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1장 탄생은 깨달음을 위한 것이었다
2.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조들과 풍상 많았던 집안
문선명의 고조부는 문성학(文成学)이고 그의 셋째 아들이 증조부인 선옥자당(善玉慈党) 문정흘(文禎紇)이다. 1841년 출생해 1918년에 타계 했는데 그 시기는 우리나라가 일제에 예속되어 국민들의 삶이 피폐해지기 시작한 '헌병경찰 통치기'이다. 문정흘에 대한 역사 기록은 정확히 남아 있지 않은데 상당한 재산을 모은 것으로 추정된다. 아들은 세명이 있었는데 치국(致国), 신국(信国), 윤국(潤国)이다.
문선명은 치국의 손자이며 막내 할아버지가 윤국이다. 문윤국으로 인해 문씨 가문의 역사가 바뀌었으며 문선명의 인생도 획기적으로 변했다. 문윤국이 기독교인이 되고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 가세가 기울었기 때문이다.
문선명의 회고에 의하면, 문정흘은 자수성가로 가문을 일으켜 수천석의 농사를 지었고 술과 담배는 입에 대지 않았다. 돈이 생기면 다른 사람에게 밥 한 끼라도 더 먹이는 것을 보람으로 여겼다. 작고할 때 "팔도강산 사람에게 밥을 먹이면 팔도강산에 축복이 몰려든다"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부지런했던 증조부는 틈틈이 짚신을 삼아 장에 내다 팔았고 나이가 들어서는 "후대에 우리 자손이 잘 되게 해주십시오" 빌면서 오리를 여러 마리 사서는 놓아주곤(방생) 했다.
또 사랑방에 한문 선생을 들여 동네 청년들에게 글을 무료로 가르쳐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선옥(善玉)'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문선명의 집을 '복 받을 집'이라 불렀다. 선옥자당이라 부르는 것은 거기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증조부가 작고하고 문선명이 자랄 시기에는 그 많던 재산이 모두 사라지고 근근이 삶을 이어나갈 정도였다. 그래도 가난한 사람에게 밥 먹이는 가풍만은 여전해서 식구들 먹을 밥은 부족해도 남을 먼저 먹였다. 그것은 문선명에게 평생의 가르침이 되었다. 훗날 문선명은 세계적으로 수많은 단체와 조직, 협회, 재단을 만들었는데 대회나 모임을 열어 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여 밥을 대접했다. 한꺼번에 700~800명의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식사를 대접하고 그들이 세계 평화와 인류화합, 갈등 치유에 앞장서게 했다. 반면 선교사들을 보낼 때는 여비만 조금 주어서는 세계 각지로 내보냈다. 그 이유는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작은 할아버지 문윤국은 1990년에 국가유공자로 선정된 독립투사다. 1877년 태어나 평양신학교를 나왔으며, 영어와 한학에 능통했다. 소학교 교사를 하다가 목사가 되었으며, 평안북도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평북 선천, 정주, 오산에서 4천여 군중의 궐기를 이끌다가 검거되어 징역 2년을 살았다. 자료에 의하면 원래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으나 일제의 감시와 이북 5도 대표로 활동 중이라는 점 때문에 당시 문 목사의 교회에 다니던 이명룡(李明龍)장로가 대신 참석하였다 한다. 복역 중 7만원을 상해임시정부에 보내 집안이 파산났다. 이승만, 최남선 등과 친분이 있었고, 이승훈이 오산학교를 설립할 때 배후에서 함께 하였다 한다. (위의 기록은 역사적으로 입증된 자료는 아니다) 문선명은 그 작은 할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작은 할아버지께서 그 재산을 저당 잡혀 가지고 어디에 써 버리는 바람에 전부 다 파산돼 버렸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리 집은 일시에 파산되어 버린 꼴이 됐습니다. 그런 일로 말미암아 우리 집안 사람들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 뒤에 어떤 소문이 났느냐 하면 남의 광산까지 팔아 먹었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그때 교인들 가운데 광산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 교인의 광산까지 팔아먹고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거예요. 그러니 할아버지도 그렇게 알고 계셨고, 조카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문중 전체, 동네 전체, 인근 동네에서까지도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할아버지가 가져간 돈이 어디로 갔느냐 하면 상해 임시 정부로 갔던 것입니다. 그때 돈으로 7만원이면 상당히 큰 돈이었는데 그 돈을 전부 상해임시정부에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고 다니시다 결국 외지(강원도 정선)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의 일을 문선명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윤국 할아버지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된 것은 1965년 서울에서였습니다. 사촌 동생의 꿈에 나타나셔서는 "내가 강원도 정선 땅에 묻혀 있노라"라고 하셨답니다. 꿈속에서 받은 주소로 찾아가보니 할아버지는 이미 9년 전에 작고하시고 그 자리엔 잡초가 무성한 무덤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윤국 할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경기도 파주로 모셨습니다."
