는 윤보선 대통령 묘소에 올라 참배를 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경순王陵이 이 근방에 있다고 하니 가 봤으면 좋겠네...그렇지만 운전석엔 권신기 전우님이 있으니 이래라 저래라..! 미안해서 말도 못하고 있는데,) 그러나 내 맘을 알고 있다는 듯, 권신기 전우님은 어느새 경순왕릉 묘소앞 주차장에 도착,車를 세우는 거 였습니다. 여기서 묘소까지 거리는 140미터...이제 돐 지난 어린아이도 걸어 갈 수 있는 거리 입니다. 처음에 약간 언덕에 중간에 서 있는 저 나무...전우님들 저 나무가 무슨나문지 아십니까? 뽕나무입니다. 뽕나무가 저 정도 크기라면 '상당히 오래된 뽕나무' 라고 권신기 전우님이 말 합니다. 임진강 근방엔 뽕나무가 지천으로 많더군요. 조금 더 걸으니...바로 경순왕릉이 나타났습니다. 경순王은 신라 56代 마지막 王입니다. (잠시 서기 900 年代의 한반도 역사를 줄여서 쓰겠습니다.) 이 때에 신라는 허약할 때로 허약해진 힘없는 나라였습니다.벌써 200 여년전, 신라에게 亡했던 백제의 옛땅에 '견훤'(견훤 [甄萱])이라는 사람이 '후백제'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여기서 잠시 후백제의 역사를 짧게 말하겠습니다.견훤은 신라에게 망했던 백제를 다시 세운거죠.) (견훤의 성씨는 원래 이씨 였다는데,생략)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강력한 군사를 모으고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옛 백제의 땅을 거의 회복하고 이제는 꺼꾸로 신라의 땅으로쳐들어가 야금야금 백제의 땅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옛 고구려 땅에는 왕건(王建)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뛰어난 정치력과 덕망으로 고려 왕조 창건과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루었습니다. 이름은 왕건(王建). 字는 약천 (若天). 송악(松嶽:개성) 출신입니다. 아버지는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이고, 어머니는 한씨(韓氏)입니다.)
왕건도 옛 고구려 땅을 회복하고 점차 남하하기 시작했고, 三國은 서로가 한치의 땅이라도 더 뺏으려고 했고.상대국은 자신들의 땅을 뺏기지 않으려고 했으니..... 신라의 김유신이 통일했던 한반도는 서기 900 년 초기에 이르러 지금의 한반도는 다시금 三國으로 갈라져 전쟁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三國이 어렇게 30여년간 싸워본 결과 서로의 강약과 우열이 드러나기 시직했는데, 신라는 경주(옛이름은 서러벌) 아랫땅(부산.대구.울산 진주.의성 안동 일대)을 비롯해 대부분을 후백제에게 뺏겼고 고려는 한강이북 거의와 충청도 일대..그리고 전라도 일부와 해안지대를 점령 했습니다. 고려가 제일 영토가 많았고 王과 將軍들이 일치단결해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합니다.
삼국을 통일했던 신라는 당시 신라를 위협할 나라도 없었으니 군사력을 더 키울 필요도 없었고 물자가 풍부해 온 나라가 흥청망청 했습니다. 나라에 헛점이 생기자 후백제와 후고구려(고려)라는 나라를 세우고 北에서 南에서 쳐들어오는 그들을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신라 말기에는 후백제에 의해 신라의 王들이 바뀌는 기막힌 일들도 벌어졌습니다.후백제의 침략을 견디다 못해 이때, 신라는 고려에 군사 요청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신라의 공격이 없어지게된 고려의 왕건은 후백제와 맛붙었습니다.처음에 고려는 후백제에 여러번 패퇴했습니다. 그러나 고려도 이길만큼 굳건했던 후백제도 내분엔 어쩔도리가 없었습니다. 원인이야 견훤의 잘못이 젤 크다고 하겠습니다.
