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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넉넉한 웃음으로 손님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홍학기선생ⓒ |
인천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는 홍학기 선생을 만나러 갔다. 주안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제일시장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듣고 제일시장만 찾았다.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무렵, 날이 갑자기 추워져 스산한 마음이 드는 날이었다. ‘아, 여기도 이런 재래시장이 남아 있구나.’ 반가운 마음에 사진 한 장 찰칵! 그러고 나서 길 건너편을 보니 내가 찾는 홍일한의원 간판이 보였다. 또 사진 한 장. 그러고 무단 횡단을 하면서 건너갔는데 앗, 홍학기 선생이 어디를 갔다 오다가 나를 봤다! 에구, 쑥스러워. 하지만 홍 선생은 못 봤다는 듯 그저 넉넉한 웃음을 보인다.
허름한 건물이지만 안에 들어서니 깨끗하다. 한약 냄새가 은은하다. 인터뷰를 전혀 안 하는데 어쩌다 이렇게 거절을 못해서 하게 됐다고 홍학기 선생이 웃는다.
원장실 안에는 아주 오래된 듯한 흑백 사진이 놓여 있다. 홍학기 선생의 증조할아버지 사진이었다. 왜 걸어 놓았냐고 물었더니 “그저 표정이 좋아서” 하고 싱긋이 웃는다. 하지만 한의학을 하는 홍학기 선생이 나름대로 걸어 놓은 까닭이 있겠지. 사람을 태양인·태음인·소양인·소음인, 네 가지 체질로 나눈 사상 의학을, 음과 양의 두 가지로 체계를 나눈 분이란다. 앗, 내가 모르는 한의학 얘기가 나와 당황스러웠다. 어쨌거나 이 증조할아버지가 세운 한의학 체계는 집안의 가보처럼 내려오는 비법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더니, 홍학기 선생은 그런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허허허 웃는다.
△계양산골프장 반대 시위를 하고 있는 홍학기 선생 ⓒ |
홍학기 선생은 유명한 분이란다. 시민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인천에서 ‘홍학기’ 모르면 간첩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라고 하는데 나는 전혀 모른다. 1980년대 독재정권, 그때 그 시절을 그저 생각없이 보낸 내 이력이 드러난다. 홍학기 선생은,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은 모를 만하다. 워낙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분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지만 그동안 무슨 일을 하고 살았는지 자세히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1980년대부터 청계피복노조 노동자들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들을 무료로 진료하고,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면서 살아왔다는 사실만 짐작할 뿐이다.
홍학기 선생은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대학을 졸업했다고 했다. 그저 편하게 살 수 있었는데 1982년 무렵 의대에서 학생회 활동을 하던 친구의 꼬임(?)에 빠졌다고 했다.
“박형규 목사가 하는 제일교회에서 청계 지역 봉제 노동자들을 위한 주말 진료소를 차리고 싶은데 한방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건 좋은 거다, 그래서 청계 지역에 있는 노동자들한테 주말 진료를 시작한 거죠.”
홍학기 선생은 그때 노동자들을 처음 만나고 충격을 받았다. 그 어린 노동자들은 홍학기 선생의 인생 스승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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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도 저한테는 그 친구들이 선생님이죠. 살아온 얘기를 들어보면 신통방통하기도 하고, 열셋에서 열아홉 살 쯤 되는 친구들이었으니까. 청계피복노조 활동을 하면서 여러 가지 겪는 이야기를 처음 듣게 됐죠. 한 어린 친구가 폐 질환을 앓아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일을 그만둬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하고 겁을 준 거예요. 그 아이가 사색이 돼 가지고 온 거예요. 제일 어렸는데, 언니 오빠들이 화가 난 거죠. 어린애한테 의사라는 새끼가 그렇게 얘기하면 어떻게 하냐, 위로를 하고 주의해야 한다고 얘기해 줘야지 어떻게 좌절하게 만드냐 하면서. 그게 저한테는 상당히 문제 의식으로 다가온 거 같아요. 이른바 민중 의료, 이런 방향으로 고민을 하기 시작했던 거 같아요.”
