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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의 노래
김창현(수필가)
<원일의 노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것. 흔히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을 쓰지만, 운명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그는 가슴 아픈 드라마를 즐기는 신인지 모른다.
사람은 이 세상에 와서 누군가와 싸우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한다. 누군가와 헤어지기도 하고 누구를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그러나 평생 가슴 속에 새기고 잊지못할 사람도 있다.
나는 최근 가락동성당 한 장례식장에서 평생 마음 속에 그 이름 지운 적 없던 여인 소식을 알게되었다. 문상객 명단에서 최옥녀란 이름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50년 전 내 친구 여동생이다. 마침 망인이 진주여고 졸업생이라 문상 온 정애여사에게 물어보니, 옥녀는 현재 남편과 사별하고 송파에 혼자 살고있다고 한다.
'옥녀 밑에 여동생이 있고, 철웅이라는 남동생이 있었는데...'
'네! 철수 오빠 밑에 철웅이가 있었어요. 철웅이가 현재 부산서 어머님 모시고 살아요.'
정애가 대답했다.
정애는 중학생 때부터 우리집에 자주 오곤 했다. 우리집은 식모까지 두고있어 정애 동생 명애가 우리 집에 하숙했고, 정애도 찾아오곤 했다.
'정애씨도 이젠 7십 넘었으니 정애여사라고 부릅시다. 정애여사! 옥녀는 내가 죽기 전에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아! 오빠가 옥녀한테 그런 맘을 가지고 있었군요.'
나는 흘러간 옛 이야기를 풀었다.
지금부터 50년 전 일 이다. 나는 대학 캠퍼스에서 한 통의 전보를 받았다.
'철수 사망. 급히 하진하기 바람. 경택이가.'
철수와 경택이 나 셋은 늘 함께 다닌 친구다. 봄이면 망진산을 쏘다녔고, 여름이면 '메기통'이란 곳에서 따이빙도 하고 현인의 '신라의 달밤'을 부르고 놀았고, 해인대학에서 평행봉을 했다. 셋 다 학교성적도 좋고 체격도 좋아 친구들은 우릴 '배건너 삼총사'라 불렀다.
철수와 나는 문학을 좋아한 편이다. 헬만헷세를 좋아했고, 니체나 키엘케골도 좋아했다. 그러다가 나는 대학 철학과엘 들어갔고, 철수는 재수생으로 진주에 남았다.
나는 대학교수한테 직접 철학개론을 듣자 신이 났다. 하루 멀다하고 철수한테 편지를 보내어, 이미 철학자가 된듯 유세를 떨었다. 첫 학기는 철학개론만 있었다. 강의에도 없던 니체나 쑈펜하우엘의 염세주의 사상까지 퍼나르기 시작했다. 당시는 염세주의가 유행하던 시절이다.
키엘케골의 '생의 무의미한 의지', 쇼펜하우엘의 '자살예찬론', 니체의 '신은 이미 죽었다'는 글을 마치 내가 그 내용을 잘 알기나 하듯 편지에 쓰기 시작했고, 철수는 내가 부럽던 모양이다. 그도 열심히 염세주의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런 어느 여름 날 철수는 철길을 혼자 걸어가 주약동 터널에서 석탄연기 풍기며 달려온 열차에 투신자살한 것이다.
하늘이 노랗게 된다는 말을 그때 나는 처음 실감했다. 세상 전체가 한쪽으로 팽그르르 돌아가는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 때는 중간학기 시험 때였다. 나에겐 더 이상 세상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시험도 필요없고 학교도 필요 없었다. 절친한 벗을 보낸 입장에선 다른 모든 건 중요치 않았다. 시험이고 뭐고 당장 팽개치고 진주 가는 기차 탈 일만 중요했다. 나는 속물처럼 시험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경멸했다.
