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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과 다른 하나님의 구원
이사야 46:1~13
오늘 우리는 지난 주일 저녁에 이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처음부터 다시 살펴봄으로써 이사야서 46장 전체의 메시지를 듣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그 당시 선민 유다 백성 가운데 편만한 우상 숭배의 헛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차 유다 왕국을 침략하여 망하게 할 바벨론 제국의 최고급 신들을 여기서 언급하면서 그들은 장차 형편없이 패망하게 될 것이고 그들 신을 기념하는 우상들도 짐승이 끄는 달구지에 실려 가는 신세가 될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46장 1절과 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렸으니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이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 그들은 구부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엎드러졌으므로 그 짐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자기들도 잡혀갔느니라”
수많은 신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여기서 언급한 신은 벨과 느보입니다. 벨은 바알 신의 바벨론식 이름이며 바벨론에서는 흔히 마르둑이라고 부릅니다. 근동 지역의 신들 중에서 가장 널리 숭배하는 신으로서 다산과 생산을 담당합니다. 느보는 지혜의 신이요 학문의 신으로서 벨과 더불어 숭배를 받는 신입니다. 바벨론은 이 신들을 존중하여 사람들의 이름에도 자주 붙이는데, 마르둑 발라단 왕이나 벨사살 왕이나 나보니두스나 느부갓네살 왕들도 이 신들의 이름을 넣어 부르곤 합니다. 바벨론은 느부갓네살 왕 때에 급속하게 성장하여 그 당시 근동 전역을 다 정복할 정도가 되었고 그 수도인 바벨론 성읍은 그 엄청난 규모와 고대 칠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공중 정원으로 유명한 화려한 도성이었습니다. 정복 전쟁의 승리로 인하여 얻게 된 재화와 많은 전쟁 포로의 노동력을 통하여 대 제국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 세계에서는 그렇게 세상적인 성공을 거두고 나라가 거대한 제국을 이루면 그것이 자기들이 믿는 신들의 위대함 때문이라고 믿었고 열렬히 신을 높이곤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그러한 대 성공을 거두게 하는 벨 신이나 느보 신이 장차 엎드러지고 구부러지고 그 신들의 우상들은 소와 나귀에게 끌리는 수레에 실리는 무거운 짐짝 신세가 될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들이 그토록 열렬히 추앙하던 벨이나 느보 신들이 심히 무력한 존재임을 알리게 될 것이며 그 우상들도 노새에게 심히 무거운 짐짝밖에 되지 못하는 신세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잡신과 우상이 그 숭배자들의 구원과 도움을 베푸는 존재가 아니라 무력하고 끌려다니는 짐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훗날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하게 될 때에 벨 마르둑 우상과 느보 우상들은 소와 노새가 끄는 짐짝이 실려 급히 이리 저리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모든 잡신들과 우상들은 다 이처럼 그들을 따르고 섬기는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돕지 못합니다. 도리어 짐이 되고 화를 갖다 주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것들은 위하면 위할수록, 섬기면 섬길수록 그 사람의 삶에 짐과 저주를 갖다 주는 존재입니다. 조상 숭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조상을 잘 섬기면 가문을 잘 되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귀신들만 불러들이는 신세가 됩니다. 우상과 잡신은 그것을 섬기는 사람의 정신과 삶까지도 혼돈과 무질서를 가져다 줍니다. 세상의 모든 잡신들과 우상들과 조상 숭배의 행위와 많은 미신 행위, 점 치는 일, 카드 점, 타로 점, 비둘기 점, 영으로 점 치는 일이나 서적을 통하여 사람의 운명과 미래를 점치는 일들은 모두 어둠의 세계 곧 음령들의 세계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영혼이 어둠의 영과 연결되고 그 영이 그 사람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반드시 화가 뒤따릅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성령 외에 모든 다른 영들은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요 속이는 영이요 저주받은 영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을 가로막는 재앙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일체의 잡신 숭배와 미신 행위, 사소한 일지만 운세를 알아보는 일 같은 것도 절대로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렇듯 벨과 느보를 비롯한 잡신의 헛됨과 무력함을 언급하신 후에 대조적으로 참 신이신 하나님 자신이 그 택한 백성들에게 행하시는 도우심을 이어지는 3절과 4절에서 한 비유를 통하여 말씀해주십니다. 함께 3절과 4절을 읽겠습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야곱의 집, 이스라엘의 집은 하나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할 남 유다 왕국의 히스기야 왕 당시에 북 이스라엘 왕국은 앗수르 제국에 의하여 망해가고 있거나 이미 망했을 때입니다. 남 유다 왕국마저 이제 떠오르는 동방의 나라 바벨론에 의하여 곧 제압당하고 나라가 망해질 위기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불안하고 두렵고 흔들려서 이런 저런 잡신들을 섬기고 바벨론이 섬기는 벨 신도 섬기고 느보 신도 수입하여 섬기는 그러한 영적 타락을 계속 해나가게 됩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태도는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들여서 결국 바벨론에 의하여 망하는 길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무능함 때문에 그렇게 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키는 데 불성실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왕국과 남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배신하고 우상 잡신을 섬기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도움을 청하기보다는 열국들에게 사신을 보내어 동맹을 청하며 군사적 도움을 청하는 불신앙적 행위를 계속했기 때문에 그렇게 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상과 다를 바 없이 무력한 존재가 아니요 저 바벨론 제국을 흥왕하게 한 신으로 추앙받는 벨이나 느보 신보다 열등한 신이기 때문에 그렇게 북 이스라엘이 았수르에 망하고 남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의 