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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경첨언] 경명왕 왕자 8대군 분봉설과 『밀양박씨세보』의 형성
개산팔경 박희용
네이버 나무위키의 박씨 계통과 족보에 대한 내용을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통계청의 2000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박씨에는 56개의 본관이 있다. 그 본관들은 신라 말을 기준으로 하여 크게 경명왕계, 경애왕계, 파사이사금계의 세 갈래로 묶인다. 이밖에도 후백제 박영규계 순천박씨와 고려말 박응주계 반남박씨가 있다. 이후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지나면서, 많은 본관 중에서 높은 벼슬을 한 조상들이 많고 후손들이 번창하여 인구가 많은 밀양박씨, 반남박씨, 함양박씨, 순천박씨, 무안박씨, 죽산박씨, 고령박씨, 충주박씨 등을 8박이라 한다. 이 중 밀양박씨가 박씨 전체 인구 420만 명의 75.6%인 316만 명을 차지한다.
1. 경명왕 계열
(1) 장남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忱)의 후손
밀양박씨: 박씨의 큰집으로 박씨 중 75.6%를 차지하며, 2015년 기준 약 316만 명이다. 조선 시대에만 문과 급제자 261명, 무과급제자 1147명이다.
(2) 2남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彦成)의 후손
고령박씨: 박정희, 박근혜, 어사로 유명한 2등 분무공신 박문수 등을 배출한 집안이다. 현재 4만 명 정도의 인구로 작은 집안인데도 조선 시대 56명에 달하는 문과 급제자를 냈다. 무과 급제자는 23명이다.
(3) 3남 속함대군(速咸大君) 박언신(朴彦信)의 후손
가. 함양박씨: 박씨 본관 중 현대 남한의 박씨 본관별 인구로는 2번째이다. 69명의 문과 급제자와 50명이 넘는 무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나. 삼척박씨: 박언신의 14세손으로 고려 공민왕 때의 개성부윤 박원경(朴元慶, 1353~1426)을 중시조로 한다. 1,535가구 총 4,929명(2000년)
(4) 4남 죽성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의 후손
죽산박씨: 박씨 중 6번째로 큰 집안이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9명, 상신 2명을 배출했다. 면천박씨, 평산박씨, 고성박씨, 음성박씨 등이 죽산에서 분적해 나갔다.
(5) 5남 사벌대군(沙伐大君) 박언창(朴彦昌)의 후손
가. 상주(상산) 박씨: 조선 문과 급제자 수는 11명, 무과 급제자가 30명이 었다.
나. 충주박씨: 박씨 본관 중 8번째 인구를 가진 집안으로 인구는 3만 명 정도로 22명의 문과 급제자와 1명의 상신, 그리고 14명의 무과 급제자가 있었다.
(6) 6남 완산대군(完山大君) 박언화(朴彦華)의 후손
가. 무안박씨: 박씨 중 5번째 크기를 자랑하는 집안이다. 충렬왕 때 홍건적을 토평한 공으로 면성(지금의 무안)부원군에 봉해진 박문오, 팔만대장경 창제 공신 박문정, 한글 점자를 창안한 박두성을 배출했다. 조선시대 25명의 문과 급제자와 63명의 무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통계청 "2015 인구주택총조사"의 우리나라 성씨 본관별 인구 현황에 따르면, 무안박씨(務安 朴氏)는 90,785명이고, 면성박씨(綿城 朴氏)는 7,666명이다.
나. 전주 박씨: 2015년 자료에 의하면 1,985명으로, 의외로 전국에 2,000명도 없는 희귀한 본관이다.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가 1명, 무과 급제자가 25명이다.
(7) 7남 강남대군(江南大君) 박언지(朴彦智)의 후손
가. 춘천박씨(春川 朴氏)의 시조 박항(朴恒)은 신라 경명왕의 일곱째 아들인 강남대군(江南大君) 박언지(朴彦智)의 11세손이라고 한다. 충렬왕 때 승선(承宣)을 거쳐 동지밀직사(同知密直使)에 올라 왕을 호종하고 원(元)에 다녀와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박원굉(朴元宏)은 평장사, 박원비(朴元庇)는 판서를 지냈고, 박원굉의 아들 박안구(朴安具)는 대제학, 증손 박의공(朴義公)은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박원비의 아들 박광선(朴光先)·박려(朴旅) 부자는 직강(直講)을 지냈다.
1만 6천 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집안으로,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 6명을 배출했다. 퇴계 이황의 어머니가 이 집안 출신이다.
(8) 8남 월성대군(月城大君) 박언의(朴彦儀)의 후손
월성박씨: 월성은 오늘날의 경주로 계림이라고도 부르는데,
2. 경애왕 계열
(1) 장남 금성대군(金城大君) 박교순(朴交舜)의 후손
가. 울산박씨: 고려 개국공신(벽상공신) 박윤웅을 시조로 한다. 박윤웅은 경애왕의 장남 교순의 후예로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할 때 자신이 다스리던 울산도 함께 고려에 귀부시킨 공으로 흥려백에 오르고 장무공이란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2000년 인구는 2만 2천 명.
(2) 차남 계림대군(鷄林大君) 박순현(舜玄)의 후손
가. 계림박씨: 경애왕의 아들 순현(舜玄)을 중시조로 한다.
3. 파사이사금 계열
신라 때 외교관 박제상은 파사왕의 자손이다.
(1) 강릉박씨: 시조 박순(朴純)은 파사왕의 35세손이자 혁거세 거서간의 38세손이다. 박순은 평장사로 추증된 박소(朴篠)의 아들로 태어나 고려 명종 4년(1174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보문각시어(寶文閣侍御: 고려 때 병부상서 겸 대장군으로 있을 때 석린(石隣)의 모반을 평정한 공로로 보정정국공신(保定靖國功臣)에 올랐다.
(2) 경주박씨: 파사왕의 38세손이자 박제상의 33세손인 박앙(朴盎)을 시조로 한다.
(3) 영해박씨: 시조는 박제상이며, 중시조는 박제상의 26세손 박명천(朴命天). 으로 태조 왕건의 호종공신이다. 신라 외교관 박제상의 후손답게 조선 조에 역관을 많이 배출한 가문이다.
4. 기타
(1) 순천박씨: 견훤의 사위로 후백제에서 장군을 한 박영규를 시조로 한다. 사육신 박팽년과 중종반정 일등공신 박원종을 배출했다. 남한 내 인구가 10만에 달하는 박씨 중 4번째로 큰 집안이다. 35명의 문과 급제자와 1명 상신이 있다. 무과 급제자가 29명이다. 강남대군 박언지의 후손이라는 말도 있는데, 애초에 박언지라는 인물의 실존 여부가 불분명할뿐더러 실존했다 쳐도 박영규보다 아들~손자뻘의 인물이므로 맞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순천박씨 종친회측에서는 가문의 뿌리를 소개할 때 박언지와 박혁거세를 언급하지 않고 그냥 박영규부터 언급한다. 박영규의 출자도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2) 반남박씨: 박씨에서 가장 벌열을 자랑하는 집안으로, 정승 7명에 문과 급제자 215명을 자랑한다. 무과 급제자는 23명에 불과하다. 시조는 고려 고종 때의 호장 박응주(朴應珠)이다. 그러나 이 집안은 위의 경명왕의 8왕자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위의 기사를 참고하며 『밀양박씨세보』를 중심으로 8대군 분봉설을 고찰해보자.
『밀양박씨세보』의 29세 [경명왕 기사]에 <諱昇英 後梁貞明三年丁丑立 在位八 王妃昔氏 誕九男>이라 하여 왕비 석씨가 아들 아홉 명을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책 前文의 [新羅十王歷代略記]에 <景明王 甲申王薨無嗣 弟景哀王立>이라 하여 924년 갑신년에 훙하신 경명왕에게 뒤를 이을 아들이 없고, 無嗣, 아우 경애왕이 뒤를 이었다고 한다. 또한 항간에 떠도는 자료 중에는 918년 경명왕 2년에 왕자 여덟 명을 각각 대군으로 분봉하였다고 하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의 [경명왕조]에는 그러한 기사가 없다.