견훤은 많은 아내를 두어 아들 10여 인을 두었는데, 그 중 넷째 아들인 금강(金剛)을 특별히 사랑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고 태자로 봉했지요. 금강의 형인 신검(神劍)·양검(良劍)·용검(龍劍) 등은 이를 알고 아버지 견훤을 원망하며 지냈습니다. 양검을 강주(康州 : 지금의 진주)도독으로, 용검을 무주(武州 : 지금의 광주)도독으로 삼고 신검을 홀로 그의 곁에 두자, 신검은 이찬(伊飡) 능환(能奐)을 시켜 사람을 강주·무주 등으로 보내 음모를 꾸몄습니다. 935년 3월 금강은 죽고 견훤은 큰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당했고요. 금산사에 석 달 동안 있다가 그 해 6월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나주로 도망하여, 고려에 사람을 보내 의탁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에 왕건은 유금필(庾黔弼)을 보내 견훤을 맞이한 뒤, 백관(百官)의 벼슬보다 높은 상보(尙父)의 지위와 식읍으로 양주땅을 주었습니다. 그 뒤 후백제는 아들간에도 내분이 생겨 왕건에 의해 멸망하였다. 신검·양검·용검 등은 한때 목숨을 부지했으나, 얼마 뒤 모두 살해됐습니다. 견훤 또한 우울한 번민에 싸여 지내다가 드디어 창질이 나서 연산(連山) 불사(佛舍)에서 죽었다. 그 때, 견훤왕이 잘 했더라면 그쪽 사람들이 지금처럼 신라를 원망하지는 않겠죠.
이제 고려에는 한강 이북 조그만 땅에 겨우 종묘만 모시고 있는 신라만 남았습니다. 왕건은 일어설 수 도 없는 ..아무 힘도 없는..신라에 대해 조금도 걱정을 안했습니다.신라는 가만 두어도 저절로 항복할 수 밖에 없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니. 이 때의 신라의 왕은 이럴 수도 저럴 수 도 없는 상태로 王의 고민만 깊어 갔습니다. 물론 개인의 생명과 국가 중 왕의 입장에서는 국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 경순왕은 하나 뿐인 선택밖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백제 견훤왕과 신검왕은 신라를 무조건적으로 점령해야겠다는 생각 뿐이였습니다 물론 고려가 우호적이였지만 고려의 힘으로 백제를 멸망시킨다해도 그 다음 고려를 절대 멸망 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일본이나 발해는 신라보다 고려를 훨씬 우호적으로 생각했고 중국 본토는 거란과 같은 민족들이 혼란을 줬습니다. 더구나 신라의 신하들과 화랑들은 술과 금은보화만 관심 가지고 전혀 희망이 없었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의 종북 좌파들과 일부 교육단체..일부사이비 종교 단체들이 호의호식하며 살면서 나라가 망하던 말던 말도 안되는 소리하고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과 거의 같습니다.나라가 망할려면 이런 무리들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지금 05시 30분 천둥소리 요란 하다니 비기 내리기시작 했습니다. 이런 기세로 30분만 내려도 가뭄이 해소될 정도로 비가 퍼붓습니다.*)
그래서 경순왕은 어쩔 수 없이 고려에 백기투항을 했습니다. (내가 그전,학교에서 단기로 배운바에 의하면 신라는 2277년에 나라를 세웠고 56대 경순왕에 이르러 고려에 나라를 바치니 그 때가 3268년이라...나라는 991년이나 유지 됐었으니 천년의 역사라...이는 동성고금에 없는 가장 기나긴 역사를 가진 나라라...)
그 때에 경순왕은 지금의 임진강 유역에서 명맥을 유지 했었나 봅니다.그가 태조 왕건보다 더 오래 살았다곤 하지만, 나라를 뺏긴 임금이고 후세에 후손들에게 오욕을 남긴 임금엔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연천군으로 되어있는 고랑포 지역 산중턱에 묻혔었겠죠. 경순왕릉은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리에 있는 신라 제56대왕이었던 경순왕(?-978)의 능으로, 사적 제24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습니다. 경순왕은 성은 김씨요 이름은 부로 문성왕의 6대손입니다. 927년에 왕이 되어 935년 왕건에게 나라를 물려줄 때까지 9년간 재위하였으며 978년(경종3)에 죽었구요.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능은 오랫동안 잊혀져오다가 조선시대에 찾게 되었다고 하며 신라의 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입니다. 무덤의 외형은 둥근 봉토분으로 밑둘레에는 판석을 이용하여 무덤보호를 위해 병풍처럼 돌렸고 능 주위로는 고장이 둘러져 있다. 능 앞에 혼유석(상석 뒤 무덤 앞에 놓은 장방형의 돌)이 놓여 있고 '新羅敬順王之陵'이라고 새긴 묘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뒷면의 비문을 통하여 이 무덤의 피장자가 경순왕임이 확인되었고 1747년(영조23년)에 이 비를 세운 것을 알게 됐습니다. 능 앞에 있는 기타 석물로는 장명등(무덤 앞에 돌로 만들어 세운 등으로 조선시대에는 1품 재상의 묘에만 세울 수 있었음.), 망주석(무덤 앞에 세운 한쌍의 돌기둥) 2개가 마련되어 있다. 신라왕릉의 경우 곡장(무덤 주위에 둘러 세운 나지막한 담.)이 마련된 것이 없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왕릉에 비로소 곡장을 마련하고 있어 묘비에서와 같이 경순왕이 죽자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석물들은 조선후기의 양식이며 화강암 재질이다.
