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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이 피눈물 흘리던 산을 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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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예쁘게 잘 있는지 궁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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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얼굴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산을 간다.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얼굴을 몇 달 안 보면 잊을 수도 있어서 집을 나섰다.
버스가 올 시간이 안 되어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는데 일찍 도착한 버스에서 나를 찾는다. 버스에 올랐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더 반갑게 인사를 하는 사람이 있어서 누군가 한참을 바라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 다시 앞으로 와서 “춘양아! 너 이뻐졌다.” 한마디 하니 차 안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한 십여 년 만에 보는가 보다.
버스는 별내휴게소를 들리고 이내 고대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멀리 떨어진 화장실을 들리고 준비운동을 하고 단체 사진을 담고 출발했다.
태순이랑 정인이는 B팀으로 간단다. 아쉽다. 마을을 지나자 길은 바로 치고 올라간다. 미선이가 너무 힘들다고 해서 주식시장이라고 생각하고 올라가면 즐거울 것이라고 했다. 떨어지지 않고 계속 올라가니 이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미선이는 삼성 주식을 오만 원에 샀다고 한다. 그래서 대박이라고 얘기를 하니 20대 때 산 것이라 대박이 아니란다.
그동안 주식분할도 하고 증자도 하고 해서 주당 가격이 5,000원도 안 되는 것이어서 대박이 맞는 것이라고 하니 맞는단다. 주식 고수를 여기서 만났다.
땀 흘리고 층계를 오르니 정자가 나타났다. 정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을 때 미선이가 오이를 꺼내서 나누어 준다. 맛나게 먹었다. 뒤에 올라온 사무국장이 저기 바위산이 김일성 고지이고 그 앞에 백마고지가 있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6·25 때만 되면 우리 아버지는 억울해하셨다.
춘천에 사시던 아버지는 6·25전쟁이 발발해서 피난을 가다가 한 살 더 많은 사촌과 함께 국군에게 붙잡혀서 제주도에 가서 1주일 훈련을 받고 바로 전선에 투입되었다고 하셨다.
나한테 한 말이 아니고 친구끼리 하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 아버지 나이가 18세이셨다. 사촌은 6개월도 안 되세 부상을 입어 후송되고 아버지는 삼 년을 꼬박 전투하고 전투가 끝난 후에는 논산훈련소에서 조교로 마치기까지 햇수로 7년을 복무하셨다고 했다.
후송 갔던 사촌은 회복해서 제대했고 턱 있는 곳에 맞은 파편의 영향으로 말만 약간 발음이 샐 뿐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사촌은 상이군인이 되어서 해마다 송아지 한 마리가 나온다고 하셨다. 자신은 아무것도 없다는 표현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지금은 참전용사 지원이 있다.
김일성 고지 이야기를 가끔 하셨다.
다른 고지도 이야기했는데 기억에는 김일성 고지만 남아있다. 김일성이 이름을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런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백마고지 전투인 것 같다.
일개 중대가 고지 점령지시를 받고 진격을 했다고 하셨다. 어떻게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기억에 없고 TV에서 전쟁 장면이 나오고 부상병을 단까(들 것)에 담아서 옮기는 장면이 나오면 “저것은 가짜다.”라면서 혼잣말을 하셨다. 그때는 이해를 못 했다.
밤에 철수 명령이 내려서 어쩌면 패퇴하면서 산에서 내려오는데 동료가 부상을 입었는데 어찌 데리고 올 방법이 없어서 다리에 줄을 묶어 끌고 내려왔다고 하신다.
그때 산은 지금과 다르다. 아마도 아무것도 없는 그냥 흙으로 된 비탈이었을 것이다.
산을 다 내려오지 못하고 산 중턱에서 밤을 새우는데 세상에 제일 무서웠던 것이 부스럭하는 소리였다고 하셨다. 적군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어서 너무너무 무서웠다고 하셨다.
폭발하는 포탄 사이를 뛰어다니는 것이 빗발치는 총알이 무섭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스럭 소리가 무서웠다고 해서 어린 나이에 의아해했었다.
내려와서 중대 인원을 세어보니 7명인가 9명인가 있었다고 하셨다.
제대하고 40년이 흐른 후에 작은아들이 군대에서 근무하다가 대위 때 우연히 무공훈장 명단에서 아버지 이름을 발견하고 신청해서 무공훈장을 받으셨다.