그런데도 왜 『밀양박씨세보』에 경명왕의 후사를 잇는 30세로 밀성대군 박언침 등 8대군이 등재되어 있을까. 같은 책 족보이기 때문에 족보 편찬자들이 두 기사가 상반되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박혁거세 탄생신화에 이어 ‘356년경에 박씨족은 석씨족과 김씨족의 왕권 투쟁에 어떻게 대처하였겠는가’하는 문제부터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의 서기 67년 탈해왕 11년조에 있는 <十一年春正月 以朴氏貴戚 分理國內州郡 號爲州主郡主 십일년춘정월 이박씨귀척 분리국내주군 호위주주군주. 11년 봄 정월에 박씨의 귀척에게 국내의 주와 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주주와 군주라 불렀다>라는 기사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먼저 생각할 점은 박씨족의 인구이다. 이때는 박혁거세 훙 63년 후다. 『밀양박씨세보』에 보면 아들 셋을 낳았다. 남해왕은 유리왕 하나를 낳았고, 유리왕은 일성과 파사 두 아들을 낳았다. 서기 67년 탈해왕 집권기에 박씨족 남자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10명을 넘지 못한다. 기사대로라면 경주를 비우고 모든 박씨 남자들이 주주와 군주로 나갔다는 말이 된다.
박씨족 귀척을 주주와 군주로 봉한 이유는 유리왕이 왕위를 아들이 아니라 석씨에게 물려준 데 대한 보답의 의미도 있지만, 왕위를 이어받지 못한 박씨족을 위무하는 동시에 박씨족의 세력을 수도에서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정치적 목적도 있다. 박씨족의 세력을 견제한 이유는 박씨족이 10여 명이 아니라 수백, 수천 명이었기 때문이다. 10여 명이라면 눈앞에 두고 감시하는 게 훨씬 편리할 것이다. 하지만 박씨족은 왕위를 빼앗긴 데에 대한 불만이 대대로 흐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밀양박씨세보』에서 탄생신화를 통해 박혁거세를 신성시하고 유일 시조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박혁거세는 박씨족의 대표로서 왕이 됐고, 혈연을 함께 하는 나머지 박씨족 다수가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015년 박씨 인구가 4,192,074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인구(2015년 당시 51,069,375명) 중 약 8.2%를 차지하고 있다. 족보를 기준으로 하면, 박혁거세 한 사람이 2084년 만에 420만이라는 후손을 보았다는 계산이 된다. 2700만 북한 인구까지 합하면 박씨족 인구가 훨씬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2015년 우리나라, 즉 남한만의 인구조사에서 최씨가 2,333,927명, 경주이씨가 1,391,867명, 정씨가 2,151,879명, 경주손씨가 68,486명, 배씨가 397,226명, 설씨가 42,646명으로 나타났다. 이 많은 인구가 각각의 씨족이 자기 족보에서 내세우는 시조 한 사람의 자손이라면, 시조와 동시대를 산 나머지 사람들은 자손을 남기지 못했다는 말이 되어 이치에 전혀 안 맞다. 당시에도 신라 6부들은 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동족의 집합체였다. 그러므로 2015년 인구조사에 나타난 인구가 6부 촌장 한 사람만의 자손이 아니라 씨족 전체의 자손들이다. 마찬가지로 420만 박씨 인구도 박혁거세 한 사람만의 자손이 아니라 박씨족을 이루었던 모든 사람의 자손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밀양박씨세보』는 박혁거세 한 사람만의 생물학적 정확성을 담보할 수 없으며, 후세에 만들어졌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최씨, 이씨, 정씨와 같이 백만 이백만이 넘는 다른 씨족들의 인구를 볼 때 현재 박씨들의 족보 모두가 과장, 허위라고 할 수는 없다. 자기 성씨를 바꾸거나 버리는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족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점이다. 그 답을 일단은 경명왕에서 8대군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논의를 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역사의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서기 940년 太祖 23년대에 책훈(册勳)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3,200여 명 중에서 지역과 이름이 밝혀진 110명에서 박씨는 (密陽) 朴郁, (昇州) 朴英規, (공주 彗城) 朴述熙, (황주 平州) 朴守卿 〈朴遲胤·朴守文·朴承位〉, (竹州) 朴奇悟, (蔚山) 朴允雄 등 6개 지역 토호 세력의 대표 9명이 들어있다>고 한다. 전체의 1/32이 9명이니 박씨 성을 가진 삼한벽상공신이 족히 200명은 넘을 것이다.
박혁거세거세간이 중심이 된 박씨 집단 이후 1천 년 세월 동안 박씨들이 전국에 퍼졌을 것이다. 또한 경애왕이 견훤에게 피살되는데 협조한 김부가 경순왕이 되자, 이에 반발한 전국의 박씨들이 대거 김씨 왕조에 반기를 들었음은 당연할 것이고, 그들이 새 국가인 고려 왕건에 귀의하였음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결과가 수백 명 박씨 삼한벽상공신이다. 그럼 그 공신들과 박씨들이 후세에 모두 어느 족보에 어떻게 편입되었겠는가.
밀성의 토호 박욱은 말성대군의 아들로 밀양박씨 2세조이다. 오늘날 그 후손이 약 320만이다. 그런데 940년경에 박욱은 고려 땅 전체에서 동남부 일우인 밀양의 호족이었을 뿐이다. 삼한벽상공신 책록만 보더라도 나머지 5개 지역에 8명의 호족 세력이 있었다. 즉 박욱의 집단보다 더 큰 박씨 집단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겠는가. 그래서 필자는 940년경의 9개 이상의 박씨 집단들이 경명왕계 8대군파와 경애왕계, 파사왕계 등으로 차츰 정리되면서 족보를 제작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밀양박씨세보』에서는 29세 경명왕의 왕비 석씨가 9남을 낳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30세는 장자 언침 외 8명을 기록하면서 경명왕이 918년에 이 아들들을 8대군으로 분봉하였다고 한다. 족보의 계통상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前文의 [新羅十王歷代紀略]는 아들이 없었다고 하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 앞의 아달라왕조에도 <逸聖王長子身長七尺姿表奇異及薨無子國人立昔氏 일성왕장자신장칠척자표기이급훙무자국인립석씨, 아달라왕은 일성왕의 장자이다 키가 7척이고 모습이 기이하다 훙하시니 아들이 없어 국인들이 석씨를 왕으로 세웠다>라 하며 아달라왕도 아들이 없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경명왕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말이 없다. 또한 <王妃昔氏 誕九男>도 없다. 그럼에도 족보 편찬자들은 무슨 자료를 근거로 하여 <王妃昔氏 誕九男>을 넣었고, 무슨 자료를 근거로 하여 전문의 <경명왕조>에 ‘후사가 없었다’를 넣었을까. 유일한 사서인 『삼국사기』에 언급이 없으면, 전문에 굳이 ‘후사가 없었다’를 넣지 않고서 <王妃昔氏 誕九男>을 근거로 하여 8대군을 달 수 있었다. 족보 편찬자들이 정밀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전해오는 자료나 구전을 근거로 했기 때문일까 현재로선 알 수 없다.
세보 편찬자들은 전문과 [경명왕조] 기사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계보에는 5세 아달라왕의 아들로 6세 벽방(碧芳)을 잇고, 경명왕의 아들들로 8왕자를 이어 놓았다. 내가 박씨의 자손이지만 세보가 이러한 착종과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도리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밀양박씨세보』뿐만 아니라 다른 성씨들의 족보에도 많이 발견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점은 편찬자들이 족보 계통을 씨족 전체적인 관점에서 봤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직계가 없는 선조의 후사를 방계의 자손을 계자로 만들어 후사를 잇도록 했다는 것이다. 아달라왕의 직계는 끊어졌지만, 가장 가까운 방계를 계자로 하였을 것이다. 경명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후사는 한 사람이면 된다. 그런데 세보에는 경명왕의 후사가 9명이나 된다. 그러면서도 대군은 8명이다. 9번째 아들은 족보에 <舜交 麗朝大相>으로만 되어 있다. 이 <舜交>는 아마 경애왕의 아들인 <交舜>일 것이다. 그래서 대군으로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만든 흔적이 드러난다.
