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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 명장면] 27. 지나내학원과 무창불학원의 설립 중국근대불교를 살찌운 ‘발전적 비판’ 불교가 화합을 말한다고 해서 불교인들이 모든 일에 늘 침묵하고 의견이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 내부에서도 불교에 대한 다른 생각과 다른 방식 때문에 서로 논쟁을 하기도 하고 비판도 했다. 이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었다. 부파불교 시대 불교인들이 제기한 상이한 주장은 불교교리의 정교한 이해를 유도했고, 교학 불교에 대한 선종의 비판은 전혀 다른 형식의 불교를 창안했다.
논쟁의 상대는 자신을 끊임없이 반성하게 하는 거울인 셈이다. 불교사의 어느 지점에서든 이런 경향은 존재한다. 중국근대불교에서 굳이 이런 예를 찾자면 지나내학원 그룹과 무창불학원 그룹의 긴장을 들 수 있다. 두 그룹이 보인 차이가 중국근대불교의 풍요를 만들었다. 사진설명 : 어우양징우가 1922년 난징에 설립한 지나내학원은 중국근대거사불교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많은 지식인들이 이곳에서 불교를 공부했다. 무창불학원 원장이었던 타이쉬스님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스님 교육을 위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사진제공=도서출판 그린비
거사불교 대표…유식학 근거로 ‘기신론’ 비판
1866년 난징에서 금릉각경처를 설립함으로써 근대 불교부흥의 계기를 마련한 양원후이(楊文會)는 1908년 다시 ‘기원정사’를 설립했다. 그곳은 일종의 불교 학교였다. 근대적 불교교육의 출발이었다. 그는 “장강에 인접한 난징에 기원정사를 설립한 이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흥시키고자 해서”라고 말한다.
불교의 부흥과 확대는 사람을 통해서 가능하다. 기원정사 출신 가운데는 나중에 양원후이를 계승한 어우양징우(歐陽竟無)와 불교개혁을 주도한 타이쉬(太虛)스님이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불교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기원정사는 경비문제로 오래지 않아 문을 닫지만 양원후이의 꿈은 어우양징우와 타이쉬에게 계승됐다.
사진설명 : 지나내학원 설립자인 어우양징우
어우양징우는 경론 유통 차원에서 불교연구 차원으로 상승을 시도했다. 지나내학원은 1922년 난징에서 정식으로 성립했다. 차이위안페이, 장타이엔 등 당시 중국을 대표한 숱한 지식인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중국근대불교 뿐만 아니라 사상사에서도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기라성 같은 학자와 사상가들이 젊은 날 이곳에서 불교를 공부했다.
기원정사와 마찬가지로 지나내학원도 출가자나 재가자가 함께 공부했다. 학생들에게는 불교적인 생활 방식을 요구했다. 출가자가 옷을 함부로 입거나 재가자가 육식을 하는 행위를 금했다. 불교가 단지 학문이 아님을 각인시켰다. 하지만 근대불교사에서 보면 지나내학원은 분명 거사불교의 대표일 수밖에 없다. 지식인을 기반으로 성립됐고 유지됐기 때문이다.
■ 무창불학원 1922년 힘들게 무창불학원은 개학했다. 그가 불학원 설립을 발의했을 때 이미 지나내학원이 활동을 시작했다. 시주를 약속했던 사람들은 지나내학원이 성립했는데 굳이 불학원이 다시 필요한지 의구심을 가졌다. 시주를 약속한 사람이 약속을 취소한 일도 있었다. 타이쉬스님은 지나내학원의 간장(簡章)을 본 적이 있었다. “본원은 불교를 선양하고 불법을 알리고 중생을 이롭게 할 인재를 양성하려고 하지 출가하여 자신의 이익만 꾀하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사진설명 : 무창불학원 원장이었던 타이쉬스님.
타이쉬스님은 반드시 불학원을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나내학원에서는 자신이 생각한 불교인재, 특히 새로운 스님을 배양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우여곡절 끝에 우창에 공간을 마련해 불학원을 설립했다. 타이쉬스님은 불학원을 졸업한 출가자는 교육 사업이나 교계 사업에 투신하게 하고 재가자는 신도회를 조직하게 하여 불교를 선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창불학원 원장이었던 타이쉬스님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스님 교육을 위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불학원 내에 연구부를 만들어 불학원 졸업생을 다시 수용하여 보다 전문적인 불교연구를 도모하고자 했다. 하지만 불학원 이사회는 타이쉬스님의 이상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들은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했다. 불학원 규모가 커질수록 재정 부담은 더욱 가중됐다.
재정 부분을 부담하고 있던 이사회에선 당연히 타이쉬스님이 이 부분을 고려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타이쉬스님은 불가능한 현실만을 고려할 수는 없었다. 계속 설계하고 건설하려는 자세로 달려갔다. 아울러 무창불학원이 스님 위주 교육으로 전환하길 바랐다. 타이쉬스님은 건전하고 교육받은 승가를 건설하길 바랐다. 거사불교운동을 존중하고 잘 조직된 신도회가 필수적임은 인정했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부분은 새로운 승가의 건설이었다. 1922년 9월 지나내학원 설립을 맞아 어우양징우는 내학원에서 <유식결택담(唯識決擇談)>을 열차례 에 걸쳐 강의했다. ‘결택’이란 판단이나 판정이라는 의미이다. 유식을 근거로 다른 교리를 비평하겠다는 의도다. 그는 앞서 <유가사지론> 100권의 교감을 끝냈고 그런 과정에서 유식학에 대한 체계적이고 방대한 이해를 갖출 수 있었다. 어우양징우는 이 강의에서 <대승기신론>의 진여 개념과 훈습 개념을 비판했다. 그의 비판은 기본적으로 ‘진여연기설’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했다.
이듬해 량치차오(梁啓超)는 일본의 모치즈키 신코의 <기신론> 중국 위찬설을 소개했다. 어우양징우의 제자 왕언양(王恩洋)은 <기신론료간>에서 “진여와 정지(正智)을 구분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뤼청(呂)은 <기신론과 선(禪)>에서 <기신론>을 위역(魏譯) <능가경>과 비교했다. 그는 <기신론>이 범본에서 번역된 것이 아니라 <능가경>을 기반으로 저술된 것이라고 판정했다. 중국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텍스트인 <기신론>에 대한 전방위적 비판이 감행된 것이다. 전통적 중국불교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도 있다. 타이쉬스님을 비롯한 무창불학원 그룹은 <기신론> 비판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발한다. 타이쉬스님의 입장은 불교 개혁을 이야기하지만 중국불교의 긍정적인 전통을 적극적으로 계승하고자 했다. 그는 중국의 다양한 불교 종파가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불법총결택담>을 발표해서 어우양징우의 <유식결택담>에 맞섰다.
타이쉬스님 생각에는 불교의 특정 교리나 텍스트를 하나의 입장에서 판단하면 옳다 그르다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유식학의 입장에서 볼 게 아니라 불교전체 맥락에서 기신론을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일종의 체계불학을 선보였다. 1924년에는 <기신론유식석(起信論唯識釋)>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유식학을 통해서도 <기신론>을 긍정할 수 있음을 보였다. 중국 근대불교는 전통불교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했다. 이렇게 전통의 계승은 반성의 기반위에서만 생명력을 가진다. 무창불학원은 타이쉬스님과 이사회 사이의 의견 차이로 20년대 후반 많은 문제를 노정했다. 1931년 일본이 일으킨 만주사변의 영향으로 무창불학원은 그해 12월 업무를 정지한다.
김 영 진/ 동국대학교 BK21 세계화시대 불교학교육연구단 연구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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