그래 즉각 서울역에 가서 기차를 탔고, 삼랑진에서 차를 바꿔 탔다. 마침 보리가 노랗게 익는 철이었다. 사람들이 들판에서 보리타작을 하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또하나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세상 전체와도 바꿀 수 없도록 중요한 사람을 잃어버리고 끝없는 절망의 심연을 헤맨다 해도, 세상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롭게 제 궤도를 태연히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장례가 치뤄진 상가에서 나는 예기치 않던 일을 당했다. 상가에서 쫒겨난 것이다.
사람들은 철수와 편지를 수없이 교환한 나를 어머님이 보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 집에서 나가라고 일러주었다.
하긴 이해할만한 일이었다. 철수는 그 어머님에게 생명 이었다. 너무나 잘 생기고, 주변의 부러움 받던 아들이다. 그런 아들을 죽음으로 몬 친구를 보면 얼마나 가슴 찢어지겠는가.
나는 먼 발치에서 하얀 상복 입은 철수 어머니와 옥녀 모습만 보았다. 어머님도 옥녀도 미인이다. 그때 본 두 사람의 하얀 상복만 기억에 남아있다.
결혼 전에 자살한 총각은 무덤을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화장한 재는 우리가 여름이면 강물에 따이빙하고, 현인의'신라의 북소리' 부르던 '메기통'에 뿌려졌다고 한다. 경택이가 나를 '당미'로 데려가더니 언덕 위 소나무에 올라가 뼛조각 몇 개를 들고 내려왔다. 그걸 '메기통'이 보이는 거기 소나무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풀밭에 노란 원추리꽃이 피어있었다. 강 건너 서장대에서 불어온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나는 건 그것 뿐이다.
우리는 훗날 다시 여길 찾아오자고 약속한 후 헤어졌고, 나는 그때 나 자신의 자살을 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울 올라온 나는 또하나의 자살을 보게 된다. 진주 다녀온 내 이야기를 들은 한 방 하숙 친구가 새벽에 음독을 한 것이다. 그는 철학과 동기로 역시 문학을 좋아했다.
둘은 돈이 떨어지면 세계문학전집을 들고나가 맡기고 우리가 쎄느강이라 부르던 제기동 K대 앞 '니나노집'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철수 이야기 많이 했고, 그도 염세주의를 무슨 사상처럼 알고 있었다.
음독한 그를 발견하고 당황한 내가 이리에 살던 그의 어머님에게 전보 치고, 상경한 가족에게 그를 맡기고 떠나보낸 모든 일들이 꿈속의 일 같다.
이후 철수의 죽음은 내 인생을 사정없이 바꿔버렸다.
나는 자학(自虐)의 심정으로 학업을 팽개치고 무작정 진주로 내려와 기원에서 소일하다가 11월 어느 날 입대했다. 동명이란 친구와 바둑을 두는데 밖에 나보다 2년 선배들 징집대열이 지나가고 있었다. '어! 저거봐라' 둘이 배영초등학교까지 따라가서, 자원입대 가능성을 기관병에게 물어보고, '창원 훈련소 가서 물어보라'는 말을 듣자, 열차를 동승해 훈련소로 가서는, 머리 깍고 훈련병 된 것이다.
나는 그때 까뮈의 '이방인'이란 소설 주인공 비슷했다. 소설에 '햇볕이 너무 눈 부셔 총을 쏘았다'는 구절이 있다. 이런 걸 요즘엔 '싸이코패스(psychopath)라 부른다. 겉은 멀쩡하면서도 충동적인 행동을 하거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반사회적 성격 장애자를 말한다.
당시 실존주의 문학에서는 그 걸 인간 실존의 한 모습으로 표현했다.
우리 둘은 훈련소에서 실시한 무슨 테스트에서 1-2등 성적을 얻어 병과를 의무로 받았다. 의무병과는 군에선 특과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붕대나 옥도징기 불출하는 한가한 의무병은 싫었다. 나는 '이방인'의 주인공 '뮈르소'처럼 되고 싶었다. 실존주의를 경험하고 싶었다.
