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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 님의 침묵
□ 혁명에 실패한 사내가 서릿발같은 한을 품고 설악산 오세암에 들었다. 좌절과 분노로
가슴은 황폐해져 털끝 만큼의 사랑도 남아있지 않았다. 초목처럼 살다가 들개처럼 쓰러져갈 것만
같은 사내였다. 이런 사내가 설악산의 품에 안겨 시를 쓰게된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 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 갔습니다.
□ 동학혁명이 무위로 돌아가자 만해는 설악에 숨어들어 오세암에 기거한다. 1896년이었다.
이후 10년간 오세암과 백담사를 오가며 한을 달랬다. 암울한 민족을, 장래를 생각하며
救國의 의지를 다진다. 그러다가 1905년 백담사에서 머리를 깍고 스님이 된다. 혁명에 실패
한 사내를 雪嶽은 걸출한 민족시인으로 거듭나게 한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나룻배 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로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며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 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은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며 날마다 나마다 날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 (나룻배와 行人, 만해 한용운)
□ 백담사 안뜰에 세워진 만해 한용운의 시비, 백담사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인 만해 한용운(1879 - 1944)의 연작시집 '님의 침묵'을 쓴 장소이다. 한용운은 1879년
충남 홍성에서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유천(裕天)이었으나 27세에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용운(龍雲)이란 법명을 받았다. 용대리에서 백담사에 이르는 20리 백담계곡은 담과 소(沼)가 되어
명경지수를 흘러내린다. 이 계곡을 따라 이어진 길은 내설악의 관문이며 오세암, 봉정암을
오르는 길이다.
[강원 인제 '한계령']
저 산은 네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속 첩첩산중
저 산은 네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다고파
이산 저산 눈물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하덕규 작사·작곡, 양희은 노래>
강원도 한계령부터 양양까지 가파른 산맥을 휘돌아 이어지는 44호선 국도는 바다로
향해 나아가는 한 척의 돛단배의 항로와 같다.
내설악이 시작되는 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리의 계곡을 따라 난 도로를 오르면 양희
은씨의 '한계령'이 흘러나오는 한계령휴게소를 만난다.
인제군 백담사와 속초시 노학동을 잇는 미시령도로가 개통되기 전 한계령은 설악산을
지나 동해로 가는 절경의 도로였다.
40여년전 양양사람은 이곳을 '오색령'으로, 인제사람들은 '한계령'으로 불렀다. 한계
령은 감자, 옥수수, 배추 등 영서지방의 농산물과 양양지방의 수산물이 장날마다 오
가는 영서와 영동을 묶는 장소였다.
한계령은 피서철과 단풍철에 도시를 탈출하고 싶은 도시민 마음의 안식처이다. 명산
설악산의 한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이곳은 70년대 소시민들의 아픔과 눈물을 끌어안는
노랫말로 가득찬 양희은씨의 '한계령'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노랫말에 등장한 '산'은 지친 정신과 육체를 끌고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찾아온 사람
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안고 살라고 한다.
■ 정선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떳다 감은 눈은 정들자는 뜻이요
감았다 뜨는 것은 날 오라는 뜻이라.
산옥이의 팔은야 객구집의 베개요
붉은 애 입술은야 놀이터의 술잔 일세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정선아리랑, 민요)
□ 우리나라는 3대 아리랑이 있다. 영남의 밀양아리랑, 호남의 진도아리랑, 강원도 정선
아리랑이다. 밀양아리랑은 씩씩하고, 진도아리랑은 구성지고, 정선아리랑은 유장하다.
강원도 사람들이 부르는 대표적 민요 '아라리' 흔히 '정선아리랑'이란 이름으로 알려
져 있지만 강원도 현지 주민들은 보통 '아라리' 또는 '어러리'라 부르는 노래이다.
산이 많아 여름에 소나기가 많고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 강원도요, 또 고갯길
이 많아 외부와의 교통이 매우 어려웠던 곳이 강원도 이고 보면, 강원도의 지리와 문
화를 간명하게 드러내는 노래다.
■ 죽서루
관동에 죽서루란 선계에 올라
위태로운 난간에 기대섰더니 여름도 또한 가을 같구나
난간아래 조각배 한 척이 바다로 들어갈 ㄸ
드리운 낚싯대를 울릉도 갈매기 툭툭 치더라 (송강, 관동별곡)
□ 동해의 시리도록 푸른 바다빛에 흠뻑 취해 삼척에 도착하면 잠깐 바다를 멀리하고 태백 준령
과 그곳에서 흘러내린 오십천이 빚어낸 절경을 만날 수 있다. 관동팔경 가운데 최고 최대의 누정
으로 꼽히는 관동제일루 죽서루(보물 제213호)이다. 태백산맥에서 발원해 오십구비를 돌아 동해로
흘러간다는 오십천 절벽 위에 자리잡은 죽서루는 관동팔경 가운데 유일하게 바다와 떨어진 내륙
에 자리잡고 있다. 죽서루감상은 여름이 제격이라면 지금은 제방공사로 말끔히 정비된 강 건너편
에서 죽서루를 건너다 보는 풍광은 단풍이 든 가을이 제격이다.
□ 옛날 실직으로 불리며 영화를 자랑하던 땅, 강원도에서 가장 땅덩어리가 넓고 인구가 많았던
삼척이 자랑하는 곳이다. 그만큼 많은 문이 시객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관동별곡은 송강 정철이
죽서루에 남긴 시구이다.
□ 죽서루란 명칭은 옛날 죽서루자리 동쪽에 죽장사가 있어 붙여졌다고도 하고, 삼척의 명기 죽
죽선녀의 집이 있어 불려졌다고도 한다.어ㅉ던 아름드리 회화나무와 오죽, 그리고 강변에 접한 절
벽이 빚어낸 절묘한 풍광은 시심을 절로 일으킨다. 창건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조선시대에 들어
와 태종 3년(1403) 부사 김효손이 중건했다.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
다.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은 모두 17개인데 그 중 8개는 다듬은 주춧돌 위에 세우고 나머지 9개
는 자연암반 위에 얹었다. 누대에는 모두 20개의 기둥이 있다.
□ 누안에는 수많은 현판이 걸려있는데 '제일계정'은 허목의 글씨이며, 관동제일루와 죽서루는 부
사였던 이성조의 글씨이고 해선유히지소는 부사 이규헌의 글씨이다. 숙종의 어제시와 율곡의 시
도 걸려 있다.