불신앙과 패역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그의 몽둥이로 사용하시어 북 이스라엘을 치시고, 바벨론을 채찍으로 삼으셔서 남 유다를 무섭게 징책하고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 멸하지 않으시고 남은 자들을 친히 보존하시고 그 바벨론 왕국 내에서 보존하시고 때가 되면 하나님은 예고하신 대로 바벨론 왕국을 망하게 할 것이요 자기 백성은 바벨론에서 해방하게 하시어 다시 고토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고는 그대로 실행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익하고 헛된 우상들과 달리 하나님은 자기를 자기 백성들에게 변함없이 신실하게 돌보며 끝까지 책임져주는 참 신임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백성 이스라엘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낳은 어린아이로 표현하면서 그 아기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낳자마자 품에 안고 기르고 젖으로 먹이고 등에 업고 기르신 어머니처럼 자신을 비유하십니다. 애굽에서 친히 구출하여 낳으신 우리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 어린아이를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정성스럽고 사랑스럽게 품에 안고 업고 살뜰하게 보살펴서 지금까지 자라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크면서 반항기도 생기고 컸다고 부모 말도 안 듣고 고집 피우는 아이들처럼 그렇게 하나님 마음을 심히 아프게 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듯 이스라엘이 나이가 들어 어린아이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처럼 된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눈에는 물가에 있는 어린아이요 젖 먹는 아이처럼 생각하시며 여전히 백발이 되어도 업고 품고 물에나 불에 빠지면 달려와서 구하여 내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어린아기나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이스라엘 곧 교회를 가리킵니다. 주의 백성된 우리를 상징합니다. 우리 함께가는교회가 지금 이곳 천안에 세워진 지 26년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교회 역사가 50년이 되고 80년이 되고 100년이 될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 함께가는교회를 변함없이 안고 업고 품고 길러주실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겪으면 급하게 달려와서 아기를 물에서, 불에서 건져내듯이 그렇게 우리를 끝까지 보살펴주시고 책임져주시고 돌봐주실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가정과 자녀들 역시 변함없이 우리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고 돌보아주실 것입니다. 우상과 달리 우리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고 그 택한 백성에게 신실하시기에 능히 이 약속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면서 우리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그들이 자꾸만 유혹을 받는 우상들과 참 신이신 하나님 자신을 비교하면서 우상 숭배의 무익함을 일깨워 가르치고자 합니다. 5절로부터 7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내며 은을 저울아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 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
하나님은 자존하신 하나님 자신과 우상을 비교하는 당시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다시 한번 우상의 무능력함을 말씀합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요 금이나 은을 달아서 도금장이에게 주면 그것을 가지고 신을 만드는 것이니 우상은 만들어진 신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들을 어깨에 매고 처소에 가져다 두고 고정시켜두면 그것이 서 있지만 움직이지도 못하고 부르짖는다 해도 듣고 응답하지도 못하고 손이 있다 해도 그 숭배자들이 겪는 고난에서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구원하지 못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보이는 우상과 그 이면에 있는 잡신들이 다 무력하고 헛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전지 전능하시고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시기에 능히 듣기도 하시고 돕기도 하시고 움직이며 자기 백성들을 구하여 내시는 참 신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처럼 사람들이 숭배하는 것들이 우상과 잡신들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 지식, 사람 지도자, 이런 존재들이 자기를 지키고 세우고 도울 줄 알고 열렬히 추구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 역시 결코 우리를 돕지 못합니다. 재물도, 권력도, 지식도, 어떤 인간 지도자들도 우리의 고난과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삶의 불안함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하나님의 자리에 있게 두지 마십시오. 오직 우리가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신뢰할 존재는 살아계시고 참된 하나님 한분뿐임을 명심하고 오직 하나님만 우리가 절대적으로 의지할 존재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믿음이 없는 그 언약 백성들에게 도전하시며 우상 대신에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권면합니다.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마음에 두라”
‘패역한 자들’이라고 자기 백성들을 나무라십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알면서도 거역하는 경우, 패역하다는 표현을 씁니다. 우리가 모르고 잘못을 범하면 허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인 줄 알면서 연약해서 범하면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 줄 알면서도 고집을 피우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거듭 행하는 것은 패역하고 완악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패역하고 완악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어 거듭 거듭 말씀하며 회개하도록 요청하나 듣지 아니하며 우상 숭배와 악으로 치닫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렇게 “패역한 자들”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향하여 회개를 요청합니다.