용인에 있는 연병장에서 군인을 사열해놓고 지프를 타고 사열하면서 사단장에게서 전달받았다.
나는 보훈처 공무원 놈들 참 나쁜 놈들이라고 욕을 하면서 받았다. 40년이 넘도록 찾아 주지 않은 것이다.
김일성 고지를 보니 그때가 생각이 난다. 이제 나도 살아온 날이 길어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옛날 일이다.
생각해 보니 나는 살인자의 자손이다.
삼 년을 총질했으니 하늘로 쏴도 수십 명을 죽었을 것 같다. 거기다가 무공훈장까지 받으셨으니 말이다. 그래도 사람을 죽였다는 말씀은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일 년에 두어 번 한국 BBC 인터넷 방송에서 한국전쟁 다큐멘터리를 방송하는데 거기서 놀라운 장면을 보았다. 북진한 한국군 장교가 놀이 삼아서 포로를 죽이고 있었다. 청년들이었다.
이것을 본 외국군이 놀라서 왜 포로를 죽이느냐고 물으니 빨갱이라고 즐겁게 대답한다. 포로를 나에게 넘기고 네 갈 길을 가라고 하는 장면이었다.
그 포로는 인민군도 아니고 노역자로서 인민군이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약 20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슬프게도 이렇게 부역자로 민간인을 죽인 사람이 약 약 20만에서 100만이 된다고 추정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모른다. 가르치지 않았다. 가르칠 수가 없었다. 앞으로도 안 가르칠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일제가 망하고 독립했을 때 미군이 우리나라를 군정으로 다스렸다. 이 사람들이 일본을 거쳐서 한국에 올 때 일본인들이 한국인은 야만인이고 반란을 수시로 일으키고 해서 통치가 어렵다고 교육시켰다.
이들을 통치하려면 일제 앞잡이를 써야 한다고 했고 자신들이 도와준다고 했다. 그래서 독립을 하고도 일본 경찰이 한국에 남아있었다.
독립군 중에는 행정 능력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거기다가 미군이 독립군을 일본인의 말을 듣고 거부했다. 자연히 정부는 일제에서 행정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장악했다.
문제는 이들의 정신상태였다. 일본인이 최고이고 자신들이 중인이고 한국인은 천민이라는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배여 있었다. 같은 민족이 아니고 지배 대상이었다.
한국인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에 충성해야 살 수 있었던 경험이 있어서 미국 군정에 충성을 경쟁적으로 했다. 이들의 눈에는 민족은 없었다. 오직 자신이 살길만 찾는 것이었다. 제 버릇 개를 못 준다.
이들의 구호는 바뀌었다. 일제에게 충성에서 미국을 추종하는 자유였다. 자유가 뭔지 모른다. 그냥 자유이다. 하루아침에 일제 앞잡이에서 자유 투사로 돌변했다.
(인터넷 사진)
이들의 자유는 함께 민족의 자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추악한 과거에서 벗어나는 자유였다. 그래서 자신의 잘 못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만들어서 죽이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자유” 그거 조심해라! 잘 못 하면 그 자유가 당신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다. 힘이 있는 자가 가장 좋은 것이 자유이니 말이다. 당신이 살려면 자유보다 당신이 이 나라에 주인이 되어야 한다.
서민은 미안하지마는 자유로 살아갈 수가 없다.
자유가 만연한다면 서민은 바로 노예의 처지로 전락한다. 명심해라! 서민은 서로 도와야 살 수가 있다. 그리고 나라가 보살펴 줘야 겨우 살 수가 있다.
재래식 언론이 말하는 자유에 속지 말고 말이다. 특히 서민들은 말이다. 나는 빨갱이를 죽이던 사람의 자손이다. 그렇다고 자유가 필요 없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자유를 찾되 맹목적인 자유가 아니라 서민의 자유를 찾아야 한다. 여러분 자신의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말등바위)
정자를 뒤로하고 산을 오른다. 앞에 바위가 있어서 찍어 놓았다. 길가에 털중나리가 예쁘게 피었다.
