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3만 일본서 휴가” 이 말에 ‘워커힐’ 밀어붙인 JP (35)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관심
내가 초대 중앙정보부장(1961년 5월 20일~63년 1월 7일)으로 공화당 창당 작업을 진행하던 시기에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이 불거졌다. 워커힐 호텔과 증권 파동, 새나라자동차, 빠찡꼬 등 네 가지 문제에 중앙정보부가 개입해 거액의 돈을 챙겼다는 주장이다.
이들 의혹은 비밀 창당 작업을 둘러싸고 번지는 루머들 때문에 실체 이상으로 증폭됐다. 특히 최고회의 내부에 이 문제를 모두 내 책임으로 뒤집어씌워 나를 쫓아내려는 세력들이 의혹을 부채질했다. 겉은 권력비리 사건처럼 포장됐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반(反)JP 권력투쟁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워커힐 호텔은 내가 직접 지휘한 국가적 작품으로 지금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증권 파동과 새나라자동차는 정보부 요원이 간여했다. 증권 파동에선 정치자금 문제가 발생했으나 새나라자동차에선 그런 문제가 없었다. 빠찡꼬는 5·16 이전 민주당 정권에서 발생한 일로 처음부터 나나 중정과는 전혀 관계없는 헛소문이었다.
육사 5기 출신인 김재춘 3대 중정부장(63년 2월 21일~7월 11일)은 취임과 동시에 4대 의혹사건을 집중 수사해 정보부 요원 등 15명을 구속했으나 이들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워커힐 사건 의혹은 호텔 건설 과정에서 건축자재를 면세(免稅)로 들여와 수십억원을 빼내 정당을 만드는 데 썼다는 주장이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워커힐은 62년 3월 초 착공, 총 공사비 220만 달러를 투입해 10개월 만인 12월에 완공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차산 기슭 19만 평 터에 26개 동의 건물이 들어섰다. 지금은 지상 15층 높이의 호텔 등이 들어섰지만 당시엔 가장 높은 건물이 4층이었다.
비용과 공기(工期)를 줄이기 위해 나는 육군 공병대와 군 형무소에 있는 죄수들을 동원하고, 육·해·공군과 해병대의 트럭도 지원받았다. 이 과정에서 적절한 행정 절차를 밟지 못한 부분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슨 돈을 빼 썼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당시 서울공대 교수와 외국 건축 전문가들은 워커힐 공사 비용을 800만~1000만 달러로 계산했다. 각고의 노력으로 통상 들어가는 비용의 5분의 1 정도만 쓴 것이다.
6·25전쟁 때 미 8군 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 왼쪽) 예비역 대장이 1962년 7월 14일 서울 광장동 워커힐 공사 현장을 둘러본 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나란히 앉아 방명록에 서명하고 있다.
밴 플리트 장군은 당시 미국 실업인단 대표로 방한, 워커힐 호텔 시설 중 자신의 이름을 딴 제임스 하우스 건설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사진 워커힐 30년사
내가 워커힐 건설에 직접 나서 심혈을 기울인 이유가 있다.
JP “대선 안 나간다고? 안됩니다”…박정희에 세번 매달렸다 (36)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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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2월, 민주공화당 창당을 둘러싼 내분으로 나는 진퇴유곡(進退維谷)의 처지에 놓였다. 당을 만들겠다며 몇 발짝 앞서 뛰던 나의 발목을 뒤에서 잡아당기는 형국이었다. 이른바 ‘반김종필 진영’이 사사건건 방해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창당 반대 세력은 혁명 주체의 원대복귀를 주장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말고 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떠들었다.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는 혁명공약 제6항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박병권 국방부 장관과 김종오 육군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가 주동이 됐다. 이들은 나에 대해 터무니없는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일개 중령이 국정을 우지좌지(右之左之)한다. 이 자식을 내쫓아야 한다’며 매사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것도 내게 전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각군 참모총장들이 모여 쑥덕공론을 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김재춘(육사 5기)·박태준(6기)과 유병현·유양수(7기특별) 등 최고위원들도 민정(民政) 불참과 원대 복귀를 주장하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