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정조 대왕 |
출전 |
『홍재전서』 '일득록(日得錄)' |
행동이 논리만 못한 사람과 논리가 행동만 못한 사람
문체는 번거로울수록 괜시리 길어져 읽기만 어렵고 또 간략하게 하면 궁색하고 막혀서 읽을 수 없다. 번거롭든지 간략하든지 간에 의식적으로 추구해서는 안 된다. 바람이 물 위를 지나가듯 자연스러워야 한다. 녹문 모곤은 소식의 글에 대해 "가야할 곳에서 가고, 멈추어야 하는 곳에서 멈추었다."고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훌륭한 말이다.
문장은 억지로 꾸미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무늬란 바탕에서 생겨난다. 그래서 호랑이나 표범의 무늬는 개나 양의 무늬보다 화려할 수밖에 없고, 금과 옥의 무늬가 기와나 돌보다 더 빛날 수밖에 없다. 어찌 지혜의 힘을 빌려 억지로 구하려 한다고 구해지겠는가?
삼연 김창흡의 시에 대해 평한다면, 요즘 들어 이런 품격의 시는 없었다. 중국 명문장가와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동악 이안눌, 읍취헌 박은, 석주 권필, 눌재 양성지, 소재 노수신 등의 여러 문집보다는 못하다.
동악 이안눌의 시는 얼핏 보면 아무런 맛이 없다. 그러나 다시 보면 오히려 더 좋다. 비유하자면 샘물이 솟아나와 천 리를 흘러가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보아도 저렇게 보아도 능히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있다.
읍취헌 박은은 신의 경지에 들어서, 음운이 맑은 격조를 띠어 사람이 높은 산에 올라 노니는 듯하다. 세상 사람들은 소식과 황정견에게 문장을 배웠다고 하지만 대부분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의 격조를 거론할 필요도 없이, 시가의 절품(絶品)이라고 할 수 있다.
눌재 양성지는 맑고 고고하며 담백하다. 취향과 뜻이 스스로 끝이 없어서 읍취헌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석주 권필은 웅장하지 않아 막힌 듯하지만 부드러운 맛이 있어서 가끔 절묘하게 깨우치는 구석이 있다. 비록 당나라 시대 문장이 전성기를 누릴 때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당나라 시대 수준에 오르지 못했다고 하면 지나치게 깎아내린 것이다.
소재 노수신은 19년간 귀양살이를 하면서 노자와 장자의 서책을 많이 읽어 많은 깨우침을 얻었다. 그래서 그 시의 음운이 넓고, 격조는 웅장하다. 옛사람이 말한 '황야가 천 리에 걸쳐 있는 형세'는 소재 노수신을 잘 평가한 말이다. 그러나 그 핵심은 유학의 맛을 잃지 않았다. 평생토록 공부한 학문의 힘은 역시 속이기 어렵다.
학문에 뛰어난 인재는 행동이 말보다 못하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재상은 말이 행동보다 못하다. 그러나 보한재 신숙주와 같은 사람은 말과 행동 모두 능숙하게 잘했다. 널리 보고 두루 경험한 재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문장을 드러냈다. 나랏일을 깊게 운용하고 막힘없이 처리해 정치의 도구를 마련했기 때문에 그 문장은 넓으면서도 잡스럽지 않았고, 분별하면서도 거짓이 없었다. 평생토록 붓을 잡고 문필에 종사하면서도 쩔쩔매며 마음 쓰지 않아야 할 곳에나 힘을 쏟는 문장가들과는 근본이 달랐다. 나라의 옛 전례에 뜻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 보아야 한다.
사가 서거정은 여섯 살 때 능숙하게 시를 지었다. 그는 20년이나 문형을 지냈다. 생전에 문집을 간행해 세상에 드러낸 사람은 서거정과 강희맹 두 사람뿐이다. 서거정 때문에 우리나라 문장의 권위가 무게를 갖추게 되었다. 그의 문장은 질박함이 흩어지지 않아 만물의 원기가 가득 찬 듯했다. 요즘처럼 문장을 다듬고 꾸미는 풍속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구나 수많은 책들을 두루 읽어 고사에 아주 밝았다.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 우리나라 문장을 이끄는 데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었다.
간이 최립의 문장은 낮은 곳은 지나치게 낮고, 높은 곳은 지나치게 높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문장들 중 고문(古文)에 가장 가깝다. 인재는 출신의 귀하고 천함에 차별을 두지 않는 법이다. 홍세태 역시 민가의 비천한 출신인데, 시로써 크게 이름을 알려 농암 김창협이나 삼연 김창흡에게 칭송을 들었다. 심지어 당시 사람들은 홍세태의 문장을 최립의 문장과 비교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최립의 시가 문장만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최립의 시를 누가 당해낼 수 있겠는가?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의 제독 이여송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때, 글깨나 한다는 선비들이 각자 이별하는 시를 지었다. 권필은 간략하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이별의 말 마음속에 맴돌아, 헤어짐의 술잔 손에 들고 천천히 마시네."
그러나 이여송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가장 나중에 최립이 "하주에서 위엄을 일으키니 요동이 다스려지고, 평양에서 큰 승리를 거두니 한양의 적군이 사라졌네."라는 시를 짓자, 그 자리에 같이 있던 사람들이 모두 붓을 내려 놓았다. 홍세태는 권필보다 몇 단계나 수준이 낮다. 하물며 최립에 비할 수 있겠는가?
이정구의 문집인 『월사집』은 '숙률지문(菽栗之文, 까다롭지 않고 쉬운 문장)'과 관각체(홍문관, 예문관, 규장각의 관리들이 주로 쓰던 문체)로 글과 이치가 모두 훌륭했다. 붓끝에 혀가 있어서 하고자 하는 말은 남김없이 드러냈고, 표현하기 어려운 말 또한 모두 표현했다.
상촌 신흠의 문장은 대가의 수준이라고 할 만하다. 수리학을 아울러 갖춰 정확하고 심오한 수준에 올랐는데, 이 또한 다른 문장가들이 따라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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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보자기에
이것저것 억지로 싸면
보자기도 찢어지고
몇 가지 안 되는 것들도 굴러 떨어져 못 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