신라 왕릉 중에서 경주 지역을 벗어나 있는 유일한 왕릉으로, 오래 동안 그 존재조차 잊혀져 오다가 조선 영조 때에 다시 찾게 되었다. 사적 24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민통선 내에 소재하고 있어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 됐었습니다. 이후,6.25 사변등의 內戰으로 임진강 유역이 전쟁터로 변했고 휴전선인 민통선이 되어 지뢰가 깔려있고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된지 20년이 지나서 군인들이 지뢰제거 작업을 하다가 땅에 묻혀 있는 상석등을 발견해 상부에 보고..이후 경주이씨 문중에 알려 확인한 결과 경순왕릉임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민간 출입이 허용되어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고 안내원이 열심히 설명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라를 경영하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고 主君을 위해 목숨을 바칠 충성스런 부하가 있어야 합니다. 한 때, 대 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의 칭기스칸에게도 당시엔 四狗(회색늑대 네마리) 또는 四駿(사준)으로 불리우던 티리운.보로클.볼츠.무카리 등 네명의 장군이 있어서 가능 했었듯이..왕건에게도 여러명의 장군이 있었는데 특히 네명의 장군이 유명해 여기에 그 이름을 올립니다.그 후손들...복 받으세요. 신숭겸(申崇謙)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능산(能山). 〈고려사〉에 의하면 광해주(光海州:지금의 춘천) 출신이며,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이 있었다고 한다. 태봉 말기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기병대장으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918년에 고려를 개국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대장군이 되었다. 927년(태조 10)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공산(公山:지금의 경북 달성군 팔공산) 동수(桐藪)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대장군으로 군사를 이끌고 참여했다. 견훤의 군대가 태조를 포위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해지자, 원보(元甫) 김락(金樂)과 더불어 싸우다가 전사했으며 그 덕분에 태조는 간신히 피신했다. 태조는 그의 동생 능길(能吉), 아들 보(甫)를 원윤(元尹)으로 등용하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 했다. 994년(성종 13)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개국장절공(開國壯節公)으로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1120년(예종 15) 그와 김락을 추도하여 예종이 〈도이장가 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었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복지겸(卜智謙) 면천복씨의 시조이다. 초명은 사괴 또는 사귀. 태봉 말기 마군장군으로 배현경·신숭겸(申崇謙)·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고자 모의했다. 918년(태조 1)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 데 공을 세워 개국공신 1등이 되었다. 그뒤 장군 환선길의 모반 음모를 태조에게 알려 난을 진압했으며, 순군리 임춘길(林春吉)의 모역도 평정했다. 대장군에 제수되었고, 삼중대광보국 문하시중평장사에 이르렀으며 혜성부원군에 봉해졌다. 994년(성종 13) 태사에 추증되었고,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는 경기도 광주시에 있다. 시호는 무공이다.
배현경(裵玄慶) 원래 군졸이었으나 담력이 있어 벼슬이 대광(大匡)에까지 이르렀다. 궁예(弓裔) 때부터 활약했던 인물이며, 특히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있을 때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고려 건국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태조(太祖) 즉위 후 1등공신이 되었고,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918년(태조 1)에는 청주인(靑州人) 현율(玄律)을 순군낭중으로 임명하는 데 반대하여 병부낭중으로 삼게 한 적도 있다. 원래 군졸이었으나 담력이 있어 벼슬이 대광(大匡)에까지 이르렀다. 궁예(弓裔) 때부터 활약했던 인물이며, 특히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있을 때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고려 건국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태조(太祖) 즉위 후 1등공신이 되었고,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918년(태조 1)에는 청주인(靑州人) 현율(玄律)을 순군낭중으로 임명하는 데 반대하여 병부낭중으로 삼게 한 적도 있다.