□ 죽서루 바로 옆에는 지난 91년 2월 문체부가 지정한 '송강 정철의 달'을 기념해 세운 '송강가
사의 터'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에는 정철의 시구 '진주관 죽서루 오십천 내린 물이 / 태백산 그림
자를 동해로 감아가니 / 차라리 한강으로 향해 남산에 이르고져 / 관원의 발길은 한도가 있는데
/ 경치는 보고 봐도 싫증나지 아니하니 / 회포도 많고 많아 나그네 시름 둘데 없다. 가 뚜렷하다.
■ 왕방연
千萬里 머나먼길 고운님 여의옵고
내마음 둘데없어 냇가에 않았으니
저 물도 내안 같아서 울어 밤길 가는다. (王邦衍)
□ 숙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당한 단종에게
사약을 전했던 금부도사 왕방연의 시조이다. 돌아 오는 길에 탄식하며 읊었다고 한다. 청령포
(淸寧浦)는 단종이 유배 당한 곳으로 삼면이 강으로 둘러 싸여있고 뒤에는 절벽이다. 울창한
송림과 백사장, 서강(西江)으로 둘러싸인 절경지이다. 영월 팔경의 하나이며 단종 유배지를
표시하는 금표비(禁標碑), 단종이 자기를 불우한 두견에 비유하였다는 누각 자규루(子規樓),
등이 있다.
□ 장릉(莊陵) : 1457년 10월 24일 17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승하한 시신을 호장 엄흥도가
강물에서 찾아 장릉에 매장하여 노산묘(魯山墓)라 하였다가 숙종 24년(1698년)에 장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장릉에는 정자각, 비각, 충신각, 보덕사 등이 있다. 매년 4월 청명에 단종을
추모하는 청명제가 열린다.
■ 메밀꽃 필 무렵
이즈러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달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 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듯이 고요한 속에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 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은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메밀꽃 필 무렵, 이효석)
□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한국 단편문학의 한 '白米'이다. 이효석(이효석)은 1907년
강원도 평창군 봉평에서 태어났다. 호는 가산(가산), 1936년 '조광(朝光)'지에 고향을 무대
로 한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여 훗날 평창 봉평땅을 아름다운 문학기행의 명소로 만들어
놓았다.
□ 별다른 문학적 경험없이 교과서에 나오는 '메밀꽃 필 무렵'을 읽은이에게도 이효석이란
작가상은 빼어난 시정과 맑은 문체, 짙은 한국적 서정으로 깊이 인상지워져 있다.
경상도
[부산 기장]
뫼흔 길고길고
물흔 멀고멀고
어버이 그린 뜯은 많코많코
어듸션 외기러기난 울고울고 가나니 <고산 윤선도>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은 너무 멀어 끝이 보이지 않는 산길과 물길 그리고 울고가는 외기러기에
비유한 고산 윤선도 선생의 글이다. 정철,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가인(歌人)으로 시조
문학의 최고봉을 이루었던 윤선도의 이 작품은 지금부터 376년전 부산(이전 경남) 기장(機張)
의 한 유배지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대쪽같이 강직한 성품과 충성심 탓으로 일생동안 3차례에 걸쳐 무려 14년간이나 귀양
살이를 겪었던 윤선도의 첫 유배지는 서울에서 2천여리 떨어진 함경도의 변방 경원이
었다.
오랑케와의 내통이 염려스럽다하여 이듬해 다시 남쪽 끝인 경상도 땅 기장으로 옮기
게 된다. 1618년 그의 나이 32세때이다. 유배생활 4년 이배지(移配地) 기장현 죽성리
는 당시 겨우 초가 몇채뿐인 한적한 어촌이었다.
■ 구지가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약 내놓지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 (구지가, 삼국유사)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라
부녀를 앗아가는 죄 크도다.
네가 만약 내어 놓지 않으면
그물로 잡아내어 구워 먹어리 (삼국유사)
□ 삼국유사에 있는 구지가, 해동가(海東歌)이다. 가락국의 시조 김 수로왕을 맞이하면서
불렀다는 구지가는 우리 노ㄹ말중 가장 오래된 노래로 유명한 영신군가(迎神君歌)이다.
이노래가 불려진 곳이 구지봉이다. 구지봉은 김해시 구산동에 있다. 국도 14호선을 따라
김해시를 관통해 조금만 올라가면 터널을 만나게 된다. 이 터널의 왼편 야트막한 동산이
바로 구지봉이다. 구지봉에는 김수로왕의 탄강신화를 담고있는 조형물과 비석들이 많다.
입구에 있는 영대왕가비 비음기를 보면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하는 육가야시조의 탄생
유래가 각인되어 있다.
□ 경북 봉화 '청량산'
청량산 육륙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헌사하랴 (떠들지마라)
못 믿을 손 도화로다
도화야 떠지지마라 (소문내지마라)
漁舟子 (어주자, 낚시배 주인)
알까 하노라 (청량산, 퇴계)
경북 봉화에 있는 청량산(淸凉山)은 퇴계 이황의 사랑을 받았던 산이다. 청송 주왕산, 영암
월출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기악(寄嶽)의 하나이다.
육륙봉은 최고봉인 장인봉을 비롯한 열두 봉우리를 말하며, 명현과 고승들의 발자취가 봉우
리와 골짜기마다 배어있다.
신라명필 김생이 수도했다는 김생굴, 의상대가 기거했다는 의상굴, 최치원이 물마시고 총명
해졌다는 총명수, 난으로 인하여 피신했던 공민왕이 쌓았다는 청량산성, 퇴계의 문인들이
성리학을 가르치던 오산당(청량정사) 등이 명소다.
□ 경북 경주 '제망매가'
생사의 길은 여기있으며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이르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가지에 나서
가는 곳도 모르는구나
아아 미타찰(彌陀刹)에서 너를 만나볼
나는
도를 닦아 기다리련다 (제망매가祭亡妹歌, 월명사)
'제망매가' '도솔가'라는 향가로유명한 월명스님, 그가 지은 향가에는 그윽한 뜻과 멋이 담겨
있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초월자의 의연한 자세와 겸허한 구도의 뜻을 버리지 않았다.피리를 무척 잘 불어
달 밝은 밤에 피리를 불면서 '사천왕사 앞길'을 산책하였는데 달도 가기를 멈추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천왕사 앞길은 '월명로', 마을이름은 '월명리'이다.
사천왕사터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울산국도를 따라 남으로 내려가면 왼쪽으로 선덕여왕릉,
사천왕사터가 차례로 모습을 보인다.