앞으로 새로운 서서와 자료들이 발굴되어 경명왕의 아들이 실제로 8명이었음이 밝혀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사서와 자료에 근거한 바로는 아들이 없었음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편찬자들은 족보를 만들면서 유일한 사서인 삼국사기를 근거로 하되 가문에서 구전되는 이야기들을 최대한 수렴하였을 것이다. 이미 수십만 명이나 되는 박씨족 전체를 종합하는 족보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 문중들의 파보를 서로 연결하는 구조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 구조가 경명왕을 줄기로 하고 밀성대군 언침 등 8대군을 가지로 하는 <8대군분봉>이었다. 다음 차례로 8대군 중시조들을 각각의 본관으로 하는 족보를 다듬어 정리했을 것이다.
그래서 밀양박씨 모든 본관의 족보에서 고려 태조 왕건 시대인 30세 장자 밀성대군 언침 등 8대군까지의 기사가 동일하다. 이것은 경명왕까지 한 줄기 계보 외에는 박씨가 없었다는 말이다. 930년경 박씨가 아마 최소한 이십만은 됐을 것인데, 먹거리가 부족한 그 간고한 시대 1000년 동안 박혁거세 이하 한줄기 계보에서 그 많은 자손이 태어났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32세 이상의 계보가 사실이 아니라 인위란 것을 반증하고 있다.
고려 중기부터 시작된 각 파별 가승 형태의 족보가 조선 중기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그것들을 모아서 종합, 정리, 편집, 편찬하는 작업이 조선 초기인 1600년대 후반기에 시작됐을 것이다.
밀성대군 박언침 등 8대군 계보 이외의 박씨들은 박혁거세를 시조로 하되 파사왕과 지마왕, 박제상 등을 중시조로 하는 족보를 만들었을 것이다. 오히려 이런 족보가 사실에 가까울 수 있다. 또한 반남박씨처럼 박혁거세는 시조라고 인정은 하나 경명왕의 왕자 8대군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이를 건너뛰어 고려말 전남 나주 반남호장(潘南戶長)을 지낸 박응주(朴應珠)를 시조로 하는 인구 16만 명의 반남박씨도 있다.
밀양박씨와 반남박씨가 득세하기 시작할 때는 조선 초기로서 비슷하다. 이후 대동보를 만들기 시작한 때도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도 두 계통이 합치하지 못한 것을 보면 조선 초기부터 양자 간에 무슨 문제가 있어 크게 대립하였음이 분명하다. 지금도 밀양박씨 쪽에서는 반남박씨가 37세 박언부의 둘째 아들 공부상서 박의신 공의 후손이라고도 말하지만, 반남박씨 쪽에서는 아예 경명왕 왕자 8대군을 인정하지 않는다. 8대군파는 고려조 개국 때부터 대대로 고관대작을 역임하는 삼한 명문가들이었으나 신라 이후 500년 동안 한미한 신분으로 묻혀있던 집안이 득세하기 시작했다고 하여 박씨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어느 성씨나 갑자기 나타나 근거 없이 같은 성씨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쉽사리 인정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대로 경명왕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8대군은 후세에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반남박씨의 주장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반남박씨들이 경명왕의 <8대군분봉설>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박응주 위의 조상을 알 수 없는 자기들 입장만 생각하는 편견과 아집이다. 자기들은 상계의 조상을 몰라도 다른 성씨와 문중들은 상계 조상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밀양박씨는 『박씨선원보』와 『명위거장보』 , 『삼국사기』와 『밀양삼국유사』, 『고려사』 등 몇 종류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사서들이 있다. 반남박씨들이 ‘朴’ 자를 성으로 쓰는 까닭은 시조 박응주의 성이 박씨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박응주의 성이 박씨라는 근거가 무엇인지 의문이다. 박혁거세 이후 이미 천삼백여 년 세월이 지났다. 그냥 구전으로만 박씨라고 전해오기 때문에 박씨 성를 붙인 것은 근거가 될 수 없다. 다만 몇 대라도 상계에서 근거가 될 수 있는 자료가 나와야 한다. 그러므로 반남박씨가 박씨 성을 계속해서 사용하려면 자기들의 시조를 아예 고려말 호장 출신 박응주로 설정하더라도 다른 박씨 문중의 중시조에 대하여 이러니저러니 시비를 걸지 말아야 한다. 다른 박씨문중은 이미 박혁거세 이후 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에 걸친 세계를 확보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비를 분명히 하기 위한 차원에서라도 반남박씨는 차라리 박씨 성을 버리고 새로운 성씨를 창성하는 편이 서로 간에 편하지 않겠는가. 상계도 없이 불쑥 박응주를 시도로 세워 박씨라고 하기보다는 그편이 훨씬 명료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견훤의 사위 박영규를 시조로 하는 순천박씨들도 박혁거세와 경명왕, 8대군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박씨라고 자칭하기보다는 달리 창성하는 편이 명료하지 않겠는가.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박 자를 성으로 쓰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견훤이 어떤 인물인가. 경애왕을 살해하고 왕비를 능욕한 자로서 박씨족들에겐 역사적 치욕을 안겨준 자다. 포석정 참살 현장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견훤의 장수로서 활약하여 사위가 된 자가 박씨라는 것을 경애왕의 후손들은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반남박씨와 순천박씨들이 앞으로도 계속하여 박씨라고 주장하려면 상계에 대한 고정 작업을 더욱 정밀하게 하면서 박씨족의 중심으로 신라 초기부터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는 밀양박씨에 대한 기본적 태도를 갖추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8대군분봉설>은 족보 편찬을 위한 편법이었다. 고려말 이후부터는 혈연 계통 관계 파악이 명료하지만, 족보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대는 1600년대 후반이다. 그 이전 시대에는 극히 일부의 유식한 문중에서만 필사나 구전으로 가계도가 전해왔다. 사서는 1145년에 간행된 삼국사기가 유일했다.
『밀양박씨세보』만이 이러한 문제점과 오류를 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성씨 족보나 다 이런 문제점과 오류를 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족보들이 가짜이거나 틀린 것은 아니다. 당장 경주김씨 족보만 해도 모든 파들이 경순왕을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190만 경주김씨들 모두가 경순왕 김부 한 사람의 자손이란 말이 된다. 가짜든 허위든 간에 무리한 인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420만 박씨가 박혁거세 한 사람의 자손이 아니듯이 경주김씨 190만은 내물왕과 함께 신라로 들어온 흉노족의 자손들 모두이다. 그것을 경주김씨 지식인들이 종합하여 줄기와 가지 별로 정리하여 만든 책이 족보이다. 그러므로 족보를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씨족 차원에서 봐야 한다.
『밀양박씨세보』가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네이버 나무위키의 30세 밀성대군 등 8대군에 관한 자료를 종합하여 살펴보자.
「첫째 밀양박씨는 30세 장자 밀성대군 박언침의 아들 욱(郁)이 기인 제도로 삼한벽상공도대장군으로 고려조정에 출사해 개경에 진출한 이후 32세 손자 란(瀾)이 요동독포사, 33세 영정(永禎), 35세 시주(施做)가 이부상서, 36세 찬행 讃行, 37세 언부(彦孚)가 고려 문종 때 문하시중에 오르고, 좌복야 박언인, 밀직부사 박양언, 판도판서 박천익, 삼사좌윤 박을재, 도평의사사사 박언상 등 고려 역사에서 가장 태평성대에 주요 관직에 후손들이 이름을 올림으로써 중국인의 관점에서 쓴 송나라 책인 고려도경에 이들이 언급될 정도로 영남 기반의 실력이 있는 문벌귀족 집안이었다.
원 간섭기에 꽤나 수난을 겪는 와중에도 오히려 밀양박씨는 권문세족들이 강성하던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인재들을 배출했고, 절묘하게도 반원자주를 국가정책으로 밀었던 공민왕 시기에 정점에 달했다.
이 시기의 주요 인물로는 충렬왕 때 급제한 후 내부시승에 임명된 충헌공 박척, 판전교사사로 봉해지고 원나라로부터 문하찬성사로 증직받은 박원, 전법판서 박천명, 사헌부 규정 박현, 대제학 박중미, 박광후, 박윤겸, 공민왕 때 장원급제한 성균관대사성 박의중, 고려군 1만 명을 이끌고 왜구의 전초기지인 대마도를 정벌한 박위,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지낸 박득중, 고려 때 호조전서였으나 조선 개국 후 두문동 전설에서 죽었다는 박침, 박침의 아들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참찬의정부사에 제수되었으며 세종에게 딸을 후궁으로 시집보낸 박강생 등이 있다.
