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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있는 분들하고 인사 나누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반가운 얼굴이 보이네요. 우리가 평상시에 지금 신앙생활하는 여정 가운데 의식 없이 사용하는 어떤 단어 어떤 문장 그런 것들 안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좀 같이 지금 찾아가는 시간을 수요일 날 지금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거짓말이라는 그런 제가 책을 중심으로 지금 말씀을 나누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오늘은 난 평신도니까라고 하는 이 말의 의미를 좀 찾아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 말의 의미가 뭘까요? 나는 평신도니까 긍정적일 것 같아요. 부정적일 것 같아요. 부정적일 것 같아요. 그래요. 맞아요. 아주 잘 알고 계십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뭔가 누군가가 성경적인 이야기를 막 물어봤어요. 우리는 모태 신앙이니 20년 30년 신앙을 했느니 성경을 몇 번 봤느니 이런 나름대로의 스펙을 가지고 있지만 또 누군가 갑자기 질문을 하면 잘 모를 때가 있어요.
그쵸? 그럴 때 우리가 써먹는 말이 이거죠. 나는 평신도라서 잘 몰라 그런 거는 목사님한테 가서 물어보는 거예요. 또 내 삶 가운데 뭔가 좀 그리스도인으로서 좀 이렇게 본이 돼야 되는데 그렇지 못할 때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야 교회 다니면서 그럴 수 있냐 그렇게 해도 돼 이렇게 물어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평신도라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뭐 어쩌면 평신도라고 하는 말을 뭔가 이렇게 구분 짓는 말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성직자 평신도 이런 이분화시키면서 약간 성직자들보다는 못한 어떤 신앙이나 또 어떤 봉사나 어떤 삶의 모습들을 갖춰도 상관없는 정도의 수준으로 우리가 생각할 때 가끔 나는 평신도니까 이런 말을 가끔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이런 말들 속에는요 영적인 태만이 들어가 있을 수도 있고요. 또는 어떤 사역을 함에 있어서 면죄부가 되기도 합니다. 나는 평신도니까 아 내가 어떻게 저렇게 열심히 해 저런 거는 좀 은사 있는 사람 사명 있는 사람들이 하는 거지 또 때로는 평신도니까라고 하는 말 속에 나는 늘 위로받고 나는 늘 축복을 받아야 될 대상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도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 여러분들 개업식을 하거나 또 뭔가 이렇게 큰 행사가 있을 때 우리 목회자를 같이 대동해가지고 예배를 드리고 또 같이 기도를 받고 막 이러잖아요.
근데 그 의미도 약간 우리가 좀 조심해야 될 부분들이 있어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많은 성도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교회에는 교회의 원리가 있고 세상에는 세상의 원리가 있습니다. 목회자야 늘 교회 안에 존재하시니까 그렇게 말씀도 하시고 또 그렇게 이끌어 가시지만 나는 세상에 살아가는 평신도로서 쉽지가 않습니다. 이론과 실전은 달라요.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했다고 얼마나 평신도의 삶이 힘든지 아십니까?
여러분들도 이런 이야기들을 끄집어낼 때가 있으셨나요? 근데 우리가 한번 이 평신도라는 말이 뭔 말인지 한번 찾아보려고 합니다. 성경에 있을까요? 없을까요? 성경에 평신도라는 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50%입니다. 네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네 맞아요. 없습니다. 평신도라는 말은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이 평신도라고 하는 개념이 아예 없었어요. 평신도 초대교회에서 중요했던 그 당시에 그들의 핵심 사상은 예수님을 믿으면 모두가 다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게 중심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3장 28절에 보면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으며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인종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남녀적으로 차별받지 않고 동일한 한 영혼으로 우리는 존귀한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게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의 복음이었습니다. 복음의 핵심적인 요소 중에 하나였어요. 그 당시는 아주 엄격한 계급 사회였기 때문에 이 복음은 굉장히 혁명적인 사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에 종교적으로 또 재정적으로 어떠한 뒷받침, 조직적인 뒷받침도 전혀 없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 그리고 세계 방방 곳곳에 퍼져나가는 핵심적인 에너지가 물론 성령의 역사 가운데 있지만 그 핵심적인 사상 안에 사람들이 갈급한 그리고 삶의 여러 가지 깨어진 그 부분들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다라는 걸 발견하면서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기독교가 로마의 공인이 되죠. 그러면서 이 교회 안에 세상의 권력적인 사고가 이렇게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중세 교회로 이렇게 갈 때쯤이 되면 이제 이런 식으로 생각이 바뀝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똑같을 수 있을까 아니 사람마다 이렇게 아는 것도 지식의 정도 차이가 있고 삶의 정도 차이도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다 똑같을 수 있냐 특별하게 인정받는 사람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이 있는 거고 또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이런 식으로 뭔가 약간의 사람들의 차별 차이가 있다고 하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중세의 사제 또는 수도사 수녀 이렇게 뭔가 교회 안에서 뭔가 일을 하는 사람들 성직자들 그들은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삶의 터전에서 직업을 가지고 농사를 짓고 또 장사를 하는 그런 사람들은 세속적인 일을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성직자라는 말과 평신도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초대교회 때부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죠. 중세까지 평신도라는 말 자체가 없었습니다. 원래 성경적이지 않으니까 그래서 헌신하는 사람들은 제사장과 같이 뭔가 사제가 되고 교회 안에서 머물면서 늘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또 일반 백성들은 그런 사제들의 이끌림을 받아서 뭔가 이렇게 바른 길을 가긴 가지만 나는 세상 가운데 살아가니 늘 넘어질 수도 있고 자빠질 수도 있고 그래서 나는 교회에 가면 회개하면 되고 이런 개념으로 약간 신앙이 뭔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렇다 보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르쳐 주신 여러 가지 이야기들 가운데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세계관을 이야기한 거거든요. 산상수훈 우리가 잘 읽어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야지라고 하는 아주 핵심적인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점점 구분화되기 시작하니까 이 산상수훈이라든지 예수님이 가르쳐준 어떠한 그러한 가르쳐줌은 이런 성직자들이나 뭔가 리더들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일반 성도들에게는 이런 것들은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갈수록 이제 격차가 커지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 과정 속에서 이제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의 개혁이 일어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상황들이 오류라고 여겨진 거예요. 성경적이지 않다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이야기한 것은 만인제사장설입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기독교의 윤리는 성직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된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성직자가 하는 설교, 성례전, 목회만이 아니라 신자가 종사하는 모든 직업에도 성직 하나님의 일이 적용된다. 이게 바로 종교개혁의 큰 핵심적인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가장 이런 정신을 가지고 가장 우선순위를 둔 게 뭐냐면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그 당시에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성경으로 번역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 특권층들만 그 당시에 쓰여져 있는 공식 언어 라틴어로만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라틴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성경을 도무지 읽을 수도 없었고 들어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종교개혁자들은 이 성경을 자기나라 말로 번역하는 일을 막 하기 시작합니다.