밀양 아리랑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정든 님이 오시는데 인사도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빵긋
다 틀렸네 다 틀렸네 다 틀렸네
가마 타고 시집가기는 다 틀렸네 (경상도 민요)
밀양(密陽)은 경상 남도 북동부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가지산,
천황산, 서쪽으로 화악산, 영추산 등이 험한 산지를
이루어진 산지이고, 서부와 남부는 굽이도는
밀양강 연안의 넓은 평야 지역이다. 쌀·보리 등
식량 작물의 생산이 많고 원예 농업도 성하다.
경부선 철도와 부산·대구·울산·마산·창녕으로 통하는
국도가 시의 중심부를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삼랑진역에서 남부순환 철도인 경전선이 갈라진다.
잘 알려진 명승 고적으로는 영남루, 표충사, 아랑각, 작원관, 백운사,
만어사, 용암대 등이 있다.
가고파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동무
오늘은 다 무얼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가곡, 이은상 작시, 김동진 작곡)
마산(馬山)은 노산 이은상 선생의 고향이다.
경상 남도 남해안 중앙부에 있는 항구 도시.
서쪽으로는 높이 700m 안팎의 산지, 동쪽으로는 마산만을 끼고
해안평지에 길게 남북으로 자리잡고 있다. 마산만은 진해만
깊숙히 있는데, 물깊이가 깊어 천연의 좋은 항구로 되어
있다. 그리고 기후가 따뜻하여 일찍부터 피한지, 보양지로 발전해 왔다.
교통은 경전선과 진해선의 교차점에 해당되고, 남해 고속 도로와
구마 고속 도로가 이어지는 곳에 있어 고성 반도·거제도·진해 등
인근 남해안 지역의 수륙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관광지로는 가포 해수욕장, 완월 폭포, 몽고정 등 이름난 곳이 있다.
독도는 우리땅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 백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우리 땅
경산북도 울릉군 남면도동 일번지
동경 백삼십이 북위 삼십칠
평균기온 십이도 강수량은 천삼백
독도는 우리 땅 (가요)
독도(獨島)는 울릉도 남동쪽 약 80km의 해상에 있는 섬.
동경 131°52′22″, 북위 37°14′18″에 자리잡고 있다.
울릉도에 딸린 화산도로서 동도, 서도와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수십 개의 암초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0.186㎢이다. 동·서도 사이에는 너비 110∼160m,
길이 330m의 좁은 물길이 있다. 동도는 화산암질 안산암,
서도는 안산암,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응회암으로
되어 있는데, 동도에는 분화구 흔적이 있다. 바닷물에 깎여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장관을 이루는데, 바위 틈에서 약간의 잡초가 자랄
뿐 한 그루의 나무도 없고, 또 집을 지을 만한 평지도 없다.
섬 주위에는 배를 댈 만한 곳이 없고, 여러 곳에 샘물이 솟아나기는
하나 수질이 좋지 않아 먹는 물로 쓸 수는 없다. 섬 주변은 한·난류가
마주치는 수역이어서 많은 어족이 모여드는 좋은 어장을 이룬다.
그러나 자연 조건이 나빠 해마다 여름 몇 달 동안만 몇몇 어민이
바닷가 자갈밭에 임시 막사를 치고 고기잡이를 할 뿐이다. 그리고
독도에는 1954년 8월에 건설한 등대가 있다.
서울
■ 목마 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속으로 떠났다. 술 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리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오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중 략.......
두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雜誌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 (목마와 숙녀, 박인환)
지금 그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되어
나뭇잎은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기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세월이 가면, 박인환)
□ 기록에 의하면 전후(戰後) 부산 피난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박인환은 명동에 있는
술집의 술을 반이상 마셨다 한다. 거의 모든 술자리에 박인환 이 끼어 들었고,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두편의 시는 전후 서울 明洞에서 出生申告를 마쳤다.
전라도
■ 내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우에
하늘에는 성근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마음 고요히 고은 봄길 우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앗시 볼에 떠 오르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을 살포시 젖는 물결 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얕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내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우에, 영랑)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베개를 돌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진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시절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히리야 ( 향수, 정지용 )
□ 음악성을 내세운 김영랑의 시는 멋진 노래로 작곡 된 것이 없는 반면 정지용의 회화적
정경은 '향수' 처럼 멋들어진 노래로 만들어 졌다. 영랑 생가는 전남 강진. 김영랑의 본명은
윤식(윤식). 1903년 이 곳에서 태어나 일본 청산학원에 입학했으나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 1930년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등과 향토색 짙은 서정시로 이름을 얻고
'북의 소월' '남의 영랑' 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6.25동란 중 은신하다 포탄을 맞고 사망.
■ 어부사시사
간 밤에 눈 갠후에 경물(景物)이 달랐고야.
이어라 이어라
앞에는 만경유리(萬頃溜璃) 뒤에는 천첩옥산(千疊玉山)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선계(仙界)인가, 불계(佛界)인가 인간(人間)이 아니로다. (어부사시사, 윤선도)
□ 송강 정철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 시인 고산 윤선도가 84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34년을
보낸 곳이 보길도이다. 이 곳에서 명시조 '漁夫四時詞'를 지었다. 남해의 숨겨진 푸른 섬 보길
도는 한번 들어가면 나오고 싶지않은 환상의 섬이다.
뫼는 길고 길고 물은 멀고멀고
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많고 하고하고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울고 가느니
□ 낯설고 험한 곳에서 귀양살이하던 고산은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이 시조를
지었다. 이 시조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길고길고, 멀고멀고, ... 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여 그 뜻을 강조하였다.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五友歌, 고산 윤선도)
■보길도
□ 전라남도 완도군 노화 읍에 속하는 보길도는 조선조 제일의 문객이었던 고산(고산)
윤선도(윤선도. 1587-1671)가 이 섬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말년을 보낸 곳이라 특히 관심을
끄는 섬. 1시간30분 정도 남해에 점점이 떠 있는 다도해 섬 사이를 넘나드는 뱃길여행의
맛을 즐기다 섬에 도착해 선착장에 늘어선 구멍가게. 식당들을 보고는 다소 실망하게 된다.
그러나 점차 섬안으로 진입하면서 이 섬이 고즈넉하게 품고 있는 정경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섬을 가로질러 상쾌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2Km 정도 걸으면 아침 해무속에 잠긴
고산의 부용동 정원과 연못가에 서 있는 정자 세연정(세연정)을 만나게 된다.
□ 고산이 그 유명한 시조 오우가(오우가)를 읊조린 정자주변에는 그가 친구로 생각한 물.
