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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the Clouds Vanish
구름이 사라지듯
A father and his son speak on Dzogchen, called the Great Perfection in Tibetan Dharma
아버지와 아들이 티베트불교에서 ‘위대한 완성’이라 불리는 족첸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by Tulku Urgyen Rinpoche and Tsoknyi Rinpoche
툴쿠 우르겐 린포체와 쏙니 린포체. 1999년 트라이시클(미국 불교잡지) 겨울호
Tulku Urgyen Rinpoche (1920–1996) was a master in the Dzogchen tradition of Tibetan Buddhism. Teachers of Dzogchen (the Great Perfection) regard it as the innermost essence of the Buddha’s teachings. During the last decades of his life, Rinpoche’s hermitage above the Kathmandu Valley was frequented by visitors from all over the world. Today, his many monasteries and retreat centers are managed by his four sons who are lineage holders, including Tsoknyi Rinpoche. What follows is adapted from Rainbow Painting by Tulku Urgyen Rinpoche, translated by Erik Pema Kunsang, and reprinted with permission from Rangjung Yeshe Publications.
툴쿠 우르겐 린포체(1920~1996)는 티베트 불교의 족첸전통의 스승이었다. 족첸의 스승들은 족첸을 부처님 가르침의 가장 내밀한 핵심으로 간주한다. 린포체가 말년을 보냈던 네팔 카트만두 계곡 위에 있던 그분의 암자로 전 세계에서 방문객들이 많이 찾아온다. 오늘날 그와 인연 있던 다수의 절과 수행처는 법맥의 계승자인 쏙니 린포체를 비롯한 그의 세 아들이 관리하고 있다. 다음 기사는 툴쿠 우르겐 린포체가 쓰고 에릭 뻬마 쿤상이 영역하였으며, 랑중 에세 출판사에서 재출판의 허가를 받은 ‘레인보우 페인팅(무지개를 그리다)’에서 인용하였다.
Tulku Urgyen Rinpoche(1920~1996) 툴쿠 우르겐 린포체
Buddhist practice involves three steps known as intellectual understanding, experience and realization. Intellectual understanding occurs when, for instance, we hear that emptiness, meaning empty cognizance, is our nature. The mental idea we get of this is called “understanding.” In the case of experience, we are told how to recognize emptiness so that we can see exactly how this empty cognizance is. We have a taste of it, maybe no more than a glimpse, but, nevertheless, an experience of what is called “recognizing mind essence.” That is what the word “experience” means in this context. When this glimpse is followed by training in repeatedly recognizing the nature of mind and avoiding being carried away by thoughts, we gradually grow more and more used to this experience. In this case, by recognizing the empty nature we are disengaging from its expression, the stream of deluded thinking. Each time the expression dissolves back into the state of awareness, progress is made, and realization finally occurs.
불교수행은 지적인 이해, 체험과 깨달음이라는 세 가지 단계를 포함합니다. 지적인 이해란 예를 들어 공성이란 말을 들었을 때 텅 빈 앎(선종에서 말하는 空寂靈智공적영지와 상응된다)이 우리 마음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마음에 개념이 생긴 것을 우리는 ‘이해’라 합니다. 체험의 경우엔, 어떻게 공성을 인식하는 건지 설법을 듣고 텅 빈 앎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한 순간이지만 그걸 맛보게 됩니다. 비록 한번뿐인 경험일지라도 그걸 ‘마음의 본성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말의 문맥상 ‘경험’이라고 합니다. 이 한번의 흘낏 봄(一瞥,일별)이 일어난 뒤에는, 마음의 본성을 반복적으로 알아차리게 되면, 생각에 떠내려 가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점점 이 경험에 익숙해집니다. 이렇게 텅 빈 본성을 앎으로써 망상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망상에 빠진 상태에서 각성의 상태로 돌아오면, 그만큼 진보한 것이며 결국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Thoughts are like clouds and can vanish just as clouds naturally disperse into space. The expression, meaning thoughts, are like clouds, while rigpa the awakened state, is like sunlit space. I use the metaphor of sunlit space to illustrate that space and awareness are indivisible. You do not accomplish or create the sunlit sky. We cannot push the clouds away, but we can allow the clouds of thought to gradually dissolve until finally all the clouds have vanished.
생각은 구름과 같아요. 구름은 자연적으로 공간으로 사라집니다. 망상은 구름 같고 각성( 티베트 말로 ‘릭빠’라고 한다)은 햇빛 비치는 공간과 같아요. 나는 공간과 각성이 둘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햇빛 비치는 공간이라고 비유합니다. 당신은 햇빛 비치는 공간을 성취하거나 만들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구름을 치워버릴 수 없어요. 다만 생각이란 구름이 점점 사라지다가 결국에는 모든 구름이 사라지게 되지요.