홍유(洪儒)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弓裔)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개국1등공신이 되었다. 태조 즉위 후 청주(靑州)에서 변란이 일어나므로 유금필(庾黔弼)과 함께 진주(鎭州 :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에 주둔하며 이에 대비하였다. 이듬해인 919년(태조 2)에는 오산성(烏山城)을 고쳐 예산현으로 하자 대상(大相) 애선(哀宣)과 함께 유민(流民) 500여 호를 옮겨 안정시키기도 하였으며, 이어 대상에서 태사 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으로 올랐다. 그리고 그의 딸은 태조의 26번째 부인인 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이 되어 의성부원대군을 낳기도 할 만큼 태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936년 후백제를 쳐 후삼국을 통일할 때 일리천(一利川)의 전투에서 마군을 거느리고 우군(右軍)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994년(성종 13) 태사가 추증되었으며, 태사개국충렬공(太師開國忠烈公)으로서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慶州에 있었더라면 둘레석이나 상석등은그러나 경주김씨 문중에서도 모르는 경순왕의 왕릉을 ... 아무도 찾지 않는 왕릉은 마구 자라는 숲에 둘러쌓여 효자라는 자녀들도 저런 산중에 아비 묘를 쓰고 한번도 안찾다가 20년만에 찾아 갔다면 ..길도 없는 깊은 산중에 키큰 나무들이 가로막아 앞이 안보이는 데 어디가서 뭘 어떻게 찾겠습니까! 그 앞에서 기념으로 -. (에이...비가 좀 더 오지...어느새 오는듯 마는듯 비가 그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에는 진주의 장세영전우님 덕분으로 잊혀져 가는 우리들의 역사의 산 주인공..지금으로 말해서 烈士인 진주 남강 技生 논개의 유적지를 보며 그녀의 나라 사랑에 가슴 뭉쿨하고 목이 메여왔었습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 강하다. 강남콩보다 더 푸른 물결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님의 詩 일부 입니다. (그 때 4월의 장세영전우님 배려로 진주남강에서의 논개의 행적을 되살려 보게 해주신 장세영전우님께 다시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적 제 244호로 지정된 경순왕릉은 민간통제선 근처에 위치하며 능역 뒤로 지뢰밭이 깔려 있어 휴전선 주변 통제지역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이 지역 일원이 유명한 공비 김신조 일당이 1968년 들어왔던 고랑포 지역인 것이다. 그러나 조선 성종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장단도호부 능실조에 "신라 경순왕릉敬順王陵의 묘가 장단부의 남쪽 8리에 있다." 고 했으므로 전혀 실전된 묘는 아니었다.
지난 금요일날(6월12일)권신기 전우님의 배려로 귀중한 역사탐방을 했습니다. 권신기 전우님 고맙고 감사 합니다.
김영배: 글을 올려놓고 보니 글자의 크기가 뒤죽박죽... 그래서 그걸 맞추려고 하니까...비밀번호가 틀리네...무슨 숫자를 쳤길래...난 늘 치는 비밀번호가 있는데 그 번호를 쳤다고 생각했는데...딴 숫자를 쳤나봐...그러니 틀렸다는 글자 계속 나오고..이런 젠장. 앞으로는 더 - 정신 바짝차려야 겠습니다. -[06/14-09:41]- 장세영: 아~ 이6월 뜻깊은 호국 보훈의 달을 맞이해,,, 특히 올해는 광복70주년과 남북으로 분단된지 70년이 되는 즈음에 역사 탐방지로 민통선의 신라 마지막 경순왕릉에 역사적 배경을 해박하게 상세히 해설해주신 김영배(백마1진)전우님 에게 깊이 감사드리며 함께 동행하신 권신기전우님 백용구전우님 박남철전우님. 여러분의 역사탐방과 평소 최진사: 역사를 보면 태평성대를 누리던 제국들이 말년에는 사치와 물욕에 눈이 어두워 허물어 지더군요.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는 필수적인 교훈을 잊어 버리는거죠. 작은 땅덩어리 한반도에는 지나간 역사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견제가 오늘날도 남아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칼을 갈고있는 북한과, 먹고 살만하니 들썩거리는 좌파들, 지역 갈등을 부추기는 국회의원, 사회불안을 가중시키는는 데모꾼들 역사는 수레바퀴 돌고돈다는데 전쟁을 경험한 세대인 우리 파월자들이 사라지면 우리 후세는 안녕할건지 염려스럽습니다. 