돌. 소나무 등이 그대로 있어 그의 문향을 느끼게 한다. 또 세연정에서 조금 떨어진 보길면
부용리에는 고산이 초막을 짓고 살다가 잡목을 베어 세웠다는 낙서재(낙서재)와 돌무더기터,
바위사이에 정자를 짓고 사색과 독서를 했다는 동천석실(동천석실)과 그 주변의 작은 연못
등을 만날 수 있다. 천연기념물 제40호인 상록수림이 장관을 이루며 작은 자갈이 깔려 있는
예송리 해수욕장도 이용해 볼만하다.
□ 가구 수는 1,200여호인데 100여곳이 민박을 제공(요금은 20,000원)한다. 여관은 단 한곳
있다. 면사무소(0633-53-6501)에 문의하면 민박을 주선해 준다.
■ 영암아리랑 (월출산)
달이뜬다 달이뜬다
월출산 천황봉에 보름달이 뜬다
아리랑동동 스리랑동동
에헤야 데헤야 어사와 디야
달을 보는 아리랑 님을 보는 아리랑 (영암 아리랑, 민요)
월출산이 높더니마는 미운 것이 안개로다
천황 제일봉을 일시에 가려외다
두어라 해 퍼진 뒤면 안개아니 걷어랴. (윤선도)
□ 전남 영암에 있는 월출산을 노래한 '영암아리랑'이란 민요와 고산 윤선도의 시조이다.
월출산은 전라남도 서남부에 있는 가장 높은 산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간 산맥
중에서 가장 멀리 뻗은 호남정맥이 영암 땅과 강진사이에 빚어올린 '호남의 소금강',
'남한의 금강산'등으로 불릴만큼 경관이빼어나다. 서해바다와 남해바다를 한눈에 굽어보며
봉우리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올랐다. 월출산은 삼국시대에는 달이 난다고해서
월나악(月奈嶽) 고려시대에는 월생산(月生山) 그리고 조선시대 부터는 현재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달과 연관이 깊은 산이다. 월출산에서 갈라져 나간 산줄기들은 영암, 해남, 강진, 장흥
등으로 뻗는다. 또 진도, 완도를 비롯한 다도해의 섬이된다. 월출산(월출산)은 무등산,
추월산(담양), 두륜산, 조계산과 함께 전남의 5대산이요 지리산, 천관산(장흥), 능가산(변산),
내장산과 더불어 호남의 5대명산이다.
□ 월출산은 행정구역상 전남 영암군에 속해 있고 일부가 강진군으로 되어 있다. 월출산은
산 전체가 거대한 돌덩어리로 능선마다 독특한 기암괴석이 자리잡고 봉우리마다 바위의
모습이 힘차고 세련미가 있다. 이 산은 한반도의 서남에 위치한 탓에 안개와 더불어 산다.
짙은 안개가 종종 월출산 전체를 삼킨다. 바람에 안개가 달아나며 암봉의 물기 젖은 용틀임
은 그 자체로도 환상적이다. 이 산 기슭에는 도갑사 해탈문, 마애여래좌상, 무위사 극락보전
등 국보와 왕인박사 및 도선국사 유적지가 있다.
[전남 영암 '영암아리랑']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영암고을에 둥글달이 뜬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둥근둥근 달이 뜬다
월출산 천황봉에 보름달이 뜬다 <백암 작사, 고봉산 작곡, 하춘화 노래>
전라도 영암이라면 군서면 구림리 출신의 왕인 박사와 도선국사가 먼저 떠오른다. 왕
인박사는 백제때 '논어', '천자문'을 일본에 전해 '아스카문화', '나라문화'를 꽃피
우는데 주춧돌이 되었으며, 도선국사는 통일신라때 풍수지리설을 주창했다.
영암은 이런 역사적 두께를 반영이라도 하듯 영암은 조선조까지만 해도 제법 큰 고을
이었다. 해안선이 복잡하고 앞바다의 깊이가 얕았을뿐 아니라 영산강의 돌목이어서
중국의 앞선 문물을 뭍으로 전하고 또 일본에 전하는 국제항의 구실을 했기 때문이
다. 70년대 태어난 '영암아리랑'을 부른 하춘화씨는 영암 독천 출신이다.
■ 성산별곡
식영정(息影亭)
어떤 지날 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말 듣소
인간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하여 강산을 그처럼 낮게여겨
적막한 산중을 듣고 아니 나시는고... (星山別曲, 송강)
■ 선 운 사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니다. (선운사 동구, 서정주)
□ 우리나라 사람에게 가보고 싶은 곳을 꼽으라면 손가락안에 꼽히는 선운사,
이고장 질마재마을 출신 서정주 시인의 육필원고를 확대하여 새겨놓은 '선운사 동구'
시비가 제목 그대로 선운사 동구에 세워져 있다.
□ 선운사는 고창군 아산면 심아리에 있다. 흥덕에서 법성포로 가는 22번 국고를 따라
약 10Km 가면 왼쪽으로 선운사주유소가 보이며 두갈래 길이나온다. 이곳에서 곧장
가면 고창읍으로 빠지고 22번 국도를 따라 우회천해 풍천강을 따라 3Km 더가면 선운사
가는 작은 길이 나온다. 이 길로 1.5Km 더가야 선운사 관광단지에 이른다. 흥덕을 거쳐
선운사로 가는 버스와 고창에서 선운사로 가는 버스가 1시간 내외로 있다. 선운사 앞
관광단지에는 호텔, 여관(동백여관0677-63-3450), 민박 등 숙박시설이 있다.
□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리는 선운산은 일명 도솔산이라고한다. 서해안에 제일 아름답다는
이 선운산도립공원에 자리하고있는 선운사는 577년에 검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후
수차례의 중건과 소실을 거듭하다 광해군 5년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한때는 주위에 89개 암자를 거느리고 3천여 승려가 수도를 했던 거찰이었다.
지금은 20여명의 승려가 있는 초라한 사찰로 변했다. 그러나 선운사 경내에는 대웅전
금동보살좌상 등 보물 3점을 비롯해 지방문화재 등 많은 문화재가 눈길을 끈다. 특히
대웅전뒤 약 1만6천평방미터에 자생하는 동백나무숲은 핏빛 꽃망울을 터뜨려 보는 이의
가슴을 타오르게 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수령은 약 5백년. 천연기념물 184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를 한바퀴 둘러본 후에는 도솔암쪽으로 산을 오른다. 오르는 길에 동백숲이
꽃병풍을 펼쳐놓은 듯한 절경을 마주할 수 있다. 동백을 보고 도솔암을 다시오르면
진흥굴이 있다. 신라진흥왕이 왕좌를 버리고 이 굴속에서 수도를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이다. 그 위에 도솔암이 있고 좀더 올라가면 깍아지른 벼랑을 앞에하고 만월대와 낙조대
가 있다. 낙조대는 서해 일몰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다. 별미 풍천장어, 복분자
(산딸기)술.
