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 수달연구센터에서 하룻밤을 묵고, 화천귀농학교 박기윤 교장선생님의 안내로 식당에서 가서 아침식사를 했다. 부산에서 김창룡 은빛님, 양산의 이창희 금빛님이 순례에 함께 하려고 아침일찍 길을 나서 이 먼곳까지 오셔서 반가웠다. 김창룡 은빛님은 월남전에 참전했던 분이다. 월남 파병전 이곳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 훈련소에서 4주간(?)의 교육을 받고 파병되었다고 한다.
식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월남파병용사 만남의 장>이 있어 그곳에 들러 참배하고, 지구상에서 전쟁과 살상이 사라지도록 영령들께서 도와주십사고 기도했다. 이어 화천귀농학교에도 들려서 박기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귀농학교 운영과 농촌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점심무렵 철원에 도착. 1000년여 전 태봉국의 도읍지였던 곳. 분단으로 남북이 나뉜 땅.
철원군 동송읍의 한 식당에서 철원군농민회의 김용빈 회장님과 DMZ역사연구자인 이우형 선생님을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식사. 철원군농민회협동조합에서 철원오대쌀로만 만던다는 막걸리 <대작>으로 목도 축였다.
김용빈 회장님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철원에서 유래했다고 소개한다. 일제강점기 경원선을 타고 철원역에 와서 금강산행 전철로 갈아탔는데, 골깊고 봉우리 높은 금강간사에 다녀오려면 이곳 철원역에서 미리 식사를 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철원역 주변에만 100여개의 음식점이 있었다고도 했다.
자, 이제 든든히 배도 채웠으니 우리도 금강산 구경, 아니 철원순례를 해볼까요?
미곡처리장 근처 공터에서 순례자들의 상견례. 오늘은 정말 전국 방방곡곡에서 순례자들이 오셨다. 철원군농민회원님들과 DMZ역사연구자인 이우형 선생님, 서울에서 이부영, 안상수, 윤병서 은빛님, 멀리 부산의 김창룡 은빛님, 양산의 이창희 금빛님, 광주의 김경석, 이승민 옥빛님, 마리아 금빛님, 원주의 청춘남녀, 그리고 DMZ순례를 계속하고 있는 이학근, 이하윤, 박소산 금빛님들까지... 덕분에 순례단이 확 젊어졌다.
철원순례 첫번째 방문지는 군부대. 우성 박용만 선생의 생가터가 이 군부대 내 어딘가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군부대 내 출입금지. 미리 허락을 구하지 못하여 부대 앞에서 묵념으로 예를 표해야 했다.
이우형 선생께서 박용만 선생의 삶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1881년 철원에서 태어난 박용만 선생은 13세 때 집을 떠나 해외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펼쳤고, 1928년 10월 17일 중국 베이징에서 이해명에게 권총으로 저격당해 숨졌다고 한다. 특히 24세(1905년)에 미국으로 망명한 뒤 군사적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는데, 1908년(1909년?) 네브래스카주에 미주지역 최초 한인독립군양성소인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하와이, 러시아 등에서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조직을 준비하였으며, 중국에서는 군사회의를 만드는 등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부대앞을 떠나와 조금 더 걸어가다보면 거리옆 공터에 있는 표지판.
(박용만 선생의 생가터가 앞서 방문했던 부대로 밝혀지기전 추정되는 곳이 이 근처였다고 한다.)
다시 걷는다... 카메라 렌즈앞을 한사코 파고드는 <**부동산> <땅.땅.땅>
접경지역의 면소재지들은 대부분 이런 간판, 현수막이 자주 눈에 띈다. 잠깐만 걸어도 대여섯개의 부동산사무실을 만나고,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몇분에 하나씩은 부동산 간판과 현수막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동상이몽. 남북평화시대에 대한 또 다른 시선, 마음, 움직임...
이런 것들이 접경지역 주민들의 삶에 미칠 영향들이 자꾸 걱정이 된다.
조금 더 가서 관전리에 있는 구)철원제일교회.
길 끝지점 오른쪽으로 새로 지은 교회가 있고, 왼쪽으로 한국전쟁 때 대부분 파괴되어 유지만 남다시피 한 구) 철원제일교회가 보인다. 이 교회는 철원지역의 대표적인 기독교회로 일제강점기 때 설립되었으며 해방후 공산치하에서는 지역의 반공투쟁 중심이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공산당의 막사로 쓰였다고 한다.