미선이에게 보라고 하니 “산에 꽃이 많이 피는데 여기는 한 가지밖에 없네” 한다. 그래서 ‘올라가면 또 있어!’하고는 올라가니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서 저 아래 보이는 바위가 표범바위라고 한다. 표범바위라고 이름을 붙였다면 이름을 붙인 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호랑이나 표범이나 다 범이라고 했고, 호랑이는 칡범이라고 했다. 불과 200년도 안 되는 말이다.
저 바위에 주상절리가 있다. 다시 말해서 화산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안내판에 전망대 위로 말등바위와 칼바위능선이 있다고 표시가 되어 있어서 말등바위를 찾았는데 찾지 못했다.
그래서 되게 억울해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아까 올라오면 찍은 바위가 말등바위이다. 표지판이 잘못되어 있다.
(표범바위)
(칼바위능선)
미선이가 바위 위에 핀 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바위채송화이다. 그 옆에 자주꿩의다리도 있다. 능선에서 하늘을 보며 사진에 담았다.
(바위채송화)
(자주꿩의다리)
삼각봉 정상에 있는 정자에 올랐다. 등산로 1번 길과 2번 길이 갈라지는 곳이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했다.
미역줄나무꽃 위에 부전나비가 열심히 꿀을 찾고 있다. 정상을 한번 바라보고 가평을 내려다보면 온통 산이다.
(미역줄나무꽃)
(정상)
와~아~ 이게 뭐래! 참나리가 층층이 꽃을 피우고 있고 벌 나비가 꽃을 찾고 있다. 멋진 풍경이다. 나무 사이로 난 길 끝에 있는 바위 위에서 철원평야를 바라보며 사진을 담았다.
이곳의 평야를 보면 평야가 산비탈을 타고 내려가면서 비스듬히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냥 바닥에 평평하게 펼쳐져 있다. 그 이유는 아주 옛날에 땅이 남쪽에서 올라와 북쪽의 땅을 만나면서 구겨졌다. 높은 곳은 산이 됐다.
(참나리)
구겨질 때 갈라진 틈으로 용암이 흘러나와 골짜기를 메웠다. 표범바위가 용암이 흘러나오던 곳이고 저 평야가 용암이 채워진 곳이다.
화산재로 채워진 철원은 땅이 매우 비옥하다. 대신 과거에는 배수가 잘되어서 논농사가 힘들었으나 지금은 관개시설이 잘 되어서 농사가 잘 된다.
과거에는 여주쌀을 최고로 쳤으나 지금은 철원쌀이 최고일 것이다. 길가로 군인들의 물품을 나르는 모노레일이 있다.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너른 데크로 된 헬기장이 있고 그 끝에 정상석이 있다. 정상인증을 하느라 야단이다.
이 산의 묘미는 남으로 겹겹이 구겨진 산물결을 바라보는 것과 북으로 골짜기에 펼쳐진 철원평야를 바라보며 그 의미를 새기는 것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힘만 드는 산이다.
꾸겨짐과 트임 사이에서 감정의 교차를 경험하고 막혔던 마음을 확 풀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저 멀리 북녘 하늘이 아쉬움을 더하지만 말이다. 궁예가 꿈꿨던 그리고 이루지 못한 미련이 남아있는 들판이 아무 말 없이 눈에 들어온다.
뽕나무 오디가 까맣게 익었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따 먹는다. 오디가 어떻게 이렇게 높은 곳에 있냐고 묻는다. 새가 똥을 누어서 그렇다. 옆에는 딱총나무가 빨갛게 열매를 키우고 있다.
안내판에 고대산이란 이름이 왕고래에서 왔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고래는 바다에 사는 고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돌방 구들 아래 있는 불이 지나가는 곳 고래를 말한다고 한다.
이 고래는 고랑, 골짜기, 골과 조상을 같이 하는 말로 땅 아래로 길게 파인 곳을 말한다.
“골”은 “굴”에서 왔고 “굴”은 “굼(구멍)”에서 왔고 “굼”은 “움”과도 관련된 말이다. 움과 관련된 말로 웅덩이, 우물, 움집 등이 있다.
지명 중에 구운동은 “굼”과 우면동 우면동은 “움”과 동작동은 “골짜기”와 관련된 지명이라고 추정한다.
ㅇ 동(洞, 골 동) + 작(雀 참새 작) => 洞雀 = 골작(골짜기, 이두식 표현)
- 동작(洞雀) => 동작(銅雀), 나중에 이름을 미화하느라고 한자를 바꿨다.