문윤국은 정선에서 붓을 팔아 생을 이어갔으며 서당을 세워 한문을 가르쳤다. 한시를 종종 썼는데 제자들이 모은 시는 130여 편이었다. 그중 하나가 '남북평화(南北平和)'이다.
십 년 전에 북쪽 고향을 떠나 월남했노라 (在前十裁越南州) 유수 같은 세월이 나의 흰 머리를 재촉하네 (流水光陰催白頭)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려 해도 어찌 갈 수 있으랴 (故園欲去安能去) 타향에 잠시 머물고자 한 것이 오래 머물게 되었노라 (別界薄遊為久游 ) 고향 갈포 홑옷을 길게 입으니 여름 된 줄 알겠고 ( 袗絺長着知当夏 ) 비단 부채 흔들면서 이내 가을 닥칠 일을 걱정하네 (紈扇動揺畏及秋 ) 남북 사이에 평화가 올 날이 이제 멀지 않았으니 (南北平和今不遠 ) 처마 밑에서 기다리는 아이들아 너무 근심 말아라 (侯簷兒女莫深愁)
독립을 위해 전 재산을 헌납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옥고를 치렀지만 여생은 고행으로 점철된 독립투사의 쓸쓸한 삶과 죽음에서 우리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손자(문선명)가 시신을 거두어 아담한 안식처를 만들어 주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랄 수밖에!
문선명의 기독교 가문은 문윤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3남인 문윤국이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당대의 엘리트였음에 비해 큰 아들 문치국은 그렇지 못했다. 문선명은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들려주었다.
"우리 할아버지를 말하자면 말이에요, 할아버지는 일자무식이에요. 학교도 안 가고, 서당도 안 갔는데 삼국지를 말입니다. 맨 첫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전부 다 한번 어느 누가 얘기해 주면 그것을 그냥 그대로 되풀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한번 들으면 그만이에요. 우리 집이 국도 옆에 있었는데 전부 다 '아무 동네 문씨 할아버지 집 가봐라'고 그러니 이거 어떤 때는 사랑방에 한 30명이 모여 들었던 적도 있어요."
그 할아버지 문치국의 아들이 문경유(文慶裕)이다. 문선명의 아버지 문경유는 1893년 출생해 한국전쟁이 휴전에 접어든 1954년에 타계했다. 문선명은 가족과 헤어져 1951년 남한으로 혈혈단신 넘어왔기에 아버지의 소천(별세) 상황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1991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가 1954년 10월 11일에 별세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통일교에서는 이날을 '문경유 충부(忠父)님 추모예배일'로 정하고 매년 추모 예배를 올린다. 문경유는 정확한 역사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농부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에 대해 문선명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로 말하면 아버지는 법이 없어도 사실 분이었습니다. 만일 아버지께서 어디서 바쁘게 빚을 얻어 왔을 경우, 그 빚을 갚는다고 약속한 날에 이자까지 갚아 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분이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 약속을 이행하는 사람이라고요. 약속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는 모범적인 분이었습니다. 법 없어도 살 사람이라구요. ㅡㅡ돈을 빌려 주고는 떼일 줄은 알아도 찾아올 줄은 모른다 이거예요. 또, 누구한테 돈을 빌려 오게 되면 절대 이자 한 푼도 깎을 줄 모른다 이거예요. 아무 날 돈을 돌려 준다고 약속하게 되면, 그날 만약에 돈이 없으면 뭐 소도 갖다 팔고, 소 뿐만이 아니라 집 기둥이라도 그저 뽑아다 팔아 갚아 준다 이거예요."
