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동네 시인선 235 김자흔 시집, 『고양이는 왜 입체적인가』
김자흔 시집 | 고양이는 왜 입체적인가 | 문학(시) | 변형국판 | 120쪽 | 2024년 7월 29일 출간
값 12,000원 | ISBN 979_11_5896_656_0 03810 | 바코드 9791158966560
입체적인 사물들의 세계
2004년 《내일을여는작가》로 등단한 김자흔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고양이는 왜 입체적인가』가 시인동네 시인선 235로 출간되었다. 김자흔 시인은 권태를 견디지 못하는 존재들을 배열함으로써 시간성의 축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가 관념의 사막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다. 김자흔 시인에게 권태야말로 견딜 수 없는 죽음의 풍경이다. 이 시집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입체적인’ 풍경들은 권태로운 시간에 저항하는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고양이는 왜 입체적인가”? 그것은 평면적 시간성, 관념적 시간성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의 속눈썹 떨리는 것도 보여요.
바람의 말에 자연은 모든 표정이 되었습니다.
얼굴을 벗고 바닥에 누웠습니다.
머리끝까지 기본을 잡아당겼습니다.
2024년 7월
김자흔
존재란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이데거는 이 유구한 질문에 시간성(temporality)의 개념으로 응수하였다. 하이데거가 볼 때, 시간성은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조건이며 따라서 존재 해석의 가장 기본적인 지평이다. 시간성의 개념을 끌어들이지 않고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일본의 전통적인 시 형식 중의 하나인 하이쿠의 간단한 규칙 중의 하나는 (시에) 시간을 나타내는 계절어(季語)를 반드시 집어넣는 것이다. 하이쿠의 작시자들은 5·7·5의 3행, 17자로 이루어진 짧은 시에 왜 구태여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를 꼭 넣도록 했을까. 계절어는 단어의 낭비를 허락하지 않는 짧은 시 형식에서 한 단어만으로도 존재와 사건의 전체적 지평(맥락)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쿠의 작시자들 역시 시간성이야말로 존재의 근본 조건임을 잘 알고 있었다.
김자흔의 어찌 보면 재기발랄한 이 시집에서도 시간과 관련된 단어들이 자주 반복된다. 독자들은 이 시집의 2/3 이상의 텍스트에서 ‘어제’, ‘시간’, ‘오늘’, ‘내일’, ‘과거’, ‘현재’. ‘미래’, ‘계절’, ‘낮’, ‘밤’ 등의 무수한 시간 관련어들을 발견할 수 있다. 부언할 필요도 없이 이 시집에서 김자흔에게 가장 큰 화두는 ‘시간’이며, 시간성의 지평에서 본 존재의 풍경이다.
미래의 간극을 조심스럽게 따라가다
또 다른 흔들림에 뼈를 뼈답게 하는 시간을 넘어
식물도 죽어 단단한 뼈를 남기죠
올곧아서 주변을 두리번거리지 않고
쓰러진 자리에서 아래로 아래로
곧은 심지를 내리죠
오래된 시간은 저축 같은 매력이 있어요
우리가 몰랐던 시간을 출발했다 믿고는
끝내는 정확한 몰입으로 견디어 내죠
자연으로 돌아간 심지는
십 년 후 만우절에나 고백하려고
시간을 몰입해 두죠
― 「오래된 심지」 부분
이 작품에서 독자들이 주목할 것은 시간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시간-의식이다. 시인은 철저하게 시간성을 근거로 현재의 사태를 추적하고 있다. 화자는 “미래의 간극을 조심스럽게 따라” 간다. 미래에 무엇이 있는가. 죽음은 미래의 터미널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는 미래에서 죽음을 ‘예견(anticipation)’한다. 미래라는 시간은 죽음에 대한, 죽음을 향한, 존재 속에서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미래는 시간의 일차적 현상이다. 3행의 “식물도 죽어 단단한 뼈를 남기죠”라는 대목은 미래의 시간을 언급할 때 화자가 죽음을 의식하고 있음을 정확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바로 이어지는 “쓰러진 자리”는 죽음의 자리를 가리키며, 화자는 더 이상의 시간이 부재한 자리에서도 삶의 “곧은 심지”가 깊이 내려진다고 언급한다. “저축 같은 매력”이 있는 “오래된 시간”은 과거이다. 그러나 과거는 현존재의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 현존재의 과거는 현존재의 앞에서 현존재를 인도한다. 그러므로 시간은 과거→현재→미래의 순서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현재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그리하여 시간을 “현재 순간들(now-points)”의 균일하고도 선형적인 연결로 간주하는 것은 시간에 대한 저속하고도 일상적인 개념이다. 김자흔에게 시간은 크로노스(Chronos)가 아니라 카이로스(Kairos)이다. 카이로스로서의 시간은 기회이다. 미래는 존재의 과거를 불러내 존재 앞에 세우고 존재의 (현재 완료적인) “존재해옴(having-been-ness)”(하이데거)을 들여다보게 한다. 과거가 현존재의 앞에서 현존재를 인도한다고 하이데거가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존재가 “몰랐던 시간을 출발했다”가 “끝내는 정확한 몰입으로 견디”는 것은 바로 이런 과정을 가리킨다. 마지막 행의 “시간을 몰입”한다는 대목은 시간의 채널을 통해 존재 물음을 던지는 시인의 분명한 태도를 보여준다.