입구에는 철원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름으로 제작한 <철원읍 3.1만세운동 항쟁지>라는 표지판도 있었는데, 박용만 선생의 삶을 소개함과 더불어 철원애국단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관전리, 중리, 월하리 지역 주민들이 자긍심을 갖자는 바람이 적혀 있었다.
철원 옛 노동당사 건물 앞에 도착했다.
해방 이후 1946년 지어진 건물로 한국전쟁 전까지 조선노동당 철원군당사로 사용했던 건물이다.(당시 이 지역은 북한관할이었다.) 반공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고문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외벽과 현관 기둥에 무수하게 박힌 포탄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 노동당사는 한국전쟁으로 철원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1년후, 1951년 6월 29일을 전후해서 철원 일대는 사흘 동안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총 공습을 받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번화한 시가지로 인구 3만여명이 모여살았던 철원읍(구철원 시가지)는 이때의 폭격으로 초토화되어 온전하게 서있는 것이 없었다는 것. 노동당사 역시 B29 폭격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았는데, 노동당사 건물만은 이렇게 살아남은 것이다. 내부가 주저내려앉을 정도의 충격인데, 철근구조물도 없이 벽돌과 콘크리트만으로 지어진 건물이 이렇게 살아남았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노동당사 앞에서 청년들이 평화퍼포먼스를 준비하는 것이 보인다. 평화음악회를 비롯하여 평화를 기원하는 행사들이 이곳에서 자주 열리면서 평화를 상징하는 공간이 되고 있다고. 폭격으로 깊은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건재한 건물의 골조사이로 보이는 하늘. 평화가 그렇게 오고 있다.
이제 월정리역으로 간다. 민통선에 안에 있는 곳이라 검문소가 있다. 철원군농민회의 협조를 얻어 출입신고를 하고 들어갔다. 철원평야가 중부내륙 최대의 곡창지대였다는 게 확 느껴진다. 드넓은 들판, 철원역, 미곡창고 등 이 모든 것들은 일제감정기 수탈의 역사를 말해주는 곳들이다.
들판에도 하늘에도 두루미들과 쇠기러기들이 무리지어 한가롭다. 저녁식사 중인가 보다.
백마고지로 가는 이정표가 왼쪽을 가리키고 있다. 이번 순례에서 아쉬운 곳 중 하나이다.
1952년 10월에 10일 동안 해발 395m의 백마고지를 두고 벌어진 전투. 산의 주인이 스물네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했다고 한다. 그래서 산정상이 대포와 함포 사격으로 깎여서 하얗게 변해버리니 산 모양이 마치 하얀 말의 모습과 같아져서 백마고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중부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철원, 김화, 그리고 북한쪽의 평강을 잇는, 소위 철의 삼각지대이기도 했다.
월정리역이다. 경원선의 간이역. DMZ 남방한계선에 가장 가까이 있는 남쪽의 마지막 역. 바로 옆에 철원 두루미관도 있다.
이우형 선생님께서 월정리역에 얽힌 이야기, 이곳 철원을 도성으로 삼았던 태봉의 궁예와 관련한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월정리역의 원래 위치는 DMZ 안쪽에 있다. 이곳은 옛 월정리역사 건물과 전쟁 중에 폭격당한 열차의 잔해 일부를 옮겨와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끊긴 철로의 잔해를 보니 마음이 울컥해진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그 바람을 담아 오늘도 순례자 박소산 선생이 평화의 날개짓을 펼쳤다.
월정리역에도 평화의 종이 있었다.
2000년 6월 25일 한국천주교회에서 '하나되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전국기도회를 이곳 월정리역에서 개최했는데, 그때 첫타종을 했다고 안내판에 쓰여 있었다.
은빛순례자들도 '하나되게 하소서' 기도하며 평화의 종을 울렸다.
맑은 종소리가 널리널리 퍼져간다. 한~반~도~평~화~ 피어라~~~~~~!
땅거미가 내리는 드넓은 평야에 저녁노을이 예쁘게 인사를 하고, 두루미며 쇠기러기며 새들도 집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서 그대로 평화를 누리기를! 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되는 아름다운 저녁무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