그래 우리는 '훗날 사회에 나가 돈 벌면 자가용 몰지 모른다'는 가설 아래 수송병과로 바꾸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수송병과가 가혹한 체벌로 견디기 어렵다는 것에 호기심이 끌렸다. 나는 군대 밑바닥을 보고 싶었다.
동명이 부친은 진주 미국공보원 원장이다. 그는 초등학교 때 반장이고, 진주서 중학 마친 뒤 경남고를 졸업했다. 의붓어머니 문제로 부친과 알력이 심했고, 대학은 안중에도 없었다,
기관병은 쓰다달다 말 없이 둘을 의무병과에서 수송으로 바꿔주었다. 아마 다른 훈련병에게 의무병과 두 자리 돈 받고 팔았을 것이다.
창원에서 610 수송병과 이등병들을 태운 기차는 해운대에 도착했다. 수영비행장 옆이었다.
우리는 낮이면 기장 양산으로 GMC 적재함에 앉아 운전교육 받으러 나갔고, 피교육생은 간혹 교관에게 '아구통이 90도 방향으로 돌아가게' 주먹으로 얻어맞거나, 조교가 '한강다리 10분간 실시!'하면 '실시!' 복창한 후 영점 5초 내로 GMC 적재함에 두 다리 걸치고 철모 위에 맨머리를 박는 기압을 받았다.
귀대하면 한겨울에 GMC 밑바닥 '시다마리'를 얼어붙은 손으로 물세차 했고, 간혹 단체로 12월 차디찬 해운대 바다 속에 들어가 입술이 새파랗게 얼도록 파도를 둘러쓰곤 했다.
나는 밤에 수영비행장 푸른 써치라이트 보면서 달빛 아래 파도소리 들으면서 향수를 달랬다. 나는 거길 프랑스령 사하라 사막 주둔 외인부대처럼 생각했다.
그 당시 나는 성욕과 더불어 인간의 가장 원초적 욕망으로 불리는 식욕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경험했다. 배고픈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동물이다.
서대신동에 외삼촌 댁이 있었는데, 나는 토요일 외출 나가면 오로지 먹는 것만 챙겼다. 자고나면 누님이 웃으면서 건네주던 밥을 게걸스레 먹어치웠다. 한 끼가 보통 두 그릇이었다.
귀대할 때는 배가 임신부처럼 불렀다. 만원 뻐스 사람들이 그 배를 밀지못하도록 나는 두 손으로 앞을 가리고 배를 보호했다. 취침점호 끝나면 비행장 써치라이트 새파랗게 비치는 그 무서운 야외 화장실에서 설사하는 일이 자정 넘도록 계속되었다.
쇠를 먹는 불가사리도 있지만 나도 그 비슷했다. 아무거나 먹어치웠다. 무우밭에 들어가 무우를 뽑아먹기도 했다. 건빵 다섯 봉지 한꺼번에 먹고 물 마셨다가 불은 건빵 때문에 배가 찢어지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새벽 2시에 취사장에 몰래 들어가 아예 두부를 상자 채 들고나와 주차장에서 보초 서면서 먹어치운 적도 있다.
그 후 나는 항만사령부 229 자동차 대대 800 중대 3소대로 전출되었다. 229 자동차대대는 군기가 센 곳이다. 부산에서 '지옥대대'로 소문난 곳이다. 나는 거기서 참 기발한 기압을 다 받았다.
고무호스는 물에 적셔서 치면 고무가 살속까지 파고든다. 침대마후라는 나무라 부러지지만, 고무호스는 아무리 세게 휘둘러도 호스가 부러지는 법 없고, 뼈를 상하는 일 없다.
사고병은 내무반에서 서로 칼빈 총질을 하기도 했다. 내무반에는 부산 15P 헌병대 감방장 경력의 별을 다섯 개나 단 전과자도 있었다. 영도 밀수업자도 있고, 인천 부두 깡패도 있었다.