■ 질마재 신화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 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 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신부가 음탕해서 그사이를 못 참고
뒤에서 손으로 잡아 당기는 거라고 그렇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ㅉ어진 채로 오줌누곤
못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인가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집 옆을 지나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
보니 신부는 귀 밑머리만 풀린 첫 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되어
폭싹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재와 다홍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미당 서정주의 시집 '질마재 신화'의 '신부'라는 시다. 질마재는 미당의 생가이며 행정
구역 명칭은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이다. 미당생가는 촌스럽지만 정감 넘치는 글자체로
우하당(又下堂)이란 당호가 새겨져 있다. 우하(又下)라는 말은 '더 없이 낮은'이란 뜻이다.
■ 매창 시비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도다 (매창)
□ 부안군청 뒤 상소산에 자리잡은 서림공원은 우거진 숲과 조촐한 산책길로 부안 사람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공원 안 한쪽에 조선시대 이 지역 여류문인인 이매창의 시비
가 있다. 아래쪽 거문고를 새겨놓은 시비에 적힌 이 시에는 어느 가을날 그녀의 마음을
고적하게 표현하고 있다.
□ 부안군청에서 서문안 당산 쪽으로 가다보면 원불교교당 바로 못미처 오른쪽으로 서림공원
가는 작은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300m 쯤 올라가면 오른쪽에 있다.
□ 당대의 문장이며 임란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유희경을 생각하며 지은 시로 3대시조집의
하나인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실려있다. 매창이 죽은 후 그녀의 글을 사랑하던 이들이
회자되는 시 61수를 모아 놓은 책이 '매창 집'이다. 훗날 시인 신석정은 이 시집을 번역
하여 '매창 시집'을 엮었다. 전북 부안의 서림공원안에 '매창 詩碑'가 세워져 있다. 여기
'梨花雨'란 비 오듯이 흩날리는 배꽃을 말한다.
□ 매창은 조선 선조6년(1573년)에 부안현 아전인 이양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매창은 호이고
이름은 계유년에 태어났다고 하여 계생이라고 불리다가 자라면서 계화, 향금이라고도 했다.
자는 천향이다. 그는 중인 신분인 아전의 서녀로 태어나 기생이 되었으나 얼굴이 예쁘거나
교태가 흐르는 타입은 아니었고, 시와글, 노래와 거문고 솜씨, 그윽한 성품으로 사람을
끌던 여성이었다. 당시 매창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그녀를 만나러
부안을 찾았다. 그와 사귀며 정을 나누던 사람 가운데는 시인 유희경이 있었고 또 허균이 있
었다. 자주 부안을 찾던 허균은 이곳에서 '홍길동전'을 지었다.
독수공방 외로이 병에 찌든 이 몸
굶고 떨며 사십 년 세월 길게도 살았네
묻노니 사람살이가 얼마나 되는가
어느 날도 울지 않은 적 없네
□ 매창은 사는 동안 사랑과 외로움, 헤어진 임에 대한 그리움 등 자기 삶에서 스며나오는
정서를 풀어낸 수백편의 시를 지었다. 개성의 황진이와 함께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던
그녀도 광해군2년(1610년), 나이 사십을 다 못 채우고 가난과 병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지 60여 년이 지난 후, 부안의 아전들이 여기저기 그의 시들을 모았고 그가 생전
에 자주 찾던 개암사에서 책으로 엮었다. 지금은 시 61수가 전해지며 부안군 봉덕리에 그
녀의 묘지가 있다.
□ 매창집은 정사신(서기 1558∼1618)의 문집. 사후 약200년 뒤인 1812년 7대손인 정래성이 목판
본 5권으로 냈다. 정사신은 병,예조정랑, 수찬 등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는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찔렀다. 그는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 등과 친했던 당대의 문사였다.
□ 전북 정읍 '정읍사'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되를 드듸욜세라
어긔야 어강도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가논듸 졈그를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정읍사, 작자미상)
전북 정읍은 '정읍사'의 고장이다.
작자와 연대를 알 수 없고 백제시대부터 구전되어온 민간전승의 가요로 현재 남아있는 작
품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악학궤범' 제5권에 '동동', '처용가', '정과정' 등 고려가요와 함께 실려 전
해진다.
정읍사는 삼국속악의 하나로 전승되어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해 춤과 함께 불리었다. 중종에
이르러 음란한 노래라하여 구중에서는 폐지되었다.
군데군데 해석이 나뉘기도 하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뜻이다.
"달아 높이 돋으사 멀리 비취오시라. 어느장에 가 계시는지요. 진데를 디디올세라. 어디에든
짐놓고 오시라. 가시는데 저물세라."
□ 전북 정읍 '새야 새야 파랑새야'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 중 략 ……
새야 새야 팔왕(八王)새야
네 무엇하러 나왔느냐
솔잎 댓잎이 푸릇푸릇
하절인가 하였더니
백설이 펄펄 흩날리니
저강건거 청송녹죽이 날속인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1894년 동학혁명·(갑오농민전쟁)은 우리나라 근대사에 굵다란 선을 그은 최대의 사건으로
서 1년동안 전라도, 충청도를 비롯하여 경상도,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등 전국에 걸쳐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갑오농민전쟁은 당시 고부군수의 끝없는 탐학과 그에 대한 항거였
지만, 더 큰 맥락에서 보면, 그것은 역사적 수명을 다해가던 조선봉건사회의 모순을 지양
하고, 이 땅을 넘보기 시작했던 외세를 극복하여 주체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려했던
몸부림이었다.
농민전쟁의 실패와 녹두장군 전봉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부르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는 지금까지도 가끔 불려지고 있다.
[전남 해남 '땅끝']
땅 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 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 간에
변하지 않고는 도리없는 땅 끝에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덩이 검은 돌이 빛나는
한 오리 햇빛
애린
나 (김지하 '애린')'
우리나라 행정상의 땅끝은 제주도의 마라도이다.
그러나 전남 해남군 송지면 갈두마을은 한반도 육지의 땅끝으로 한반도 최남단임을
알리는 토말비가 세워져 있다.
더 갈 수 없는 곳 땅끝(土末)에서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겨울바다의 운치를 느껴
보자.
* 별미집 : 해남읍 성내리 해남군청앞 '녹수회관'(0634-536-2087). 해남지방 향토음
식을 몽땅 한 상에 올려놓은 한정식, 35가지의 반찬마다 독특한 맛.
