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블루스』(작사 이철수, 작곡 라음파)는 1939년 약관 20세에
'국경의 부두' 등을 취입하며 가수로 데뷔하여 1940년 '남강의 추억'을
1941년에는 '선창'으로 인기가수가 된 「고운봉」선생이 해방 후인
1961년 불러 히트 시킨 곡입니다.
이 곡은 1958년 「김용만」선생이 취입했으나 "일본 가요와 유사하다"
는 얘기가 있자 작곡가 '라음파'가 곡을 손을 보고 작사가 '이철수'가
가사를 새로 써서 「고운봉」에게 주어 1961년 취입시킨 곡입니다.
「고운봉」(본명 고명득,1920~2001,충남 예산 출생)은 17살이 되던
1937년 예산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상경(上京)하여, 평소 자신이
존경하던 가수가 소속되어 있는 '태평 레코드'에 찾아가는데,
그를 첫눈에 알아본 문예 부장 '박영호'에 의해 「고운봉」이라는
예명(藝名)을 얻고 전속 가수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후 '국경의 부두'가 알려져 인기 가수가 되었으며, 1941년 발매한
"선창"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1942년에는 콜럼비아 레코드로 이적했으며, 6.25종전(終戰)
후에는 일본에 건너가 활동을 하다가 1958년 귀국합니다.
이후 그의 대표 곡 중 하나인 『명동 블루스』를 크게 히트시킵니다.
2000년까지는 'KBS 가요 무대'에도 출연하는 등 팔순이 넘은 몸에도
정정했으나, 이듬해인 2001년 3월에 뇌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졌고,
8월 1일 노환(老患)에 따른 뇌경색 투병 끝에 별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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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 비 오는 명동의 거리
가로등 불빛 따라
쓸쓸히 걷는 심정
옛 꿈은 사라지고
언제나 언제까지나
이 밤이 다 새도록
울면서 불러보는 명동의 블루스
깊어만 가는 명동의 거리
고요한 십자로에
술 취해 우는 심정
그 님이 야속턴가
언제나 언제까지나
이 청춘 시들도록
목메어 불러보는 명동의 블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