그러던 차에 문송면 사건이 터진다. 문송면은 1988년 7월 2일 수은 중독으로 죽은 열다섯 살짜리 노동자다. 온도계를 만드는 협성계공에서 일한 지 두 달 만에 수은 중독에 걸렸는데 산재 승인을 해 주지 않았다. 석 달 동안 노동부와 싸워 산재 승인을 받았지만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었다. 문송면의 죽음은 노동자의 산업 재해, 직업병 문제가 사회 문제로 된 계기가 되었다. “송면이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자” 하고 싸운 결과 회사의 공개 사과와 보상은 물론 노동부로부터 책임자 징계, 산업 안전 보건 대책 마련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홍학기 선생은 노동자들의 건강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는 것이 더 절실히 가슴에 와 닿았다. 그때 홍학기 선생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양길승 선생을 만나고, 노동과건강연구회를 통해 김은혜 선생, 하종강 선생 같은 분들을 만났다. 양길승 선생은 지금 녹색병원 원장이고 김은혜 선생은 원진레이온 싸움 때 136일 동안 거의 날마다 시신을 지키면서 온몸을 던져 싸웠던 사람이다. 하종강 선생은 지금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이다.
홍학기 선생은 그 사건을 겪으면서 노동자들의 건강 문제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더 열악한 지역 주민들의 건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면서 1987년 인천으로 간다. 그곳에는 박종렬 목사가 빈민들이 사는 달동네에서 사랑방교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하는 노동청년회라는 모임에서 주말 진료를 하면서 한의원을 내게 됐다. 그것이 바로 지금 주안역 근처에 있는 홍일한의원이다.
“각 동네마다 의대생들을 중심으로 한 진료소가 대여섯 개 있었어요. 같이 모여 고민해 보자, 인천 지역 진료소 연합회를 꾸려서 진료 활동을 체계화하고 지역 주민운동, 노동운동에 진료소 활동이 기여를 해 보자, 해서 인천산업사회보건연구회라는 모임을 꾸리게 됐죠.”
그 연구회는 산재 직업병에 관한 교육, 상담, 대책 활동을 하면서 지역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 냈다. 현재는 ‘건강한노동세상’으로 이름이 바뀌어 노동자 중심의 건강 관리를 추구하는 조직으로 발전했다.
2003년 무렵, 홍학기 선생은 조옥화 선생과 함께 인천참여자치연대라는 단체를 꾸려 공동대표를 맡는다. 또한 2006년부터 ‘계양산골프장저지인천시민대책위원회’를 꾸려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의료운동도 중요하지만 시민운동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홍학기 선생이 바라는 세상은 다가오고 있을까.
“현실은 더 악화되고 있죠. 비정규직 문제가 전혀 해결이 안 되면서 노동 강도가 세졌고, 현대 직업병이라든가 여러 가지 갈등, 경제적인 어려움, 정치적인 어려움, 고민, 스트레스 이런 걸로 노동자들의 건강이 더 안 좋아지고 있죠.”
그럼 해답은 없을까.
“지금이 비관적인 시기인 것은 맞죠. 이명박 정부의 자본주의적 사고 때문에 날이 갈수록 서민들의 소외당하는 느낌은 더 극명해지는 것 같지만, 멀리 보면 우리의 힘을 키워 보고자 하는 노력이 묻히고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 들기 때문에 점점 기운을 회복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어요.”
인터뷰하는데 환자가 와서 인터뷰가 두어 번 끊어졌다. 그런데 진료 시간이 너무 길었다. 환자한테 끊임없이 물어보고 진료를 하는데 2~3분이 아니라 20~30분씩 걸렸다. 환자가 간 뒤에 그 까닭을 물었다.
“환자의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하니까. 배가 아프면 보통 잘못 먹어서 아픈 거지만, 몸과 마음이 연관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 삶을 알아야 돼요. 주변에서든 멀리서든 부딪치는 물리적, 심리적인 자극들에서 오는 피로가 어느 정도인가 알아볼 필요가 있으니까 진료 시간이 길어져요. 또 제가 말이 느린 것도 있고요.”
마지막엔 또 허허허! 겸손하게 웃는다. 인터뷰를 끝내고 계양동에 있는 ‘문턱없는밥집’ 2호점으로 갔다. 거기 있던 손님들이 홍학기 선생을 알아보고 반겼다. 연락도 없이 오셨냐고 하면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더니, 역시 그렇군.
술을 한잔 마시면서 홍학기 선생한테 다음 주에 이소선 어머니가 작은책에서 강연을 한다고 알려 드렸다. 꼭 시간 내서 오겠다고 했다. 홍학기 선생은 그 옛날 청계피복노조 노동자들을 진료할 때 이소선 어머니를 알았다.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도 이소선 어머니를 꼬박꼬박 진찰하고 한약을 대 드리고 있다. 이소선 어머니뿐만 아니라 집회에 나가서 다치거나, 사정이 어려운 노동자들한테는 무료로 한약을 지어 준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도 홍학기 선생은 하지 않았다. 다 남한테 들은 이야기다. 휴, 이번 인터뷰는 힘들었다.
“홍 선생님, 너무 겸손해도 안 되는 겁니다.”
△홍학기 선생이 진료하는 홍일한의원 내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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