우리는 군함이 내려주는 군수물자를 3부두에서 받아 각 기지창에 날랐다. 밤이면 빳다가 난무해 내무반과 주차장은 아비규환 이었다. 고참들 빳다는 도깨비 방망이였다. 치면 칠수록 작전 다녀온 운전병 주머니에서 돈이 나왔다. 운전병은 모두 군수물자 절도범에 가까웠다. 고향에 논을 산 자도 있었다.
여기가 자살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사고치기 알맞은 곳이다.
나는 자살할 때 쓸 칼빈 실탄 수십발을 내가 몰던 GMC 속에 숨겨두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장난이 심하다. 내가 항상 쓸수 있도록 준비한 그 실탄 때문에 오히려 나는 부대에서 '열외' 대접을 받고말았다.
어느 날 ROTC 중위로 3소대 소대장이던 K대 선배가 소대 차량점검 중 내 차에서 다량의 실탄을 발견했다. 아마 소대장이 기겁을 하였을 것이다.
즉각 전 중대엔 비상이 걸렸고, 소대장은 문제아를 밀실로 데려가 면담했다.
'왜 차에다 실탄을 싣고 다녔느냐?'
'저는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원래 인생이 '무의미한 생의 의지' 아닙니까?'
'실탄은 어디서 구했나?'
'수영 부두에서 해운대 장산 탄약창에 운반할 때 빼두었습니다.'
'어디 사용할려고 했나?'
'제 친구 둘이 자살했습니다. 저도 필요하면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두 사람이 K대학 선후배가 아니었으면 나는 영창에 갔거나 '불명예 제대'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대장은 내무반 고참 사고자들을 설득했다.
'김일병은 K대학 내 후배다. 우리 229자동차대대 유일한 대학 재학생 운전병이다. 그는 철학과 학생이다. 나는 철학은 잘 모르지만, 한참 철학에 빠진 애송이들이 그런 경우 있다는 말은 들은 적 있다. 내 얼굴을 봐서 이해해달라.'
그 바람에 나는 그후 한번도 단체기압 받은 적 없다. 오히려 고참 사고자들 친구가 되었다.
그 중 김대지 병장이 있다. 그는 남한산성 군형무소에서 총감방장까지 한, 이북 출신 육군 중령 대대장도 꺼려서 피하던 인물이다. 하루는 내가 PX에 모시고 가서 막걸리를 대접하자,
'나는 해방 후 일본서 여동생과 홀홀단신 귀국해 사회 밑바닥에서 살았다. 여동생 수도원에 맡기고 입대했지만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나에게 대학생인 자네가 술을 산 것이 너무 고맙다.'
그러면서 그는 내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김대지가 PX에서 김일병 손 잡고 울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 효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제대까지 나는 229 대대에서 초 VIP급 열외자였다.
아마 이때도 운명의 신은 혼자 희쭉이 웃었을 것이다.
나는 아무리 사고를 칠려도 해도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사고가 모두 나를 피해 도망을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사랑 만난다고 군복 바지 줄여입고 진주로 휴가 갔다가 적발되어 감방 간 적 있고, 토요일에 서면 '하이에리어' 미군 부대 주변 사창가 배회하며 15P 헌병 구타하여 전 부산지역 헌병대에 비상을 걸리게 한 적 있다.
그 모두가 미미한 사건이다. 실존주의 문학에 나오던 그런 참사는 아니다.
이렇게 군을 제대하자 나는 무작정 남해로 갔다. 거기서 2차로 끝장을 볼 심산이었다.
남해 미조라는 곳에 있다가 욕지도 동항리로 갔다.
이때부터 인생의 고독을 알게 되었다. 나는 거기서 내가 잊혀진 사람이란 걸 알았다. 세상에 잊혀진 사람처럼 비참한 것은 없다.