It is not as if we need to decide, “I hate these thoughts. I only want the awakened state! I have to be enlightened!” This kind of grasping and pushing will never give way to enlightenment. By simply allowing the expression of thought activity to naturally subside, again and again, the moments of genuine rigpa automatically and naturally begin to last longer. When there are no thoughts whatsoever, then you are a buddha. At that point the thought-free state is effortless, as well as the ability to benefit all beings. But until that time it does not help to think that you are a buddha.
그건 우리가 ‘나는 이런 생각들을 싫어해. 나는 각성 상태만 원해! 난 깨달아야만 해!’라고 결심한다고 그렇게 될 수 없는 것과 같아요. 이런 식으로 밀고 당기는 행위로는 결코 깨달음이 다가올 수 없어요. 생각이 자연이 스러지고, 다시 또 다시 내버려 둠으로써 진정한 릭빠(각성)의 순간이 자동적으로 일어나서 자연적으로 오래 지속되기 시작합니다. 어떤 생각도 없을 때 당신은 붓다입니다. 한 생각도 없는 상태는 애씀이 없어요, 그와 동시에 모든 존재에게 은덕이 됩니다. 그런 때가 오기 전에는 자신이 붓다라고 생각해도 아무 소용이 없죠.
Listening to this explanation is merely getting the idea. We intellectually comprehend that emptiness is empty yet cognizant and that these two aspects are indivisible. It is like going to a buffet where we don’t actually taste anything, but only receive a guided tour or explanation of the different dishes: “This is Indian food, that is Chinese food. Over there is French cuisine.” Without eating anything your knowledge of the food is only intellectual understanding. Once you finally put the food in your mouth, that is experience. When your stomach is full, that is realization. Realization is the total and permanent collapse of confusion.
이런 설명을 듣는 건 단지 이해를 위한 것입니다. 공성이란 게 텅 빈(空) 동시에 알아차림(覺)입니다. 두 가지가 서로 나눠질 수 없음(空覺不二)을 지적으로 이해한 겁니다. 이건 뷔페식당에 와서 다만 다양한 음식을 둘러보며 설명을 들었을 뿐 실재로 맛을 본 것이 아닌 거죠. “이건 인도 음식, 이건 중국 요리. 저기엔 프랑스 요리” 먹어보지 않고 다만 음식에 대해 아는 것을 지적인 이해라고 합니다. 당신의 입속으로 음식을 넣고 먹어야 그걸 경험했다고 말하죠. 당신의 배가 부르면 그걸 깨달음이라 합니다. 깨달음이란 혼란(산란심)의 완전하고 영원한 붕괴입니다.
Empty cognizance is our nature. We cannot separate aspect of it from the other. Empty one aspect of it from the other. Empty means “not made out of anything whatsoever”; our nature has always been this way. Yet, while being empty, it has the capacity to cognize, to experience, to perceive. It’s not so difficult to comprehend this; to get the theory that this empty cognizance is buddha nature, self-existing wakefulness. But to leave it at that is the same as looking at the buffet and not eating anything. Being told about buddha nature but never really making it our personal experience will not help anything. It’s like staying hungry. Once we put the food in our mouth, we discover what the food tastes like. This illustrates the dividing line between idea and experience.
텅 빈 각성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이 둘(공성과 각성)을 떼어 놓을 수 없어요. 공성의 측면과 각성의 측면은 둘이 아닙니다. 텅 비었다는 것은 ‘어떤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본성은 항상 이래왔어요. 그래도, 텅 비었으면서 경험하고, 인식하는 등 아는 능력이 있어요. 이걸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이렇게 텅 빈 각성이 불성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각성이죠. 그러나 여기서 멈추는 건 뷔페를 둘러보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는 거와 같죠. 불성에 대해 듣기만 하고, 실재로 본인이 체험하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그건 항상 배고픈 상태로 남아 있는 거죠. 입 안에 음식을 넣어야만 음식 맛이 어떤 지 알 수 있지요. 이렇게 개념으로 안 것과 실재로 경험함 것이 서로 다른 구분이 생겨요.
In the same way, if we have correct understanding, the moment we apply what our master teaches, we recognize our nature. That there is no entity whatsoever to be seen is called “emptiness.” The ability to know that mind essence is empty is called “cognizance.” If it were only blank, bare space, what or who would know that it is “blank” or “empty” or “nothing”? There would be no knowing. These two aspects, empty and cognizant, are indivisible. This becomes obvious to us the very moment that we look; it is no longer hidden. Then it is not just an intellectual idea of how emptiness is; it becomes a part of our experience. At that moment, meditation training can truly begin.