근데 이게 마틴 루터 때 시작된 게 아니에요. 마틴 루터 200년 전에 위클리프라고 하는 영국에서의 이 사람도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다가 화형당합니다. 성경을 번역하는 그 일이 이단으로 여겨진 거죠.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야누스라고 하는 사람도 체크해서 자기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다가 이단으로 몰려서 화형당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번역하는 것 그 자체가 굉장히 이단스럽다고 여긴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거 1500년대에 이르러서 이제 루터를 비롯한 사람들이 독일어로 이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여러분 평신도라고 하는 말은요. 지금 우리가 이런 기독교 역사 짧은 이야기를 했지만 이 역사 가운데 그냥 우리가 만들어낸 성경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조직적인 그런 개념하에서 만들어낸 그런 단어라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뭐라고 말할까요? 아까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것처럼요. 우리 모두는 제사장이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5절과 6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나라가 되게 하시며 자기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 무궁하도록 있기를 바랍니다. 분명하게 말하는 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제사장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제사장이라는 말을요. 사용할 때 복수를 썼어요. 나라라고 하는 말은 단수를 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제사장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어떤 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 대해서 열어놓은 말씀으로 이야기하셨습니다.
또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잖아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오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그 당시에 택함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록된 말씀이었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제사장이 어떤 역할을 했던 사람들인가요? 그들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늘 새로워지기를 바라고 늘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근데 그 당시에는 제사장이라는 사람들이 특별한 사람들만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게 왜 중세 시대에 그렇게 됐느냐라고 할 때 제사장들이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이렇게 대를 물렸잖아요. 그러니까 특별한 사람이라고 하는 인식을 자기들이 그런 제도하에서 만들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제는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특별한 몇 사람들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우리나라 안에 샤머니즘이 아주 오랜 시간 있었어요. 샤먼이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인간과 신 사이를 연결해 주는 매개체를 샤먼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샤먼 근데 우리 기독교 안에 이 샤머니즘이 그대로 또 틈을 타고 들어와요. 그래서 목회자가 샤론 같은 존재 역할을 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목회자 성직자들이 하나님과 여러분들 사이에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주고 하나님이 주는 축복을 받아서 여러분들을 축복해 주고 여러분 이 개념은요. 우리가 지금 성경 말씀으로 자세히 보면 샤머니즘적인 내용들이 있습니다.
물론 전혀 뭐 100이다 아니다 이런 말씀은 아닙니다. 근데 중요한 건 뭐냐 하면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우리 모두가 다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이 되었는데, 과거에 구약에 있는 제사장, 그리고 중세 시대에 있었던 그러한 잘못된 성직자관 이런 걸 가지고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샤머니즘과 연결되면서 약간 그런 종류의 신앙관을 가지고 성직자와 평신도라고 하는 구분을 짓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들이 분명히 있다라는 사실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여기에 마리아가 들어갈 수도 없고 베드로가 들어갈 수도 없고 목회자가 들어갈 수도 없고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 각자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이미 부여받았어요. 그러니까 나는 평신도니까 라고 하는 말로 뒤로 빠지고 뭔가 핑계거리를 찾고 이럴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각자 각자가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어요. 물론 목회자는 그러한 일들을 잘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 돕는 그런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여러분들을 돕고 여러분들을 세워가는 역할을 맡은 그러한 역할을 맡은 사람이라고 보면 돼요.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 되어서 아름다운 덕을 세우고 또 세상들을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가졌다.
오늘은 간단하게 여기까지 정리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다음 주에 읽으려고 하는데요. 평신도니까라고 하는 말 속에 숨겨져 있었던 여러분들 주춤거림이나 뒤로 물러서려고 하는 마음들을 우리가 다시 정리하기를 원합니다.
말을 좀 바꿔서 나는 제사장이다. 한번 해볼까요? 나는 제사장이다 나는 성도다 이게 핵심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평신도니까라고 하는 말이 왠지 성직자와 뭔가 구분을 짓고 내가 뒤로 나는 물러서도 나는 넘어져도 전혀 문제가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누군가의 의지만 하는 그런 대상이 아니라 여러분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과 직접 만나고 소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축복을 받은 사람이고, 여러분들을 통해서 또 믿지 않는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축복의 통로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나는 병신도니까가 아니라 나는 제사장이야, 나는 성도야 라고 하는 인식 속에 이번 한 주간 더욱더 힘있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