나는 학교에서 제적되어 있었다. 중간 시험을 놓쳤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걱정하던 사람들도 사라졌다. 그들은 처음에는 연락을 취하고 걱정하다가 시간이 경과하자 체념해버렸기 때문이다.
모두 잠잠해지자 고독이 뼈에 사무쳤다. 들려오는 것은 갈매기 울음소리와 파도소리 뿐이었다.
꿈결에 '종암동 서울역 가요!' 하고 외치던 18번 버스 차장 목소릴 들은 밤은 한없이 울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서울, 서울이 그리워 한없이 울었다. 펄럭이는 촛불 앞에서 눈물 흘리며 성경을 읽었고, 천지 구분할 수 없는 안개 덮힌 밤바다를 무작정 헤매었다.
그런 어느 날 모종의 결심을 하고 나는 절벽 중간에 내려가 소주를 마시고 취해서 잠들어 버렸다. '운명아 나를 데려가고 싶으면 네 맘대로 하라'는 심보였다.
절벽에서 떨어진 몸은 시신이 되어 물에 떠다닐 것이다. 그래 유언장은 비닐로 싸서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그러나 비극은 그때도 나를 비껴 갔고, 그렇다면야 나도 운명의 신한테 더 이상 부탁할 일도 없다.
어느 날 형님 손에 이끌려 서울로 올라온 나는 마치 백년 인생을 다 산 사람 같았다. 붙 타던 마음은 싸늘히 식은 재가 되었다. 마치 수도승 같았다.
나는 미친듯이 공부만 하다가 불교신문 기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부산서 군대 생활 할 때 한번 옥녀를 만난 적이 있었어요'
내 이야기가 다시 옥녀 이야기로 돌아가자,
'오빠가 부산서 옥녀를 만난 적 있다고요?'
'어떤 경로인지 기억나지 않아요. 옥녀가 서면 로타리 바로 뒷골목에 산다는 이야길 듣고 군복 입은 내가 찾아간 적이 있지요. 철수 대신에 오빠 노릇을 해야겠단 생각을 하고.'
'내 고향 뒷동산 잔디밭에서 손가락을 걸면서 약속한 순정을
옥녀야 잊을소냐 헤어질 운명 차거운 밤하늘에 웃음을 팔더라도
이제는 모두 잊고 내 품에 잠들어라.'
그 당시 최무룡의 '원일의 노래'라는 유행가 아시나? 나는 가끔 이 노래를 불렀지만, 사실 주인공 이름만 옥녀지 노래 사연은 옥녀와 관련 없어요.'
'오빠! 옥녀 만나서 무슨 이야길 했는데?'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 어머님과 옥녀 두사람은 날 보자 초상집이 되고 말았지.'
'안갈껄 그랬어.'
'그렇지. 그후 제대하고 섬에 있다가, 복학 후에 취직하고 결혼하고 바쁘게 살면서 옥녀를 잊고 말았지만, 다 50년 전 이야기지. 기억에 그때 서면에서 옥녀가 대문 밖까지 따라나와서 나를 바래준 것 같긴 해요.'
'오빠가 옥녀를 한번 보고싶긴 하겠다.'
'그래서 정애여사한테 부탁인데, 한번 자릴 만들어 주면 좋겠어.'
'내가 죽전역 근처에 자리 만들어 볼께요.'
정애는 만사 똑똑한 여자다. 훌륭한 언론인 남편에다 훌륭한 자식 두었다. 자식은 둘 다 압구정동에 살고, 정애는 내가 살던 삼성동 옆에 살다가 지금도 나와 같은 수지에 살고있다.
한번 말하면 두 말 필요없는 여자다. 명함을 주었더니 며칠 뒤 연락이 왔다.
옥녀는 머리에 하얀 백발을 인채 나왔다. 칠십 초반 여인이다.
'내 이름이 김00인데, 기억나십니까?'