― 오민석(문학평론가)
은밀하게 딱 하루 같은 느낌으로
하얀 산의 몽블랑과
하얀 호수의 앙블랑
이건 농담이 아니라서
상관없는 것들을 마구 차갑게 하지
진짜 보고 싶을 때 못 보는
눈먼 샤먼의 일상
그것이 약간 어긋날 때
톡 오르혼강은 말하지
“가끔씩 휘어지던 우린 똑같은 날은 없었네”
딱 하루만 조각 난 기를 모아
무채색 연정을 통째로 이어받도록
― 「처음 같은 연정」 전문
이래서 밤의 여행이군요
각각의 팔레트를 펼쳐 놓은 듯
해 떨어지는 균형적 감각이 필요해요
생의 마지막 장면을 마주하고
그러다 의심이 생기면 내 방식대로
나 홀로 방향감각을 잡아가는 거예요
날씨와 교접한 빛이 폭발될 때
죽은 나뭇가지는 술렁술렁 열매를 맺고
바람의 신은 바다에 물의 벽을 쌓아 올리죠
우연히 맞닥뜨린 자연은 우릴 배신하지 않아요
겹쳐지다 추억하다 붙여져서
유기적 관계로 일어서는 거예요
어제는 우아하고 품위 있게
내일은 또 밤의 숲을 버리려고 해요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붙잡지 마요
얽히고설킨 미로에서
바람 햇빛 소금이 만들어낸
짠맛을 보러 가요
그나저나 오늘이 며칠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 「밤의 여행」 전문
마치 키 작은 외계인을 위한 선물 같았어요
과거로 흘러들어도 뽑히지 않는
머리카락을 심어두기로 했어요
그래서 어제는 헤어질 결심을 했을 거예요
마치 신들이 내는 소리로
마음의 곁가지를 정리해야만 했어요
마침내 홀로 죽을까 봐서요
무슨 반응이 이렇게 건조하냐고요?
그냥 오늘 밤은 숲을 버리려고 해요
― 「메멘토 모리」 전문
서툴긴 하지만
앞으로 나아갈 일은 나아갈 일
우리가 자라 눈물 흘리는 바람에
강은 자꾸 깊어졌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단단한 내일을 들여놓는 또 다른 흔들림에
빛나는 저 세상
계절은 두려움을 숨기지 않는다
몰랐던 시간을 출발했다 믿고는
조심스럽게 내일을 따라간다
과거의 선물처럼 지금은 좁아 보일지라도
자연과 미래의 간극을 차곡차곡 쌓아
날 선 일상을 멈춘다
오늘의 방황이 다는 아니어서
기다린 만큼 지혜롭고 풍요롭게
시간을 돌려 나아간다
흔들리지 않는 의문이다
― 「방황이 다가 아니어서」 전문
너는 뒤가 마려운 고양이
그래도 힘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새들의 수다처럼 노는 일만큼 중요한 일도 없고
놀다가 지치면 가면무도회를 연다
보름달이 떠오르는 시간
고양이는 무도회 가면 하나씩을 받아 들고
전봇대 아래로 모여든다
입체적인 자세로
입체적인 모의를 한다
가면 푹 눌러쓰고
조용히 복수의 칼날을 벼린다
고양이는 왜 입체적인가
― 「가면무도회」 전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특별한 일회성 행사처럼
매일 아침 반복되는 출근길이었거나 현관문 열리는 느긋한 오전이었거나 아니면 빛바랜 한낮의 외출이었거나 서로 다른 일직선으로 대문을 벗어난 식솔들이 꼭짓점을 나눠 가지며 이 층으로 놓인 계단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르는,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있어.
아마도 오전이거나 한낮에 나섰을 대문 밖 식솔들의 안녕이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제 창문 열고 저들의 안녕을 불러들이면 나의 안녕도 밤새 괜찮을 것이다.
김자흔 시인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2004년 《내일을여는작가》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고장 난 꿈』 『이를테면 아주 경쾌하게』 『피어라 모든 시냥』 『하염없이 낮잠』이 있다.
제1부
처음 같은 연정•13/낭만적인 무덤•14/달의 몰락•16/홀로의 여행•18/오래된 심지•20/진화 중인 관계•22/그러고도 한참을•24/공작 불매칭•25/밤의 여행•26/때•28/기억으로 안녕•30/무작정 숲•32/마지막엔 나무•34
제2부
달아오른 씨앗•37/이 별을 위해•38/핀볼게임•40/헤이 헤이 헤이•42/그다음의 문제•44/메멘토 모리•45/사막의 침묵•46/진지하게 결합•48/계절을 선도하는 여행자처럼•50/백 년 동안의 고독•52/블루곤의 비밀처럼•54/지극히 정안•56
제3부
긴장된 애교•59/시간적인 농담•60/자명한 마이너스들•62/방황이 다가 아니어서•64/가면무도회•66/생각은 덤•67/그 사이에서•68/잘난 오해로•70/지구 엔드게임•72/칠월•74/흰 독말풀•75/미니멀한 마우스•76/마당엔 독사•78/고독적인 버섯•80
제4부
허밍허밍한 낮•83/나 홀로 솔캠•84/스위트한 농담•86/입체적인 감정들•88/외롭게 가는 2월•90/여행지의 비밀•91/지금은 어때요•92/잘된 굿바이•94/유발된 감정•96/소일•97/우리 안녕은 내일에서•98/모순•100/서로 원활히•102/정안 하고(河鼓)•104
해설 오민석(문학평론가)•105
출처 : 시인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