문선명의 기억에 따르면 어렸을 때 머리 좋은 친척 중의 한 명이 집안의 재산을 빼돌리려 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작은 꾀로 모든 진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참이라는 것은 꾀, 작은 꾀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대의에 의한 그 중심에 의해서 지배를 받지, 그런 것은 다 몇 년 못가서 드러난다"고 말했다 한다. 비록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을 사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졌다 할 수 있다.
문경유는 교회에 갈 때 찬송가를 가지고 가지 않았는데 문선명이 그것을 궁금하게 여겨 하루는 "아버지, 왜 찬송가를 안 가지고 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것 가지고 다니면 귀찮은데 뭘 가지고 다녀? 잃어버리고 그럴텐데. 놓고 다니지"라고 대답했다. 기독교인으로서 귀찮아서 안 가지고 다닌다는 말에 의아함이 들어 또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찬송을 불러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명료했다. "넘이 부를 때 따라 하면 되고, 모를 땐 내 앞에 선 사람 것 보고 부르면 되지." 이 대답은 어린 아들에게 가르침을 주었을 수도 있지만 정작 문선명은 그 반대로 살았다. 남을 따라 하지 않고 그 자신이 항상 먼저 새로운 길을 개척했으며, 남의 것을 보고 따라한 것 아니라 남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대답은 아들에게 반어법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아버지와 전쟁 통에 헤어져 일생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니 문선명의 가슴에 새겨진 아픔이 얼마나 컸을 것인지 가늠할 수 있다.
아버지에 대해 "볏섬 하나를 이렇게 들고 층계를 올라 갔었다고요."라고 말할 정도로 체격이 좋고 힘이 셌지만 학자 타입이었다. 반면 어머니 김경계(金慶継)는 여장부였다. 1888년 태어나 1968년 소천했다. 출생연도에서 보듯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5살이 더 많다. 그럼에도 남편보다 14년이나 더 오래 살았던 것으로 보아 여장부임에는 틀림없다. 문선명은 어머니를 닮아 그의 말처럼 "앞뒤가 두리둥실 하고, 힘이 셌다."
어머니는 13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5명이 죽고 8명이 살아남았다. 일제강점기에 자식 8명을 키웠을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생했을지 능히 짐작이 간다. 그러기에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사랑과 엄격함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어머니는 성격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회초리로 쳐서 항복했다고 않으면 죽을 때까지 치는 성격입니다. 나도 그 어머니를 닮아서 고집이 대단하다구요. 한번 시작하면 항복하기 전에는 후퇴를 할 줄 모르는 거예요."
'후퇴'는 문선명의 사전에 없는 말이었다. 남한으로 내려와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거쳐 1945년 서울에서 통일교를 창립해 공적 노정을 시작한 이후 그 어떤 일이든 망설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즉시 착수했고, 한번 시작한 일은 반드시 끝을 맺었다. 물론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간 경우도 있지만 실패가 두려워 도전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예컨대 프로축구팀을 창단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인력, 자금, 명분, 가치, 시간, 법적 절차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선명은 '하면 한다'는 정신으로 모든 일을 해나갔다. 그 정신은 통일교 신도들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이 책의 곳곳에서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예컨대 문선명이 통일교 지도자들을 불러 "남미로 떠나 선교 활동을 하라"고 지시하면, 빠르면 그 다음날, 늦으면 3일 이내에 모두 짐을 싸서 남미로 떠났다.