그 소리에 대번에 쌍거풀진 까만 눈동자 이슬 맺힌다. 오십년이 흘렀지만 옛날처럼 애련하다.
'오빠! 오빠 이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어요?'
'경택이란 이름도 생각납니까?'
'경택이 오빠 잘 계셔요?'
'고인입니다. 이제 배건너 삼총사 중 철수 경택이 둘은 가고 혼자 남았어요.'
'아! 그렀군요.'
그 옥녀가 빠안히 날 쳐다본다.
'옥녀씨도 7십 넘었으니, 이제 옥녀씨라고 호칭합시다. 내가 점심 살테니 정애씨와 둘이 차나 한잔 사요.'
식사 후 세 사람이 죽전 역 근처 다방에 들렀다. 나는 그동안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옥녀도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언니는 어떤 사람이에요?'
옥녀가 물었다.
'인물도 미인이고 서울 언니지.'
정애가 옆에서 거들었다.
'행복하시지요?'
옥녀가 물었다.
'후회만 있지요. 진주서 여고만 나온 사람과 맺지 못하고 서울서 대학 나온 사람과 맺은.'
내가 정애에게 물었다.
'정애씨! 내가 장례식장에서 했던 말 기억 납니까? 집안 주도권이 둘 있으면, 맨날 다투고 싸운다는 말? 회사 조직에서도 과 단위나 부 단위에 톱이 둘이면 문제가 생깁니다. 견제 많고 능률 저하되고 불화가 나옵니다. 노년이 되면 모든 게 판가름 납니다. 이제는 모두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가고픈 생각만 납니다.'
'그래도 모든 남자들이 미인과 살고싶어하지 않아요?'
'그건 그렇겠지....사람이 원래 그런거니까. 그러나 하나가 좋다 싶으면 반드시 하나는 댓가를 치뤄야 하는 게 인생이지요. 노년에 안사람이 맨날 밖에 나가서 혼자 대하는 밥상이 얼마나 쓸쓸한지, 같이 마트에 가서 낮익은 톳이나 파래 같은 해초를 담다가 아내가 도로 반납하는 무안을 당할 때 느낌이 어떤지, 카터만 끌고 뒤에 따라오라고 할 때 기분이 어떤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두 사람은 듣기만 했다.
'어릴 때 우리가 배 고파 부엌에 들어가면 나이 든 고모님들한테 사내대장부는 사흘 굶어도 부엌에 들어오면 안된다고 야단을 맞았지요? 그런데 지금 부엌 설거지 주로 누가 합니까? 거실 청소 주로 누가 합니까?
같은 출생지 사람끼리 결혼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기사 진주 여인도 서울 오면 다른 사람 된다는 이야긴 있습니다만...'
'우리 남편도 진주 사람인데 어떤 면은 힘들어요.'
정애가 짧게 코멘트 했다.
'내가 이런 말 해선 않되지만, 훗날 이 사람 세상 떠날 때, 여기 정애씨 옥녀씨 두 동생 꼭 찾아와 주세요. 남강물처럼 다정한 진주 여인 손 한번 잡아보고 떠나게.'
이때 정애가 끼어든다.
'오빠! 우리 나이는 저승가는 순서가 없어요.'
'하긴 그렇지. 그건 그렇고 나는 간혹 최희준의 '병사(兵士)의 향수'란 노래를 부릅니다.
'내 고향 처녀들이 나를 불러주는데, 하루에도 열 두번씩 가고 싶은 내고향. 에헤야 가다 못가면 에헤야 쉬었다 가세. 내 님의 치마 한 감 사가지고 갑시다.'
'왠지 쓸쓸하군요. 그때 제가 꼭 가서 오빠 손 잡아드릴께요.'
옥녀가 말했다.