“이 일을 기억하라”고 하셨는데, 이 일은 앞서 말씀드린 바 우상의 무익함, 무능력함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우상 숭배는 헛되다고, 우상은 전혀 돕지 못하는 존재라는 점을 명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면서 ‘장부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이 장부가 되라는 뜻은 굳건하게 믿음에 서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데 있어서 남자답게 마음을 굳게 정하고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우직하게 밀어붙이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늘 연약하고 허약하여 흔들리며 굳세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한번 하나님을 믿고 섬기겠다고 결심한 후에는 흔들리지 않고 어떤 상황이 와도 믿음의 의리를 지키고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집안 일이 평안하지 않고 속을 썩는 일이 생기고 혹 부부 싸움도 하고 경제적인 시련을 겪어 많은 것들이 제약이 많아도 하나님을 섬기며 정한 공예배에 참석하여 몸을 주님께 드리는 것은 절대로 빼뜨리지 않는 각오를 갖고 충성스럽게 믿음 생활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믿음이 대장부와 같은 사람입니다. “장부가 되라”는 이 말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6:13에 반복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물러간다 해도, 세상 사람들의 온갖 조롱과 반대가 있다 해도, 목에 칼이 들이댄다 해도 우리는 흔들리지 맙시다. 더욱 견실하며 주님 편에 섭시다. 끝까지 믿음의 자리, 부르심의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는 믿음의 장부가 되어 주님이 보실 때에 심히 믿음직스러운 주의 종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갈대처럼 믿음이 흔들리는 당시의 주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자꾸만 현실을 바라보면서 우상 숭배하는 나라가 잘 되고 잡신 숭배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형통한 것을 보고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 헛된 것 같아서 잡신 숭배와 우상 숭배에 마음이 끌려가는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흔들리는 믿음을 붙잡는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옛적 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출애굽의 기적과 광야에서의 돌보심과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도우심과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팔을 내밀어서 그들을 건지셨던 수많은 일들을 상기하고 마음에 되새김질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마음이 흔들리고 믿음이 약해지고 마음에 근심과 두려움이 찾아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하나님께서 여기서 제시해준 해결책대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옛적 일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펴서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에 대한 기록들을 차분히 읽고 묵상하십시오. 그리할 때에 그 말씀 속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산란한 마음을 잠잠케 하십니다. 두려운 마음을 내몰아주십니다. 근심하는 마음에 평안의 마음을 불어넣어주십니다. 혼란스런 마음에 질서와 지혜를 주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인하여 마음에 담대함이 생깁니다. 이것이 늘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늘 힘써 행한 영적 싸움의 기술입니다. 시편 77:6 이하에 나온 말씀의 한 예만 들어보겠습니다.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그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시편 77:6~12)
삶의 이런 저런 일들이 생기면 마음속에 불안과 근심과 의심이 구름같이 피어오르면 금새 신앙은 어디론가 사라저버리고 우리 삶에 금방이라도 큰 환란과 시련이 닥쳐올 것 같습니다. 금방이라도 우리 삶이 깊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버릴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다 끝난 것만 같습니다. 그러할 때 이 시인처럼 마음에 구름같이 일어나는 생각들을 내려놓고 차분히 하나님이 행하신 옛적의 기이한 일들을 조용히 기억하면서 주의 모든 일을 입술로 조용히 읊조리면서 묵상하며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고요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느 틈엔가 과거 광야 시절에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먹이신 그 자상한 손길이 생각이 나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믿음이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도 끝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확신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언제 그렇게 구름같이 가득차 올랐던가 했던 의심, 불안, 근심등이 다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했던 영적 싸움의 이 기술을 우리도 사용합시다. 만사 내려놓고 성경의 시편들을 조용히 읽고 모세 오경을 읽고 선지자들의 삶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기적들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그리할 때에 우리 마음은 반드시 회복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또한 하나님은 옛적 일만 기억할 뿐 아니라 이제 앞날에 대한 하나님의 행하심을 믿으라고 자기 백성들에게 권면합니다.