고려 말 정국군파 파시조 박위가 대마도를 정벌할 때는 군사 1만 명과 전함 100척을 동원했는데, 기록상 고려 중앙군이 긴 전란으로 궤멸되고 다른 신흥 무인들이 정벌을 주저할 때, 박위와 박천등 개인 사병들이 주축이 되어 먼저 출항하고 여러 다른 신흥 무인들의 합세를 나중에 받은 것으로 보아 당시 밀양박씨가 고려 내 크고 작은 신흥 무인들 사이에서 구심점이 되어 세력을 이룰 정도의 경제, 군사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대마도 정벌은 확실히 밀양박씨의 공이 크다. 2015년 기준 3,168,084명이다. 고려말과 조선 초기에 밀양박씨 족보 편찬 작업에서 이들의 후예들이 중심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둘째 고양대군 박언침의 고령박씨는 현재 인구가 43,774명이다.
중시조는 박언성의 7세손인 박섬, 박환, 박연 등인데, 주요 인물로는 박은(朴誾, 1479년 ~ 1504년), 박공량(朴公亮, ? ~ 1556년), 박경업(朴慶業, 1568년 ~ ?) 등이 있다.
세째 속함대군 박언신의 함양박씨는 인구가 163,616명이다.
중시조(中始祖)는 박선(朴善)으로 고려조에서 예부상서를 지내고 추밀원사에 추증되었다고 한다(고려사 등에는 기록이 없다). 시조 박언신과 중시조 박선 사이의 계보가 확실치 않다. 박선의 장남 박인정(朴仁挺)도 예부상서를 지내고 추밀원사에 추증되었다고 한다(고려사 등에는 기록이 없다).
박장은 고려 원 간섭기의 군부총랑(軍簿摠郞)을, 박충좌는 고려 원 간섭기의 찬성사(贊成事)를 지냈고, 박인계는 고려 후기의 무신이다. 박습(朴習, ?~1418)은 태종 때 병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냈다
네째 죽성대군 박언립의 죽산박씨는 인구가 63,179명이다
박언립朴彦立)의 아들 박기오(朴奇悟)가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태보(太保)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라 죽주백(竹州伯 안성지역)에 봉해졌다.
박서는 고려 고종 때의 무신으로 살리타가 이끈 몽골군을 격파하였다.
박전지는 고려 충숙왕 때 수첨의찬성사였고, 박문보 고려말 정당문학으로 죽산군에 봉해졌으며 박원형은 조선 예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다섯째 사벌대군 박언창의 상주박씨는 인구가 25,238명이다
박언창(朴彦昌)은 사벌대군(沙伐大君)에 봉해지고 사벌주(沙伐州ㆍ지금의 상주)를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후 본국과의 교통이 단절되자 후사벌국을 창립하여 시조가 되었다고 전한다. 견훤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10세손으로 사자금어대(賜紫金魚帒) 박견(朴甄)이 있으며, 12세손 박여(朴侶)는 고려 충렬왕 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3세손 박문로(朴文老)는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증(贈) 좌참찬(左參贊)이 되었다.
여섯째 완산대군 박언화의 무안박씨는 90,785명, 면성박씨는 7,666명, 전주박씨는 1,985명으로 모두 100,436명이다.
무안박씨는 충렬왕 때 홍건적을 토평한 공으로 면성(지금의 무안)부원군에 봉해진 박문오, 팔만대장경 창제 공신 박문정, 한글 점자를 창안한 박두성을 배출했다. 전주 박씨는 1398년에 세워진 전주시 향토문화유산 (구)제5호 박진 효자비 (朴晋 孝子碑)가 있다. 후손으로 1637년 조선 인조 치세 중기 시대의 무관 관료 출신이던 당시 41세의 박사영(朴士榮)과 당시 40세의 박숙지(朴叔只)는 같은 1637년(인조 14년) 당시에 별시무과(別試武科)를 모두 각각 병과(丙科)로 합격(무과 입격)하여 모두 1637년 조선(朝鮮)의 무관(武官)으로 첫 출사(관료 입직)하였다.
일곱째 강남대군 박언지의 후손 춘천박씨는 16,000명 정도이다. 시조 박항(朴恒)은 박언지(朴彦智)의 11세손이라고 한다. 충렬왕 때 원(元)에 다녀와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박원굉(朴元宏)은 평장사, 박원비(朴元庇)는 판서를 지냈고, 박원굉의 아들 박안구(朴安具)는 대제학, 증손 박의공(朴義公)은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박원비의 아들 박광선(朴光先)·박려(朴旅) 부자는 직강(直講)을 지냈다.
퇴계 이황의 어머니가 이 집안 출신이다.
여덟째 월성대군(月城大君) 박언의(朴彦儀)의 후손 월성박씨는 26,565명이다. 1세 중시조는 고려 혜종 치세 시대 판결사 박휘(朴徽)이며, 고려 때에 대릉직(재능직)을 지낸 하급 관료 출신의 박인육(朴仁育)을 월성 박씨 2세 중시조이자 월성 박씨 본격 1세조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 월성 박씨의 시조 박언의(朴彦儀)는 신라 경명왕의 막내아들로 월성대군(月城大君)에 봉해졌다는 전설은 후대에 족보를 편찬하면서 만들어진 전승이다.
『밀양박씨세보』에서 <九男 舜交 麗朝大相>으로 나타나 있는 금성대군 박교순은 경애왕의 적장자이고, 후손 울산박씨는 26,571명이다
시조 박윤웅(朴允雄)은 고려 태조(太祖) 때 큰 공이 있었고, 박유는 두문동 72현으로 칭송받았으며, 박홍(朴泓, 1534년 ~ 1593년)은 임진왜란 때 경상좌수사였으며 박두세는 숙종 때 요로원야화기를 저술하였다.
이렇게 나무위키는 8대군계를 설명하지만, 이 글의 근거인 『밀양박씨세보』 서문에는 경명왕이 분명히 무사(無嗣)로 나타나 있다. 그 당시에나 후세 어느 때에 제사를 지낼 후사를 이었을 수 있지만, 일단은 적장자가 없다. 그러므로 8대군이 후세에 이은 경명왕의 繼子들이라면, 금성대군 박교순 계통이 신라 왕실의 정통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금성대군 박교순은 박씨 왕실의 정통성뿐만 아니라 신라 왕실 전체의 역사적 정통성을 가졌다. 왜냐하면 김씨족 대표 김부가 경애왕에 반역하여 견훤군을 유도하여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하도록 하고, 그 공으로 견훤이 직접 신라왕으로 임명하였기 때문이다. 김부는 반역자인 균정의 아들 신무왕의 증손자로서 왕위에서 먼 방계일 뿐만 아니라 신라 백성들의 추대가 아니라 적국 견훤의 임명을 받아 왕이 됐기 때문에 정통성이 전혀 없고, 신라를 고려에 팔아먹은 매국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울산박씨는 신라 왕계를 잇는 정통성을 가진 문중이다.
또한 14세손 박보 할아버지의 딸이 고려 시대 파평윤씨 윤보에게 시집간 사실이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데, 파평윤씨 족보에도 배우자가 울산박씨라고 기재되어 있고 윤보의 손녀가 고려 충혜왕의 정비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로써 고려시대 인물들 족보의 신뢰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면 뭔가 그림이 그려진다. 경명왕의 8대군 분봉설이 무엇에 근거하고 어떠한 구조인 가를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발견된다.
먼저, 순교 (舜交)는 경애왕의 아들인데도 九男으로 올려져 있다.
‘박교순(朴交舜)’을 중시조로 하는 울산박씨가 지금도 대를 잇고 있다. 밀양박씨가 전혀 아니다. 그러므로 『밀양박씨세보』가 박씨 계보를 종합하는 차원에서 29세 경명왕 아래의 30세에 8대군계와 함께 경애왕계 순교를 九男으로 포함한 아홉 명 중시조 체제로 만들어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초기 편찬자들의 의도는 이러한 통합체제였지만, 이후 ‘九男 舜交’계는 이탈하여 별도로 울산박씨를 이루었다.