[전북 고창 '신재효 생가']
고창읍내 홍문거리
두춘나무 무지기안
시내우에 정자짓고
정자겨태 포도시렁
포도곁에 연못이라
성관(姓貫)은 평산신시(平山申氏)
이실 재(在) 효도 효(孝귀)는
…… 중 략 ……
뜰아래 핀 벽오동은
임신생(壬申生)과 동갑(同甲)이요
너도 공부(工夫) 하량이면
가끔가끔 차져오소
에용에용 어허
우겨라 방아로구나 <신재효 생가 대문 옆에 세원진 '동리가비'(桐里歌碑)>
소리꾼이 고수(鼓手)와 함께 판을 짜 창을 하고 때때로 '아니리'와 '너름새', '발림'
따위의 동작과 연기로 민중의 삶의 애환을 표현하는 판소리, 민족의 한(恨)과 정서를
해학성 넘치는 독특한 사설로 아우르는 판소리가 오늘날까지 보존된 것은 동리 신재
효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서이다.
신재효 생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연분홍 빛을 띤 꽃이 활짝 핀 두춘(杜春)나무가
반긴다.
중요민속자료 제39호로 지정된 신재효 생가는 현재 6칸 규모로 지어진 사랑채만 남아
있다.
신재효는 이곳에서 태어나 민중의 애환과 민족의 정서를 담은 판소리를 고스란히 전
하고 보존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다.
생가 사랑채에 '동리정사(棟里精舍)'라는 현판을 걸어 도리청으로 꾸민 그는 판소리
열두마당 중에서 춘향가, 심청가, 수중가, 적벽가, 박타령(흥보가), 변강쇠가(가루지
기타령)의 사설을 정리하여 소문을 듣고 찾아온 소리꾼들에게 이를 가르쳤다.
생가 바로 뒤에 건축된 '동리국악당'이 있다.
[전남 목포 '목포의 눈물']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
님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 1935년 作>
1969년 목포 유달산 중턱에 세워진 '목포의 눈물' 노래비에 적힌 노랫말이다.
일제치하 일본으로 배 떠나자 입술만 꼭씹던 새악시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친다. 신혼
초야마저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남편은 머나먼 타국땅으로 떠났기에 복받치는 눈물은
옷고름을 넘치고 옷자락을 아롱젖힌다.
남도 엘레지 '목포의 눈물'은 이별이라는 인간의 보편정서를 모태로 출발한다. 그러
나 목포의 낭만과 꿈을 그리면서도 일제치하에서 암울했던 이 땅의 현실과 항일정신
을 암시한다.
기실 '삼백년 원한 품은' 임진왜란때 '노적봉' 그리고 충무공을 가리킨 '임자취' 등
의 표현은 일제가 불온하게 여기고 트집을 잡았다. 이 가사를 쓴 '문일석'이라는 무
명시인은 목포출신으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이 한편의 가사를 남기고 사라진다.
진도 아리랑
가지 마오 가지 마오
저 달이 떴다지거든 그 제사 가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흥 아라리가 났네.
청천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
문경 세재는 이별 고개
굽어진 굽이 굽이가 눈물에 젖네
놀다 가세 놀다 가세
저 달이 지도록 놀다 가세 (전라도 민요)
진도(珍島)는 전라 남도 남서부, 진도군의 중심을 이루는 섬.
면적은 334㎢로서 제주도와 거제도에 이어 우리 나라에서
셋째 번으로 큰 섬이다. 소백산맥의 갈래가 황해에 가라앉아 생긴
섬들로 구릉성 산지가 발달하였다. 동쪽 화원 반도와의 사이에
있는 울돌목(명량 해협)은 조수의 흐름이 빠르기로 유명하다.
기후는 온화하지만, 겨울에는 북서 계절풍의 영향으로 기온이
낮은 편이다. 주곡을 비롯하여 목화와 약초 등이 재배되고 축산도 성하다.
부근의 바다에서는 조기, 갈치, 도미, 새우, 고등어가 많이 잡히고,
김과 굴 양식이 성하다. 진도는 도로망이 발달되었고, 진도의 녹진과
해남의 우수영 사이에 진도 대교가 가설됨으로써 교통이 더욱
편리하게 되었다. 조도면 일대의 섬 지역은 경치가 아름답고,
삼별초와 이 충무공의 유적지가 많은 곳으로 다도해 해상
국립 공원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특히 이 지방 특산인 진돗개로
유명하다. 또한 음력 2∼3월의 보름이나 그믐께에는
진도와 모도(茅島) 사이의 바다가 갈라져 2.8㎞의 바닷길이
생기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아들고
있다.
충청도
■ 가람 이병기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을 벗어나고
산듯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가람 이병기)
□ 가람(1891-1968)은 시조 중흥의 기틀을 다지고 시조의 현대적 혁신을 위한 새로운 운동
펼쳤으며 스스로도 수많은 시조를 창작한 시조 시인이자 국문학자이다. '역대시조선',
'가람문선', '국문학전사' 등의 저서를 남겼다. 전북 익산 여산면 원수리 진사동에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가 있다. 선생의 생가를 알리는 팻말을 보고 마을길로 접어들어 10여 채의
민가를 지나면 길 오른쪽에 단정한 초가가 나선다. 가람은 1891년 변호사 이채의 큰아들로
이 집에서 태어나 1968년 77세를 일기로 역시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 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전문
□ 신동엽은 1967년,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두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한편은 짧은 서정시
'껍데기는 가라' 였으며 다른 한편은 서사시 '금강' 이었다.
王은
백성들의 가슴에 단
꽃
군대는
백성의 고요한
문지기
앞마을 뒷마을은
한식구
두레로 노동을 교환하고
쌀과 떡, 무명과 꽃밭
아침 저녁 나누었다. (금강. 6장 부분, 신동엽)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옷한벌 걸치고
걸어가자
배고프면
얻어먹고
어두워지면 헛간 빌리어 자자
휴전선 너머
계속 계속
걸어가자
백두산 천지
기슭에 사는 호랑이
한라산
백록담에 사는
토끼 만나러 가자. (금강, 신동엽)
□ '금강'을 발표한 신동엽은 일년 반뒤 세상을 떠났다. 사십세에...
■ 칠갑산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느냐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 주던 산새 소리만 텅빈 가슴속을 태웠소 (칠갑산, 가요)
□ 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과 정산면에 걸쳐 있는 칠갑산(해발 561미터)은 워낙 산세가
거칠고 가파른데다 교통마저 불편해 '충남의 오지'로 알려져 왔다. 청양군 한복판에 있는
칠갑산은 1,600여종의 나무가 자라며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줄을 이어 '아흔아홉고개'라고
불린다.