처음 인식한 신라의 마지막 임금의 왕릉을 보면서 여러가지를 머리속에 그려보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알게되어 고맙습니다. -[06/14-11:55]- 홍종만: 高麗創業의 太祖 王 建도,그 빛나는文化遺産(高麗大藏經 ,高麗佛畵 ,高麗螺鈿漆器, 高麗靑磁)을 남겨 5百年 王業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06/14-13:11]- 최진사: 서부전선 임진강 너머 고량포 안쪽 철책선 GOP에서 쫄병생활을 한 기억이 남아서 정다운 지명입니다. 그땐 민간인 구경을 못했는데 지금은 접근이 가능하나 봅니다. -[06/14-13:15]- 김창선: 김영배 전우님 감사합니다 경순왕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역시도 경순왕의 34대손이라하는 것같습니다 너무 오래전에 큰집 형님한테 들은 이야기이고 형님께서 경기도 파주 휴전선 부근에가 경순왕의 묘가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읍니다 그리고 멀리서 살다보니 잊고 살고 있었는데 새삼 생각이 나네요 너무 감사합니다.건강하세요. -[06/14-15:27]- 최진사: 군대생활 할때 민간인 사는곳으로 건널수 있는 화이트교 다리가 가물가물 기억납니다. -[06/14-15:50]- 박남철: 김영배 전우님 경순왕 에대한 역사 공부를 다시배우는것 같습니다. 권신기 전우님이 고랑포 쪽에 신라의 마지막 왕이신 경순왕 릉이 있다고 해서 산라의 왕릉이면 경주에 있어야지 어찌 여기 고랑포에 모셔저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 는데 역사에 박식하신 김영배 전우님의 설명에 역사 공부잘 했습니다. 권신기 전우님 곳곳에 흩어저 있는유적지 등을 소상히 아시고 안내하셔서 덕분에 뜻깊고 보람있는 여행 잘 했습니다. 권 전우님 께도 감사드립니다. -[06/14-16:40]- 신용봉: 선배님 신라 마지막왕인 경순왕릉에 들르셨군요. 나라를 고려에 바친 경순왕은 개경에서 죽습니다. 경순왕의 능을 경주로 할 경우 민심이 동요할것이다라는 주장과 더불어 옛 신라인들을 다독거리기 위해 왕릉으로 하고 왕릉은 개경 백리 밖으로 할수없다라는 전통으로 고량포에 능을 썼다고 합니다. 파주시 백학면과 연천군 군남면을 경계로하는 곳에 쥔장께서 말씀하신 화이트교가 있는데 지금은 새로 다리를 건설하였고 교통량도 많이늘었다고 합니다. 항상 좋은 소식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06/14-18:11]- 최진사: 김영배 전우님 내일(15일) 아침 8시50분에 온열치료실 앞에서 캔버스 사진 전해 드릴께요. -[06/14-18:26]- 한기성: 제가 파월전 고랑포에서 군생활 했던곳입니다 전역후에 다시 찿아가보니 흔적이 보이지를 않드군요 무더운 날에 두루두루 조심하세요 ~ -[06/14-20:33]- 최현득: 많은것을 느끼게 합니다. 아픔의 역사는 되풀이 되지 않아야 됩니다 힘이 없는 나라는 백성을 불쌍하게 만듭니다. 역사의 현장을 해설과 함께 올려주셔서 공부 잘했습니다 감사 합니다 김영배 전우님 ! -[06/14-23:25]- 김영배: 감사합니다.진사님 .잠시후에 뵙겠습니다. -[06/15-05:54]- 백동기: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에 선대 산소가 있어 문산쪽에서 차를 몰고 가보면 감악산 북쪽 길목에 경순왕릉 이정표를 본적이 있습니다.오래전 비온 후 가보니 백학저수지에 한강에서 물길따라 올라온 잉어들이 저수지에 들어가기 위해 점프를 하면 군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발로 차 잡아내는 정겨운 장면을 본적이 있었는데 그지역에는 사람들이 덜 살아서 그러한지 순박하고 좋은곳 입니다. -[06/15-06:20]- 김병장: 천년 고도 경주에 갔을때...마지막 경순왕의 생각났는데...세상에 영원한것도 새것도 없다는 말이 생각납니다...ㅎ...많은 역사를 알게되어 감사드립니다...김영배 선배 전우님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06/15-06:25]- 황진국: 영배성 땜시 역사공부 잘하네요, 내가아는 사학과 출신 여자둘다 역사는 꽝이던데,ㅋㅌㅋ -[06/15-07:05]- 전재경: 세분 전우님의 밝은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나도 좋은데 갈때 낑가 주세요 ㅋㅋ -[06/15-07:10]- 박용환: 역사를 다시금 배우고갑니다...ㅎ -[06/15-0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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