스승이 가르친 대로 꼭 같이 적용하여 정확히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자기의 본성을 알게 됩니다. “공성, 공한 것’이라 불리는 어떤 것, 어떤 실체라는 게 없습니다. 마음의 본성이 텅 비었음을 아는 걸 바로 ‘각성’이라 합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단지 허공처럼 멍한 것이라면, 누가 또는 무엇이 ‘멍하다’, ‘텅 비었다’, ‘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걸 알겠습니까? 거기(허공)엔 앎이 없습니다. 여기 두 가지 양상 즉, 텅 빔(空寂)과 앎(靈智)은 둘이 아닙니다. 이건 우리가 무엇을 보는 순간 자명하게 드러나기에, 더 이상 숨겨진 게 아닙니다. 그러면 공성이란 게 다만 지적인 이해가 아니라 우리 체험의 일부가 됩니다. 이때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수행이 시작되는 겁니다.
We call this training “meditation,” but it is not an act of meditating in the common sense of the word. There is no emptying the mind essence by trying to maintain an artificially imposed vacant state. Why? Because mind essence is already empty. Similarly, we do not need to make this empty essence cognizant. All you have to do is leave it as it is. In fact, there is nothing whatsoever to do, so we cannot even call this an act or meditating. There is an initial recognition, and from then on we do not have to be clever about it or try to improve it in any way whatsoever. Just let it be as it naturally is—that is what is called meditation, or more accurately “nonmeditation.” What is crucial is not to be distracted for even a single instant. Once recognition has taken place, undistracted non meditation is the key point of practice.
우리는 이 수행을 ‘명상’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흔히 쓰는 관습적 용어로서 명상하는 행위를 말하는 건 아닙니다. 인위적으로 텅 빈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으로는 마음의 본성을 텅 비울 수 없습니다. 마음의 본성은 이미 벌써 텅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의미로 텅 빈 성품이 앎을 일으키도록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전부는 다만 일어나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내버려 놓아두는 겁니다. 사실 할 일이 전혀 없어요. 그래서 이걸 ‘한다’거나 ‘수행한다’거나 부를 수도 없어요. 처음 알아차리면, 그때부터 이걸 알아맞추려고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고, 그걸 더 나아지게 하려는 어떤 애씀도 필요하지 않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놓아 두세요. 이걸 소위 수행 없는 수행(無修行)이라 합니다. 중요한 점은 한 순간이라도 산란하면 안 된다는 거죠. 한 번 알아차림이 일어난 다음, 산란하지 않는 수행 없는 수행이 바로 수행의 핵심입니다.
“Distracted” means that once the attention wavers and loses itself, thoughts and emotions can take place. Distraction is the return of all these kinds of thoughts, in which the continuity of nondual awareness is lost. The training is simply to recognize again. Once recognition takes place, there is nothing more to do; simply allow mind essence to be. That is how the cloud-covers gradually dissolve.
‘산란하다’는 말은 주의력이 흩어져 사라지고 생각과 감정이 일어난 걸 말합니다. 산란은 모든 종류의 생각들이 찾아오는 건데, 이러면 둘이 아닌 각성의 지속성을 잃어버린 겁니다. 다시 그걸 각성하기만 하면 되는데 이게 반복 연습입니다. 한번 각성이 일어나면, 더 이상 할 것이 없어요. 다만 마음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면 됩니다. 이러면 구름에 덮인 것이 서서히 사라지게 됩니다.
What is crucial is not to be distracted for even a single instant.
중요한 것은 한 순간이라도 산란되지 않은 겁니다.
The ultimate state is totally free from any obscuration, like the short moment of recognition. However, in the latter there is still the tendency for the obscurations to return. The state of realization, complete enlightenment, means that no cloud-cover can ever return; its causes are utterly and permanently eliminated. When the clouds vanish, what else can cover the sun? That is the final or ultimate realization—when there is only brilliant, pure sunshine throughout space without any cloud-cover whatsoever. In other words, everything that needed to be removed has been removed and everything that needed to be actualized is already present.
긍극적 상태는 마음의 본성을 흘낏 본 순간 처럼 어떠한 산란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입니다. 어쨌든 그러고 나서도 망상이 되돌아오는 경향이 아직 있습니다. 깨달음의 상태, 완전한 깨달음은 구름에 덮인 상태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 원인(번뇌망상)이 아주 완전하고 영원하게 제거된 것입니다. 구름이 사라지면, 다른 무엇이 태양을 가릴 수 있겠어요? 이것이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깨달음-구름 한점 없이 밝고 순수한 햇빛만이 공간을 두루 비추듯-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제거되어야 할 것이 모두 제거되면 실현되어야 할 모든 것이 이미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첫댓글 아 기억났어요. urgyen 린포체 아들들이 많았는데 다 린포체라고 들었어요.
맏아들이 어제 스님이 올려주신 글의 최키니마 린포체이고...막내아들이 요즘 유명한 욘게이 밍귤 린포체이죠.
까규와 닝마 둘다 수행하는 집안이죠.
(댓글 수정)
아들 넷이 모두 환생자로 태어나, 지금 모두 스승 노릇을 잘 하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