□ 이 골짜기에는 옛날에는 호랑이가 많이 살아서 산중턱 마을인 정산면 천장마을(노루목
고개)에서는 호랑이 피해를 막기 위해 호랑이를 수호신으로 모시는 산신제를 매달 섣달에
지내 오고 있다. 이 '노루목 산신제'의 제주는 상을 당하거나 그해에 나쁜 일을 겪은사람은
안되고, 집에 아기 밴 여자가 없어야 하고 아내의 달거리가 산신제 날에 걸치지 않아야
한다. 노루목 산신제는 밤10시에 시작해서 칠갑산이 있는 상신단과 하신단에 가서 새벽닭이
울기 전에 제를 다 올려야 하며 내려오는 길에 새로 깎아 세운 장승(길신)에게 또 제를
올린 뒤 마을에 돌아와 풍물을 치며 아침까지 놀음판을 올린다.
□ 자연에 삶을 기대는 부분이 많은 칠갑산 언저리의 마을들에는 곳곳에 세워진 한 쌍의
장승에게 정월 보름 새벽에 도둑을 맞지 않고 병에 걸리지 않도록 비는 장승제를 올리기도
한다. 이 장승제는 별다른 제수거리는 없지만 한티마을 우물에서 새벽 일찍 떠오는 정한수
를 으뜸 제수로 올린다. 그리고 이 샘물을 마을의 수호신인 장승들의 신령스런 기운을
마을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물이라 하여 마을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며 마신다. 그래서 이
마을 엔 병이 없고 장수를 누린다.
□ 그러나 칠갑산은 지난 83년 밑동에 455m 대치터널이 뚫리고 이제 '깊은 산골'의 티를
벗고 있다. 79년에는 칠갑산 허리에 '천장저수지'가 생겨 '산정호수'의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이 근처가 개울에서는 참붕어, 버들치 등 매운탕 감이 많이 나고 특히 무한천에서
나는 참게는 한 일주일 오가리에 가두고 쇠고기를 먹여 간장에 우려내면 감칠 맛이 그만
이다.
□ 칠갑산 장곡사에는 국보 58호인 철조약사 여래상과 보물 4점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칠갑산 여행은 그 곳 향토음식인 민물고기 매운탕, 산채백반, 시골닭 백숙 등을 맛보며
민박을 하는 것이 제격이다.
■ 울고넘는 박달재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 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성황님께 빌고가소
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 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에 금봉이가 <반야월 작사, 박재홍 노래, 1948년 作>
[충북 제천 '울고넘는 박달재']
'재'는 이별과 기다림의 원형이다.
경상도 젊은 선비 박달(朴達)은 과거를 보러가던 중 백원면 평동리에서 금봉이라는
처녀를 만났다. 과거에 급제한 후 함께 살기로 약속한 박달은 금봉을 고향에 두고 한
양길에 오른다. 그녀 생각에 공부를 게을리해 과거에 낙방하고 염치가 없어 금봉에게
로 돌아가지 못한다. 서낭당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박달의 금의환향을 빌던 금봉은 상
사병에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에서 숨을 거둔다. 사흘후 돌아온 박달은 금봉의 죽음을
접하고 그녀의 환영을 좇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박달재의 전설이다.
고려때 김취려 장군이 거란 10만대군을 물리쳤던 곳, 신라 경순왕이 왕건에게 항복하
기 위해 울고 넘던 고개, 어린 단종이 유배지 영월을 가기 위해 울분을 삼키며 넘던
재, 신해교난, 병오박해를 피해 봉양면 구학리 베론성지를 찾아가던 그런 박달재이
다.
□ 충청북도 제원군 봉양면 원박리와 백운면 평동리사이에 있는 박달재는 예로부터 제천
에서 서울에 이르는 관행 길이었다. 교통이 불편했던 옛날에는 산간지대를 넘어가는 잿마루
가 호랑이와 도깨비가 판을 치고 애틋한 전설이 주머니채 열리는 '구름도 울고 넘는'고생길
이었다.
□ '박달재 노래비'가 세워지면서 포장길이 놓이고 옹달샘이 시멘트로 단장된 오늘의 박달재
는 얼른보면 별로 높거나 험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산허리를 더듬고 올라온 매지구름
(비를 품고 있는 먹구름)이 박달재에서는 '울고 간다'고 할 정도로 하루에도 몇 번씩 비를
뿌린다. 당시 연인들의 보편적 정서였을 금봉이류의 사랑이 그 양태를 많이 달리한 오늘
'울고 넘는 박달재'는 비탄 조니 패배.향락적이니하는 일반의 비판에 아랑곳 않고 충북사람
들의 기분을 세워 주는 노래이다.
□ 험준한 계곡과 웅장한 산세를 갖춘 박달재는 1217년(고려 고종 4년) 7월 거란군 10만이
침공했을 때 김취려 장군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빛나는 전공을 세운 유적지이기도하다.
또 1258년(고종 45년) 몽고 군이 쳐들어 왔을 때도 제천,충주의 별초군이 대승을 거둔 곳
이기도 하다.
□ 박달재에는 박달재 자연휴양림이 있어서 좋은 쉼터가 되고 있다. 울창한 소나무 숲과
기암괴석 사이를 지나 정상에 서면 백운산, 구학산 등 크고 작은 준봉들이 바다를 이룬다.
휴양림 봉우리에는 '깊은 산속 옹달샘'이 하나 있다. 산과 구름바다를 멀리 내려다보며
마시는 그 옹달샘 물 맛은 속세의 때를 씻어 주는 듯이 시원하다.
천안 삼거리
천안삼거리 (흥) 능수나 버들은 (흥)
제멋에 겨워서 축 느러졌구나 (흥).
에루화 에루화 (흥) 성화가 났구나 (흥)
은하 작교가 (흥) 다 무너졌으니 (흥)
건너나 갈 길이 막연하구나 (흥).
오동동 추야에 (흥) 달이 동동 밝은데 (흥)
님에 생각이 새로 동동 나누나 (흥).
계변 양류가 사사록 (흥) 인데요 (흥)
그 버들가지가 유색 신이라 (흥). (충청도 민요)
천안 삼거리 ( 天安三巨里 )
충청도 민요의 하나. 사설 사이사이에 ‘흥흥’하는 흥을 돋우는
소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흥타령>이라고도 한다.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부른다.