왜 남미로 가야 합니까?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선교를 합니까? 선교 자금은 얼마나 줍니까? 지금 하던 일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하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가방 하나와 선교 책자만 들고 훌훌 브라질로, 우루과이로, 칠레로,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을 각오로 선교를 했다. 그러한 불굴의 의지와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통일교가 전 세계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그 도전정신을 문선명은 '항복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치는' 어머니에게서 배웠다.
문선명은 한 명의 아들로서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고생을 옆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님이 일을 많이 했습니다. 자식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자식들을 시집, 장가 보내기 위해서는 무명을 짜야 된다구요. 무명을 짜기 위해서는 목화를 따 가지고 거기에서 털을 빼 가지고 물레에 넣어 가지고 실을 뽑아야 됩니다. 그것을 평안도 말로는 토깽이라고 그래요, … 혼례, 결혼을 하게 될 때, 그 집안을 평가하는 데는 … 그 혼수를 보낼 때 여러가지 뭐, 옷도 보내고 뭐 전부 보냅니다. 그때 무슨 나일론 옷이 있었어요? 옷이라는 것은 전부 다 아낙네들이 목화를 따다가 실을 만들어 가지고 베들로 짜야 된다구요. 그런 것에 우리 어머니가 챔피언이에요. 어머니가 힘이 세다구요. … 보통 여자가 3장, 4장 짜는데 20장을 짜는 것입니다. 우리 누나가 시집갈 때, 정 바쁠 때는 하루에 한 필을 끊었어요. 바쁩니까 언제 기다릴 새 있어요? 후닥닥 해 버리는 거예요."
어머니가 모든 일을 후다닥 해버리는 것을 닮아 문선명 역시 모든 일을 후다닥 해버렸다. 이는 위에서 말한 도전정신과 일맥상통한다. 그렇게 어머님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사랑하고, 사랑을 받았지만 역시 전쟁통에 헤어져 생사를 알지 못했다. 문선명이 어머니를 다시 만난 것은 1991년 겨울이었다.
"고향에서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 꽃을 마쳤습니다. 흥남 감옥으로 나를 찾아오셔서 피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내가 본 마지막 모습입니다. 어머니의 무덤 위에 간밤에 내린 눈이 살포시 덮여 있었습니다. 나는 흰 눈을 손바닥으로 쓸어 내리고 어머니의 묘에 자란 뗏장을 한참이나 쓰다듬었습니다. 어머니의 거친 손등처럼 무덤 위의 겨울 잔디가 거칠거칠했습니다."
71세의 아들이 어렵게 찾아가 다시 만난 어머니는 이미 무덤 속에 누워계셨다. 그 무덤을 쓰다듬는 아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40년 전에 헤어진 어머니의 모습이 바로 어제처럼 어른거렸을 것이다. 그러기에 "어머니가 다정하게 나를 부르는 듯했습니다. 어머니의 무명 치맛자락이 휘익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습니다"라고 말했던 것 아닐까?
문선명의 형제는 모두 8명(큰네, 작은네, 용수, 효순, 용명[문선명], 효심, 효수, 효선)이었는데 공식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1991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 "어여쁘던 동생들이 초로의 할머니가 되었고, 누님이 어깨를 붙잡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자서전에는 "떠나온 지 48년 만에 고향에 가보니 누님과 여동생 한 사람만 살아있었다. 어릴 적 어머니처럼 나를 위해주던 누님은 칠순이 넘은 할머니가 되어 있었고 그토록 귀엽던 여동생도 이미 육십이 넘어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다"고 남아 있다. 또 큰형 문용수(文龍壽)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문선명의 말에 따르면, 몸에 병이 있었지만 철저한 신앙으로 고쳐 나갔으나 "틀림없이 형님은 북괴의 손에 피살되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