다음으로 둘째 고양대군 박언침의 고령박씨도 근거가 뚜렷하다고 할 수 없다. 고려와 조선 초기까지 중시조는 박언성의 7세손인 박섬, 박환, 박연 등인 것은 가계가 한미했으며, 주요 인물로는 박은(朴誾, 1479년 ~ 1504년), 박공량(朴公亮, ? ~ 1556년), 박경업(朴慶業, 1568년 ~ ?) 등인 것을 보면 1600년대 후반에 이루어진 족보 편찬 작업에 고령박씨 후손들이 참여하면서 중시조로 고양대군을 만들어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고양대군이 중시조임을 가전으로 전해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음으로 세째 속함대군 박언신의 함양박씨도 근거가 뚜렷하다고 할 수 없다.
시조 박언신과 중시조 박선 사이의 계보가 확실치 않은 데다가, 중시조(中始祖) 박선(朴善)이 고려조에서 예부상서를 지내고 추밀원사에 추증되었다고 하고, 장남 박인정(朴仁挺)도 예부상서를 지내고 추밀원사에 추증되었다고 하나 고려사 등에는 기록이 없다.
박인계가 고려 후기의 무신이고, 박습(朴習, ?~1418)은 태종 때 병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내며 박씨들과 관계를 맺으며 밀양박씨 족보 편찬을 할 때 참여했을 것이다. 족보의 계통을 만들 때 한 가지로서 속함대군을 설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 다섯째 사벌대군 박언창의 상주박씨도 근거가 뚜렷하다고 할 수 없다. 박언창(朴彦昌)은 사벌대군(沙伐大君)에 봉해지고 사벌주(沙伐州ㆍ지금의 상주)를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후 본국과의 교통이 단절되자 후사벌국을 창립하여 시조가 되었다고 견훤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고 전한다.
박언창의 10세손으로 사자금어대(賜紫金魚帒) 박견(朴甄)이 있으며, 12세손 박여(朴侶)는 고려 충렬왕 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3세손 박문로(朴文老)는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증(贈) 좌참찬(左參贊)이 되었다. 역시 후세에 사벌대군을 중시조로 만들어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 여섯째 완산대군 박언화의 무안박씨와 전주박씨도 근거가 뚜렷하다고 할 수 없다. 무안박씨는 면성부원군 박문오, 팔만대장경 창제 공신 박문정, 한글 점자를 창안한 박두성 등이 있지만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뚜렷한 인물이 없다. 또한 전주박씨의 1398년에 세워진 박진 효자비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사회적 위세의 뚜렷한 징표였다. 그러나 이 효자비의 후광효과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박종수가 죽고난 후 두 아들이 장수 등 먼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1637년에 박사영과 박숙지 두 사람이 무과급제하여 현달하면서 밀양박씨 동족들과 밀접해져서 족보 편집에 동참한 것 같다.
다음으로 여덟째 월성대군 박언의의 월성박씨도 근거가 뚜렷하다고 할 수 없다. 중시조 박휘(朴徽)가 고려 혜종 시대 초기에 판결사(判決事)라는 관직을 역임하였다고 하나, 고려 때에 대릉직(재능직)을 지낸 하급 관료 출신의 박인육(朴仁育)을 월성 박씨 2세 중시조이자 월성박씨 본격 1세조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 즉 고려와 조선 시제 중기까지 뚜렷한 인물이 없는 가계에서 월성대군의 후손이란 말이 가전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려하고 난 후에 경명왕과 연관되면서 고려조에 높은 벼슬을 한 근거가 비교적 뚜렷한 대군은 밀성대군과 네째 죽성대군 박언립의 죽산박씨 둘이다.
밀양박씨는 고려와 조선조 때 현달한 후손들이 뚜렷하게 사서 등에 나타나 있으니 적통임이 분명하다. 또한 죽산박씨는 죽성대군의 박언립朴彦立)의 아들 박기오(朴奇悟)가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태보(太保)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라 죽주백(竹州伯 안성지역)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 고종 때 몽골군 장수 살례탑을 격파한 박서, 교려말 정당문학 박문보, 조선 예종 때 영의정 박원형 등 현달한 후손들이 뚜렷하다. 정리한다면, 『밀양박씨세보』 편찬 작업에서 밀성대군과 죽성대군의 후손들 중에서 영달한 문중이 중심 역할을 하며 군소 문중들을 포함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뚜렷하지 않다고 해서 경명왕의 후손이 아닌 것은 아니다. 태조 왕건이 임명한 삼한벽상공신 3,200명에서 확인된 110명 중 박씨가 9명이니 전체적으로는 200명은 됐을 테니, 서기 900년 무렵만 해도 박씨족이 전국 여러 곳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었음이 증명된다. 그들 중에서 고려 시대에 득세한 문중들이 후세 어느 땐가 8대군으로 정리됐다고 봐야 한다.
다음으로 검토할 문제는 8대군 후손들의 인구 분포이다.
420만 박씨 중에서 밀양이 316만으로 절대적 다수를 차지한다. 이어서 함양이 16만 명, 순천이 10만 명, 죽성이 6만 명, 고양이 4만3천 명, 월성이 2만6천 명, 사벌이 2만5천 명이다. 완산대군 무안과 전주박씨 인구가 10만 명이다. 7대군 후손들 모두 316만 명의 밀양박씨보다 훨씬 적다. 8대군설이 맞다면, 밀성대군의 같은 아들로서 그 후손들이 번창한 정도가 너무도 차이가 난다. 밀성대군 후손들의 생활력과 번식력이 강하여 이렇게 엄청난 차이를 가져왔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달리 말하면 7대군 박씨들이 밀양박씨에 비해 인구는 적지만 중시조 이후 씨족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직설하면, 만만한 밀양박씨 속으로 조선 후기부터 일제 초기까지 신분제 붕괴로 인하여 他姓, 客姓, 無姓 인구들이 많이 유입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940년경 7대군들과 함께 동시에 출발한 밀성대군의 후손 밀양박씨가 다른 대군들보다 30배 이상 많다는 것은 자연과 생물의 이치에 어긋난다. 하지만 정통이든 아니든 함께 이왕 밀양박씨가 된 이상엔 밀양 본관에 충실함이 도리일 것이다.
역사상 평민들이 성씨를 사용하게 된 것은 12세기부터다. 14~15세기에 이르러서야 성씨 사용이 사회적 관습으로 정착되었다. 현재 전하고 있는 16~17세기의 호적을 검토해보면, 그 당시에는 성씨를 사용하지 못한 노비들이 전체 인구의 30~40%나 되었다. 이들 노비는 물론이고, 그보다 상위 계층이자 인구의 40~50%를 차지하던 평민들도 당시에는 족보와 거리가 아주 먼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중기부터 신분제도가 붕괴하면서 신분 세탁을 통해 천민 계층은 양민으로, 양민들은 양반층으로 슬며시 편입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때 창씨보다는 먼 옛날인 신라의 국성인 박씨, 그중에서도 맏집인 밀양박씨와 경주김씨, 경주이씨 등으로 세탁하는 것이 편리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패망한 가야왕성인 김해김씨로 세탁하는 것이 가장 편리했을 것이다. 위험도가 높은 조선의 국성인 전주이씨로는 세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결과, 다른 성씨들보다 김해김씨, 경주김씨, 밀양박씨, 경주이씨 인구가 월등하게 많은 게 아니겠는가. 조선 시대에는 신분 세탁을 하고 멀리 이사를 가면 수십 년 후엔 묻혔다.
이런 식으로 점점 성을 취득한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나라가 망하기 전 일제 통감치하에서 1909년 민적법이라는 것이 생기고, 순사와 면서기를 동원하여 전국적으로 한 사람 빼놓지 않고 모두 성을 넣어 민적 신고를 하도록 했다. 성씨를 새로 만들게 하는 일제 민적법 시행 당시는 당시 순사들이 각 집을 돌면서 원하는 대로 성씨 신청을 받았고. 가끔 한자의 획을 잘못 써서 희귀한 성씨가 나오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갑자기 압박을 당한 성이 없는 백성들은 모두 아는 성을 써넣거나 가짜 성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서 가장 흔한 성이 김씨고 그다음이 이, 박, 최, 정씨 순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창씨보다 이미 있는 큰 성씨 중에서 골라 써넣었다.