洞雀(동작)이라고 써 놓고 골작(洞雀)이라고 읽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이두식 표기법이다. 나중에 이두식 표기법을 잃어버려서 골작이 동작이 됐다. 이곳은 한강에서 항구처럼 깊숙이 들어간 골짜기였다고 한다.
이 주변이 대광리인데 과거에는 신탄(薪炭)리였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숱을 굽던 곳이란 것이다. 철원읍이 가까워 이 산에서 숱을 구워 팔았던 것 같다.
옆에서 어떤 이가 이 산이 고대산이니 저 산을 연대산이라고 해야 한다고 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 고대산은 숱을 구워 팔던 산이란 의미이다.
내려오는 길은 굉장히 가파르다. 거기에다가 흙산이라 미끄럽기도 하다. 앞에 가는 이가 이쪽으로 올라왔으면 고생했겠다고 한다.
내려오다가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 있고 산자락으로 난 길이 있어서 산자락으로 난 길로 가자고 했다. 앞에 가던 사람이 갑자기 90도를 꺾어서 계곡 쪽으로 내려가서 무심코 따라 내려왔다.
(큰까치수염)
(노루오줌)
작은 능선을 넘어서는 곳은 직벽에 가까운 길이다. 해선이가 나보고 앞에 먼저 내려가서 손을 잡아주란다. 그래서 먼저 내려와서 손을 잡아주랴고 하니 됐다고 하다가 자기가 잡아준단다. 그리고는 뒤에 오는 사람의 손은 잡아준단다.
여기를 내려서니 위에서 내려오는 고속도로 같은 널따란 길이 있다. 뭔가 잘못됐다 싶다. 길을 내려서니 계곡이고 물이 흐른다. 표범폭포가 어디 있냐고 물으니 저 위에 있다고 한다.
(자드락길과 계곡길이 만나는 곳)
그래서 나는 다녀오겠다고 하고서는 다시 오르다가 용준이 일행을 만났다. 나중에 길이 어디에서 갈라졌는지 알아보니 자락길을 내려오다가 계곡으로 내려선 길이다. 그냥 앞으로 직진했으면 폭포 길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그렇게 용을 쓰고 폭포에 도착했다. 송아지 오줌 줄기 같이 가녀리게 내려온다. 그래도 표범폭포는 만났다. 표범폭포라서 그런지 폭포에는 초록의 무늬가 그려져 있다.
(표범폭포)
내려와서 계곡에서 은량이 일행을 만났다. 약수터를 만나서 약수를 한 모금 마셨다. 한 바가지를 먹기에는 물이 너무 적다. 탄산 맛이 약간 나는 것 같이 상큼하고 시원했다.
모기가 장남이 아니게 덤빈다. 손으로 눈앞을 부채질하면 모기가 몇 마리씩 손바닥에 맞는다. 부지런히 내려왔다. 버스를 타고 자리를 옮겼다. 대광리역 앞에 있는 식당에서 동태탕으로 하산식을 먹었다.
역은 기차가 서지 않고 역사 안에 있는 다래나무에 다래는 이 역을 지나간 사람만큼이나 많이도 열렸다.
(약수터)
버스를 타고 의정부 휴게소에 들렸는데 쓰레기를 못 버리게 한다. 아마도 이 휴게소는 민자인 것 같다. 민자 고속도로는 수익이 안 나면 국가에서 손해를 보전해 주게 되어 있다.
이 민자 고속도로는 통행량이 많아 충분히 흑자를 내고 있었을 텐데 적자라고 해서 대통령이 조사를 시키니 차입금 이자를 20%에서 40%로 높여서 적자를 만들어 놓았다. 한 마디로 세금 도둑놈들이다.
대통령이 즉시 바로잡으라는 지시를 내리는 장면을 얼마 전에 보았다. 우리나라는 정상화 되려면 이런 것 다 대통령이 찾아서 고쳐놔야 한다. 할 일이 참 많으시다. 그냥 편히 사시면 되기는 하는데 말이다.
한강을 넘어서면 세종-구리간 고속도로이다. 이 도로는 햇빛을 별로 볼 수가 없다. 터널로 쭉 이어진다. 대단하다. 대한민국! 그렇게 달려서 집에 도착했다. 참 멋진 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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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건강한 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