천안(天安)은 충청 남도 북동부, 차령 산맥 북쪽 기슭의 분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동쪽과 남쪽을 성거산, 흑성산, 광덕산 등이
에워싸고 있으며, 시내에는 낮은 언덕이 많다. 예로부터‘천안
삼거리’로 이름난 교통의 요지로 경부선, 장항선, 안성선
철도가 이 곳에서 갈라지고, 경부 고속 도로와 국도 및 지방도가
사방으로 뻗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고려 때 세워진 성불사,
유관순 사당, 천흥사지, 광덕사 독립 기념관 등이 있다.
제주도
오돌또기
오돌또기 저기 춘향 나온다.
달도 밝고 내가 머리로 갈거나
둥그레 당실 둥그레 당실 여도 당실 연자머리로
달도 밝고 내가 머리로 갈거나 (제주도 민요)
둥그레 당실
둥그레 당실 둥그레 당실 너도 당실 연자머리로
달도 밝은데 내가 머리로 갈가나
한라산 꼭대기 실안개 돈 듯 만 듯
흰구름 사장에 궂은비 온 듯 만 듯
서귀포 칠십리 파도가 인 듯 만 듯
해녀들 머리가 에루화 보일 듯 말 듯
용지연 폭포에 용놀던 자리 없고
삼성혈 옛자리 흔적이 있는 둥 만 둥 (제주도 민요)
제주도(濟州道)는 우리 나라 남서 해상에 있다.
북쪽으로 목포와의 거리는 141.6km,
북동쪽의 부산과의 거리는 286.5km,
동쪽의 일본 쓰시마섬과는 255.1km 거리에 있다.
면적 : 1,825.61㎢
도의 꽃 : 영산홍
도의 새 : 큰오색딱따구리
도의 나무 : 녹나무
제주도는 화산도(火山島)로서 그 구성 암석과 산 모양이
반도 안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여러 번에 걸친 화산 활동
끝에 맨 마지막에 분출한 현무암, 곧 검은 색깔에 구멍이
송송 나 있는 바윗돌이 많은 것이 특색이다. 섬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한라산은 지금은 휴화산이지만, 지난날의 화산
활동의 흔적으로 산꼭대기에 화구호(火口湖 : 백록담)가
남아 있다. 산 모양은 거북의 등과 같이 경사가 완만하며,
비탈면을 따라서 350여 개나 되는 측화산이 흩어져 있다.
지표면을 덮은 다공질 현무암은 투수성이 커서 거의 모든
하천은 여느 때는 메말라 있다가 비가 내릴 때에만 물이
흐른다. 땅 속으로 스며든 물은 지하수가 되어 해안에서
솟아나므로 샘물(용천)은 해안 가까이에 흩어져 있고,
그것이 음료수와 폭포수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 제주도의
해안은 매우 단조로운데, 그 길이는 254km에 이른다. 해안
곳곳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다. 제주도에
딸린 섬으로는 우도, 상추자도, 하추자도, 가파도, 마라도,
비양도 등 8개의 유인도와 54개의 무인도가 있다.
식물 분포 상태는 한라산의 북쪽 비탈면을 기준으로 삼을 때
70m 이하의 낮은 지대에는 아열대 식물들이 자라며,
녹나무를 주로 하는 상록 활엽수가 숲을 이루고 있다.
또 700∼1,200m까지에는 서어나무, 개서나무, 졸참나무 등
온대 활엽수가 자라고, 1,200∼1,500m까지는 소나무, 향나무,
구상나무 등의 냉대 침엽수가 자라며, 1,500∼1,700m까지는
관목이 숲을 이루고, 1,850m 이상의 산마루에는 고산 식물대가
펼쳐져 있다.
제주도와 한반도와의 연락은 해상과 항공편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통과 지역인 제주시는 통과 관광 도시로 번영하고 있다.
도내 교통은 도로 교통이 주가 되고 있는데,
제주시를 기점으로 하는 해안 우회 도로,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한라산 횡단 도로 등이 중심을
이루어 도내 관광과 산업 개발에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해상 교통으로는 목포, 부산, 여수 등지와의 사이에
카페리호가 정기적으로 다니고 있다. 항공 교통은 여객기의
취항으로 전국이 1시간대이다.
현재 제주도를 기점으로 서울, 김해, 광주, 대구, 여수,
사천 등지와 정기 항로가 열려 있다. 특히 제주 국제 공항은
우리 나라 제3의 국제 공항으로, 일본의 오사카 및
후쿠오카와의 사이에도 정기 직행 항로가 열려 많은
관광객을 받아들이고 있다. 제주도의 관광 자원으로는
백록담, 성산 일출봉, 정방 폭포, 산방굴사 등의 영주
10경이 예로부터 유명하며, 그 밖에도 천지연, 천제연 등의
폭포, 이호, 함덕, 중문, 대정 등의 해수욕장과 만장굴,
금녕사굴, 협재굴 등의 용암 동굴, 오백 나한과 용두암 등의
기암 괴석 등이 있다. 또 많은 측화산, 독특한 민속 자료,
희귀 식물의 군락, 넓은 기업 목장, 삼성혈, 항몽 유적지,
관덕정 등의 사적과 문화재 등이 곳곳에 있어 섬 전체가 큰
관광지를 이룬다. 특히 도 전역에 걸친 꿩 사냥터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인 물
■ 황진이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황진이)
산은 예산이로되 물은 예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니 옛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아서 가고 아니 오노메라. (황진이)
□ 어느날 문득, 오래전에 만난 사람 중에 어느새 죽어서 다시 만날 수없는 사람이 있음을
알게된다. 흘러간 강물은 다시 볼 수가 없듯이 사람 역시 죽고나면 다시 만날 수가 없다.
어져 내일이여, 그릴줄을 모르더냐.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 나도 몰라 하노라. (황진이)
□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없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가겠다면 내버려둘 뿐 잡을
수가 없다. 그러나 떠난 후면 그리움만 남는다. 원로시조시인 가람 이병기는 '이 한수의
시조가 나의 스승이었다'라고 하였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에 둘러내어
춘풍(春風)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날 밤이어드란 구비구비 펴리라. (황진이)
□ 당대의 유명한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개성)의 3절'이라 일컬어지던 황진이의
시조이다. 황진이는 조선 중종때 사대부 집안의 서녀로 태어 났으나 어려서 부터 사서삼경
을 읽고 시와 글씨, 소리에 남 다른 재질을 보였다. 황진이는 미모가 뛰어나 15세무렵에는
동네총각이 그녀를 짝사랑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일이 있었다. 그충격으로 기생이된
황진이는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글 재주로 여러문인과 어울리며 많은 시와 시조를
지었다. 이 중에서도 이 시조는 황진이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마음이 어린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에 어느 임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ㄱ가 하노라. (서경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