인생은 한 편 드라마 같은 것. 세 사람은 그날 식은 커피 남겨둔 채 죽전에서 헤어졌다.끝
※최욱순 친구의 글소개 원문
나는 원일의 노래를 좋아한다(0)* 원일(元日)이란 뜻을 찾아보니, 정월 초하루 날. 이런 뜻인지?
고향 ! 생각을 하면 가슴 뭉클 해지는 단어 ! 내 고향 뒷동산 잔디밭에서 소꼽친구들과 씨름도 하고, 나란히 누워서 하늘 저 멀리 둥둥 어디론가 떠내려가는 구름을 보면서 소년시절을 보냈고, 어릴때는 산에서 늑대가 내려와서 돼지를 물어 죽이는 일도 있었지요.
부엉이가 밤에 울기도 한 촌 산골. 어릴 때는 깨끗한 앞 냇가에는 붕어 송사리도 많이도 잡았다 손가락을 걸면서 약속한 옥녀는 없어도, 뒷집 경숙이, 안동에 산다는데 무소식이고 앞 냇가 건너 정희는 고인이 된 지가 오래되었다, 여름방학이면, 동곡지에 멱을 감으러 갔었고, 겨울 방학이면 앞산에 산토끼 잡으며, 잔뼈가 굵은 곳, 나의 탯줄이 묻힌 고향, 지금도 일요일이면 막걸리 한병에다 김밥 한줄을 가지고 흙 내음 맡으로 가는곳. 동곡지 오솔길은, 가을이면, 낙엽을 밟으며, 한번 걸어 보세요. 멋져요. 그 고향에는 어릴 때 오순도순 이웃에 아홉 소꼽친구들이 보름 달밤에 처녀총각들이 줄을 지어 깊은 산골 승방제실까지 놀러 간 추억들. 내기 화투를 쳐서 밤에 남의 닭을 훔쳐서 닭서리 하였던 추억....지금은 신서기술혁신도시로 모두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었지요 . 나는 그 곳을 그리면서 내 아호가 동곡이다.
어머니들이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쌀 1되씩 내어서 1969년12월 5일에 향우회 모임을 결성해주었지요,, 한 친구는 비운에 운명을 달리 한지가 어년 35년이 되고, 얼마 전에는 한 집 건너 옆집에 살았던, 석태친구가 고인이 되었지요, 19살에 해병대지원해서 포항훈련소에서 죽도록 고생해서 포항땅을 처다보기도 싫다했지요. 옛 추억들을 생각하니, 며칠간 마음이 울적하더군요. 동기 재열이 친구는 의식불명이 되어 요양병원에 있고, 병호친구도 건강이 좋지 못하고...55년의 세월 동안 매년 12월31일 모임을 했는데, 다가오는 11월에 해체를 하려니,....ㅠㅠㅠ 나이테 7개의 인생 무상(無常)함을. 느끼네요....아픈 친구들의 쾌차를 빕니다.
구름 같이 <노 천명>
큰 바다의 한 방울 물만도 못 한
내 영혼이 지극히 적음을 깨닫고
모래언덕에서 하염없이
갈매기처럼 오래오래 울어보았소
어느 날 아침이슬에 젖은 푸른 밤을 거니는 내 존재가
하도 귀한 것 같이 들국화를 꺾어 들고
아침다운 아침을 종다리처럼 노래하였소
허나 쓴 웃음 치는 마음
삶과 죽음 , 이 세상 모든것이
길이 못 풀 수수께끼 어니
내 생애의 비밀인들 어이 아오
바닷가에서 눈물짓고
이슬언덕에서 노래 불렀소
그러나 뜻 모를 이 생
구름 같이 왔다 가나 보오
” 인 생“
애련아 ! 애련아!
외상없는 인생 열차에 몸을 싣고
가야 할 가야 할 길은 어디냐?
7篇 시리즈로 보내준 친구가 고맙고...
누구가는 평생 못잊을 사람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군요!
염세주의 사상에, 자살예찬론까지 마음여린 내 마음도 물결이 입니다.