10절로부터 11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여기서 보면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하나님께서 장래의 모든 일까지 이미 작정하시며 그 모든 작정된 바를 다 성취하시는 역사의 주관자라는 점입니다. 우상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우상은 장래 일을 알아 맞추지도 못하고 미래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래 일을 미리 다 알고 계시고 그 모든 미래를 그 뜻대로 운행하십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이 장차 바벨론에 끌려가겠지만 그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자를 그 북방 나라에서 이끌어와서 독수리처럼 빠르게 무너뜨리고 그 백성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룰 것이라고 여기서 다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동쪽에서 사나운 날 짐승을 불러 오겠다는 것은 페르시아 제국을 세운 고레스 왕을 가리킵니다. ‘독수리’로 그를 여기서 비유하는데, 실제로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의 군대의 깃발 문양을 두 날개를 활짝 편 황금독수리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바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래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볼 줄도 모르고 지극히 무능력한 우상과 잡신과 보이지 않는 우상들인 재물, 권세, 인간 자신에게 절대로 의탁하지 맙시다. 오직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다스리며 그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자가 됩시다.
다윗이 시편 31:15 말씀에서 고백한 바,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라고 한 바대로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운명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비록 공의롭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주어질 구원의 축복을 믿으라고 권면하십니다.
12절로부터 13절을 읽겠습니다.
“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이를 들으라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당시 유다는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공허하게 여겼습니다. 유다 나라는 흔들리고 대적하는 앗수르나 바벨론의 신흥 세력은 거대하고 강성한데,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내버려 두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상에게 매달리고 저 가까운 이방 나라들과 동맹을 맺어 그 정치 군사적인 동맹을 통하여 자기를 지키려 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의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미달하여 하나님의 은혜는커녕 진노를 받기에 합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자기 백성이 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조건없이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이르기를 의에서 멀리 떠난 자기 백성 유다를 향하여 자기의 공의를 가깝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인간의 의는 늘 부족합니다. 함량 미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에 절대 부족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완전한 의를 선물로 전가해주십니다. 그래서 모든 죄를 다 사해주시고 도리어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선물로 주사 조건없이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러한 약속대로 바벨론에 끌려간 그의 백성들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해방을 주시고 바벨론에서 돌아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다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의 의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서 부어주신 완전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 점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6,17 말씀에서 이렇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은 의가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온갖 죄와 부패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값없이 자기의 완전한 의를 선물로 주셔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으니, 이것이 구약 백성에게도 부어졌고 신약 백성들에게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으로써 완전히 계시되었습니다. 이렇게 완전한 하나님의 의를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완전한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미쁘시므로 우리 자신의 신실치 못하심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그러한 은혜를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3:3,4,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디모데후서 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리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얼마나 큰 행운아들인지요? 이에 반하여 우상을 섬기고 잡신을 섬기는 자는 참 불쌍합니다. 그들은 우상을 열렬히 섬기고도 결국 이 땅에서 저주를 받고 죽어서도 영원한 멸망의 자리로 가니 참 불쌍합니다. 이에 반하여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부족하여도 하나님 자신이 친히 하나님의 의를 주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시되 이 땅에서도 어린아기를 기르는 어머니, 아버지처럼 끝까지 품고 안고 구원해주시니 그 사랑이 변함없으니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혹 연약하고 혹 완악할지라도 끝까지 우리를 자신의 의로써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고 그 아들의 의로써 우리를 의인으로 삼아주시고 놀라운 은혜와 축복과 구원을 주시니 참으로 우리는 큰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이른 말이 우리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명기 33:29)
성도 여러분이여 하나님의 은혜로 이 복된 행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으니, 이 행복을 항상 기억하며 세상의 어떤 시험과 유혹 속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이 행복을 지키며 마음껏 누리며 자랑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