성 없이 노비로 한평생 살았던 안동김씨 가문의 노비 3백여 명도 구한말에 일사불란하게 그 주인댁과 같은 성씨가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 김좌근은 계동의 집 대지가 8천 평, 농지는 수만 평이라 노비가 수백 명이었다. 김좌진 장군댁 노비 100명도 안동김씨 호적을 만들어 가졌다 한다. 이런 방법으로 김씨 인구가 늘어났다면, 박씨 인구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일제가 성이 없던 밑바닥 천민(노비)계층에게 유명 성씨의 호적을 준 것은 조선 양반 성씨들이 씨족별로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노비를 양민화 시켜 수탈 대상을 늘이기 위한 식민통치정책의 일환이였다. 그 결과로 김이박씨가 폭증했다.
그 민적법이 식민지 시대를 지나 독립 국가 대한민국에서 호적법으로 변신하여 그대로 적용되었다. 현대에도 인구조사를 할 때 호적법에 따라 하는 데, 출생신고를 할 때 이미 정해져 있는 성에다가 써넣은 관향은 신고자가 임의로 써넣는다. 족보나 인보 등 객관적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대에 시행되는 성과 씨 통계는 근본부터 큰 하자를 내포하고 있다.
다음으로 검토할 문제는 앞에서 언급한 고려 건국기의 전국의 박씨 분포도이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3,200여 명 중에서 지역과 이름이 밝혀진 110명에서 박씨가 6개 지역 토호 세력의 대표 9명이 들어있었고, 전체로는 박씨 삼한벽상공신이 200명은 넘을 것이니, 그 많은 박씨가 다 어느 족보로 갔겠는가. 경애왕계와 파사왕계, 순천박씨와 반남박씨로 정리되고도 남은 박씨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 많은 박씨를 족보로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8대군을 만들고, 중시조들과 파시조들을 계속해서 만드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8대군을 큰 가지로 세우고, 중시조들과 파시조들을 작은 가지로 만들면, 높은 관직을 역임한 유명한 사람이나 무후인 사람 아래 아들을 여러 명 만들어 붙이면 계파가 자꾸 만들어진다. 그렇게 하면 수십 수백만을 쉽게 한 족보 안에 넣을 수 있다. 조선 중기에 각 문중에서 족보를 만든 사람들은 우선 그런 방법으로 족보의 대강을 짰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정리 정돈된 이후로는 이후로는 족보 관리가 매우 엄격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밀양박씨세보』가 박혁거세부터 현대까지 일관된 정통성을 가진
어느 한 박씨 문중의 족보가 아니라 여러 박씨 문중들의 가계를 종합하여 정리하기 위해 <8대군 분봉>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대동보가 된 연유를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1600년대 후반에 경명왕 8대군 체제와 계통으로 정리된 『밀양박씨세보 』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문제를 살펴보자.
『밀양박씨세보 상권』 [三十二世 子 瀾] 기사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朴瀾 麗朝遼東督捕使 謹按新羅世系明載於明衛擧章譜而 且麗初世系參錄於擧章譜而 世遠人亡其傳或泯而 况累經兵火傳者幾稀 故上下五百餘年間 修其新舊譜而只書十王世系疑闕二十四世故也 每以是恨之間嘗謹閱傳來珍藏則一有擧章譜是乃
始祖王卽位五十一年甲寅秋九月 與開國功臣二十八人設擧章殿萬福宴古事而王之六世孫諱正是大君重修聯系而高麗惠宗聞賜后孫肅受而月沙李先生家藏考訂者也 上下數千載世系諱啣爵位生卒配墓昭然可考乃尤於吾朴無徵之文 得此珍貺其私心興感尤當何如哉 又有先生所序文而遺漏云是爲可恨
33세 란(瀾)에 고려조에 요동독포사(遼東督捕使)를 지내셨다.
삼가 살펴보니, 신라 세계는 명위거장보(明衛擧章譜)에 명백히 실려있다. 또 고려 초의 세계도 거장보에는 함께 들어있으나 세대가 멀고 아는 사람이 없어서 전하여지는 것이 혹 빠지기도 했다. 더구나 병화가 자주 있어서 전하는 것이 거의 없음이 상하 500여 년간 신보와 구보를(新·舊譜) 고쳤으나 단지 10왕의 세계(王系)뿐이고, 24 세대(世代)는 미심쩍어 빠지고 비게 된 연유이다. 이리하여 매번 한스럽던 차에 일찌기 삼가 살펴보니 변하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되어 온 것이 하나 있으니 곧 거장보(擧章譜)이다.
이 책은 시조왕 즉위 51년 갑인(기원전 7년) 가을 9월 개국공신 28인과 함께 거장전 만복연을 열었던 옛일을 왕의 6세손인 휘 정시(正是)대군이 손질하여 고친 것으로서, 고려 혜종이 이를 듣고 책을 하사한 것을 후손이 삼가 받았고,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선생이 자기 집안에 간직해오던 책이라고 고정하였다.
상하 수천 년 세계를 이어오면서 휘함(諱啣), 작위(爵位), 생졸(生卒), 배위(配位), 묘소(墓所)를 매우 분명하게 상고할 수 있었던 것은, 도학과 문장이 한 나라의 으뜸이고 명성이 중국에까지 이른 월사(月沙) 선생 덕분이다. 더욱이 우리 박씨는 조상의 내력을 증거할 만한 글이 아무 것도 없는데 이런 문서를 얻으니, 이러한 보배를 하늘이 주는 데에야 그 사심(私心)과 흥감(興感)이야 어찌 다하지 않으랴. 또 선생의 서문(序文)에서 누락된 것이 있다고 이르니, 조상의 흔적을 다 찾지 못해 한스럽다.」
신라 시대의 10왕을 제외한 24세 조상들의 흔적을 전혀 알 수 없었는데, 다행히 월사 이정귀 선생의 집안에 가장되어 오는 명위거장보(明衛擧章譜)를 발견하여 조상들의 흔적을 찾게 되었다는 기사이다. 월사 선생이 1564년에서 1635년 사이를 산 분이니, 『밀양박씨세보』가 1600년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된다. 월사 선생은 당대의 문장가로 장유와 친교가 깊었다. 장유는 규정공인 충정공 박숭원의 외손자이다. 그러니 월사와 친교하며 명위거장보(明衛擧章譜)를 읽었을 것이다. 충정공 박숭원의 종형인 낙촌공 박충원의 증손자가 광해조 때 영의정 박승종으로 1600년대 초에 박씨 문중 중에서 낙촌공파와 충정공파가 득세하면서 이 족보 『밀양박씨세보』 편찬 논의가 있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발간된 밀양박씨족보(숭정임인보)(密陽朴氏族譜(崇禎壬寅譜))의 기록이 다음과 같다.
「1662년(현종 3) 밀양박씨 규정공 14세손 박승건(朴承健)이 숭정 임인년에 간행한 밀양박씨의 족보. 분량은 1책이며, 호남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표제는 “밀양박씨족보”, 판심제는 “밀양세보(密陽世譜)”이다.
박승건의 발문에 따르면, 밀양박씨는 구보가 있었지만, 임란을 거치면서 전해지지 않자 박승건의 아버지 박안행(朴安行)이 동종의 합의를 거쳐 공홍도관찰사 박정현(의곡공)과 함께 밀창부원군 박승종(숙민공)의 도움을 받아 1620년(광해군 12 경신년)에 족보를 간행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경신보(庚申譜)였는데, 그 안에는 여러 후손이 누락 되는 등 미비점이 많아 박안행은 오랜 기간 교정 작업에 착수하여 원고를 정리하였으나 간행하지는 못했다. 이에 그 아들인 박승건이 호남에 도사로 부임하여 밀양박씨 외손이던 관찰사 이태연(李泰淵)의 전적인 협조를 받아 간행하게 되었고, 임인년에 발간하였다.」
발간 순서는 구보(舊譜) → 임란 실전 → 경인보 → 숭정임인보이다. 구보(舊譜)가 어떤 형태인지 모르지만, 1476년(성종7) 년 안동에서 간행된 안동 권씨 성화보(安東 權氏 成化譜)에 비추어 볼 때, 안동 권씨 못지않은 벌문인 밀양박씨에서 족보를 발간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 시대보다 앞선 시대의 족보는 문중보나 대동보의 형태가 아니라 직계를 중심으로 가까운 친척을 포함한 家乘, 家牒, 家譜의 형태로 가전되었을 것이다. 그 사례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족보가 지금 남아 있어서 국보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그 족보는 개국 전 함경도 화령(현재의 함경남도 영흥)에 살고 있을 때의 것이다. 여진족 속에서 사는 무골 이성계 가문이 가승 형태인 족보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이니, 고려 중기부터는 유명한 성씨 문중들마다 가첩 형태의 족보가 만들어져서 전해졌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박씨들이 가승 형태의 각 파보를 수합하여 종합 정리한 후에 계통을 정하여 『밀양박씨세보』를 편찬한 시기가 1600년대 후반일 것 같다. 이후 1700년대부터 <박혁거세서서간 후손 30세>까지 통일된 각 파보 간행이 활발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로 1701년 신사보, 1741년 신유보, 1744년 갑자보 등 여러 파에서 대동보를 발간하였다.
밀양박씨 문중에서 발간한 족보 종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자료가 있다.
「성남 박형원 소장, '고문헌' 기증식, 2019. 4.26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성남문화원 부원장인 밀양(밀성)박씨 충헌공파 대제학파 사직공 17세손 박형원 소장께서 4월 26일 국립중앙도서관에 총 125권의 고문헌을 기증하셨습니다.
박 소장은,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가서 외교활동을 펼친 밀양박씨 대호공 朴로의 후손으로, 감사공 朴자 紳자 조부꼐서 편찬한 밀양박씨 양주 가계의 파보인 1701년 <신사보> 부터 1902년 <임인보> 까지 수집하셨고, <신사보>는 밀양박씨 최초의 족보로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기증한 족보의 영인본은, 양주 가계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할 뿐 아니라, 밀양박씨 관련 족보를 일괄하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하게 됨으로써 족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도 자료조사의 편의를 제공하게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기증할 목록은 충헌공파, 대제학공이 발간한 족보 영인본으로 신사보(1701년 발간, 1책), 신유대보(1714년 발간 4책), 갑자보(1804년 발간 4책), 신묘보(1831년 발간 6책), 경술보(1850년 발간 10책), 신해보(1851년 발간 6책), 병인보(1866년 발간 11책), 병자보(1876년 발간 17책), 인인보(1902년 발간 17책의 영인본과 『신라선원세보원』, 『북보 : 1984년에 조선시대 小北派 28개 성씨 69개 문중을 소개』, 『명위거장보』, 『박씨밀성세가 : 고려 혜종대왕이 전해준 <박씨신라선원세계>를 월사 이정구 선생이 고증』 등 총 125권을 기증하셨습니다.」
이 중에서 『명위거장보』와 『박씨밀성세가』는 족보사 연구에 매우 귀한 서책이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니, 밀양박씨 족보를 연구하는 종친들은 잘 읽고 족보 편집에 반영해야 할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명위거장보(明衛擧章譜)』와 『고려사』 등의 문헌을 살펴봐야 할 것이지만, 위의 여러 자료를 보더라도 『밀양박씨세보』를 위시한 8대군파의 족보들은 『명위거장보(明衛擧章譜)』가 발견된 후에 일괄적으로 上系의 繼代와 紀事를 정리한 것 같다. 그 결과로 조선 초기까지의 족보 繼代와 紀事가 동일하다. 필자 역시 다른 대군파들의 족보와 다른 박씨들의 족보를 열람하여 『밀양박씨세보』를 꾸준히 보유 및 교정할 것이다.
이와같이 1600년대의 조상들이 모여 上系의 繼代와 紀事를 정리했다. 그러나 다른 사서들도 그러하지만 정작 본서인 『밀양박씨세보』의 앞에 둔 <신라십왕역대기략>에 경명왕의 후사가 없고, 9남 순교가 경애왕의 왕자인 것 등 앞에서 고찰한 여러 사실을 보면 30世의 경명왕 왕자 8대군은 사실이 아니라 『밀양박씨세보』를 처음으로 만든 조상들이 편법으로 세운 구조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허위나 가짜는 아니다. 전해지는 족보와 기록 등이 없어 실증할 수 없는 먼 조상의 가계를, 1600년대 후반 당시에 얻을 수 있는 사료와 자료, 서적 등을 최대한으로 참고하여 줄기와 가지로 나누어 정리했을 따름이다. 그러한 작업에서 가장 우선되는 자료는 계파별로 전해오는 家乘普와 대대로 전해 내려 오는 구전 家史였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과 작업은 어느 성씨 문중이나 동일하다. 고려 말에나 조선 초기에 일어나 명문거족이 된 문중들은 상대의 내력을 전혀 알 수 없어 아예 처음으로 현달한 조상을 중시조로 삼는다. 그에 비해 우리 박씨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박혁거세거서간과 아홉 왕의 사적이 기록되어 전해오고 있으니 훨씬 더 깊은 뿌리를 알 수 있다.
5세 아달라왕은 후사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족보에는 6세로 벽방이란 분이 올라 있다. 사서가 틀릴 수도 있지만, 사서가 맞다고 해도 그 당시에 반드시 계자를 들여 후사를 이었을 것이다. 경명왕 사후에도 박씨 문중에서 반드시 한 명을 뽑아 후사로 삼았을 것이다. 또는 각 본관 별로 8명을 뽑아 후사를 잇도록 했을 수도 있다. 그 말이 대대로 구전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모여서 족보를 만들 때 8대군을 설정했다고 할 수도 있다. 명문가들은 장손이 아들이 없을 경우에 다음 집의 장자를 계자로 정해 후사를 잇도록 하는 관습이 있으므로 아달라왕과 경명왕의 후사를 계자를 들여 잇도록 했을 것이 자명하다.
신라 시대 6세부터 27세 추신까지의 가계를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족보를 보면 박씨 종손들이 왕위는 잇지 못했지만 김씨왕조 대대로 갈문왕, 후, 대군 등의 칭호로 귀족 대우를 받았음이 등재되어 있다. 특히 14세 계보(啓輔)란 분은 자비왕 김씨조에 대사후로 봉해졌으나 소지왕 김씨조에는 ‘적거대호변 謫居大湖邊’이라 하여 무슨 연유인지 왕이 바뀌자 귀족 신분에서 말려나 큰 호수 가에서 귀양살이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계속되는 김씨왕조 하에서도 700여 년 동안 박씨족이 꾸준히 가계를 이으면서 귀족 대우를 받았고, 세력을 유지해왔다는 것을 28세 신덕왕에서 알 수 있다. 신덕왕은 경휘라는 이름을 가진 귀족 신분일 때 효공왕의 딸 김씨를 부인으로 얻었다가 왕위에 올랐다. 박경휘가 시조왕 박혁거세를 잇는 종손이기 때문에 왕의 사위가 될 수 있었다. 또한 김씨들과의 경쟁 속에서 박씨로서 728년 만에 왕위를 오른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왕의 사위라는 지위도 작용했겠지만 효공왕의 근친 김씨들과 경쟁하여 승리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었다. 김씨족의 반발이 8년 후에 김현승의 반란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해 볼 때, 밀양박씨는 경주김씨와 함께 거의 사실에 가까운 족보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이야 420만 박씨 대부분이 족보에 들어 있지만 1600년대까지만 해도 높은 벼슬에 오른 조상들이 많은 문중만 가승이 있었고, 그들끼리 연결망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상의 가계보를 알고 있는 집안은 극히 드물었을 것이다. 그래서 각 문중의 대표자들은 신라 시대와 고려 초기에 걸친 박혁거세거서간부터 경명왕까지 삼국사기에 근거하여 비교적 뚜렷한 계보를 갖고 있는 밀성대군을 중심으로 족보를 종합하여 편찬할 필요성을 느꼈다. 가장 원만한 방법이 경명왕 아랫대를 8대군으로 만들어 중시조로 삼아 각 파를 연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명왕을 29세로 하는 모든 박씨 족보에서 30세까지가 똑같다. 30세 중시조들을 만들고 난 다음에는 각 대군 아래 각 파별로 족보 작업을 하기가 순조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 하는 족보 종합 편찬 작업이기 때문에 앞서 지적한 바대로 몇 군데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위조나 조작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단지 어둠 속에서 바늘 찾듯이 이리저리 꾸며서 만들어야 하는 방편이었을 뿐이다.
공이 많이 들었지만 후손의 눈으로 보기엔 곳곳에 허술하거나 빈틈이 있다. 허술한 점을 보유하고 빈틈을 채우는 것은 후손들의 몫이다. 뿔뿔이 흩어져 없어져 버릴 수도 있는데 계통을 세워진 것만 해도 조상들께서 큰일을 하셨다. 중간할 때 이러한 사실을 보유와 첨언으로 붙여서 밝혀야 한다. 아무리 애써도 아득한 시초때부터 일관된 계통보를 만들 수는 없다. 기왕에 밝혀진 정도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어느 파나 대체로 1600년대 이후의 족보는 거의 정확하다. 한미한 일생을 보낸 조상이라도 귀한 나의 조상이다. 그분이 없었으면 대가 끊어졌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족보를 기록해야 한다. 웃대 족보에서도 하지도 않은 벼슬을 버젓이 나열하는 것은 허풍이다. 그런 족보가 있는 집안에서는 허풍쟁이가 대대로 태어난다.
족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라 왕실의 왕권 투쟁, 박씨족, 석씨족, 김씨족의 타협과 투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 탄생 신화가 허구이자 상징이듯이 박석김 성골이 왕위를 서로 물려받았다는 말과 화백회의는 후세의 분식이다. 박석김 세 성씨가 서로 간에 견제와 타협, 투쟁과 축출 등의 정치적 변화를 통해 왕권 교체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내물왕 김씨왕조로 굳어진 역사가 실제이다.
농경 정착인들인 서라벌 6촌에 나타나 처음으로 왕권을 장악한 씨족은 박씨족이었다. 그러나 곧 강한 무력을 가진 석씨족이 나타나면서 정치적 타협을 하였다. 이어서 중국 신나라가 망하자 김씨족이 대거 유입하여 세력을 넓혀갔다. 기원후부터 본격적인 세력 다툼이 박석김 세 씨족간에 전개되었다.
석씨족이 배를 타고 온 것을 보면, 기마민족으로 집단으로 온 박씨족보다 인구가 적었을 것이다. 김씨족은 나중에 온 선비족계 내물왕의 군대는 소수이지만 강병이었고, 먼저 온 오환족계 김알지의 집단은 인구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 석씨족과 신구 김씨 연합족의 전투에서 석씨족이 패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왕위를 200년 동안 빼앗긴 박씨족이 석씨족을 편들 리 없다. 석씨족 성질이 칼칼하니 패하고도 항복하지 않았을 게고, 전투로 단련된 내물왕 군대가 석씨족을 모조리 죽였을 것이다. 이것이 2015년 인구조사에서 석씨가 1만밖에 안 되는 이유다. 그러나 박씨족은 승자 김씨족에 협조하면서 왕비족이 되고 대군과 후의 지위를 대대로 받는 귀족이 되었다.
356년 피의 투쟁을 거쳐 흉노계 선비족 출신 내물왕이 왕이 된 후부터 신라는 김씨족의 나라가 되었다. 이후 780년 37대 선덕왕이 반란으로 왕위에 오른 후부터 시작된 김씨족들 간의 왕위 쟁탈전이 912년 52대 효공왕이 아들 없이 죽음으로써 일단 끝났다. 132년 동안 15대의 왕이 바뀔 정도로 왕권이 쇠약해지면서 국력도 쇠약해졌다. 뿐만 아니라 51대 진성여왕을 세울 정도로 씨가 마르고, 겨우 세운 52대 효공왕조차 재위 5년 만에 후사 없이 죽어버리니 왕권이 세워질 리가 없었다.
912년 후사 없이 죽은 효공왕의 하나뿐인 공주인 김씨에게 장가든 덕분에 왕이 된 신덕왕과 아들인 경명왕, 경애왕이 15년 동안 쇠약해진 국력을 다시 강하게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데다가 박씨족에게 왕위를 빼앗긴 김씨족이 반격의 기회를 노리다가, 박씨왕조에 불만을 품은 김현승이 918년에 반란을 일으켜서 신라와 왕실의 힘이 약화되었고, 927년 김현승의 숙부인 김부가 견훤군을 이끌어 들여 경애왕을 참살하였다. 왕비는 견훤에게 능욕당하고, 후궁들과 궁녀들은 견훤군에게 곳곳에서 강간당하였다. 신덕왕의 셋째 아들이자 경명왕의 아우인 孝廉은 신하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끌려가서 생사를 모른다. 김부가 견훤에게 의해 왕위에 올려져서 경순왕이 되었다가 8년 만에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김부는 46대 문성왕(839~857년)의 후손으로 9대 70년 만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경애왕을 죽이고 왕비를 능욕한 약탈자 견훤이 자의로 왕으로 임명하였기 때문에 신라의 백성들과 신하들이 옹립한 왕이 아니다. 삼국사기 경순왕조의 ‘爲甄萱所擧卽位 위견훤소거즉위, 견훤에 의해 위에 올랐다’대로 견훤의 신하일 뿐이다. 또한 이미 9대나 흐른 후의 먼 왕손이기 때문에 신라왕조사에서 정통성이 없다.
천년 사직 신라가 멸망한 원인은 왕권 쇠약이지만 결정적인 근인은 김부가 견훤군을 이용하여 반란을 성공시키고 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흑역사 면에서 보면, 김부 경순왕은 신라의 역적이자 매국노다. 김씨족 알지가 신라 왕족에 편입하여 득세하고, 자손 내물왕이 석씨족을 박멸하고 김씨족 만의 왕조를 만들더니 결국 김씨족이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김부의 반란이 없었다면, 나라를 새롭게 하여 다시 일어서기 위해 낡은 김씨왕조를 반대하고 시조왕 박혁거세의 후손인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을 세운 신라인들의 의지가 다시 불타올라 신라가 부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김씨족의 반란과 경순왕의 항복으로 천년 신라가 망하고 말았다.
오늘날, 신라를 고향으로 하는,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박, 석, 김, 이, 최, 정, 손, 배, 설씨 등이 한국 인구의 51%가 된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핏줄 속에는 신라가 맥맥히 흐르고 있다.
수백 년 시간이 흘렀지만, 박씨족 선조들이 『密陽朴氏世譜』를 편찬할 때 넣지 않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박혁거세거서간]에 관한 기록을 후손 희용이 2025년에 삼가 넣어서 편집한다. 더불어 현대에 얻을 수 있는 각종 자료들을 병기한다. 현대문명인의 시각으로 보면 족보가 유치하고 단순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족보 속에는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흔적이 담겨 있다. 신화든 사실이든 다양한 각종의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우리 박씨족 혈통이 어떻게 시작되고 전래되어 오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우리 박씨 조상들만이 우월하다는 허황한 숭조 의식을 경계하고, 모든 성씨가 화합하며 살 수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에 우리 박씨족이 한몫하기를 바랄 뿐이다.
내 비록 시골의 한 작은 선비이지만, 朴氏의 핏줄을 이어받았기로 짧고 얕은 지식과 소견으로나마 억측스런 가설을 세워보았다. ‘如是重修所傳以竢現後之博採’, 이와 같이 다시금 고쳐서 전하노니 지금 종친이나 후손들 중에 사리에 밝은 자 있어 캐고 다듬어 보유하길 바랄 따름이다.
2025년 3월 10일
안동 열락연재에서 쓰다
별첨 : 짧고 얕은 식견으로 부족한 글을 올립니다.
계속 수정, 보완할 계획이니 관심있으신 족친께서는
각 문중의 족보 중에서 32세까지 기사를 카톡 사진으로 보내주시면
수정, 보완 작업에 참고로 하겠습니다.
조언과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특히 8대군 분봉의 근거 자료를 아시는 분은 연락 바랍니다.
우리 박씨 동족들이 합심협력하여 더 사실에 가까운 족보를
만들어서 후세에 전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번은 010-8587-4092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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